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의 적용(1)-율법과 그리스도


진리의 언덕 2014-01-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187.html


우리가 알듯이 바울이 딤전1:4에서 말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자신을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에 분배하심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할 단체적인 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본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그의 온 힘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골1:28).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보지 못했던 시절의 그는 가는 곳마다 
옳은 것으로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정죄하고 핍박하는 인생을 
살았었습니다(딤전1:13, 빌3:6). 


생명되신 그리스도 자신을 살고 공급함으로 사람의 참된 
필요를 채우는 길을 걷는 사람과 성경이 하라 하지 말라고 한 
율법적인 요구에 묶여 결국 사람들의 참된 필요를 외면하고 
오히려 정죄하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그 열매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사울의 대비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12장을 읽었습니다. 오늘따라 더욱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심사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안식일 날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 먹은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도 잘못이 없다며 그들을 두둔하는 입장에 서셨습니다. 
물론 '그들의 참된 필요인 배고픔'도 돌아보는 마음이 있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이에 더하여 비록 안식일이긴 하지만 
손이 오그라들어서 불편한 사람의 참된 필요도 관심하셨고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제단에 차려 놓았던 진설병을 
먹었으나 죄가 되지 않았던 사실(삼상21:6),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은 점(민28:9-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안식일 
제물을 드리기 위해 일해야 했음),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점(호6:6) 등의 진리적 당위성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는 사실만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을 두둔할 뿐아니라 한 수 더떠서 자신이 직접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을 깨뜨리신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안식일을 범한(그들의 눈에) 
주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counsel)를 열었습니다 
(마12:14). 이러한 사건은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이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에스겔 20:12, 신명기 5:15 등의 구절들을 
예수님을 정죄할 근거말씀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 자신은 성경을 잘 지키는 정통이지만, 성경내용의 바로 그 주인공이신 
주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이단이요 비성경적인 분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여 한다는 단편적인 성경지식은 있으되 
그러한 안식일의 주인(마12:8)이신 주 예수님 자신을 보는 영적인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바울 이전의 사울이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실을 보는 눈이 먼 것이 소위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함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한 부분만을 붙잡고 '배고파 밀 이삭 먹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제가 과거에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기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때 그들은 배고파 밀 이삭 잘라 먹는 사람들을 위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주고자 하시는 그들의 주인 그들의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하시고 품으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짓밟고 
정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주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데서 더 전진하여 
주님 자신까지도 극렬하게 반대하며 저지하고 심지어 죽이려 듭니다(마12:14).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데 
이러한 그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밖의 율법을 준수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공격받고 그영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없이 다만 사랑하시고(요3:16) 
그들에게 주님자신인 생명을 주시고 또 주심으로(요10:10) 
그들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인 주님자신으로 충만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가시고(엡1:23) 
마침내 거룩하고 흠없는 신부로 단장해 가시는(고후11:2, 계19:7, 21:2, 9-10) 
현재의 주 예수님의 일 하심에 다만 아멘하고 동역하기를 갈망합니다. 

이에서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그 어떤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중대사는 아닐 것입니다. 


창조주, 구속주, 남편


유향의 동산 2013-1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0733.html

창조주, 구속주, 남편

 

스승은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제자와 남자 스승이 결혼에 골인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 않습니다. 이럴 같은 남자라도 선생님과 남편 사이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간격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54 5절은 땅의 하나님이신 바로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Maker)이자 구속주(Redeemer) 남편(Husband)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여호와 하나님에 관해서도 신분을 두고 사람들이 알아가는 정도는 각기 다를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께서 창조주이신 것은 믿지만, 구속주이심을 부인합니다. 유대인들이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신약  기록은 창조주까지만 믿는 쪽과 믿는 사이에서 사사건건 다툼이 일어난 것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여호와를 창조주와 구속주까지만 믿는 쪽과 그분을 남편으로 까지 고백 하는 사이에 있는 긴장 관계도 만만치 않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건 여호와께서 우리의 남편 이시다 라는 54:5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반만 이해한 것일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것은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며(4:5), 그분의 신부로 만드시는 것까지가 그분이 참으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11:2, 19:7-9, 22:17).

 

우리를 창조하신 하늘같은 , 또는 우리 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생명의 은인같이 고마운 그분까지는 용납하겠는데, 그런 분을 남편처럼 대하는 것은 뭔가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분들은 자신의 관념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남편삼아 매사에 의지하고, ‘다른 남자들’(우상들)에게 한눈 팔지 않고, 그분 만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봉사한답시고 아무리 남편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해도 사랑 문제에 금이 있으면 주님과의 관계는 그리 달콤하지 않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너를 지으신 남편이니 만군의 주가 그의 이름이며, 너의 구속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라. 그가 온땅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리라”(54:5)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2)- 세대주의 이단 논쟁


진리변증/토론 2013-11-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0717.html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2)

- 세대주의 이단 논쟁

 

 

이 글은 먼저 세대주의 혹은 언약 신학을 지지하는 것이 정통 혹은 이단이 되는 문제는 아님을 말하고자 합니다. 또한 형제회와 교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세대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세대주의가 중요시하는 몇 가지 핵심 항목들에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합니다. 이들이 생명과 생명의 체험,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자신들의 사역의 초점으로 삼는 점도 세대주의와 차별화 된 부분입니다.


1. 세대주의 관련 이단 논쟁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1]는 한국의 개혁신학 쪽 분들에게 주로 종말론과 관련해서 이단성 시비가 있어 왔습니다.[2] 그런데 이것은 무천년설만이 유일한 정통 종말론이라는 전제에 기초한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무천년설은 같은 장로교 진영에서도 이견과 비판이 있는 터라, 그와 다르면 곧 이단이 되는 절대 진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3]


한편 언약 신학 쪽에서는 종말론 외에, 세대주의 구원론[4]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한 예로 존 걸스트너(John H. Gerstner)는 ‘거듭나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인데, 세대주의자들은 ‘믿어야 거듭난다’고 정 반대로 말하니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요20:31)고 말하는 것은 성경 자체라고 반박합니다.[5] 이외에도 계시록의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문자주의 해석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다른 견해, 시대 구분 등이 세대주의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6]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대주의 안에도 여러 유형들이 있어 이들을 어떤 고정틀로 뭉뚱그려 비판하기 어렵게 되어 있고[7], 언약 신학 안에도 수정노선이 등장하는가 하면[8], 언약의 정의와 그 성경근거 제시에도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9] 따라서 균형잡힌 신학자들은 언약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정통과 이단의 차원이 아니라 보수 신학계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틀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언약 신학의 관계 설정
 

이 연구를 위해 다양한 자료수집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약교회 김성주 목사님이 쓰신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과 장두만 박사님이 쓰신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이라는 글이 가장 눈에 띄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언약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로 인식하며 이를 신앙과 삶의 절대가치와 최고의 규범으로 삼아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이며 두 교리체계이다. 그러므로 이 두 신학의 성경 해석적 관점의 차이는 정통과 이단의 관계로 규정해 비판하기보다는 정통신학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의 차이로 분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모름지기 신학이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관점을 집대성한 학문적 논리체계로서 인간의 주관적인 사상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지 않다. 그러므로 특정 신학을 절대화시키거나 신봉하기보다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부단히 연구 정진함으로 신학의 체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선의적인 작업이 부단히 요청된다고 하겠다.”[10]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언급해야 될 것은 세대주의와 언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 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11]


위 두 분은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신학체계를 이단으로 보는 견해에 강하게 반대하고, 둘은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특히 장 박사님은 위 논문 서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고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모두 '사탄의 종'이고 '적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이단’”이라고 함부로 정죄한다면서 “필자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는 양식 있는 학자라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점잖게 충고합니다.


그는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매도해 왔다. 그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부 세대주의적 견해에 동조하는) 챨스 스윈돌(Charles Swindoll),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W.A. Criswell) 등이 모두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읽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지적합니다.


위 지적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부 같은 것을 말해도 즉각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이단시 하는 경향이 있는 개혁신학 전공자 분들과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한번 쯤 귀를 열고 경청해 볼 만 합니다.


3. 세대주의와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워치만 니는 폐쇄파 형제회와 일정기간 교류가 있다가 성만찬 문제로 교제 단절을 당한 바 있습니다. 또한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와 만나기 전 7년 반 동안 형제회 모임에 몸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경 해석 안에서 소위 ‘세대주의의 특징들’이 일부 발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세대주의 핵심 특징들에 있어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크게 달리합니다.


1) 이스라엘, 교회, 왕국 :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면서, 교회는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 연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하와로 예표된 교회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목표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신약 교회의 ‘예표’라고 말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의 실재가 바로 왕국이라고 가르침으로 소위 ‘왕국 연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12]


2) 대환란 전 휴거 : 알려진 대로 세대주의는 <대환란 전 휴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극소수 이기는 자들 외에, 대다수 거듭난 성도들은 <대환란 후 휴거>될 것을 가르칩니다.[13]


3) 7년 대환란 : 세대주의의 <7년 대환란 교리>는 그 내용과 개념이 두 성경교사와 다릅니다.[14]


4) 알레고리 해석 : 비판자들은 워치만 니 특히 위트니스 리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한다고 정죄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문자적 해석이 특징인 세대주의자일 수는 없어야 합니다.[15]


5) 산상수훈 해석 등 : 어떤 세대주의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은 유대인들에게 해당되어 신약 교회와 무관하며, 대환란 때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천국 복음’(마24:14)을 지금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6]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마태 복음 5-7장은 왕국 백성인 우리에게 헌법에 해당되고, 천국 복음은 대환란 전에 온 땅에 확산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6) 시대의 구분 : 두 성경 교사는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처럼은 아니지만, 시대를 구분합니다.[17] 그러나 대표적인 언약 신학자들인 찰스 핫지와 루이스 벌콥 역시 시대를 구분합니다.[18] 따라서 시대를 구분한 자체가 곧 세대주의자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4. 결론


찰스 C. 라이리는 언약 신학이 체계화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로 극히 최근의 일이고, 초기 교회의 공인된 교리가 아님을 지적합니다.[19] 장두만 박사님은 언약 신학의 행위 언약, 은혜 언약의 석의적(釋義的,exegetic) 근거가 불충분하고, 언약 체결 시기와 언약 당사자에 관해 신학자마다 혼란이 있는 것은 성경 근거가 희박함을 말해준다고 주장합니다.[20] 심지어 믿음이 없는 유아들을 세례주는 근거로 언약 신학이 고안되었다는 혹평도 있습니다.[21] 만일 이런 지적들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언약 신학과 다른 것은 이견일뿐 이단일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양 쪽 지지자들 모두가 구 프린스턴 신학교에 광풍처럼 몰아쳤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싸웠던 무기였던 <근본주의 5대 강령>[22]을 다시 함께 고백함으써 WCC, 번영신학 등 신종 자유주의가 한국 교계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함께 영적 싸움을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23] 이런 영적 전쟁에서 자유주의가 적군이라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우군입니다.[24]

 

 

 

--------------------------------------------------------------------------------

 

[1] 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ID=2177 (목창균 박사님, 세대주의 논쟁)


[2] 한국교계 내에서는 ‘시한부 종말론’ 비판(ftp://203.230.114.4/DLIIMG/009/009/T0211401.PDF) 또는 선교 단체인 인터콥의 종말론 비판(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02)과 관련하여 세대주의가 자주 거론된다.


[3] 그런데 무천년설만이 정통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 또한 만만치 않다. 1) 차영배 박사님은 그의 <성령론>(도서출판 엠마오, 1997)에서 “대부분의 교부들은 역사적 전천년설자들”이었는데, “이젠.. 무천년설이 득세하여 한국교계의 전천년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탄식하고 있다 (12쪽). 2) 미국의 Faith 신학교를 졸업한 이광복 목사님도 종말론 토론에서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의 알레고리 해석법에 기원하며”, “무천년설에 의존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은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라고 비판한다.<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 (생명의 말씀사, 1996, 201, 203쪽) 3) 특히 덴버 신학교 정성욱 교수님은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267)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더 성경적인 종말론임을 역설한다.


[4] <세대주의 구원론>과 관련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이다.


[5] http://sharperiron.org/forum/thread-dispensationalism-cult (영문)


[6] 이단감별사인 이인규님(감리교 권사)은 <세대주의 비판>이라는 인터넷 상의 글에서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으로 “1) 배타적 폐쇄적이며, 2) 오직 자신들 교리만 진리라고 주장하며, 3)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1)과  2)는 언약신학 쪽도 자유롭지 못하고, 3)의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라는 주장이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이라는 이인규님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다.


[7]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36&wr_id=16 이 자료는 세대주의를 “고전적 세대주의, 수정 세대주의, 점진적 세대주의, 대중적 계시주의”로 분류한다. 이외에도 찰스 C. 라이리는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전도출판사)에서 블링거로 대표되는 ‘극단적 세대주의’를 말하며, 이를 다시 ‘극단적인 유형’과 ‘온건한 유형’으로 분류한다(218쪽).


[8] 포이쓰레스는 <세대주의 이해>(총신대 출판부, 1992)에서 언약 신학의 수정노선과 관련하여, “성경신학”의 등장, 안토니 후크마 종말론의 “지상적”인 영원상태, 그리고 Willem Van Gemeren의 로마서 11장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할” 등을 지적한다(54-55쪽을 보라).


[9] 각주 11이 소개한 논문은 언약 신학자들이 제시한 성경 근거들이 왜 무리한 인용인지를 밝히고 있다.


[10] http://blog.daum.net/7gnak/15718380  (김성주 목사님,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특강 자료 중 일부이다)


[11] http://blog.daum.net/lbts5857/4245 (장두만 박사님,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이 논문은 <목회와 신학> 1995년 2월호에도 게재되었다.


[12] 위트니스 리는 <신약의 결론-왕국>(한국복음서원, 1992)에서, “어떤 성경교사들은 왕국이 연기되었다고 잘못 가르쳤다…로마서 14장에 따르면, 왕국은 오늘날의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의 실재가 왕국이다.”라고 말한다(21-22쪽).


[13] 위트니스 리는 계14:4의 ‘첫열매’ 관련 각주에서, 대부분의 믿는이들의 대환란 끝 휴거를 주장한다.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해당 구절 각주 2를 보라.


[14] 위트니스 리는 계11:2 ‘마흔 두 달’에 대한 각주에서, 다니엘 9장 27절의 “후반부 삼년 반이 대환란의 기간일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7년 대환란>이라는 용어 자체를 부인한다.


[15] 이인규 권사님은 위트니스 리의 ‘알레고리 성경 해석’이 문제라고 자주 주장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읽되, 필요시 상징적인 의미를 따져 보는 것을 원칙삼으라고 가르친다(한국복음서원이 발간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을 참조).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일 뿐, 세대주의자와 무관하다. 성경에는 ‘문자주의’(사7:14)와 ‘알레고리’(갈4:24)가 혼재한다.


[16]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43&wr_id=25 이송오 목사님은 이 자료에서, “무천년 주의자들은….유대인의 왕국 복음을 이 시대의 구원 계획으로 붙들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17] 위트니스 리는 로마서 5:14 주석에서, ‘아담부터 모세까지’(롬5:14),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요1:17), ‘그리스도 초림부터 만물의 회복까지’(행3:20-21), ‘그리스도 재림부터 천년왕국 끝까지’(계11:15, 20:4, 6)로 시대를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경 자체의 구분일 뿐 세대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워치만 니에게서도 시대 구분의 흔적을 볼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II, 한국 복음서원, 2002, 88쪽 참조).


[18] 찰스 핫지도 ‘different Dispensations’이라는 소제목 아래 ‘아담에서 아브라함’, ‘아브라함에서 모세’, ‘모세에서 그리스도’, ‘그리스도에서 마지막’으로 시대들을 구분한다(Systematic Theology II,  pp. 373-377). 핫지와 벌콥의 시대구분은 찰스 라이리의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 (전도출판사) 48-49, 54쪽도 보라.


[19] 언약 신학의 상세한 역사는 위 라이리 박사님의 책 200-205쪽을 참조하라. 혹자는 어거스틴의 "구약은 숨겨진 신약이다. 신약은 드러난 구약이다."라는 말을 빌려 언약 신학 기원을 초대 교회까지 소급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대주의 쪽도 역시 어거스틴의“시대를 구분하여라. 그러면 성경은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룬다”는 말을 세대주의 기본원칙 중 하나로 인용한다(위 각주 16의 제공자료 참조).


[20] http://blog.daum.net/lbts5857/4245 


[21] 박만수 형제님은 “칼빈은 유아들이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섭리에 의해 그들이 이미 은혜 계약 안에 있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세례를 줄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소위 언약 신학의 출발점이었다”라고 주장한다(http://blog.naver.com/hjxch/80036289026).
 

[22] 근본주의 5대 강령은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적인 죽음, 육신입은 부활, 기적의 인정(또는 재림 신앙)’이다.


[23] http://blog.koreadaily.com/korea3927/695125 김명도 박사님은 이 글에서 “개혁주의와 신근본주의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른 믿음을 지키려는 교단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24] 중국 난징소재 ‘진링(金陵)연합신학대학’의 왕애명 박사님은 최근에 10년(2002- 2012년) 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및 지방 교회들을 연구한 결과, 이들이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개신교 표준 고백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공개 증언한 바 있다(http://www.localchurch.kr/localchurchnews/7957). 이것은 미국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와 풀러 신학교 측이 장기간 연구한 결과와 일치된 결론이다.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진리변증/토론 2013-10-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0606.html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1. 이런 글을 쓰는 이유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한국 내의 적지 않은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절대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일치되는 것과 다소 다른 부분이 공존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림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룰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에서는 얼마간의 오해를 동반한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지상 대화를 시도함은 양측의 현존하는 이견들이 참되게 거듭난 몸 안의 지체들 사이에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따라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2.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 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이 원칙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 지방교회’ 라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합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원래의 취지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까지도 차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더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됨이 없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입니다.[2]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과거에 일반 교단에서 구원받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참된 신자일진데 단지 소속이 옮겨졌다는 이유만으로 불신자(또는 이단)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양 측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고 교제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3. 각자의 현실을 되돌아 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합니다. 김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하여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임).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 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 교단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을 자처합니다. 그렇다면 장자교단에 부합되게 위 김 교수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측이 ‘법정 선언적 칭의’ 방면의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두 성경 교사들의 도움으로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방면에 주님으로부터 얻은 풍성한 계시와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지방 교회측은 이처럼 남이 보지 못한 어떤 진리를 나는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에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진리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의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따른 소위 ‘건설구원’을 주장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흡사하지만, 진리를 제시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5]


4.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쌍방의 이견들 중 다음 몇 가지 쟁점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한국교계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그중 어떤 이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님)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이어지는 두번 째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마16:18, 엡1:23),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행7:38).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 구약 모두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님(안티오크)은 양 진영 모두를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근거로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별도의 글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차례로 다루고자 합니다.

 

 

 

--------------------------------------------------------------------------------


[1] http://theflamingheretic.wordpress.com/2011/03/25/in-essentials-unity (영문)


[2] http://www.nazuni.pe.kr/faith/creeds/westminster/confession.php?chap=17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www.godssalvation.or.kr/aspects/regenerate.html


[5] http://pcouncil.net/jboard/?p=detail&code=mundab-aa002&id=12502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

 




혼이 잘 되는 것이 뭐지?


유향의 동산 2013-10-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0577.html

혼이 되는 것이  뭐지?

 

1.

오늘 새벽모임에서 우리는 요한 삼서 2절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혼이 잘되는 것같이, 모든 일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자매님이 혼잣 말로 혼이 잘되는 것이 뭐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업이 된다혹은 좋다 식의 말은 쓰지만, 혼이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다들 궁금해졌습니다.

 

성경 교사는  혼이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혼은 몸과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기관이다. …믿는 이의 거듭난 안에는 그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신다(8:9, 16). 그분은 믿는 이의 영에서 퍼져나가시어 혼을 적시심으로써, 믿는 이의 혼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표현할 있도록 하신다 (12:2, 고후3:18).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혼이 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영을 통하여 우리의 혼을 점유하시고 다스리심으로써, 혼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다스리고 사용하게 , 혼이 되는 것이다.”[1]

 

물론 사람마다  이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질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 영이 혼을 다스리고, 혼이 몸을 다스릴 혼은 것입니다. 이런 인식아래  다소 혼이 방황하는 분을 기억하며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안에서,  주님, 아무개 자매님의 혼이 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진심으로 드렸습니다.

 

 

2.

자매님이 과거 침례교단시절, 거기서 사람의 구조를 설명하는 동그라미 대해 반복해서 들었다고 했습니다.  가장 가운데가 , 다음이 , 그리고 마지막 원을 사람의 몸으로 생각하는 소위 삼분설에 근거한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하면서 <인생의 비밀>이라는 전도 책자에서,   동그라미 영에서 혼으로 다시 몸으로 뻗어나가는 화살표 그림[2] 더해진 것을 보고 비췸이 있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자매님이 말한 화살표는 로마서 5 10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방향성을 표시한 것입니다. 화살표는 처음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거듭남)(3:6), 그분은   영에서 혼으로 거처를 확대하시고(성화)(3:17), 다시 혼에서 몸까지 생명으로 적셔 가시는 (영화) (8:11) 보여줍니다.    혼이 되는 성화 과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3.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오신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분은 캠퍼스 선교회에서 오래 간사로 계셨던 분입니다. 20 전에 우연히 <인생의 비밀> 소책자를 선물받았답니다. 이후 인생의 고비들 어려울 때마다 책자를 보고 힘을 얻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어느 문득 이것을 발행한 교회가 있을 것같아 인터넷을 통해 캐나다 밴쿠퍼 인근 교회에 발로 찾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부부가 중년훈련에 계십니다. 바른 구원의 진리를 통해 혼이 사례 하나입니다.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도 혼이 되시기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