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면으로 기독교 안에는 모든 것을 다 영적인 것으로 만든 한무리의 성도들이있었다. 그들은 영에 속한 일은 영에 있는 것이고. 이런 물질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떡을 뗄때 누룩이 있는 빵으로 한 조각 한 조각 나누어 뗀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설령 매일매일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 할지라도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떡을 먹는 것에 있지 않고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에 있다.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그분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참되게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기념 하는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영적인 실제가 없다. 떡을 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강한 사람은 제시 펜루이스 여사이다. 그녀는 형식적으로 떡을 떼는 것이나 형식적으로 침례받는 것을 반대 하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을 뿌려도 충분치 않을 뿐아니라. 물속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이 물속에 백번들 들어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정한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할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살고 날마다 생활 속에서 침례받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침례이다. 성도들이 떡을 떼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한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그 생활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되게 전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게 떡을 떼는 것이다."
그 당시 펜 루이스 여사에게 한 젊은 동역자가 있었는데. 바로 오스틴 스팍스형제이다.이후에 그가 대만에 욌을떼에 그가 펜루이스 여사를 떠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내게 분명히 말했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가 주님의 상 과 침례받는 일을 너무나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자매로서 펜루이스 여사가 거기서 머리 노릇하는 것이 스팍스가 그녀를 떠난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를 떠난후 자신이 직접 짐회를 세웠다. 그의 만찬집회는 실제로 형식에 형식을 더 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가 있는곳에 4주 동안 손님으로 머물면서 적어도 세번정도 만찬 집회에 참석했다. 앞에는 오직 탁자 하나만 놓여있었고 그가 거기에서 있었다. 시적부터 끝까지 그가 혼자 서서 찬송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셩경을 잃고 말씀은 전하였다. 오랬동안 해 보았 으므로 모두들 그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떡을 나누고 떡을 먹고 잔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떡을 나누는 것이 일곱차레의 순서가 있으며. 잔을 나누는 것도 일곱 차례의 순서가 있었다. 떡이 다 돌아가고 잔이 다 돌아가면 그가 다시 말을 했다. 이후에 그는 "지금은 모두가 자유로이 경배하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몇몇 사람이입을 벌려 기도를 하는데 그 시간은 약10분 정도 였다. 그런후에 그는 다시 "자유로이 경배하는시간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가 되면 아무도 기도 할수 없고 모두가 그의 말씀을 기다렸다. 영에 속한 사역을 하는 스팍스가 여전히 이렇게 형식 속에 갇혀 있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펜 루이스 여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이고 스팍스 형제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 이네 방면의중점에 있어서 그들이 분명옳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심 삼았던 진리안에 "솜털이나. 눈썹. 코털.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이 혼잡하게 섞여 있다는 것이다.
1955년에 스팍스 형제가 처음으로 우리를 방문했을때 먼저 홍콩에서 말씀을 전하였고 다시 대만으로 왔는데 그 기간에 거의 내가 그를 위해 통역을 했었다. 그가 전한 말씀은 실제로 회복안의가르침이었고. 어떠한 혼잡도 없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우리 모든 사람은 매우 많은 공급을 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57년에 그가 두번째 왔을 때에는 "눈섭과 코털과 솜털"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어느날 대북의 어느형제의 식당에서 백여명의 동역자들이 그와 자유로이 교통을 가졌다. 그중 한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스팍스 형제님 당신은 여기에 두번째 오셨는데 우리의일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해 주시 겠습니까. 그는 처음에 왔을때 어떤것을 보고서 틀렸다고 생각했었으나 너무 빨리 말해서는 안되겠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이런 기회가 왔으니 이제 이야기 하겠다고 그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했다.
먼저그는 이렇게 말했다."여러분 중에 군복무를 하는 형제들은 왜 집회가 끝나자 마자 집회소를 나서지도 않았는데 모자를 씁니까 " 앉아있던 한형제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는 풍습에 의하면 군인들은 어떤 곳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회때에는 고린도전서 11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무릇남자로서 머리에 무었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것이요"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자를 벗습니다.그러나 집회가 끝나면 모자를 씁니다.라고 좋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스팍스 형제는 불쾌하게 느끼며 말했다. "여러분은 성경을 따릅니까. 아니면 풍속을 따릅니까. 내가 거기서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우리가 스팍스 형제를 절대로 따를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내속에서 분명해졌다. 비록 그가 영적이고. 내가 어려서부터 그의책을 읽고. 그를 따르고 존경하며 중시 하였었지만. 그날 내 안에서는 그러한 존경심이 사라져 벼렸다. 나는 마땅히 존경해야 할자만 존경할수 있을 뿐이다.
그다음에 그는 다시 말했다. "여러분이 떡을 떼는 순서는 너무나 혼라스럽고 질서가 없습니다. 이사람이 기도했다가 저 사람이 기도하고 이사람이 말했다가 또 다른사람이 말하고 하니 너무어지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듣고고 할말이 없었다. 1958년에 그는 런던에 있는 그의 집회에 방문하도록 나를 초청하였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그의 떡을 떼는 방식을 보고서야. 왜 그가 우리의 떡떼는 것이 혼란 스럽다고 말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가 거기서 인도할때 무엇이든지 다 그가 직접하고 사람들은 다 그가 하기를 기다리니 자연히 질서가 있고 군대처럼엄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다만 어떤 역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나는 여러분이 왜 회복안에 어려움 들이 있는지 보기 바란다. 회복 안에서 어떤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와 같은 주요한 계시" 를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떠 어떤 사람들은 큰 계시도 보고 아주 세세한 것들도 본다. 중심되는 계시는 사람들에게 공급을 주지만 아주작고 지엽적인 것들은 사람들를 죽이고 교회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 밖에 또 어떤 사람들은 큰 중점을 보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보고서 이 사소한 것들로 서로 다투므로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역사은 어려움이 발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무었을 중시해야하고 무엇을 주의하지 말하야 할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고전 1: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고전 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 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중심적인 계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그러면 지엽적인 것은 무엇인가. 침례받는 것이나. 떡을 떼는 것과 같은 일들이 지엽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이 지엽적인 것들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많은 다툼이 생긴다.예를 들면 침례를 받을
때 담수에서 해야하는가. 흐르는 물에서 해야하는가. 물이 있는곳이면 가능한가.반드시 요단강에 가야하는가.욕조를 사용해도 되는가 등이 있다.
떡을 떼는 것도 주일 오전에 해야하는 가. 주일 오후에 떼야 하는가. 빵을 사용해야 하는가. 누룩없는 떡을 사용해야 하는 가.아니면 날마다해야하는가 아니면 1년에 네번혹은 한달에 한번 아니면 매 주일에 한번씩 떡을 떼야하는가 이것은 쟁론의 여지가 있으며 또한 저마다의 논리가 있다.
1600년대에 재침례파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받는것에 대해 유아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성경에는 유아세례가 없고. 유아는 자아의식이 없어서 그리스도를알수없다고 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하고 회개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받기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수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침례를 받는것이 물속에 잠기는것임을 회복하였다. 그당시에 이것은 놀라운 회복이었다.천주교는 이것을 반대했으며 그들을 박해했다. 심지어 마르틴 루터,쯔빙글리,칼빈도 이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재침례파성도들을 스위스의 리마트 강에 수장시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진리를 위하여 엄청난 순교를 하였고 또한 침례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본진리가 침례회를 만든 기초라는 것을 알수있다. 바울은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고전 3:11)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작은 진리 위에 그들의 모임을 세웠다. 침례를 받는 진리가 분명하지만 이것이 중심적인 진리는 아니며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 주님께서 중요시 하고 주의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말한 의미는 무었인가. 바울은 "나는 침례를 전하는 것을 중심 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침례주는 것도 중심 삼지 않았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나아 갈때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하였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큰 능력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만일 고린도 전서를 8장까지만 읽는다 해도. 바울이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를 매우 중심 삼아 말한 것을 볼수가 있다. 여기에서 영은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포함 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전서를 읽을때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보지 못하며 생명이나 교회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는 가 그들 대다수는 오직 지엽적인 것들만보며 그 사소한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다툰다.
엡 4:7절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은사의 분량에 따라 은헤를 주셨습니다.
엡 4:11-12. 그분께서 직접 어떤사람들은 사도로 어떤사람들은 신언자로 어떤사람들은 복음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온전케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7절에 있는 "각 사람" 은 그리스도의몸의 모든 지체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은사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된 네 종류의 은사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신약안에는 몸의 건축을 위해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유일한 사역만이 있다. 성도들이 사역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은 몇몇 인도하는 자들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 직접적인 건축의 일은 온전케된 성도들에 의해 수행된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사도들로 선지자들로 복음전하는 자들로 목자들과 교사들로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건축하는 지체들이 되어야 하며. 또 될수있다. 이러한 몸의 건축을 위해 필요한 것은 교리적인 가르침이 아닌 생명의 성장이다. 교리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들가운데 하나를 파괴해 왔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분으로 영양을 공급받아 점차 교리적인 관념들을 제쳐 놓는다면 우리는 온전한 하나에 이르게 될것이다. 생명이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기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러 사랑안에서 스스로 건축하는 데 이르도록 몸의 성장을 갖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