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 형제님의 초기사역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1-2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37.html
십자가의 공과
1924년 봄 복주에서 한가지 불행한 일이 생겼다. 당시 왕재 형제는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종종 복음을 전하러 나갔으며 그는 나갈때 마다.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상해에서 기독교 선교연맹 수진당의 창시자인 오백서선생을 만났다. 오백서는 만일 교파에서 은사 있는 그를 청하려 한다면 그는 반드시 안수를 받은 복음전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의 했다. 그는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여 한날을 정하여 오백서 선생이 상해에서 복주로  와 집회소에서 그를 위해 안수를 하고  그를 복음전도자로 세우기를 바랬다.워치만 니 형제님은 이 일을 안후에 동의하지 않고 도리어 "언약궤의 역사"라는 한편의 메세지를 전했다.

언약궤의 역사
이 메세지에서 워치만니 형제님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언약궤는 장막안에 있어야 하지만 이스라엘백성이 실패한 후에 비정상적인 상황이 될때  언약궤는 장막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삼상 7:1-2)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때 그는 먼저 장막에 가서 제사를 드렸고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원했던 대로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

꿈에서 깨어났을때 그는 언약궤가 거기 없으므로거기서 경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언약궤앞에서 하나님께 경배 했다. (왕상 3:4-15)  워치만니 형제님은 언야궤는  그리스도이며  장막은 교회의 외형이고 그리스도는 교파안에 계시지 않으며 이러한 안수와 같은 외형적인 것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말씀으로 왕재 형제가 안수를 받으려 했던 일은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왕재 형제는 매우 불쾌해했고 진리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았던  다른 형제들은  모두 왕제형제를 동정했으며 워치만니 형제님을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그 메세지를 전한 후에 남경과 항주로 가셨다. 그가 항주와 남경에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왕재형제와 다른 다섯명의 형제들은 어떤 명분을 가지고 워치만니 형제님을 제명했다. 그때 복주에서 집회하던 청년들 대부분은 워치만니 형제님편에 서 있었으므로 불공평한 이 일로 인하여 화가 났고 워치만니 형제님에게 이러한 소식을 편지로 써서 보내어 형제님이 빨리 오시도록 했다. 

그러나 워치만 니 형제님은 십자가의 공과를 배웠고  복음 전하는 일도 바빴으므로 복주에서 온 편지와 전보를 보기만하고 잠시 한쪽에 제쳐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항주와 남경에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다 끝난후 워치만 니 형제님은 는 상해로 갔다.그리고 다시 복주로 가는 배 안에서야 워치만 니 형제님은 비로서 편지와 전보를 꺼내 보았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편지를 보면 볼수록 화가 나서 안에 실제로  평강이 없었다. 

배가 마미에 도착해 부두에 정박하려 할즈음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화가 점점사라지고 있었다.그때  니 형제님안에 "너는 십자가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자신을 위햐여 말하지 말고 인내하며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워치만 니 형제님은 돌아간 후에 아무것도 하지않고 저녁에 잠을 잤다. 다음날 니 형제님은 짐을 꾸려 복주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더 이상 이 일을 이야기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배가 부두에 도착하자 한무리의 청년들이 워치만 니 형제님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이야기를 하였다.  니형제님이 집에 도착하자 집 안팎으로 사람들이 있어. 니 형제님이 불공평한 일을 당한 것을 도우려 하였다. 니형제님은 또 다시 격동되는 것을 느끼자 모두에게 집에 돌아가도록 부탁하였다.

기독도보를 발행함
밤이되어 워치만니 형제님의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에 주님은 또다시 워치만니 형제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마땅히 어떠한  일을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복주을 떠나야 한다. " 그래서 그 다음난 아주 일찍 워치만니는 그 청년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은 어떤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내 짐은 이미 다꾸려졌으며 나성탑으로 이사 하려고 합니다. " 워치만니 형제님은 이렇게 복주 교외의 마미 근처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런후에 주님으로 부터 한가지 부담을 받아 기독도보 라는 간행물을 발행할 준비를 하였다. 이 간행물의 네 가지 큰부담은 복음전파와 성경 강해 교회와 영에 속한 생명을 논하는 것이었다. 이월간  간행물은 매달 80에서10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되어 있었는데 워치만 니 형제님이 혼자 다 원고를 준비 하였다. 성경강해 방면에서는 계시록연구와 창세기 연구가 있다.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워치만 니 형제님은 "영에 속한 사람을 쓰기 시작하였다.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모두 합해 10권이나 되었으므로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하였다. 그래서 그는 축소형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영적전쟁(워치만 니 전집 제 1집 1권)이라는 책을 먼저 썼다.

1925년 전후로 이연여 자매님이 몇몇 자매들과 남경에서 떡을 떼기 시작한 후에 그녀는 "영광보"를 떠나 주의 회복의 길로 완전히 가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영광보" 책임자는 그녀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녀는 도덕성이 아주 높고  매우 책임감 있는  사람이어서 당장에 그만두지 못하고  거기서 1926년 말까지 열심히 일했다. 1926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은 성귀기 형제의 집에 거하였는데 미국 무디 성경신학교에서 출판한 스코필드 성경통신교육과정을 번역하느라 바빴다. 그 때 이자매님과 약간의 교통이 있었다.그러므로 이연여 자매님의 영적인 인식은 많이 증가하였다.

1927년 혁명군이 남경을 점령했을 때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예배당과 더불어 "영광보"사무실도 완전히 파괴하였다. 다행이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이연여 자매님은 재빨리 뒷문의 좁은 골목으로 빠져 나와 기차를 타고 상해에 돌아와 거기에서 동역하던 자매들과 다시 모이게 되었다.

상해교회는 1926년 말에 왕패진 자매님과 몇몇 자매들과 신가화원에 있는 왕패진 자매님의 부모님의 집에서 떡을 떼기 시작했다. 이것은 왕패진자매님이 남경에서 신학을 공부할때 이연여 자매님을 만나고 워치만 니 형제님을 만남으로  후에 주의 회복의 길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1927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이 다시 한번 상해에 오셔서 그곳의 성도들과 함께 떡떼는 집회를 가졌는데 그후 왕패진 자매님의 집이 신가 화원에서 갱경리로 이주 하면서 집회 장소도 갱경리로 옮겼다.

같은해 웟치만니 형제님은 그의 복음서원출판사를 나성탑에서 상해로 옮겼다 1928년 1월에 그들을 상해 합동로 문덕리에 집을 얻게 되어 더 이상 왕 자매의 집에서 집회를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1948년 말까지 상해 교회는 거기에서 계속집회를 했다. 1948년에 남양로 에 땅을 사서 대집회 장소를 지은 후에야 그들은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수원교회의 역사 1.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1-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895.html


워치만 니 형제님과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관계 1.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1-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883.html
나는 1925년 봄에 구원받았다.  그때 워치만 니 형제님은 남부 복건성에 살고 있었고 나는 북부 산동성에 있었다. 그의 집은 복주에 있었고 나는 연대에 있었다. 그당시 연대에는 영국에서온 여자 선교사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중국에 와서 외국인 상사를 열어 산동성의 특산물을 다른나라로 수출하였다. 후에 그것은 인덕양행이라불리는 큰 수출상사가 되었다.

이상사를 운영하는 사람의 아내는 비교적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자급자족하는 서양선교사가 되었다.그녀는 소위 말하는 서양 선교사교회를 운영하였으며 '신성보" 라는 월간지를 출판하였다. 신성보는 영적인 수준에 있어서 비록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약간의 복음과 영에 속한 것들이 그 안에 있었으며 워치만니 형제님도 그 신문에 몇 편의 글을 올렸다.

나는 구원 받은후 주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성경의 각 장과 구절들을 분명히 알아야 겠다고 결심했다.그래서 나는 힘을 다하여 영적인 서적들을 구하러 다녔으며 신성보도 사게 되었다.  신성보를 읽고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은 분명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로서 학문이 높고 명성이 자자하며 체험이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5년초에 니 형제님은 직접 기독도보를 출판하였다. 나는 성경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나는 워치만 니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나는 성경을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이되는 책은무었입니까." 그는 회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은 "다비의 성경개관"입니다. 그러나 그책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네 다섯번은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그후에도 나는 질문을 하였고 그는 답변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편지로 같은 인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1931년 9월 워치만니 형제님은 상해에서 제 2차 이기는 자 집회를 열었다.나는 그의 출판물을 통해 이 소식을 알게 되어 참가 신청을 하였고  곧 접수되었다. 출발한 그날 나는 짐을 꾸려 여관에 도착하여 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보가 왔다. 그날은 9월 18일 이었다  그날 일본이 봉천의 북대영을 침략하여 점령당함으로써 "9.18사변" 이 발발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상해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하여 상해에 가지 말것을 권하였다.나는 다시 짐을꾸려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부터 우리 두사람의 편지왕래는 더욱더 긴밀해 졌다. 비록 처음 그 10년동안은 내가 직접 주의 회복의 한 복판에 몸을 드릴수 없었지만 나는 니 형제님이 발행한 책자들을 반드시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이로서 나는 니 형제님과 주의 회복에 대한 많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1933년 8월 말에 나는 직업을 내려놓고 곧바로  워치만니 형제님을 만나러 가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해 10월에 나는 연대를 출발하여 천진과 북경을 거쳐 남경에 이르렀으며 그 후에 상해에 도착하였다.상해에서 워치만니 형제님은 나를 손님으로 머물게 하면서 나를 인도해 주었다. 그때 상해 교회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일도 많지 않았으므로  니 형제님은 나와 많은 시간을 가졌다.

니 형제님은 나를 상해에서 약 4개월 동안 머물게 하였다.  나는 매주 그를 찻아가서 오랜시간 교통하였다. 우리는 세상의 공허한 무익한 것들에 대해 전혀 이야기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니 형제님은 나에게 교회의 역사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일세기부터 시작하여 한세기씩  계속 말해 주었는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말하고 영국 형제회가 일어난 것까지 이야기 해주었다.

그가 말할때에 그의 눈 앞에는 한권의 책도 없었지만  그는 시간과 장소와 이름과 사실들을 내게 아주 분명히 말해 주었다. 나는 내가 직접읽어도 그렇게 잘기억할수 없었을 것이다. 도서실에 가서 참고한다 해도 이렇게 잘 읽기란 쉽지 않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좋은 책들을 거의 다 읽었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기억해 놓은 것들 한항목 한항목을 조목조목 내게 말해 주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해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으며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내안에 여전히 깊은 인상이 있다. 그후 그는 다시 내게 우리가운데서 주의 회복의 역사을 말해주었다. 니 형제님은 그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와 어떤 장소에서 구원받았는지를 내게 말해주었으며 내가  없었던 10년 의 역사를 전부 다 상세히 들려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가운데서의  60년의 역사를 말해줄 약간의 자격이 있다고 말할수 있다.


교회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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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교회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성경안에 있는 신앙과 계시를 위해 피와 눈물의 대가를 지불한 것을 볼수있다. 그들은 역사가운데 향기롭고 달콤한 증인들이 되었다.이땅에서 교회가 지나온 길은 피와 눈물의 역사라고 말할수있다.

초기의 박해로 부터 종교개혁까지 종교개혁부터 연합형제단 까지.특히 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얀 후스와 보헤미안 형제단.모라비안 형제회와 진젠돌프. 마르틴루터. 칼빈. 쯔빙글리. 존웨슬리. 영국의 형제회.속생명파 . 근대 성령의 운행하심의 두드러진 특징은 내적 생명의 회복이다.


페네롱신부. 귀용부인부터 앤드류머레이.펜 루이스 또한 마가렛바버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내적 생명을 회복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진리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신 진리를 보아야 한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사시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해와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는 것과  합당한 교회생활의 실행이다.

그러나 이모든 귀한 항목들 자체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수없다. 반드시 실재가 되어야한다.20세기에 이르러서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준 계시와 이상은 앞선 믿음의 선진들에 의해 밣혀진 진리를 전진시켰으며 집대성 되었다.. 그내용은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의 어깨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와 계시가 우리를 통해 더 전진하여 실행되고 실천하여 완전한데 이르게 해야한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시며 사람이 그 생명을 얻을 뿐아니라 그 생명으로 그리스도안에 살고 그 생명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건축되고 새 예루살렘이되게 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시고 그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시며 생명주는 영은 일곱배로 강화된 영이 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여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


이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 선진들의 피의 댓가로 회복된 진리와 계시들이 아무 손상없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었을 뿐아니라. 전진되었으며 실행 가능하게 되었다.


사탄은 언제나 파괴하는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의 완성을 저지하는 듯 했으나 결국 이 땅에서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 을 통해 죽어있고 타락한 상황을 이기실 것이고 묵묵히 그분의 교회를 지키고 예비하실 것이다.
이기는 이들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  이기는 이들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건축될수없고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를 얻기위해 다시 돌아오실수없다.

이기는 이들은 주님을 위해 회복을 위해 몸을 위해 이기는 이들이 되도록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대가를 지불할것이다.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와 관계 (목회자신문기사)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1-1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853.html

워치만니는 위트니스리를 온전케하고 두사람은 끝까지 신실하게 동역함
워치만니는 1902년 중국복건성 복주에서 회중교회(감리교)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웟치만니는 아일랜드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성공회)이세운 복주 트리니티 대학을졸업했다

그는 탁월한 그의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기독교역사 전반을 망라한 약3000 여권의 기독서적을 독파하였다. 또한 그당시 그의 고향에서 활동했던 마가렛바버 선교사(성공회) 를 통해서 당대 유럽의기독교 거장들과 교류하였다.그의신학사상은 워치만니전집에 잘반영되어있다.

그는 중국이공산화 직후 투옥되어 20년간 수감생활 끝에 1972년 5월30일 순교하였다. 워치만니의 동역자인 위트니스리는 1905년 중국 산동지방에서 삼대 째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워치만니가 발간하던 문서를 통해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워치만니의 사역에 합류하였다.  워치만니는 그를 약 18년 이상 직접 온전케 했고 둘은 끝까지 신실하게 동역하였다.

위트니스리는 1949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만에서  1962년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인 1997년 까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동안 일관되게 워치만니 로부터 보고 배운 큰 틀안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메세지는 400여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중에 성경 66권을 강해한 라이프스타디  전집 과 지방교회의 조직신학에 해당되는 8권으로 된 신약의 결론(총 1600쪽)이 있다.

위의 두 성결교사는 일관되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뜻이 이뤄지는 것과만인 제사장의 실행를 강조하였다. 지방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  새 예루살렘을 강조한다.              
      
            2006년 11월11일 제 516호  목회자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