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펜 루이스 여사와 오스틴 스팍스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2-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74.html
또 한면으로 기독교 안에는 모든 것을 다 영적인 것으로 만든 한무리의 성도들이있었다. 그들은 영에 속한 일은 영에 있는 것이고. 이런 물질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떡을 뗄때 누룩이 있는 빵으로 한 조각 한 조각 나누어 뗀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설령 매일매일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 할지라도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떡을 먹는 것에 있지 않고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에 있다.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그분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참되게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기념 하는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영적인 실제가 없다. 떡을 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강한 사람은 제시 펜루이스 여사이다. 그녀는 형식적으로 떡을 떼는 것이나 형식적으로 침례받는 것을 반대 하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을 뿌려도 충분치 않을 뿐아니라. 물속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이 물속에 백번들 들어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정한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할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살고 날마다 생활 속에서 침례받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침례이다. 성도들이 떡을 떼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한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그 생활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되게 전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게 떡을 떼는 것이다."

그 당시 펜 루이스 여사에게 한 젊은 동역자가 있었는데. 바로 오스틴 스팍스형제이다.이후에 그가 대만에 욌을떼에 그가 펜루이스 여사를 떠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내게 분명히 말했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가 주님의 상 과 침례받는 일을 너무나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자매로서 펜루이스 여사가 거기서 머리 노릇하는 것이 스팍스가 그녀를 떠난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를 떠난후 자신이 직접 짐회를 세웠다. 그의 만찬집회는 실제로 형식에 형식을 더 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가 있는곳에  4주 동안 손님으로 머물면서 적어도 세번정도 만찬 집회에 참석했다. 앞에는 오직 탁자 하나만  놓여있었고 그가 거기에서 있었다. 시적부터 끝까지 그가 혼자 서서 찬송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셩경을 잃고 말씀은 전하였다. 오랬동안 해 보았 으므로 모두들 그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떡을 나누고 떡을 먹고 잔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떡을 나누는 것이 일곱차레의 순서가 있으며. 잔을 나누는 것도 일곱 차례의 순서가 있었다. 떡이 다 돌아가고 잔이 다 돌아가면 그가 다시 말을 했다.  이후에 그는 "지금은 모두가 자유로이 경배하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몇몇 사람이입을 벌려 기도를 하는데 그 시간은 약10분 정도 였다. 그런후에 그는 다시 "자유로이 경배하는시간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가 되면 아무도 기도 할수 없고 모두가 그의 말씀을 기다렸다. 영에 속한 사역을 하는 스팍스가 여전히 이렇게 형식 속에 갇혀 있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펜 루이스 여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이고 스팍스 형제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 이네 방면의중점에 있어서 그들이 분명옳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심 삼았던 진리안에 "솜털이나. 눈썹. 코털.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이 혼잡하게 섞여 있다는 것이다.

1955년에 스팍스 형제가 처음으로 우리를 방문했을때 먼저 홍콩에서 말씀을 전하였고 다시  대만으로 왔는데  그 기간에 거의 내가 그를 위해 통역을 했었다. 그가 전한 말씀은 실제로 회복안의가르침이었고. 어떠한 혼잡도 없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우리 모든 사람은 매우 많은 공급을 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57년에 그가 두번째 왔을 때에는 "눈섭과 코털과 솜털"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어느날 대북의 어느형제의  식당에서 백여명의 동역자들이 그와 자유로이 교통을 가졌다. 그중 한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스팍스 형제님 당신은 여기에 두번째 오셨는데  우리의일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해 주시 겠습니까. 그는 처음에 왔을때 어떤것을 보고서 틀렸다고 생각했었으나 너무 빨리 말해서는 안되겠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이런 기회가 왔으니 이제 이야기 하겠다고  그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했다.

먼저그는 이렇게 말했다."여러분 중에 군복무를 하는 형제들은 왜 집회가 끝나자 마자 집회소를 나서지도 않았는데 모자를 씁니까 " 앉아있던 한형제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는 풍습에 의하면 군인들은 어떤 곳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회때에는 고린도전서 11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무릇남자로서 머리에 무었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것이요"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자를 벗습니다.그러나 집회가 끝나면 모자를 씁니다.라고 좋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스팍스 형제는 불쾌하게 느끼며 말했다. "여러분은 성경을 따릅니까. 아니면 풍속을 따릅니까. 내가 거기서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우리가 스팍스 형제를 절대로 따를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내속에서 분명해졌다. 비록 그가 영적이고. 내가 어려서부터 그의책을 읽고. 그를 따르고 존경하며 중시 하였었지만. 그날 내 안에서는 그러한 존경심이 사라져 벼렸다. 나는 마땅히 존경해야 할자만 존경할수 있을 뿐이다.

그다음에 그는 다시 말했다. "여러분이 떡을 떼는 순서는 너무나 혼라스럽고 질서가 없습니다. 이사람이 기도했다가 저 사람이 기도하고 이사람이 말했다가 또 다른사람이 말하고 하니 너무어지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듣고고 할말이 없었다. 1958년에 그는 런던에 있는 그의 집회에 방문하도록 나를 초청하였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그의 떡을 떼는 방식을 보고서야. 왜 그가 우리의 떡떼는 것이 혼란 스럽다고 말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가 거기서 인도할때 무엇이든지 다 그가 직접하고 사람들은 다 그가 하기를 기다리니 자연히 질서가 있고 군대처럼엄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다만 어떤 역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나는 여러분이 왜 회복안에 어려움 들이 있는지 보기 바란다. 회복 안에서 어떤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와 같은 주요한 계시" 를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떠 어떤 사람들은 큰 계시도 보고 아주 세세한 것들도 본다. 중심되는 계시는 사람들에게 공급을 주지만 아주작고 지엽적인 것들은 사람들를 죽이고 교회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 밖에 또 어떤 사람들은 큰 중점을 보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보고서 이 사소한 것들로 서로 다투므로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역사은 어려움이 발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무었을 중시해야하고 무엇을 주의하지 말하야 할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바울의 완성하는 사역의 중점과 지엽적인것(가지와 잎)branches and leaves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2-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68.html
고전 1: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고전 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 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중심적인 계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그러면 지엽적인 것은 무엇인가. 침례받는 것이나. 떡을 떼는 것과 같은 일들이 지엽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이 지엽적인 것들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많은 다툼이 생긴다.예를 들면 침례를 받을
때 담수에서 해야하는가. 흐르는 물에서 해야하는가. 물이 있는곳이면 가능한가.반드시 요단강에 가야하는가.욕조를 사용해도 되는가 등이 있다.
 
떡을 떼는 것도 주일 오전에 해야하는 가. 주일 오후에 떼야 하는가. 빵을 사용해야 하는가. 누룩없는 떡을 사용해야 하는 가.아니면 날마다해야하는가 아니면 1년에 네번혹은 한달에 한번 아니면 매 주일에 한번씩 떡을 떼야하는가 이것은 쟁론의 여지가 있으며 또한 저마다의 논리가 있다.

1600년대에 재침례파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받는것에 대해 유아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성경에는 유아세례가 없고. 유아는 자아의식이 없어서 그리스도를알수없다고 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하고 회개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받기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수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침례를 받는것이 물속에 잠기는것임을  회복하였다. 그당시에 이것은 놀라운 회복이었다.천주교는 이것을 반대했으며 그들을 박해했다. 심지어 마르틴 루터,쯔빙글리,칼빈도 이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재침례파성도들을 스위스의 리마트 강에 수장시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진리를 위하여 엄청난 순교를 하였고 또한 침례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본진리가 침례회를 만든 기초라는 것을 알수있다. 바울은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고전 3:11)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작은 진리 위에 그들의 모임을 세웠다. 침례를 받는 진리가 분명하지만 이것이 중심적인 진리는 아니며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 주님께서 중요시 하고 주의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말한 의미는 무었인가. 바울은 "나는 침례를 전하는 것을 중심 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침례주는 것도 중심 삼지 않았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나아 갈때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하였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큰 능력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만일 고린도 전서를 8장까지만 읽는다 해도. 바울이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를 매우 중심 삼아 말한 것을 볼수가 있다. 여기에서 영은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포함 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전서를 읽을때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보지 못하며 생명이나 교회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는 가 그들 대다수는 오직 지엽적인 것들만보며 그 사소한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다툰다.


워치만니의 1차 이기는 자 집회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1-3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49.html
제 1차 이기는 자 집회
1928년 2월1일 워치만 니 형제님은 상해 교회에서 제 1차 특별집회를 가졌는데 "이기는자 집회"라고 불렀다. 그 집회의 중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그리스도의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은  약 50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에 20-30명은 외부에서 상해에 온 사람들로 그들의 태반이 강소 북부와 절강 남부의 평양에서 왔다.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체험함
1928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은 영에 속한 사람을 다 써서 출판하였다.그책을 쓰기전에 워치만 니는 이미 폐병에 걸려있었다. 영에 속한 사람을 쓰는 까닭에 1929 년이 되어서는 의사도 치료할 약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워치만 니 의 폐병은 더욱더 심해졌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날수도 없었고 밥을 먹을수도 없었으며 밤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려 편안히 잘수도 없었다.

워치만 니는 스스로도 자신은 반드시 죽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워치만 니는 이를 위하여 전일하게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믿음을 주시도록 구하였을 때 결국 하나님은 워치만 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 암아 살리라."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돌 살리시리라."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 함이로라"(고후 5:7) 마침내 워치만 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치료함을 받았다.

부흥보와 주제별 진리연구기록을 발견함
1928년에 부흥보가 상해에서 다시 발간되었다. 부흥보는 본래 1923년1월에 복주에서 창간되었는데 1925년 워치만 니 형제님이 부담을 가지고 기독도보를 발간하면서 중단되었다. 기독도보는 1925년 말부터 발간되다가  1927년 말에 중단되었다. 1928년 1월부터 워치만 니 형제님은 다시 부흥보를 계속 발간했다. 부흥보는 비교적 깊은 간행물로서 영에 속한 원칙 부활의 생명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것들을 전적으로 논했다.

1930년 4월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매달 한번씩 또 다른 간행물인 주제별 진리연구 기록을 발간했다. 이 간행물은 비교적 초보적인 것으로서 대부분이 워치만 니 가 상해에서 매 주일 전한 메세지거나 혹은 다른 때에 전한 생명의 메세지였다. 출판된 부수는 부흥보와 기독도보보다도 더 많았다. 그 당시에 작은 무리의 찬송이라고 불린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1930년에 이미 130곡이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제 2차 이기는자의 집회
1931년 10월 워치만 니 형제님은 상해에서 제 2차 이기는자의 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비교적 많았는데 그중 대다수가 여전히 평양과 강소 북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번 특별집회에서 말씀하신 메세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지혜로서 더 나은 언약 혹은 신약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이미 출판되었다. 책의 앞부분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전한 것이며. 뒤에 있는 두 편은 1946년에서 1948년사이에 내가 상해에서 전한 것이다 워치만 니 형제님은 언약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셨으며. 나는 언약의 체험에 대하여 말했다.  1950년 후에 이연여 자매님은 이 두 방면의 메세지를 하나로 합하여  새언약 (워치만 니 전집 제 1집 9권) 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는데 이후에 우리는 그 이름을 더나은 언약.또는 신약이란 무었인가 라고 바꾸었다.

여기 한가지 기묘한 일이있다.워치만 니 형제님은 1920년에 구원받고서 1922년에 정식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여 교회를 세웠다. 워치만 니의 일생은 1922년부터 시작해서 1972년 주님의 품에 가시기 까지 계산해 볼때 모두 50년이다. 마지막 20년은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혀있어 일할수 없었다. 전반부 30년은 세단계의 시기로 나누어지며 매 단계는 10년씩이다. 1922년 에서 1932년 까지가 첫 단계이며. 1932년에서 1942년까지가
또 다른 단계이고 1942년 부터  1952년 까지가 또 하나의 단계이다.

1932년에 워치만 니 는 북부에서  나와 만나 북부의 회복을 시작했다.그래서 1932년이  한단계의 시작이다. 1942년에 상해 교회에 큰소요가 있어 그는 사역을 중단하고 6년동안 물러나 있었다.그래서 1942년이 또 하나의 경계선이 된다.  1952년에 워치만 니 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되 되었다. 그는 1952년부터 1972년에 주님의 품에 가기 까지 감옥에 있었다.

**. 워치만 니 에 대한 이런 기록들은 1922년 워치만 니의 사역의 시작에서부터 1932년까지의 10년간  워치만  니 의 초기 사역을  위트니스 리가 기록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에 대한 두 권의 책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은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와 역사와 계시 라는 책이다. 위트니스 리는 자기가 워치만 니와 함께 하지 않은 1922-1932년 까지의 10년의 역사에 대해  자신이 상해에 와서 워치만 니와 동역을 시작할때에 워치만니 자신이  어떻게구원받았는지.어떤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말해 주었다고 말했다.**


워치만 니 형제님의 초기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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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공과
1924년 봄 복주에서 한가지 불행한 일이 생겼다. 당시 왕재 형제는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종종 복음을 전하러 나갔으며 그는 나갈때 마다.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상해에서 기독교 선교연맹 수진당의 창시자인 오백서선생을 만났다. 오백서는 만일 교파에서 은사 있는 그를 청하려 한다면 그는 반드시 안수를 받은 복음전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의 했다. 그는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여 한날을 정하여 오백서 선생이 상해에서 복주로  와 집회소에서 그를 위해 안수를 하고  그를 복음전도자로 세우기를 바랬다.워치만 니 형제님은 이 일을 안후에 동의하지 않고 도리어 "언약궤의 역사"라는 한편의 메세지를 전했다.

언약궤의 역사
이 메세지에서 워치만니 형제님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언약궤는 장막안에 있어야 하지만 이스라엘백성이 실패한 후에 비정상적인 상황이 될때  언약궤는 장막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삼상 7:1-2)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때 그는 먼저 장막에 가서 제사를 드렸고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원했던 대로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

꿈에서 깨어났을때 그는 언약궤가 거기 없으므로거기서 경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언약궤앞에서 하나님께 경배 했다. (왕상 3:4-15)  워치만니 형제님은 언야궤는  그리스도이며  장막은 교회의 외형이고 그리스도는 교파안에 계시지 않으며 이러한 안수와 같은 외형적인 것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말씀으로 왕재 형제가 안수를 받으려 했던 일은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왕재 형제는 매우 불쾌해했고 진리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았던  다른 형제들은  모두 왕제형제를 동정했으며 워치만니 형제님을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그 메세지를 전한 후에 남경과 항주로 가셨다. 그가 항주와 남경에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왕재형제와 다른 다섯명의 형제들은 어떤 명분을 가지고 워치만니 형제님을 제명했다. 그때 복주에서 집회하던 청년들 대부분은 워치만니 형제님편에 서 있었으므로 불공평한 이 일로 인하여 화가 났고 워치만니 형제님에게 이러한 소식을 편지로 써서 보내어 형제님이 빨리 오시도록 했다. 

그러나 워치만 니 형제님은 십자가의 공과를 배웠고  복음 전하는 일도 바빴으므로 복주에서 온 편지와 전보를 보기만하고 잠시 한쪽에 제쳐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항주와 남경에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다 끝난후 워치만 니 형제님은 는 상해로 갔다.그리고 다시 복주로 가는 배 안에서야 워치만 니 형제님은 비로서 편지와 전보를 꺼내 보았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편지를 보면 볼수록 화가 나서 안에 실제로  평강이 없었다. 

배가 마미에 도착해 부두에 정박하려 할즈음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화가 점점사라지고 있었다.그때  니 형제님안에 "너는 십자가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자신을 위햐여 말하지 말고 인내하며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워치만 니 형제님은 돌아간 후에 아무것도 하지않고 저녁에 잠을 잤다. 다음날 니 형제님은 짐을 꾸려 복주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더 이상 이 일을 이야기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배가 부두에 도착하자 한무리의 청년들이 워치만 니 형제님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이야기를 하였다.  니형제님이 집에 도착하자 집 안팎으로 사람들이 있어. 니 형제님이 불공평한 일을 당한 것을 도우려 하였다. 니형제님은 또 다시 격동되는 것을 느끼자 모두에게 집에 돌아가도록 부탁하였다.

기독도보를 발행함
밤이되어 워치만니 형제님의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에 주님은 또다시 워치만니 형제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마땅히 어떠한  일을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복주을 떠나야 한다. " 그래서 그 다음난 아주 일찍 워치만니는 그 청년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은 어떤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내 짐은 이미 다꾸려졌으며 나성탑으로 이사 하려고 합니다. " 워치만니 형제님은 이렇게 복주 교외의 마미 근처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런후에 주님으로 부터 한가지 부담을 받아 기독도보 라는 간행물을 발행할 준비를 하였다. 이 간행물의 네 가지 큰부담은 복음전파와 성경 강해 교회와 영에 속한 생명을 논하는 것이었다. 이월간  간행물은 매달 80에서10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되어 있었는데 워치만 니 형제님이 혼자 다 원고를 준비 하였다. 성경강해 방면에서는 계시록연구와 창세기 연구가 있다.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워치만 니 형제님은 "영에 속한 사람을 쓰기 시작하였다.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모두 합해 10권이나 되었으므로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하였다. 그래서 그는 축소형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영적전쟁(워치만 니 전집 제 1집 1권)이라는 책을 먼저 썼다.

1925년 전후로 이연여 자매님이 몇몇 자매들과 남경에서 떡을 떼기 시작한 후에 그녀는 "영광보"를 떠나 주의 회복의 길로 완전히 가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영광보" 책임자는 그녀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녀는 도덕성이 아주 높고  매우 책임감 있는  사람이어서 당장에 그만두지 못하고  거기서 1926년 말까지 열심히 일했다. 1926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은 성귀기 형제의 집에 거하였는데 미국 무디 성경신학교에서 출판한 스코필드 성경통신교육과정을 번역하느라 바빴다. 그 때 이자매님과 약간의 교통이 있었다.그러므로 이연여 자매님의 영적인 인식은 많이 증가하였다.

1927년 혁명군이 남경을 점령했을 때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예배당과 더불어 "영광보"사무실도 완전히 파괴하였다. 다행이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이연여 자매님은 재빨리 뒷문의 좁은 골목으로 빠져 나와 기차를 타고 상해에 돌아와 거기에서 동역하던 자매들과 다시 모이게 되었다.

상해교회는 1926년 말에 왕패진 자매님과 몇몇 자매들과 신가화원에 있는 왕패진 자매님의 부모님의 집에서 떡을 떼기 시작했다. 이것은 왕패진자매님이 남경에서 신학을 공부할때 이연여 자매님을 만나고 워치만 니 형제님을 만남으로  후에 주의 회복의 길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1927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이 다시 한번 상해에 오셔서 그곳의 성도들과 함께 떡떼는 집회를 가졌는데 그후 왕패진 자매님의 집이 신가 화원에서 갱경리로 이주 하면서 집회 장소도 갱경리로 옮겼다.

같은해 웟치만니 형제님은 그의 복음서원출판사를 나성탑에서 상해로 옮겼다 1928년 1월에 그들을 상해 합동로 문덕리에 집을 얻게 되어 더 이상 왕 자매의 집에서 집회를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1948년 말까지 상해 교회는 거기에서 계속집회를 했다. 1948년에 남양로 에 땅을 사서 대집회 장소를 지은 후에야 그들은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엡 4장 11-12절


봉사 2015-01-2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31.html

엡 4:7절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은사의 분량에 따라 은헤를 주셨습니다.
엡 4:11-12. 그분께서 직접 어떤사람들은 사도로 어떤사람들은 신언자로 어떤사람들은 복음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온전케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7절에 있는 "각 사람" 은 그리스도의몸의 모든 지체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은사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된 네 종류의 은사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신약안에는 몸의 건축을 위해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유일한 사역만이 있다. 성도들이 사역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은 몇몇 인도하는 자들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 직접적인 건축의 일은 온전케된 성도들에 의해 수행된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사도들로 선지자들로 복음전하는 자들로 목자들과 교사들로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건축하는 지체들이 되어야 하며. 또 될수있다. 이러한 몸의 건축을 위해 필요한 것은 교리적인 가르침이 아닌 생명의 성장이다. 교리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들가운데 하나를 파괴해 왔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분으로 영양을 공급받아 점차 교리적인 관념들을 제쳐 놓는다면 우리는 온전한 하나에 이르게 될것이다. 생명이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기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러 사랑안에서 스스로 건축하는 데 이르도록 몸의 성장을 갖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