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6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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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원인

이집트가 군비를 계속 강화하고, 이스라엘을 침략할 의도가 보여서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의 공군기지에 폭격을 하여 시작된 전쟁

전쟁과정 

이집트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확보한 이스라엘군은 D-day 를 1967년 6월 5일 8시 45분 아침으로 정하고 이보다 1시간 전인 7시 45분에 이집트 공군기를 공격하여 반 이상의 전투기를 지상에서 파괴했다.

그런후에 지상작전을 개시하여 6월 9일까지 시나이 반도를 점령해버렸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상부가 하부 전투보고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스라엘군 방송을 통하여 시나이 반도 북단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방송하고 이집트군이 항공으로 지원군을 파견하도록 유도하여 이들 모두를 생포하는 전과를 획득하기도 했다.

요르단 지역에서는 6월 5일 공격하는 요르단군에 대해서 역습을 실시하여 6월 8일까지 요르단 강까지 진격했다.

골란 고원에서는 시리아군을 견제하다가 이집트와 전투행위가 끝난 6월 9일 진격을 개시하여 6월 10일에는 디마스쿠스로 진격하려는 기세를 유지하였다.

6일 전쟁의 결과

소련의 위협과 미국의 권유로 전투행위를 마감한 이스라엘전쟁 전보다 3.5배나 되는 영토를 획득하는 전과를 거두고 특히 예루살렘을 완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심리적 이점을 확보하였고 이스라엘의 국가적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스라엘 에서 주님의 움직이심


이스라엘여행 2012-01-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5 http://blog.chch.kr/k505/368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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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성도들의 집회 .  러시아 성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었다,

 

                                                               러시아성도들은 우리를 따뜻한 사랑으로 영접하여주었다.

   이스라엘에서 주의 회복의시작-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이민을  통해 문이 열림
회복 안의 성도들이 항상 이스라엘을 위한 부담을 갖고 있던차에 1973 년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교회생활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야 할 부담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주님의 회복을 통한 이스라엘에서의 주님의 최신의 움직임은 1999 년에
중요한 전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백만명이 넘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들이 사역을 얼마나 갈망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로고스(무료회복역 성경배포기관). 
러시아어 회복역을 홍보하고 배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3000권이 넘는 주문이 쏟아졌고.
이런 인도에 부응하여 2000 년말과 2001년 초에 미국과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로부터 한무리의 성도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수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치적,문화적 차이가 아주 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네 도시에 지방교회 생활을 일으키셨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열린 사람들을 많이 일으키셨다는 것을 기쁨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네개의 지방교회 안에는 지난 9 년 동안 주님의 회복의  진리의 좋은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초기에 주님은 주로 러시아계 이민자들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증거를 세우셨는데. 네 교회 중 세교회는 주로 러시아어권 유대인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열려있고. 깊은 진리에 굶주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체험할 역량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느낌은 이곳의 주님의 움직임이 구소련에서의 그분의 움직임의 직접적인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일어나기 수년전에 러시아에서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1980 년말에 한무리의 동역자들과 성도들을  러시아로 보내셨고.러시아가 열리던 시기에 주님은 러시아에서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급속하게 확산되어 많은 러시아어 회복역이 지하철역 과 캠퍼스,도심 곳곳에서 많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배포되었습니다.
그때에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짦은 기간안에 수 천명이 되었고. 초기에 침례받은 러시아 사람들이 오천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유대인 러시아사람들이 이르켜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하여 러시아어권 동역자들이 예비되었고.유대인 배경을 가진 성도들이 이주할 부담을 받았으며. 엄청난 양의 사역의 문서들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러시아 성도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저희도 젊은 성도들을 러시아에서 열리는 훈련과 특별집회에 보내왔습니다.
이모든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목표를 향해 더욱 전진함

그러나, 우리의 수고의 목표가 이 나라의 인구구성 (약 40 퍼센트는 토박이 히브리어권 이스라엘인, 다른 40퍼센트는 구 소련에서
온 러시아계이민자를포함한 이민자들. 나머지 20 퍼센트는 아랍인들) 에 부합하도록 전형적인 이스라엘 인들 사이에서 견고한 증거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우리는 전형적인 이스라엘 인들을 얻는 것에 더 중점을 둬야한다고 느낍니다.
이를 위하여. 2009년에 새롭게 도착한 한무리의 전시간 봉사자들은 다른 동역자들이 이미 살면서 러시아어권 성도들을 돌보고 있는
네타냐로 가지 않고 텔아비브로 갔습니다.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도시이고. 경제적 면이나 교통의 면에서는 이 나라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텔아비브는 또한 세속적인 (비종교적인) 토박이 이스라엘 인들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도시입니다.
새로 도착한 전시간자들은 텔아비브 대학 인근에집을 얻었고. 2010년에 텔아비브에 교회의 터를 취하였을 뿐 아니라 캠퍼스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또 여기에 몇몇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이 가세하였고. 또한 주님의 회복을 확산할 부담 때문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몇몇 
가정들도 가세하였습니다. 

이도시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으며. 특별히 캠퍼스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유대인 들을 열매로 더 얻으시기 위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미  지난 2년동안  우리는 캠퍼스에서 2백명의 학생들을 접촉했느데 ,이것은 공개적인 복음활동이나 복음지배표
(이스라에에서는 복잡한 문제가 될수있음)없이 얻은 결과입니다. 이학생들 중 일부는 주님을 영접하였고. 수십 명은 성도들과 계속 만나고 있으며.
그룹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가정들을 얻음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는 주님의 움직임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2년동안 두 마을에서 두 형제님 가정들이  자신들이 다니던 곳에서 부터 "강을 건너" 갈릴리 지방교회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중에 한 형제님은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아랍인 마을에 살고 계십니다. 다른 형제님도 아내와 자녀가 있으신데. 자신의 마을의

회중의 목사 이셨습니다. 이 두분의 가정이 회복되므로 이방의 갈릴리에 광명의 빛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마 4장 15-16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해변길 요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리야. 어둠에 않아 있는 백성이 큰빛을 보았고 빛이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사람들을 비추었다".
갈릴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방인의 갈릴리 라고 불리었으며 정통적인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이 두가정 외에도 자녀가 9명이나 되는 또 다른 가정이 주님께 이끌리어 갈릴릴 지방교회안으로 돌이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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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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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로마의 통치는 여전히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기원 후 66년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유대인과 그리스인 들과의 충돌은 유대인들에게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으로 더욱 가열되었다. 67년에 네로황제가 반란을 제지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대장으로 60000명의 군사를 보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68년까지 체계적으로 요세들을 하나씩 점령해 갔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과 유대 사막의 몇개의 요새만 남아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타이터스는 성전산을 장악하고 70년에는 성전을 함락시켰다.

사해 근처에 있는 마사다를 포함하여 세개의 요세가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3 년에 걸쳐 정복되었다. 129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에 70년부터 주둔해온 로마 제 10군단만 남겨놓고 예루살렘을 로마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음으로 율사 아키바의 지휘아래 발 코흐바 독립항쟁이 132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발 코흐바의 군대가 승리하는 듯하였으나. 로마군의 전쟁무기로 하나씩 영토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134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으며 성전의 함락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유대지방에서 살수없도록 전멸되었다.

  비잔틴시대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교와 믿음이 흡사함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율법과 계명. 민족적성격을 지닌 유대교를  따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반면
그리스도교는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로마의 콘스탄틴황제는 모든제국의 개종을 독려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2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이에 더욱박차를 가했다. 

3세기경 로마를 이어받은 동로마제국의 비잔틴 과 이란지방에 새로이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300백년간의 격돌로인하여 정치적혼란과 경제적피폐. 과중한 세금으로인한 민심의 이탈. 종교적내분으로인한 국론분열 있었다.

395년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비잔틴)제국으로 분열된다. 이후 100년후 5세기말에 서로마제국은 몰락하고 만다.
로마교회는 동로마 황제의 후원밑으로 들어갔지만. 점차 독자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과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주민들도 로마의 주교를 교황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교회와동로마체국의 관계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교황권의 독립성을 인정하지않는 동로마황제의 잦은 침해 와 마찰로 항상 논쟁이 
그치지않았다.
특히 726년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발한 우상파괴령은 로마 카토릭고회에 결정적인 타격를 가하는 것이었다.
당시 로마 카토릭교회는 게르만족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십자가상 및 예수와 성인들의 형상과 같은 성상을 활용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런데 동로마 황제는 원래 기독교가 우상을 금지한 종교라는 이유로 성상의 활용을 금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732년에 로마교회는 비잔틴제국 과 결별하게 되었고 이후 양 지역은 로마카토릭과 동방 정교회라는 별개의 문명권을 이루게 되었다. 

800년정치적 실력자의 후원을 필요로 하던 로마교황 레오 3세는 게르만족 프랑크왕국의 최고 실력자인 카롤링조의 샤를 마뉴를 동로마제국에 맞설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시키게 된다.
이로서 프랑크왕국은 로마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로마교회와 제휴하여 서로마제국을 부활시켰던 것이다.
 
  이슬람시대
7세기초 비잔틴제국 과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오랜 전쟁으로 마비된 육상 실크로드를 대신한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우회루트가
생기게된다. 그 중심도시가 메카와 메디나 였다.
이러한 시기에 마호메트가 등장하였다. 그는 메카의 명문쿠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를 잃고 어려운환경에서 팔레스타인
과 시리아 등지로 대상활동을 하면서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깊이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를 고용한 여주인 카디자와 결혼한 마호메트는 사업보다는 명상생활을 통해 인간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오랜명상끝에 그의 나이 40세때되던 610년에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아 평등 평화를 강조하는 이슬람교를 세웠다. 그러나 마호메트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당시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그래서 622년에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를 마련하였다. 이것을 해지라고하며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서 굳건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마호메트는 세차례에 걸친 전투끝에 630년 메카를 정복함으로써 획기적인 교세확장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632년 마호메트가 사망하므로써 후계자 선출문제에 직면하였는데 칼리프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칼리프는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한다.

아부바를크(632-634) 우마르(634-644) 우스만(644-656) 알리(656-661) 에 이르는 제 칼리프의 통치시기를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칼리프시대라고부른다.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정복이 이루어져. 이시기부터 비잔틴 치하에 있던 시리아가 정복되고.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였다.
634년과 640년 사이에는 이스라엘땅, 시리아와 요르단이 회교도에 의해 점령되었다.


불과 10년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상황이 이슬람세력이 확장되는 것이 가능케하였다. 
이슬람이 쳐들어오자 그동안 비잔틴의 통치아래 시달려오던 유대인들은 침략자들의 도시정복을 도왔고.
이슬람이 진출하는것을 오히려 환영하였다고 한다. 
415년에는 유대사회에서 가장높은 지위인 유대 원로제가 폐지되었고. 비잔틴시대에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종족이라하여 경멸했기때문이었다.
이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산에 두개의 회교사원이 세워졌다.

이슬람군대는 합리적인 조세제도와 토착주민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므로써. 전쟁다운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주변지역을
쉽게 복속 시킬수 있었다.
그때의 아랍제국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마리아인들을 성경의 사람들로 인정하고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성지순례도 모든종교에게 허락하여 이도시를 더욱중요하게 하였으며. 11세기초에는 유대종교법의 최고 귄위를 지닌 율사 아카데미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그리스도교인들도 "거룩한 땅"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일찌기 3 세기부터 순례를 왔다.
800년경 압바스왕조의 슐레이만대제는 예루살렘에 호스텔과 수도원을 지었으며 11 세기에는 순례객이 수 백명씩 육로로 혹은 바닷길로 운송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정복으로 영토가 강해지면서 부족간의 이견과 이해관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모하메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가되자 무아위야가 알리를 암살하고. 알리의 추종세력들이 이탈하여 시아파가 생기게되었다.

1258년몽골의 침략으로 이슬람의 압바스제국이 멸망하였고.이것은 아랍이주도하던 이슬람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슬람세계는 투르크인들이 주도하는 오스만제국의 시대가된다.



  십자군시대
1095년 동로마제국 황제의 요청하에 교황은 믿는 이들을 모아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십자군의 부름은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십자군에 가입하면 죄를 사하여 줄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당에 갈수 있다고 확신을 주었다.
유럽남부로부터 시작한 십자군은 성지를 회교도로부터 해방시키기위해 먼저 콘스탄틴노플까지 출정하였다.

1074년부터 1270년 동안 유럽에서는 여섯치례주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십자군들은 정복한 모든 지역을 요구하는 동로마제국황제와  의견충돌을 하였다. 십자군원정은 예루살렘으로 계속되었으며  증원부대를 욥바항에
도착하게 하였다.
1099년 7월15일 예루살렘은 십자군의 손아래들어갔다. 정복후 예루살렘내의 회교도들과 유대인들은 학살되었다.
십자군시대는 북으로는 티베리아. 동으로는 여리고까지 정복하여 200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성지탈환을 명분으로 한 십자군이 오히려 성지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살육과 노략질을 하여 로마 교황청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
게다가 원정군대의 대부분이 오합지졸 이어서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1212년에 교황청은 심지어 수천명의 어린이로 조성된 어린이 십자군를 불러모았는데 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상인
들에게 노예로 팔렸다.
   
  맘루크 시대와
오스만 시대

맘루크는 비회교 국가의 살라딘과 그의 계승자들이 획득한 노예들이었다. 살라딘 왕은 1187년 십자군과의 격렬한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이스라엘은
회교도의 손에 들어갔다. (살라딘 왕은 쿠루드인이었다).
1260 년 맘루크 의 벨 사령관은 이라크 시리아 를 정복하교 이스라엘까지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쳤다. 오스만제국의 정복까지 십자군시대를 제외한 약 900년간 회교도의 정권이 계속되었으며. 이후 계속적인 쇠퇴를 가져왔다.

 15세기 이후로 중앙 아시아 터키에서 시작된  오스만제국은 갈수록 강해졌으며.1516년에는 시리아 에서 맘루크를 멸망시켰다.
오스만 세력은 남쪽으로 지속된 출정은 일년 후 카이로까지 점령하였다. 16세기말까지 오스만은 경제발전과 주민의 안전을 발전시켜 그들의 수를 늘리는데 이바지한 안정된 정권체제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 오스만 제국은 17세기에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내부요인으로 귀족및 영주들의 세력이 커지고.군인들의 반란과 과중한 세금. 관료와 군부의 부패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커졌기 때문이다.
19세기에들어상황은 급변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을 계기로유럽의 오스만영토잠식은 더욱 활발해졌다.

1924년 1차 세계대전당시 독일 편에 가담했던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어 제국이 와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기고.1299년이래 600년이상 이슬람세계을 지배했던 오스만왕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되었다.
   
    시온니즘
19세기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조직된  이스라엘사람들이 유대땅에 돌아와 마을이 생겨났으나. 많은 어려움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하여 영국군은 이집트에서 전진해 나아가 터어키를 유대땅에서 몰아내고. 1917년에 이스라엘땅이 유대인들의 나라임을
인정하는 발포아 선언이 내려졌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에서 이땅에 아랍인과 유대인을 위한 두 독립 국가를 세울것을 결정했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독립국가임을
선언하는날 주변의 아랍국가의 상비군이 침입하였다. 전쟁은 여러달 계속되었으며.1949년 여름. 이 신생국가와 이웃국가간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이스라엘여행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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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사역을 통하여 가을장로훈련에 참여케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훈련은 네델란드 Baarlo 에 있는  Kasteel 호텔에서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주님의 움직이심을 볼수있는 집회 였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메마른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


 

   마.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대는 신언자들을 죽이고.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치는자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내가 얼마나 자주 네자녀들 을 품으려 하였습니까. 그러나 너희가 원치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게 되어 버린바 되리라.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제 부터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찬송하십시요! 라고 할때 까지. 여러분은 결코 나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의 에 대적하는 그녀의 모든 죄들로 인해 예루살렘을 버리셨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고. 예루살렘에 거주민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분을 찬송하십시오"라고 할 것임을 보여준다.

  행  21:20-24
형제님 그대가 아는 대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는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대에 관하여 전해 듣기로는  이방 나라에 사는 모든 유대인에게 모세를 저버리라고 가르치며. 그들의 자녀들에게 할례도 주지 말고 관습을 따라 행하지도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그대가 와 있다는 것을 들게 될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겟습니까. 그러니 그대는 우리가 말해주는 대로만 하십시오. 스스로 서원한 네사람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의식을 행하고. 그들의 비용을 대 주어 머리를 밀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에 관하여 전해들은 것들이 전혀 사실이 아닐뿐 아니라. 그대 자신도 율법을 지키려 올바르게 행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혼합으로 말미암아 마태복음 24장 2절의 예루살렘의 파괴에 관한 예언은 성취 되었다. 그 해에 로마의 장군 타이터스는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다. 하나님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의 파괴를 허락하심으로 교회안에 유대교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셨다.

  마  24:15
"그러므로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신. 황페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으십시오)".
주님은 그 당시에 성전이 세워진장소인 거룩한 곳을 언급한다. 이것은 다시한번 성전이 건축될때 예루살렘 또한 회복될 것임을 가리킨다.

스가랴 14:4
4절: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절반은 북으로.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6절:그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신언자 스가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다시 오실때 그분은 그분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감람산으로 오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나라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이방땅 갈대아우르에서 불러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고.그땅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시작되고. 그땅에 성전이 건축되고  그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죽으셔서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룬 땅이다.

나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 이번 여행을 통해서 조금은 알게 된것같다. 또,나는 역사가는 아니고 지식은 짧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것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

1.예루살렘 성은 높은 고산지대에 건축된것부터 아주 특별하다. 역사를 통해서 본다면 지구상의 모든 큰도시들은 강을 끼고 세워졌다.
물이 없다면 사람이 살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은 해발 740m에 달하는 모리아산에 건축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신언자 갓은 다윗에게 이 곳을 오르난으로부터 사서. 그 곳으로 올라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명했다.(역대상 21:15-28)  모리아산은 결국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시온산이 된다.

2.예루살렘성은 물이 대단히 부족하다. 물저장소가 없다면 살기어려울것이다. 그러므로 곳곳에 물저장소가 있다.
기묘한 것은 그 높은곳에 기혼샘이 있다. 그러나 기혼샘은 성 밖에있으므로 적들이 공격해 들어온다면 사용할수없다. 그러므로 히스기아왕은 앗시리아의 산혜립의 임박한 포위 중에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 하기위해 533m에 달하는 수로를 파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이 실로암연못이다.  

히스기아가 산혜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의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밖의 모든물근원을 막고자하매 그들이 돕더라.(32:2)
히스기야가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역대하 32:30.)

3.이스라엘은 돌이 많은나라이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유대광야가 있는데 돌산이다. 서쪽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식물들이 자랄수있는 옥토라고 말할수있는데. 우기때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또한 지중해에서 올라오는 수중기로 이슬이 많은 지역이다.
반면에 동쪽 사해바다쪽은 연중 거의 비가오지 않고 더운 사막지역이다. 아마 사해사본이 2000년동안 보존될수있었던것도 이런 환경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4.사해도 특별한데 어떻게 민물이 들어가서 바닷물보다 10 배나 짠물이 될수있는지.또 들어오는 물만있는데 넘치지않고 그 수위를 그대로 유지할수있는것도 신기한 일이 아닐수없다. (더운 지역이기때문에 증발한다고한다). 
황량한 광야지역에 엔게디 샘이 있는것도 특별하다. 그것도 높은돌산 속 중턱에 있다. 예루살렘 서쪽지역에서 내려온 빗물이 지하수로를 통하여 이곳엔게디에 이른다고 한다. 

위에서 본것과 같은 조건을 갖춘땅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옥토가있고. 광야가있고.소금의 바다도있고. 강이없는 높은 산에 건설된도시가 있는땅
아주 특별한 나라이다.성경에 가나안을 젓과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나.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땅이 더좋은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말씀의 어떤부분들은 가나안의 좋은 땅을 높은땅임을 말한다. (신 32:13.겔20:40-42.34:13-15.37:22.)
좋은땅은 들어 올려진 땅으로. 사망에서 일어나 높아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좋은땅은 낮은 땅이아니라. 높은땅이다.
이땅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보존되기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위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땅 인것 같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이스라엘에서 역사하셨고.그리스도가 이스라엘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주가되셨다.
이스라엘은 선자자를 죽이고 배척하고 돌로쳤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버리셨다. 그로인해 이방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것이다.  

주님을 배척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되었을까?  우리는 홀로 코스트 유태인 박물관에 갔었는데. 2차세계대전당시
히틀러에 의해 유럽에서의 유태인들의 비참한 고난의 역사을 보았다. 

초기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영상과 사진을 보면서.
유태인해설자는 거의 한시간동안 박물관 안에 시대별로 구분된 로. 구역을 돌며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어떠한 방랑생활을 하였는지 자세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슬픔의 역사를 들었을때.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이스라엘여행 2011-11-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347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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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 한가운데 메마른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




 

   마.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대는 신언자들을 죽이고.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치는자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내가 얼마나 자주 네자녀들 을 품으려 하였습니까. 그러나 너희가 원치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게 되어 버린바 되리라.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제 부터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찬송하십시요! 라고 할때 까지. 여러분은 결코 나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의 에 대적하는 그녀의 모든 죄들로 인해 예루살렘을 버리셨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고. 예루살렘에 거주민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분을 찬송하십시오"라고 할 것임을 보여준다.

  행  21:20-24
형제님 그대가 아는 대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는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대에 관하여 전해 듣기로는  이방 나라에 사는 모든 유대인에게 모세를 저버리라고 가르치며. 그들의 자녀들에게 할례도 주지 말고 관습을 따라 행하지도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그대가 와 있다는 것을 들게 될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겟습니까. 그러니 그대는 우리가 말해주는 대로만 하십시오. 스스로 서원한 네사람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의식을 행하고. 그들의 비용을 대 주어 머리를 밀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에 관하여 전해들은 것들이 전혀 사실이 아닐뿐 아니라. 그대 자신도 율법을 지키려 올바르게 행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혼합으로 말미암아 마태복음 24장 2절의 예루살렘의 파괴에 관한 예언은 성취 되었다. 그 해에 로마의 장군 타이터스는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다. 하나님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의 파괴를 허락하심으로 교회안에 유대교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셨다.

  마  24:15
"그러므로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신. 황페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으십시오)".
주님은 그 당시에 성전이 세워진장소인 거룩한 곳을 언급한다. 이것은 다시한번 성전이 건축될때 예루살렘 또한 회복될 것임을 가리킨다.

스가랴 14:4
4절: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절반은 북으로.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6절:그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신언자 스가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다시 오실때 그분은 그분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감람산으로 오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나라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이방땅 갈대아우르에서 불러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고.그땅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시작되고. 그땅에 성전이 건축되고  그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죽으셔서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룬 땅이다.

나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 이번 여행을 통해서 조금은 알게 된것같다. 또,나는 역사가는 아니고 지식은 짧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것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

1.예루살렘 성은 높은 고산지대에 건축된것부터 아주 특별하다. 역사를 통해서 본다면 지구상의 모든 큰도시들은 강을 끼고 세워졌다.
물이 없다면 사람이 살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은 해발 740m에 달하는 모리아산에 건축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신언자 갓은 다윗에게 이 곳을 오르난으로부터 사서. 그 곳으로 올라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명했다.(역대상 21:15-28)  모리아산은 결국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시온산이 된다.

2.예루살렘성은 물이 대단히 부족하다. 물저장소가 없다면 살기어려울것이다. 그러므로 곳곳에 물저장소가 있다.
기묘한 것은 그 높은곳에 기혼샘이 있다. 그러나 기혼샘은 성 밖에있으므로 적들이 공격해 들어온다면 사용할수없다. 그러므로 히스기아왕은 앗시리아의 산혜립의 임박한 포위 중에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 하기위해 533m에 달하는 수로를 파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이 실로암연못이다.  

히스기아가 산혜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의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밖의 모든물근원을 막고자하매 그들이 돕더라.(32:2)
히스기야가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역대하 32:30.)

3.이스라엘은 돌이 많은나라이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유대광야가 있는데 돌산이다. 서쪽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식물들이 자랄수있는 옥토라고 말할수있는데. 우기때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또한 지중해에서 올라오는 수중기로 이슬이 많은 지역이다.
반면에 동쪽 사해바다쪽은 연중 거의 비가오지 않고 더운 사막지역이다. 아마 사해사본이 2000년동안 보존될수있었던것도 이런 환경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4.사해도 특별한데 어떻게 민물이 들어가서 바닷물보다 10 배나 짠물이 될수있는지.또 들어오는 물만있는데 넘치지않고 그 수위를 그대로 유지할수있는것도 신기한 일이 아닐수없다. (더운 지역이기때문에 증발한다고한다). 
황량한 광야지역에 엔게디 샘이 있는것도 특별하다. 그것도 높은돌산 속 중턱에 있다. 예루살렘 서쪽지역에서 내려온 빗물이 지하수로를 통하여 이곳엔게디에 이르는것같다. 

위에서 본것과 같은 조건을 갖춘땅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옥토가있고. 광야가있고.소금의 바다도있고. 강이없는 높은 산에 건설된도시가 있는땅
아주 특별한 나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위한 하나님이 선택하신곳 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 가나안을 젓과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나.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땅이 더좋은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이스라엘에서 역사하셨고.그리스도가 이스라엘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주가되셨다.
이스라엘은 선자자를 죽이고 배척하고 돌로쳤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은 버리셨다. 그로인해 이방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것이다.  

주님을 배척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되었을까?  우리는 홀로 코스트 유태인 박물관에 갔었는데. 2차세계대전당시
히틀러에 의해 유럽에서의 유태인들의 비참한 고난의 역사을 보았다. 

초기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영상과 사진을 보면서.
유태인해설자는 거의 한시간동안 박물관 안에 시대별로 구분된 로. 구역을 돌며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어떠한 방랑생활을 하였는지 자세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슬픔의 역사를 들었을때.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로마의 통치는 여전히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기원 후 66년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유대인과 그리스인 들과의 충돌은 유대인들에게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으로 더욱 가열되었다. 67년에 네로황제가 반란을 제지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대장으로 60000명의 군사를 보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68년까지 체계적으로 요세들을 하나씩 점령해 갔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과 유대 사막의 몇개의 요새만 남아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타이터스는 성전산을 장악하고 70년에는 성전을 함락시켰다.

사해 근처에 있는 마사다를 포함하여 세개의 요세가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3 년에 걸쳐 정복되었다. 129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에 70년부터 주둔해온 로마 제 10군단만 남겨놓고 예루살렘을 로마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음으로 율사 아키바의 지휘아래 발 코흐바 독립항쟁이 132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발 코흐바의 군대가 승리하는 듯하였으나. 로마군의 전쟁무기로 하나씩 영토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134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으며 성전의 함락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유대지방에서 살수없도록 전멸되었다.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교와 믿음이 흡사함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율법과 계명. 민족적성격을 지닌 유대교를  따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반면
그리스도교는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로마의 콘스탄틴황제는 모든제국의 개종을 독려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2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이에 더욱박차를 가했다.

415년에는 유대사회의 유대원로제를 폐지했다.  634년과 640년 사이에는 이스라엘땅, 시리아와 요르단이 회교도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때의 아랍제국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마리아인들을 성경의 사람들로 인정하고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성지순례도 모든종교에게 허락하여 이도시를 더욱중요하게 하였으며. 11세기초에는 유대종교법의 최고 귄위를 지닌 율사 아카데미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그리스도교인들도 "거룩한 땅"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일찌기 3 세기부터 순례를 왔다.
800년경 슐레이만대제는 예루살렘에 호스텔과 수도원을 지었으며 11 세기에는 순례객이 수 백명씩 육로로 혹은 바닷길로 운송되었다.

유럽남부로부터 시작한 십자군은 성지를 회교도로부터 해방시키기위해 먼저 콘스탄틴노플까지 출정하였다. 십자군들은 정복한 모든 지역을 요구하는 황제와  의견충돌을 하였다. 십자군원정은 예루살렘으로 계속되었으며  증원부대를 욥바항에 도착하게 하였다.

1099년 7월15일 예루살렘은 십자군의 손아래들어갔다.  1260 년 맘루크 의 벨 사령관은 이라크 시리아 를 정복하교 이스라엘까지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쳤다. 오토만제국의 정복까지 십자군시대를 제외한 약 900년간 회교도의 정권이 계속되었으며  15세기 이후로 중앙 아시아 터키에서 시작된 
오토만제국은 갈수록 강해졌으며.1516년에는 시리아 에서 맘루크를 멸망시켰다.

오토만 세력은 남쪽으로 지속된 출정은 일년 후 카이로까지 점령하였다.  전성의 절정이었던 16세기말까지 오토만은 경제발전과 주민의 안전을 발전시켜 그들의 수를 늘리는데 이바지한 안정된 정권체제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19세기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조직된  이스라엘사람들이 유대땅에 돌아와 마을이 생겨났으나. 많은 어려움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하여 영국군은 이집트에서 전진해 나아가 터어키를 유대땅에서 몰아내고. 1917년에 이스라엘땅이 유대인들의 나라임을
인정하는 발포아 선언인 내려졌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에서 이땅에 아랍인과 유대인을 위한 두 독립 국가를 세울것을 결정했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독립국가임을
선언하는날 주변의 아랍국가의 상비군이 침입하였다. 전쟁은 여러달 계속되었으며.1949년 여름. 이 신생국가와 이웃국가간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