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


나의 일기 2011-11-0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mdhsk2545/34296.html

오늘은 나주교회와 함께 저녁에 기도집회를 하고나서
광주교회 L형제님 부친의 장례식장에 조문하기로 하였다.
늦은 밤에나 돌아오겠다 싶어 하던 일을 마치고 가려다보니
기도집회 시간에 30분이나 늦었다.
매주 각 가정으로 돌아가면서 기도집회를 하는 나주교회,
오늘은 처음 가보는 지체의 가정이어서 조금 미안하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반부의 추구하는 공과는 끝나고
바로 기도집회를 시작하고 있었다.

모인 숫자는 몇 명 안 되었지만 우리는 마음을 열고
주님의 임재와 공급과 살아나타냄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나주와 영광교회, 각 가정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리고 복음의 확산과 함평을 비롯한 전남의 아홉 군데의
미개척지를 위해서 주께서 움직여 달라고 기도했다.
끊길듯 끊길듯 하면서도 기도의 부담을 거의 다 쏟아 냈다
싶었을 때 우리는 기도를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에는 또 다른 M형제님이 우리와 함께 들어가려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M형제님이
나에게 네 사람 대표로 향을 피우라고 해서 응했더니만
돌아와서 기도하려는데 옆구리를 치며 대표기도까지
시키는 것이 아닌가?
상주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사양할 수도 없고 난처했다.
평소 고인을 한 번도 뵌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분이 어떤 분
이었는지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주님께서 이 가족들을
위로하시고 모든 장례절차를 무사히 치루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형식적인 기도였다.

나는 고인을 잘 알지 못하였지만 L형제님의 부친이어서
참석하였고, 나주교회와 기도집회도 할겸, 또한 오랜만에 광주교회
형제자매들도 만날 수 있겠다 싶어 형식적인 인사치레 정도로
참석하였기 때문에 형식적인 기도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L형제님은 눈치채지 못했을지라도 주님은 알고 계신다.
왜 미리 전화로라도 L형제님에게 진심으로 위로하며 상황을 묻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나의 거의 모든 삶은 이처럼 체면치레의 형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그런 겉치레의 삶은
성도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죽은 삶일 뿐"이라고..

기도집회,장례식,나주교회,기도의 부담,영광교회,대표기도,형식적인 기도,기도하는 마음,겉치레의 삶,죽은 삶


기다리는 마음


나의 일기 2011-10-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mdhsk2545/34248.html
 

요즘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기도가 함평을 위한 기도이다.

30복음 확산 움직임 후 한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간 함평 움직임은

이래저래 우선은 누가 이주해 올 때까지 내가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부담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서울교회 4대지역과

동역이 있기 때문이고, 나 개인적으로 조금은 성숙했기 때문이다.

나는 베드로 같은 성격상 먼저 몰아붙이기식으로 간증 선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두려워서가 아니라 함평을 위해서 참으로

온 지체들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보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서울교회 4대지역의 봉사형제님에게서 간간이 연락이 온다.

오늘도 사역의 인도를 따라 우리에게 분깃으로 주어진 함평을

언제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형제님과 많은 교통을 가졌다.

우리의 인수가 많다고 해서 이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지나 아이 성을 치는

과정에서 이미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우리가 함평에 교회

깃발을 꽂을 수는 있지만 어떻게 꽂느냐가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우리의 관심을 함평에 쏟는

만큼이 함평교회의 역량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도 형제님과의 교통 가운데 더 분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미 한국교회 5개년 계획에 의해서 함평을 비롯하여 나머지

24-5개의 지역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교회와 사역은 하나가 되어 이 일을 믿음으로 성취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갈망에 부응하는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사탄까지도 이것을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러나’가 아직 우리 가운데 방해 요인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회복의 무리들 중에는

주변의 방해와 많은 상황들이 발생하자 ‘아직은 성전 건축할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자기 집을 짓는데 바빴다.


이 ‘그러나’가 우리 회복 안에 상당히 만연되어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 함부로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오히려 악한 자의 궤계에 말려드는 경우가

있으니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일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분명히 이 시대의 학개와 스가랴 같은
형제들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인내하면서 기다리자.

30복음 확산,베드로 성격,간증 선포,분깃,아이성의교훈,교회와 사역,회복의 무리,학개,스가랴


이기석형제님 묘소에서


나의 일기 2011-10-3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mdhsk2545/34175.html
이제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하고 안식하신지 2달 쯤 되었을까?
나는 집회 후에 형제님의 묘소에 가보리라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형제님께서 살아 생전에 몸이 편찮으신 분이었던 탓에
장례 때는 교회에서 장례를 치루도록 가족들에게 미리 유언하시라고
당부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었다.
그래도 주님께 기도로 의탁하고 그 당부를 했어야 했었다.
갑자기 형제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교회가 형제님의 장례를 치룰 수도 있다고 가족들과 상의했으나
수많은 친족과 법성포 굴비 연합회 상조회 사정 때문에 정중히 거절 당했다.
우리는 장례 첫날 마지막 추모집회만 갖고 물러서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장지까지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따라 우리의 주일집회 참석 인수도 매우 적었다.
형제님이 아버지처럼 살아계실 당시에는 형제님 앞에서 감히 누구도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불평하는 것을 서로 자제했었는데
요즈음은 걸핏하면 딴청을 부리고 집회까지 소홀히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내가 함평으로 이주 한다는 것이 그렇찮아도 적은 수의 형제자매들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평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인도하심 인지
참으로 이 일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인지 기도하는 사람은 적다.

집회가 끝나고 이기석형제님 묘소방문에 대한 광고를 하였더니
그래도 참석한 지체들 전원이 따라 나섰다.
우리는 하얀 국화꽃 한다발을 준비해서 남양굴비 사업장으로 찾아갔다.
마침 아내되시는 김00자매님이 기꺼이 가게를 비우고 손자 자운이를 데리고
법성포 인근의 형제님 묘소가 있는 공원묘지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지방마다 묘를 쓰는 방법이 다양하겠지만 이곳은 땅 위에 관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은 덮어 놓은 것 처럼 1인당 꼭 땅 한 평만 차지하도록 하여
빽빽히 묘를 써 놓았다. 묘를 찾기는 좀 힘들겠지만 경제적이어서
좋아 보인다. 한 여름을 지내고 잔디가 잘 뿌리를 내린 형제님의 묘소에서
우리는 형제님이 즐겨부르던 찬송, '교회생활은 아름다워'를 불렀다.

형제님을 생각하니 모두다 목이 메어 찬송을 부르다 자꾸만 끊긴다.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 안식과 만족" 오늘따라 왜 그리도 새 예루살렘이
사모되는지 형제님이 그립고 주님이 그리워 말없이 다들 울고만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시시 웃으시며 일어나 앉아서 우릴 반갑게 맞아주실 것 같아
나는 "형제님 이제 깨 벗고 칼 찬 기분 아니지요~" 소리 지르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다 같이 기도하며
남은 가족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주님께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형제님을 따로 만났다. 그리고 "형제님 당신은 지병으로 힘드시고
또 많이 외로우셨지요? 그러나 그 힘듦이 주님을 찾게 하였고, 그 외로움이
주님께 더욱 나갈 수 밖에 없는 축복이었던 것을 이제 알고 계시지요?"
형제님은 "진짜 그래라우"라고 대답하셨다.
장례, 안식, 유언,추모집회,이주,국화꽃,묘소,새 예루살렘,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