사탄의 깊은 것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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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고 손에는 금잔을 가졌는데,  그 금잔에는 가증한 것들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하였으며 그 여자의 이마에는 '비밀, 큰 바빌론,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계 17:4-5) 


And the woman was clothed in purple and scarlet, and gilded with gold and precious stone and pearls, having in her hand a golden cup full of abominations and the unclean things of her fornication. And on her forehead there was a name written, MYSTERY, BABYLON THE GREAT,THE MOTHER OF THE HARLOTS AND THE ABOMINATIONS OF THE EARTH.(Rev. 17:4-5) 


24절은 『그러나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고 말한다. 「깊은 것들」이란 에베소서 3장 18절의 깊이들을 뜻한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비밀스런 것들을 나타낸다. 로마 천주교는 많은 비밀들이나 깊은 교리들을 갖고 있다. 고난받는 교회에 대해서는 사탄의 회당이 있었고(2:9), 세상적인 교회에는 사탄의 왕좌가 있었으며(2:13), 변절한 교회 속에는 「사탄의 깊은 것들」이 있다. 회당의 종교, 사탄의 왕좌 밑에 있는 세상, 사탄에 속한 비밀들의 철학들은 모두 교회를 손상시키고 부패시키려고 사탄이 사용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교회는 사탄의 회당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며, 마침내 교회는 세상적으로 되어 사탄이 거하며 그의 왕좌가 있는 곳에 거하고 있다. 이 모두가 원수의 간교함이다. 그것은 모두 사탄에게서 발원(發源)된다. 그러나 여기 네 번째 교회에는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단지 사탄의 회당, 사탄이 거하는 곳, 혹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의 문제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사탄은 교회 안으로 들어왔으며, 그 자신으로 교회를 적셔지게 했다. 변절한 교회에는 사탄의 깊은 것들 곧 사탄의 비밀스런 교훈들이 있다. 이것이 사탄적인 철학이다. 변절한 교회는 사탄에 속한 비밀들을 가르친다. 이것은 사탄의 깊숙한 사상 곧 사탄의 관념이 변절한 교회에 침투했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 교회는 사탄의 체현이 된다. 

합당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변절한 교회는 사탄의 체현이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내주하시지만, 사탄은 간교한 방법으로 변절한 교회에 내주한다. 사탄은 언제나 간교한 방법으로 행동한다. 그가 처음 사람에게 왔을 때 그는 아름다운 뱀의 모습으로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었다. 사탄은 늘 좋은 모습을 취한다. 사탄이 「교회」를 그의 모습으로 입을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의 참 상황임을 본다. 기독교계는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 비록 그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해도 실상 그 속에는 사탄 자신이 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이것을 보아야 한다. 

사탄의 깊은 것들은 사탄적인 철학으로서 간교한 것이다. 변절한 교회 안에는 수많은 소위 비밀들이 있다. 이 악한 교회가 가르친 비밀들은 모두 사탄적인 철학들이다. 그들의 철학 중 하나는, 만일 당신이 어떤 것들을 성경 진리들 안에 첨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로우신 주님은 이것을 빵을 먹기 쉽게 만들기 위해 고운 가루 속에 넣는 누룩에 비유하셨다. 변절한 교회는 말하기를, 만일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갖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출생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마스(mass)」는 고운 가루에 더해진 누룩이다. 이것은 간교하며 사악하다. 

만일 당신이 이 악한 여자가 사탄의 체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계시록 17장 4절과 5절을 살펴보라고 청하겠다. 4절은 『또 그 여자는 자주빛과 진홍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것들과 그녀의 음행의 부정한 것들이 가득하더라』고 말한다. 이 악한 여자는 멋있는 외양을 갖고 있다. 그녀는 금과 보석들과 진주 곧 새 예루살렘이 건축된 바로 그 재료들로 치장(도금)했다. 새 예루살렘은 이 세 가지 재료들로 견고하게 건축된 반면에 이 악한 여자는 단지 그것들로 치장했을 뿐이다. 치장(도금)한다는 것은 거짓 모습으로 꾸미고, 피상적으로 매력 있게 되고, 악한 것을 감추어 호감을 주거나 보이기 위한 겉모양을 갖는 것이다. 그녀의 외양은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흉측하다.

또한 이 여자는 가증한 것들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찬 금잔을 갖고 있다. 예표론에서 금은 신성한 본성을 상징한다. 외관상 이 악한 여자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붙잡고 있지만, 사실은 내적으로 가증한 것들이 가득하다. 성경에서 가증한 것은 주로 두 가지-우상 숭배와 음행-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 것은 하나님 눈에 가증한 것이다. 겉으로 볼 때 이 여자는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치장하고 금잔을 갖고 있으므로 매우 매력적이다. 만일 당신에게 통찰력이 없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속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이 여자가 내적으로 어떠한지를 볼 때 우리는 그녀가 가증한 것들과 더러움으로 충만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계 LS 13) 



니 형제님이 형제회를 방문한 후에 주님으로 부터 얻은 빛비춤(1933-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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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한가지 큰 일이 발생했다. 형제회의 형제들이 1932년에 방문하였으므로 그들도 니 형제님이 그들을 방문하도록 초청한 것이다.

1933년 4월에 니 형제님이 연대의 집회를 보러 오셨는데 그때 연대의 집회는 아직 일년이 채 안되었다. 그는 며칠을 머르무르고 우리를 떠나 싱해로 돌아간 후에 배를 타고 유럽에 갔다. 먼저 그는 독일에 들렀는 데 독일의 형제들이 사랑으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후에 그는 런던에 가서 거기 있는 형제회 사람들을 보았다. 니 형제님은 스팍스 형제의 책을읽고 그와 편지로 왕래하였으므로 스팍스 형제를 만나 보기 원했다. 이외에 녀 형제님은 팬톤형제의 책도 많이읽었으므로  팬톤형제도 만나러 갔다. 그러나 형제회 사람들은 그들을 방문하러 오면서 또 다른사람들도 방문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팬톤형제를 보러가는 것은 그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스팍스 형제가  일찍이 펜루이스 여사의 동역자 였기 때문에 스팍스 형제를 보러 가는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펜 루이스 여사와 팬톤 형제는 그들의 체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도 마귀에게 붙잡힐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영국에는 영적인 은사 운동이 성행 하였는데 펜 루이스 여사도 이것을 듣고 보았으므로 영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일 우리가 공중을 향하여 활짝 열어놓고서 자신의 머리를 닾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제어 하지 않는다면 마귀를 쉽게 오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인 들에게 말하였다.
 
팬톤형제는 진리 위에서서 영적인 은사운동을 반대하였다. 그는 일찍이 요한일서 4장 2-3절까지의 말씀으로 84개의 방언 말하는 사람들을 시험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것을 시인하는 영 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입니다.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적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장하였으나 팬톤이 그들 안에 있는 마귀에게 대답하도록 명령하자 결국 그들은 모두 예수를" 저주할자"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를 두사람은 영국에서 힘을 다하여 영적인 은사 운동을 반대 하였으며. 그들 가운데서 마귀에게 붙잡힌 거짓된 상황을 지적하였다.

형제회 사람들은  이러한 인식이 없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마귀에세 붙잡힐수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들은 사람의 육체 안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그다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잘못된 가르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펜 루이스 여사가 믿는 것처럼 그렇게 믿는다.  로마서 7장17절과 20절을 근거로 할때 단수의 죄는 우리안에 곧. 우리육체 안에 거하며  그 단수의 죄는 실제로 말해서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다.

이러한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형제회 사람들은 펜 루이스 여사가 귀신을 불러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니 형제님이 팬톤을 보러 갔을때 형제회 사람들은 종아하지 않았으며 그후 니 형제님이 다시 스팍스 형제를 보러 갔을 때 형제회 사람들은 더욱더 불쾌해 했다 어느 주일에 니 형제님이 스팍스 형제가 있는 그곳에서 떡을 때었는데 형제회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돌아가 그 일을 보고 했다.

형제회는 공개파와 폐쇄파가 있다. 공개파 형제들의 인도자는 죠지 뮬러였다. 어떤 사람이 형제회와 함께 있지 않고 다른 단체에서 만찬을 뗀다해도 그들 개인이 주님과 아주 좋은 교통을 갖고 있다면. 즉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교파를 떠났든 떠나지 않았든  관계없이 모두 받아들여햐 한다고 그들은 생각 했다,  이와 반대로 다비가 인도하는 폐쇠파 형제들은 다른  단체와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형제회 이외에 다른 어떤 만찬에 참여하기만 해도 그 사람을 "악과 짝하는 자"로 여기며.오직 철저하게 교파를 떠난 사람들과만 함께 떡을 뗄수 있다고 생각한다.

니 형제님이 먼저 형제회에서 떡을 떼었고. 나중에는 스팍스 형제가 있는 곳에서 떡을 떼었으므로 이런 페쇄적인 형제회의 눈으로 본다면 이것은 너무나 큰 죄악이다. 그들이 니 형제님과 교통하였을때 니 형제님이 어떻게 대응 하였는지는 알수는 없다. 어쨌든 쌍방은 잠시 평화를 유지하였고. 그들은 니 형제님을 데리고 미국으로갔으며 미국 동부로 부터 캐나다 서부의 벤쿠버에 까지 이르렀다.

이 여행에서 니 형제님은 많은 상황을 보았으며.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놀라게 한 것은 형제회가 도처에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벤쿠버시에는 삼십개의 독립적인 모임이있었는데 제 각각이며 서로 상관하지 않았다. 형제회는 그를 뉴옥으로도 인도했는데 그는 거기에서 이천명의 형제회 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중국으로돌아왔다. 그는 그가 방문하는 곳마다 한도시안에 여기저기 도처에 형제회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영안에서 아주 큰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 지방 교회의 경계가 도대체 무어인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4년 1월에 니 형제님은 상해에서  "제 3차 이기는 자 집회"를 소집하여 전국의 동역자들이 다 상해에 왔다. 집회후에 동역자들과의 성경연구 집회가 있었으므로 모두들 거기에 남아서 교회에 관한  문제를 전적으로 연구하였다. 그 중의 한가지 제목이 "지방교회의 경계"인데 후에 "집회 생활"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책속에서 지방교회의 경계는 한도시의 경계로서 그 교회가 소재하는 경계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기는 자 집회후에  나는 성경연구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에 남아있지 않고 북부 연대로 돌아왔다. 5월에 다시 상해로 갔을때 니 형제님은 내게 서문을 한 편 쓰라고 원고를 주셨다. 그 원고는 성경연구집회의 기록이었는데 나는 아주 흥미롭게 읽고 그 내용에 공감하였다. 이 책의  첫번재 중점은 교회의 지방적 경계이고. 두번재 중점은 우리 가운데 집회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형제회가 본 빛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형제회의 앞선 인도자는 다비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사도시대는 이미 지나 갔으므로  제 1세기 후에 이 땅에 사도는 더 이상없게 되었고. 이 땅에 사도가 없으므로 장로를 세울 사람이 없으며. 정식으로 장로가 될 사람이 없으므로 교회라 칭할수있는 어떤 집회도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점으로서 오늘날까지 도 형제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성경연구에서 니 형제님은 약간의 빛을 보았으므로 형제회의 그런말이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비정식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오늘 우리와 같이 주를 위히여 일하는 사람들은 비록 사도는 아니지만 우리가 하는일은 사도들이 하는일과 거의 같은 것 이므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비정식적인 사도라 칭할수 있다. 비록 비정식적인 사도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권위가 있으며 비정식적인 장로를 세울 위치가 있다. 비 정식적인 장로가 있으면 비정식적인 교회가 있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1934년 1월부터 1937년1월까지 삼년동안의 상활을 볼때 니 형제님이 본빛은 더 전진했다. 1936년말 나는 니 형제님으로 부터 상해에 서둘러 오라는 긴급전보를 받았다. 이 특별집회는 동역자들을 위한 집회였다. 그 집회에서 니 형제님은 "사역의 재고"라는 메세지를 해방하였는데 빛이 더욱 분명해졌다.

니 형제님은 "우리는 오늘날의 사도이다. 정식으로 세워진 사도이며 비 정식적인 사도가 아니다.우리가 세운장로도 정식으로 세워진 장로이다.이러한 장로가 다스리는 교회가 바로 정식으로 세워진 교회이다."라고 말했다.

형제회 안의 혼란과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니 형제님은 다시 새롭게 신약을 읽었으며 거기서 이러한 빛을 읽어냈다. 그는 지방교회의 경계가 곧 교회가 소재하는 곳의 그 도시라는 것을보았다. 이것은 우리의 이러한 지방입장의 빛이 결코 형제회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큰 증거이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형제회와는 다른 것이다. 형제회가 만일 지방입장과 지방경계를 돌아본다면 그들은 결코 감히  한도시 안에서 세개 네개로 나누어질수없다. 그러므로 결코 지방입장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만일 모든 사람들이 한도시 안에 있다는 지방입장을 지키려 한다면 어디에 분열이 있겠는가. 니형제님의 빛은 아주 컸다.


다른단체를 초청함으로서 야기된 어려움(1932년 초)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2-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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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이 영국에서 책을 샀기 때문에 우리는 영국 형제회 사람들과의 접촉이 있었다. 1931년 말에 칠팔명의 성도들이 우리를 방문하러 오고 싶다고 그들이 편지를 보내왔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영적인 서적들을 매우 많이 읽었으며 교회 역사와 형제회 안에 있는 일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방문하려 오는 사람들은 결코 모든 형제회를 대표하지 않으며 그들은 다만 "폐쇄파 형제들" 이었음을 그는 알았다.

또 한면에서 워치만니 형제님은 그들이 오는 것은 그들의 단체를 대표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면 그들의 단체를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니 형제님은 신중하게 그들에게 회답을 보냈다."여러분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 입니다. 여러분이 오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기쁘게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 개인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여러분이 대표하는 단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당신의 말에 절대로 동의 합니다." 라고 회답해 왔다. 

그래서 1932년 하반기에 그들이 왔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면으로 교통이 있었지만 또 한면으로 아주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어떤 어려움 이었는가. 이 형제회의 형제들이 소북의 형제들을 접촉한 후 소북의 어떤 형제들이 영향을 받아서 그들과 왕래를 하고 싶어 했는데 이것이워치만 니 형제님에게 아주 큰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형제회의 형제들은 동시에 상해로부터 복주 일대까지 다 돌아보고 싶어했다. 결국 거기에서도 똑같은 어려움이 발행했다. 그래서 워치만 니은 그 일 이후로 외국어로 된 서적의 도움을 받을수는 있지만 쉽게 사람을 오라고 청할수는 없다는 한가지 공과를 배웠다.  이후에 니 형제님은 유럽에 두번 다녀왔는데 두 번째 가서는 주로 스팍스 형제가 있는 곳에 머물렀다. 비록 워치만니는 스팍스 형제보다 열서너 살어렸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워치만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워치만니를 존중하였으며  워치만니는 또한 스팍스형제로 부터 상당한 도움을 얻었다.

1939년에 워치만니 형제님이 상해에 돌아와서 특별집뢰를 열었는데. 나도 특별집회를 위해 상해로 오도록 요청 받았다. 우리는 항상 함께 교통을 가졌다. 말할때 그는 항상 스팍스 형제를 매우 감상하였는데. 우리는 그에게 왜 스팍스 형제를 오라고 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워치만니 는 지헤가 있어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간단히 한 마디만 했다. 워치만니 는 형제회의 형제들이 그때 방문했을때 고통을 받았으며 경솔하게 사람을 오라고 청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워치만니는 스팍스 형제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비록 그가 말한다 해도 도리어 쉽게 오해가 생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혜롭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1955년 과1957년에 우리 형제들은 체험이 부족한 까닭에 외부 사람을 요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팍스 형제를 오게 했다. 그때 나는 비록 워치만니와 같은 그런체험은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지켜본 체험은 약간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계속하여 스팍스 형제를 대만에 오게 하자고 나를 밀어 붙였다. 나는 실제로 더 이상 거절할 길이 없어서 결국 오게 하였고. 이로  인해 번거로움도 함께 왔다.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모른다. 나는 일생에 그러한 고통을 맛본적이없다고 말할수있다.

일반 성도들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 거의 동역자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여러분은 가서 물어보라. 영적인 것을 말하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끝에 가서는 크고 중심이 되는 것을 주의하기 보다 사소한 것에 너무 치중하여 군인형제가 집회가 끝난후에 모자쓰는것을 비평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해할수 업었다. 최종적으로 스팍스 형제가 가장 해를 준것은 교회의 지방입장 이었다. 우리의 일은 처음부터 성령의 권위와 지방입장. 이 두가지를 기본 요건으로 삼았다. 내용 방면에서는 성령의 권위가 있고. 외형적으로는 지방입장이 있다.

이 두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결핍되어서는 안된다. 이 입장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매번 적어도 두 시간씩 최소한 삼십 번은 그와 길게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다 한후에 그는 그가 나를 변케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고. 나도 또한 그 사람이 바귈수 없음을알았으므로 두사람은 할말이 없었다. 여러분은 마땅히 이러한 것을 알아야 만한다. 이것이야 말로 참되게 역사를 읽는 것이며 역사로부터 빛비춤을얻고 공과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1922-1932년까지 처음 10년동안 우리 가운데 있었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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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32년까지 10년동안 우리 가운데 발생한 어려움은 어디에서 왔는냐는 것이다.1922년 워치만니 형제님은 성경에서 계시를 얻어 왕재 형제 부부와 복주에서 교파를 떠나 매주일 떡을 떼는 것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겨우 2년이 지나면서 왕재 형제는 기독교의 방법으로 돌아가 안수를 받고 전도자로 세워지는 것을 받아들였다.도대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 그가 만약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큰 대가를 지불하고 교파를 떠났겠는가.

그런데 왜 겨우 2년만에 그는 목사가 그에게 안수 하는 것을 받아들였는가. 이것은 그가 그 어떤 것보다 복음 전하는 일을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에 왕제 형재는 미국 시카고 부근의 기독교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교파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워치만 니 형제님을 보라. 워치만 니 는 일생토록 교파를 거절했다. 1932년 연대에 있는 중국 독립교회와 황현에있는 남침례 신학교에서 말씀을 전한후에 1952년 감옥에 갇히기까지 다시는 교파에서 워치만 니 를 초청하지 않았다. 이는 교파가 완전히 워치만 니 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1922년에 복주에서 시작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여 떡을 떼어 주님을 기념하는 작은무리 집회가 시작되었지만  한사람은 보편적인 길를 갔고. 워치만 니 형제님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 받는 길을 택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두사람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일을 위해 보편적인 길을 간 그의 영적인 결과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위해 좁은 길를 간 사람의 사역은 비록 잠시는 거절당했지만 오늘날 전세계에 확대 되었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가장 큰 유혹은 일의 확장과 확산이다. 당신은 유명한 복음전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왕재형제는 그런 애석한 길로 갔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회복안에 들어와서 잠시 머물다가 일의 확장을 위하여 떠나가 버렸다. 비록 그들이 아직 평가 받을 때는 아니라 해도. 여러해가 지나면서 주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실 길이 없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 후에 왕재 형제가 자주 복음을 전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에 어느날 마가렡 바버자매님은  그에게 "당신은 복주에 완전히 정착해야 하며 여기 저기 돌아다녀서는 안됩니다.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돌아 다닌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위해서나 확산을 위해 있지 않고 환영받는 것을 위해 있지 않고.오직 기꺼이 거절당하고 기꺼이 좁은 길을 가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주님의 회복은 출로를 얻을 수있기 때문이다. 

1922-1932년까지 주의 회복은 다른지방으로 확산 되었다.  1924년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말레이시아 시티아완을 방문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에 그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복건성 하문부근의 장주에 가서 복음은 전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장주에 집회가 시작되었다. 1926년 하문과 고랑여를 방문했고 그 후에 장주와 동안을 방문했다. 약 이 개월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 같은해 워치만니 형제님은 안휘성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한 이야기가 있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안휘성에서 복음을 전할때  접대하는 사람의 집으로 갔을때 방에는 서양식 철 침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침대위에는 홀이불만 하나 있을뿐 요는 없었다. 워치만니는 공과를 배웠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쉬다가 철 침대위에서 잠이 들었다. 워치만니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당신이 어느 곳에 갔을때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해주시오. 저렇게 해주시오.라로 너무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 말했다.  

1926년 하반기에 워치만니는 하문과 동안 일대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도 집회가 시작되었다. 1926년 전후로 워치만니 형제님은 병이 생겼다.그래서 워치만니는 한면으로 휴식을 취하고  한면으로 남경을 방문하였다.그의 방문으로 남경에서도 집회가 시작되었다. 그해에 워치만니는 영어로 된많은 영적인 서적들을 샀는데  대부분이 영국에서 부터 구입한 헌책들이다. 그래서 워치만니는 영국의 형제들과 접촉하였고 그들과 편지로 왕래하였다.1928년 1월에 상해에서 집회를 정식으로 문덕리로 옮겨 왔으며 같은해 2월에 워치만니는 거기에서 제 1차 "이기는 자 집회"를 가졌다.

이외에도 1931년 1월에 워치만니는 광동 산두와 갈양을 방문하여 이 두 지방에서 일을 하셨다.1932년 이전에 주의회복은 그렇게 크게 확장되지는 않았었지만 주요한 것은 복건성의 복주와 하문과 동안과 장주 등에 집회가 있었다는 것이다.또한 강소북부와 절강 남부 평양현에도 집회가 있었다.

중국에서의 주의 회복은 먼저 복주에서 부터 집회가 시작되었고 다시 복주에서 부터 서서히 북으로 올라가 상해에 이르렀다.  1932년에 이르로서는 북부로 나아갔다. 그해 3월말 워치만니 형제님은 왕등명 형제와 산동성 제남부를 방문했다. 니 형제님은 제노대학 의과 대학생들 80여명을 데리고 태산에 올라가서 삼일동안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으며 산에서 내려와 제노대학 본교에서 11일 동안 머물면서 대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했다.같은해 6월 연대에서 집회가 시작되었고 제남부에도 집회가 시작되었다,1933년 9월에 연대에 집회인수가 증가하였고 돌봄이 필요 했으므로 위트니스리는 직장을 내려놓고  전시간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제시 펜 루이스 여사와 오스틴 스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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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면으로 기독교 안에는 모든 것을 다 영적인 것으로 만든 한무리의 성도들이있었다. 그들은 영에 속한 일은 영에 있는 것이고. 이런 물질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떡을 뗄때 누룩이 있는 빵으로 한 조각 한 조각 나누어 뗀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설령 매일매일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 할지라도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떡을 먹는 것에 있지 않고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에 있다.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그분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참되게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기념 하는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영적인 실제가 없다. 떡을 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강한 사람은 제시 펜루이스 여사이다. 그녀는 형식적으로 떡을 떼는 것이나 형식적으로 침례받는 것을 반대 하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을 뿌려도 충분치 않을 뿐아니라. 물속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이 물속에 백번들 들어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정한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할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살고 날마다 생활 속에서 침례받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침례이다. 성도들이 떡을 떼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한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그 생활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되게 전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게 떡을 떼는 것이다."

그 당시 펜 루이스 여사에게 한 젊은 동역자가 있었는데. 바로 오스틴 스팍스형제이다.이후에 그가 대만에 욌을떼에 그가 펜루이스 여사를 떠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내게 분명히 말했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가 주님의 상 과 침례받는 일을 너무나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자매로서 펜루이스 여사가 거기서 머리 노릇하는 것이 스팍스가 그녀를 떠난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를 떠난후 자신이 직접 짐회를 세웠다. 그의 만찬집회는 실제로 형식에 형식을 더 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가 있는곳에  4주 동안 손님으로 머물면서 적어도 세번정도 만찬 집회에 참석했다. 앞에는 오직 탁자 하나만  놓여있었고 그가 거기에서 있었다. 시적부터 끝까지 그가 혼자 서서 찬송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셩경을 잃고 말씀은 전하였다. 오랬동안 해 보았 으므로 모두들 그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떡을 나누고 떡을 먹고 잔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떡을 나누는 것이 일곱차레의 순서가 있으며. 잔을 나누는 것도 일곱 차례의 순서가 있었다. 떡이 다 돌아가고 잔이 다 돌아가면 그가 다시 말을 했다.  이후에 그는 "지금은 모두가 자유로이 경배하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몇몇 사람이입을 벌려 기도를 하는데 그 시간은 약10분 정도 였다. 그런후에 그는 다시 "자유로이 경배하는시간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가 되면 아무도 기도 할수 없고 모두가 그의 말씀을 기다렸다. 영에 속한 사역을 하는 스팍스가 여전히 이렇게 형식 속에 갇혀 있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펜 루이스 여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이고 스팍스 형제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 이네 방면의중점에 있어서 그들이 분명옳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심 삼았던 진리안에 "솜털이나. 눈썹. 코털.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이 혼잡하게 섞여 있다는 것이다.

1955년에 스팍스 형제가 처음으로 우리를 방문했을때 먼저 홍콩에서 말씀을 전하였고 다시  대만으로 왔는데  그 기간에 거의 내가 그를 위해 통역을 했었다. 그가 전한 말씀은 실제로 회복안의가르침이었고. 어떠한 혼잡도 없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우리 모든 사람은 매우 많은 공급을 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57년에 그가 두번째 왔을 때에는 "눈섭과 코털과 솜털"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어느날 대북의 어느형제의  식당에서 백여명의 동역자들이 그와 자유로이 교통을 가졌다. 그중 한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스팍스 형제님 당신은 여기에 두번째 오셨는데  우리의일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해 주시 겠습니까. 그는 처음에 왔을때 어떤것을 보고서 틀렸다고 생각했었으나 너무 빨리 말해서는 안되겠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이런 기회가 왔으니 이제 이야기 하겠다고  그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했다.

먼저그는 이렇게 말했다."여러분 중에 군복무를 하는 형제들은 왜 집회가 끝나자 마자 집회소를 나서지도 않았는데 모자를 씁니까 " 앉아있던 한형제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는 풍습에 의하면 군인들은 어떤 곳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회때에는 고린도전서 11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무릇남자로서 머리에 무었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것이요"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자를 벗습니다.그러나 집회가 끝나면 모자를 씁니다.라고 좋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스팍스 형제는 불쾌하게 느끼며 말했다. "여러분은 성경을 따릅니까. 아니면 풍속을 따릅니까. 내가 거기서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우리가 스팍스 형제를 절대로 따를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내속에서 분명해졌다. 비록 그가 영적이고. 내가 어려서부터 그의책을 읽고. 그를 따르고 존경하며 중시 하였었지만. 그날 내 안에서는 그러한 존경심이 사라져 벼렸다. 나는 마땅히 존경해야 할자만 존경할수 있을 뿐이다.

그다음에 그는 다시 말했다. "여러분이 떡을 떼는 순서는 너무나 혼라스럽고 질서가 없습니다. 이사람이 기도했다가 저 사람이 기도하고 이사람이 말했다가 또 다른사람이 말하고 하니 너무어지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듣고고 할말이 없었다. 1958년에 그는 런던에 있는 그의 집회에 방문하도록 나를 초청하였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그의 떡을 떼는 방식을 보고서야. 왜 그가 우리의 떡떼는 것이 혼란 스럽다고 말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가 거기서 인도할때 무엇이든지 다 그가 직접하고 사람들은 다 그가 하기를 기다리니 자연히 질서가 있고 군대처럼엄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다만 어떤 역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나는 여러분이 왜 회복안에 어려움 들이 있는지 보기 바란다. 회복 안에서 어떤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와 같은 주요한 계시" 를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떠 어떤 사람들은 큰 계시도 보고 아주 세세한 것들도 본다. 중심되는 계시는 사람들에게 공급을 주지만 아주작고 지엽적인 것들은 사람들를 죽이고 교회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 밖에 또 어떤 사람들은 큰 중점을 보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보고서 이 사소한 것들로 서로 다투므로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역사은 어려움이 발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무었을 중시해야하고 무엇을 주의하지 말하야 할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