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삼경목사의 이단정죄는 불법이자 직권남용이다.


진리변증/토론 2013-05-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7722.html
헌법해석위, 타교단 이단정죄는 타교단이 알아서 해야
총회는 단지 보고만 받을 뿐, 보고받으면 타교단에 통지할 것
로앤처치 (307)
2013. 4. 25.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해석위원회가 이단정죄 관련 질의서에 대하여 타교단사람들에 대해서는 해당교단에 통지하여 해당교단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해석을 했다. 동교단사람들에 대해서는 교단헌법에 따라 재판절차를 거쳐야 하고, 타교단 사람들에 대해서는 타교단이 알아서 해야한다는 해석이다. 본교단사람들은 본교단의 헌법을 통해서, 타교단 사람들은 타교단의 헌법을 통하여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헌법위는 교단내의 이단적 행위와 적극적 동조행위를 한 자에 대하여는 고소고발이 제기되면 재판을 통하여 권징책벌로 하여 회개촉구와 신앙생활 유지를 그 목적으로 한다고 해석하고, 타교단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단과 교파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총회이단대책위원회가 연구한 결과를 본 총회에 보고하고 해 교단에 통지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해석하였다. 
 
질의자 이정환목사는 "우리 총회는 지금까지 다른 교단이나 교파의 사람들까지 이단으로 마구잡이 정죄함으로 사실상 한국교계의 분열을 조장한 측면이 없지 않으며, 에큐메니칼 교단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타교단 교파사람에 대한 이단시비문제는 이대위가 연구한 결과나 혹은 직영신학대학교 해당분야 교수 5인중 3인의 동의서가 첨부된 연구결과를 소속교단에 통보하여 해교단에서 치리하도록 해야하는 것이 아닌지"라고 질의한 바 있다.
 
헌법위는 더는 예장통합교단이대위가 직권남용을 하여 타교단사람들에 대해서 이단정죄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즉 총회에서 이대위의 보고는 받되, 그 보고도 동교단산하 교회들을 위한 것이고, 타교단 목사들의 이단결정은 해당교단에 통지하면 해당교단에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총회보고는 본교단을 위한 것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대위가 총회에 보고만 하면 마치 이단이 된 것처럼 타교단 목회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로앤처치는 재판도 하지 않고 이단옹호언론인양 매도했고, 박윤식, 김기동, 윤석전, 조용기, 박철수 등은 해교단에 통지하지 않고 이대위의 보고형식으로만 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들이다.  
 
이정환목사, 당연한 해석이다 
 
이번에 질의서를 제출한 이정환목사는 다시는 동교단. 타교단 상관없이 이대위의 마녀사냥식 이단정죄와 중세식의 이단재판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번에 헌법위가 동교단에 속한 자는 재판절차를 통해서 이단판정을 하고, 타교단에 속한 자는 해당교단에서 통지하여 처리하라고 해석한 것은 정당한 해석이라고 했다.
 
이번 헌법해석으로 예장통합교단 이대위가 지금까지 동교단이나 타교단 사람들에 대해 한번도 소명기회를 주지도 않는 기초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장통합 교단 헌법에도 없는 교리재판을 하여 타교단의 권리를 빼앗아 타교단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판단한 것은 직권남용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지금까지 타교단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모두 잘못되었거나 무효인 셈이 되었다. 모두 불법이고 절차하자이며 직권남용이다. 이 한가운데 최삼경이 있었던 것이다.  
 
헌법위는 사이비성, 이단성, 신학적 문제성, 윤리적 문제성, 목회자문제성의 표현은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단산하의 노회, 지교회, 기관 등에 주의를 촉구 각성케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여 그러한 표현들이 이단정죄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이대위는 자체 교단산하 교회에게 주의를 각성시키기 위한 표현만 갖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왔다.   
 
이번에 예장통합교단 헌법위는 타교단목회자들의 이단성에 대해서 보고를 받는다면 해당교단에 통지하여 처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타교단목사의 이단정죄는 해당교단의 권리임을 분명히 명시한 것이다. 이제까지 이대위는 남의 권리를 찬탈하여 자신들이 직접 타교단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한 것이다.    
 
이대위의 무소불위의 권위
 
지금까지 최삼경이 중심이 된 예장통합이대위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갖고 동교단 타교단 소속에 상관없이 중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단적이고 초법적인 행위로 이단행위가 없어도 한번도 소명기회도 주지않고 총회폐회가 임박해서야 "이단성이 있다", "사이비성이 있다"라고 보고하여 사실상 이단으로 정죄했고, 교리와 상관없이 총대들이 확인할 수도 없는 개인윤리와 사생활에 대해 부풀려 '사이비 하다'라고 보고하고, 장로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침례교, 오순절 교단에 소속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이단정죄를 하여왔다. 또한 최삼경을 반대하는 언론들에 대해서는 한번도 소명기회도 주지않고 이단옹호언론이라고 정죄해 왔다.  
 
총회임원회, 이단정죄에 대해 해명해야
 
이제 예장통합교단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한 자들은 예장통합교단의 총회장을 상대로 상대로 재심청구를 하거나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예장통합임원회는 이제까지 일방적으로 타교단목사들을 이단이라고 매도한 것에 대해 해명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이정환목사가 헌법해석위원회에 올린 질의서에 대한 답변이다.
 




▲     ? 로앤처치
▲     ? 로앤처치

 

         
 
출처: http://lawnchurch.com/sub_read.html?uid=3770&section=sc85&section2
기사입력: 2013/05/07 [23:36]  최종편집: ⓒ lawnchurch


지방교회측 변증: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가 아닌가? -반론


진리변증/토론 2013-05-09 / 추천수 1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7777/47696.html


지방교회 양태론 관련 포도가지(차영위)님의 주장에 대한 해명

 

인터넷 안에는 검증 안된 글들이 많이 떠 다닙니다. 아래 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진리가 왜곡되는 것과 성도 간에 불필요한 장벽을 막도록 최소한의 해명 또는 반박을 해 보겠습니다. 편의상 <차영위> <지방교회측 반박> 이렇게 구분하겠습니다.

 

 

<차영위>

 

아래의 글은 이인규님이 지방교회와 토론할 때 인용했던 위트스리의 글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내가 위트니스리의 글이 의미하는 바를 밝혀 놓았으니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면 위트니스리의 글이 양태론자들의 말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의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우기면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말하려면 양태론자들이 하는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는 양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위트니스리가 과연 양태론자가 아닌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아래에 인용된 위트니스리의 글이 왜곡된 것이거나 조작된 것인지 (지방)교회 사람들이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 항의가 없으면 사실기록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문맥의 흐름을 무시하고 어느 한 부분만 떼어내어 소개하다보면 저자가 말하려는 의도가 크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단어 하나로도 이단과 정통이 판가름나는 삼위일체론은 특히 그러합니다. 정통 교부인 바실 (Basil)은 그런 식의 비판을 통해 삼신론자로, 역시 정통 교부인 어거스틴은 양태론자로 오해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상쇄할 다른 부분의 언급을 통해 정통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아래 포도가지/차영위 님(또는 이인규님)이 위트니스 리가 말했다며 인용한 글들은 유감스럽게도 오해살 만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도드라지게 보이게 했고, 앞뒤 쪽의 전제조건’,‘추가설명’ ,‘그런 말이 나오게 된 성경본문과 배경등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었습니다.  참으로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든 이단 만드는 것이 목적인 분들이 뽑아 낸 본문들이라 그렇습니다.

 


<차영위>


1. “그러므로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 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비밀. 18-19)

--“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 이 부분입니다. 위트니스리의 이 말은 그가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구분)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그가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아들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고 이렇게 혼동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9 6절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2번을 볼까요? “


 

<지방교회측 반박>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라는 말은 차영위 님의 오해처럼 2(아들) 1(아버지)이라고 부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2격으로 대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위 문장에서의 그분’)는 기도 시에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라는 의미입니다.

 

각 위격을 1/3씩 나누어 생각하는 이단 신론을 가진 분들(대표적인 사람이 한기총과 합동교단에서 삼신론 이단으로 공식 규정된 최삼경목사 그리고 그의 옹호자인 이인규씨임)아들, 전체 하나님 중에서 아버지와 성령은 제외된 제 2격만(1/3)이라고 크게 착각합니다. 사실은 한국교계 이단감별사들 상당수가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위에서 보듯이, 어느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한 삼일 하나님 전체라는 정통 교부들의 신앙관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삼위는 각각 1/3로 분리된 셋이라고 오해할 때, 아들(2)=아버지(1)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양태론 오해가 생겨납니다. 즉 이단기준으로 보니, 정통이 이단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는 다음과 같이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언급하는 아버지가 제 1격만을 배타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세 위격 전체 즉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의 예에서처럼, 우리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그것은 배타적으로 삼일성의 첫번 째 위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hillipsburg, <state>NJ</state>: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p. 107

 

 

삼위를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으로 보는 분들은 아래와 같은 정통 삼위일체 고백을 잘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시각조정 차원에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조금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          (어거스틴)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 299).

 

·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 (George Bull 성공회 주교,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          신적 존재양태들(the divine modes of being)이 상호간에 서로 서로를 아주 완전하게 조건지으며 스며들어서 하나가 항상 다른 둘 안에 계신다.”(Karl Barth, CD 1/1, p 370).

 

·          (다마스커스 요한)”각 위격은 각각 다른 위격 안에서 어떤 연합 (coalescence)없이 존재(being)를 가지신다.”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843-844).

·          『위격 간의 상호내재 : 닛사의 그레고리는 신격의 위격들이 시간 안에서, 장소 안에서, 직무 안에서, 또는 활동 안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김석환, 위 책, 228)

·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실체의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삼위의 구별을 위해서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가 다 들어 있다.”(김석환, 29).

·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14:10)라고 선언하신 바와 같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1, p169)

세 위격을 세 사람들처럼 각각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다음과 같은 지적도 새겨 들으면 좋습니다.

 

·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으로는 셋이나 실체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님의 실체를 아담과 하와와 셋에 비교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역시 잘못된 것이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 241, 원출처: Gregory of Nyssa, QNTD (5:334 ).

·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실 수 없으시다. 그분들은 마치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이 그런 것처럼, 서로 나란히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1947, p109).

 

·          신적 실체는 각 사람의 경우처럼 개체적 부분의 한 종류로 간주될 수 없다”(김석환, 삼위일체에서페리코레시스이론에 관한 분석)

다시 반복하지만, 위 위트니스 리 본문은 포도가지/차영위 님의 오해처럼, 2(아들)=1(아버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포도가지님이 자신의 삼위일체관을 위 정통 신학자들의 그것과 일치시킨 후, 본문을 다시 읽어보시면 비로소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이 정통 신학자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차영위>


2.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은 영원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 따른 합당한 번역이다. 아버지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의 아버지이시다.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은 영원 안에 계신 바로 "그 아버지"이시다. 저쪽 영원 안에서 "그 분은 아버지"셨고, 이쪽 시간 안에서 우리의 시대에 "그분은 아들"로서 주신 바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비밀. 18)

“-- 위트니스리의 유추해석은 이것입니다.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우고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니,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이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여기서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오류 때문에 그는 혼돈에 빠지고 양태론자들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됩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우고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니,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라는 말는 차영위 님의 주장처럼 위트니스 리의 유추해석아니라 아래에서 보듯이 성경본문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9:6, 개역)


<차영위>

 

성경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구별(구분)합니다. 인성으로 볼 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이십니다. 그리고 신성으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십니다. 이 양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구별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첫째, 그 둘이 합해져 제3의 어떤 존재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이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성’이 합해졌지만 구별된다는 말의 뜻입니다. 이런 뜻으로 본다면 이사야서 9 6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을 때 아들 혼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아들이라 불릴 뿐 아니라 아버지라 불리운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위트니스리는 ‘아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불리우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쪽 영원 안에서 그분은 아버지셨고, 이쪽 시간 안에서 우리의 시대에 그분은 아들로서 주신 바 되는 것이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들은 영원 안에서도 아들이시고 아버지는 영원 안에서도 아버지라고 구별하여 말하지, 아버지와 아들을 혼동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아들을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을 양태론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말씀은 어떤 물질적인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기도 하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아들과 아버지를 영원히 구별하며, 혼합하거나 혼동하지 않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 말씀도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일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보는 것이지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한 번도 ‘내가 곧 아버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자신과 아버지를 혼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제 3번을 봅시다.”

<지방교회측 반박>

 

포도가지님은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아들이라 불릴 뿐 아니라 아버지라 불리운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가지님의 이 말 자체도 삼위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결국 아들이 아버지라는 말임으로 위격간의 혼동을 가져오는 양태론 이단 주장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의 엄격한 구별은 어떤 경우에도 성자=성부일 수 없다라는 말임으로 두 위격이 아무리 안에그리고 함께계신다고 해도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이지, 아들이 아버지로 불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포도가지/차영위님 은 본인이 파 놓은 함정이 본인이 빠지고 있는데, 이 점을 어떻게 해명하실지 궁금합니다.

 

사실 위트니스 리 (또는 지방교회측)은 이 구절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는 본문에 근거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경륜적인 삼위일체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로 이해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방교회측의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지에 별도 논문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 http://www.affcrit.com/pdfs/1996/01/96_01_sc.pdf (영문) 참조)

 

 

<차영위>


3.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


“-- 위트니스리의 혼동을 보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동을 넘어 혼돈입니다. 그는 말로는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증거를 대면서 말하는데도 자신은 그래도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고 말하면 그는 ‘구별’이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충고했지만 그는 그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차영위 님이 비판하시는 위 내용은 스가랴 2:8-12에서 만군의 주께서 보내신 자(He)’보내심을 받은 자’ (I) 둘 다 이심을 지적한 바로 다음 문장입니다. 그리고 인용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은 앤드류 머레이는, 가장 좋은 기도는 내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께 기도한 것이라고 말했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위트니스 리는 이 문제를 교리상으로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에서는 참으로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문맥 전체의 흐름을 무시하고 오해살만한 부분만 떼어내어 비판을 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고

일종의 비겁한 이단 감별일 뿐입니다.

 

본문 자체(2:8-12)가 두 위격을 동일시하는 내용을 해석할 때 위트니스 리의 의도는 이 역시 기도하시는 아들도 <삼위 전체>이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도 <삼위전체>라는 전제 하에 말한 것입니다.

 

-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 (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한편, 위트니스 리는 위에서 처럼 삼위 전체의 방면에서 어느 한 위격들을 말할 때도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삼위의 구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후 문맥을 잘 살펴서 인용하고 비판해야 할 이유입니다.

 

“에베소서 3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그분의 영으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 아들 그리스도를 갖는다. 모두는 동시에 존재한다….성경은, 아버지가 한 동안 존재했으며 그 다음 아들이 왔으며 그 다음 얼마 후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영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이 구절은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들으며, 그 영은 성도들을 강화시키며, 아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진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304-305)

 

미국의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드(CRI)는 지방 교회측이 참되게 믿는 바를 알고자 하였기에 위와 같은 언급들은 제대로 평가한 반면, 포도가지/ 차영위 또는 이인규님은 위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균형을 잡아 주는 언급들을 양태론을 감추려는 변명으로 함부로 폄하합니다. 참된 저자의 의도보다는 어떻게든 이단을 만들려는 것이 이분들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양을 손바닥으로 영원히 가릴 수는 없습니다.

 

<차영위>

 

4.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48)


--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곧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양태론 이단자들과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의 사상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했는데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의 주장이 그러할 뿐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라거나 ‘주님이 그 영(성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라는 성경 근거는 이사야 9:6, ‘그리스도 주님이 성령이시다라는 성경 근거는 고후3:17입니다. 특히 고후3:17에서 가 그리스도이시고, 영이 성령이라는 해석은 수십명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원하시면 이에 대한 상세한 자료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위격간의 기능적인 동일시로 보는 관점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교수인 개핀 교수, 박형용 박사 등도 가지고 있습니다. 박형용 박사는 이 주제로 총신대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 논문도 발표했습니다(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 28-39, 논문 전문은  http://www.djrecovery.or.kr  증거/변호와확증 7번글 참조).  이들이 양태론 이단자들이라면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개핀 교수 그리고 이분에게서 배운 후 한국내 장로교 보수 교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교수들 또 그들에게서 배운 신학생들 목회자들은 다 양태론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참고로 출처로 제시된 성령론 48쪽에는 위 내용이 없습니다.

 

<차영위>

 

어떤 지방교인은 위트니스리가 ‘주님이 그 영’즉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생명주는 그 영’이라고 말했지 ‘주님이 성령’즉 ‘아버지, 아들, 성령 할 때의 그 성령’이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같은 문장에서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같이 두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님이 생명주는 영’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령’이라는 뜻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위트니스리가 ‘그 영’을 ‘성령’과 구별하여 말하기도 하고 구별하지 않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구별하지 않고 ‘성령’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후서 3 17절의 ‘주는 곧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아들이 곧 성령’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으나(고전15:45) 위트니스리의 주장처럼 ‘아버지, 아들, 성령’ 할 때의 그 ‘성령’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성령’이 되셨다면 그것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인데 위트니스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지방교회 반박>

 

이 역시 1, 2,3격이 각기 분리된 분들이라는 선입관에 따른 지적일 뿐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삼위가 서로 상호내재하시는 삼위의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항상 전제합니다. 또한 위 이사야 9:6, 고후3:17은 두 위격 간의 경륜적인또는 기능적인동일시를 말하는 구절들입니다.

 

 

<차영위>


‘살려주는 영’은 ‘성령’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살려주는 영과 성령을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오류입니다. 그가 분리하지 않는 것은 맞는데 구별하지 않는 것은 틀립니다.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가 오류에 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말이 교묘해서 그 오류를 보기가 쉽지 않고 지적하기도 어렵습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뱀장어 같아서 잡기도 어렵고 많은 사람이 쉽게 미혹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글을 읽으면 그가 양태론자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5번을 보겠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만일 살려주는 영성령은 우리의 체험과 적용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것을 구별할 수 있다면 차영위 님에게 생명을 주어 거듭나게 하신 분이 살려주는 영인지 성령이신지 교리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자신이 있으신지요?

 

차영위 님은 지금 반복해서 교리적이고 존재론적인 방면과 체험적이고 경륜적인 방면을 혼동하고 뒤섞어서 비판을 가하고 있으십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만든 틀에 자신이 갇히고 있습니다.

 

 

<차영위>


5.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
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하나님 297)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얼음과 물과 수증기로 설명하는 것은 양태론자들이 가장 잘 쓰는 수법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이렇게 설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성령이 되어 결국에는 아버지와 아들은 이름과 역사(歷史)만 남고 실체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수증기는 과거에 물이었다. 물이었을 때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증기가 되어 더 이상 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수증기는 물 이전에 얼음이었다. 얼음이었을 때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얼음이 아니다. 지금은 얼음도 없어졌고 물도 없어졌고 수증기만 있다’ 이 논리로 하나님을 설명해 보십시오. 오늘날 아버지와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분이 됩니다.

위의 예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사람은 아주 명백히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는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시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같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現存)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제는 수증기가 된 ‘얼음’과 ‘물’을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다른 것입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 위트니스 리 설명은 세 위격의 존재론적인 방면을 설명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대신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삼위 전체가 과정을 거친 후 우리 안에 오신 것이지 일부의 오해처럼 삼위 중 1/3인 보혜사 성령만(성부와 성자는 제외되고) 오신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차원의 문맥입니다.

 

사벨리우스는 위트니스 리와 달리, 삼위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부인한 채 위와같은 설명을 함으로 양태론자가 된 것입니다.

 

위 문맥의 소제목은 하나님이 삼일이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고후 13 13절이 말하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 이 셋이 어떻게 우리의 누림과 체험 안에서는 각각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맞물려 있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입니다. 우리 중 누가 고후13:13이 말하는 내용에서 어디까지가 성부의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성자의 은혜이며, 또 무엇이 성령의 교통인지를 칼로 무우 자르듯 구별하여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비록 양태론자가 쓰는 예를 들었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될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 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 26)

 

위 글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또 성자가 성령이 된 후 성부와 성자는 사라지고 성령만 계신다고 믿는 사람은 결코 할수 없는 고백입니다. 오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면 모두를 균형있게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수 있는 설명입니다. 그것도 최삼경 목사를 두둔하기 위하여 쓰여진 자신의 논문에서 우리 안에는 성부와 성자가 제외되고 보혜사 성령만(1/3) 계신다고 주장한 차영배 교수와 같은 분들의 오해된 신론을 바로잡는 목적이 있는 문맥입니다.

 

 

<차영위>


그들은 진리의 양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태론자라는 정죄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양태론을 주장하면서 겉의 말로는 정통삼위일체론 뒤에 가서 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정통삼위일체론자로 착각하게 됩니다.

양태론자라는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할 때 ‘얼음, , 수증기’ 논리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들의 술수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래의 수박 비유에서도 위트니스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트니스리는 위 인용문에 바로 이어서 “…많은 예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도 그 자체로는 이 실체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창조에서 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예를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이나 차영위(포도가지)님은 이런 경고의 말은 쏙 빼고 의도적으로 바로 윗부분까지만 인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래야 수증기 비유 등을 들어 양태론으로 몰아가기 쉬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고의적으로 왜곡시킨 것입니다.


 (차영위)

 

6.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


-- 위와 같은 비유도 양태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비유입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수박이고 아들은 조각난 수박이고 성령이 수박 즙이라면,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들과 성령이 계시지 않았고, 아들이 계실 때는 아버지와 성령이 계시지 않았고, 성령이 계시는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위의 문단에서 그는 분명히 ‘없어진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온 가족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소화된 수박은 더 이상 수박이 아닙니다. 통수박도 없어졌고 조각난 수박도 없어졌고 수박 즙도 없어졌습니다. 사람 속에 남은 것은 영양소와 배설물입니다. 그것을 두고 누구도 ‘수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배설물도 없어지고 양분은 사람의 일부분이 됩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성령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 후에는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어지고 사람의 영과 합해진 ‘한 영(고전6:17)’만 남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입니다. 그의 이렇게 빗나간 ‘수박신학’에서 신성을 모독하는 참람한 ‘신화(神化)교리 -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을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신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도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이 같은 그의 주장이 한 면으로는 맞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완전히 틀렸습니다. 이것은 한 면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 보아도 맞지 않고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수박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양태론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7번은 성육신에 관한 글인데, 여기서도 위트니스리는 양태론자들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 포도가지님의 지적을 읽으면 무슨 대단한 문제가 있는 것같지만, 비유로 꼬투리를 잡은 후 불필요하게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위 비유 역시 전체 하나님이 아니라 1/3하나님만 우리 안에 계신다고 굳게 믿는 최삼경목사, 이인규님, 차영배 교수 같은 분들의 분리된 삼위 사상을 바로 잡기 위한 일종의 충격 요법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위트니스 리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비유가 아니라 평이한 말로 고백할 때, '우리 사람 안에 성부와 성자는 안 계시고 성령만 계신다'고 했다면 위 포도가지 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그야말로 공식에 맞아 떨어지는 양태론인 셈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다. 즉 위트니스 리는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우리 안에 계신다'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위트니스 리를 강하게 비판하는 분들의 글에서 제시함으로 위 포도가지 님의 과장된 확대해석이 기우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세분은 하나이시다(64-신약2, 175).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생각은 순식간에 또 바뀌어 세분(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고 한다. "오늘날 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 우리는 세분이 분리되어 하나가 아니시라고 믿지 않는다.(64-신약2, 176)" (차영배, 위트니스 리의 삼일론 논박, 교회와 신앙 2001 10월호,132)

 위 인용문의 요지는 '우리 안에 세 인격들의 하나님이 계시지만 이 셋은 '분리된' 셋은 아니며 우리의 매일의 체험에서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생각이 순식간에 바뀐 것이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성령 안에 아들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실 때 우리 속에는 세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즉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말처럼 '아들 하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만 계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 안에도 아들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계시고...."(최삼경, 교회와 신앙 97 8월호, 158)

위 두 개의 반대자들의 증언 자료들은 위트니스 리는 수박비유를 통해 성부, 성자가 우리 안에 안 계시고, 1/3위격인 성령만 계신다고 말한다.’ 포도가지님의 가설은 가설일 뿐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사실이 아닌 이런 저런 말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해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차영위)

7.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


-- 여기서 위트니스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 그의 표현대로라면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성경을 얼마나 왜곡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위의 문장에서 그는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한다.’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요한복음 1 1절을 볼 때 ‘말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아들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인 하나님이 육신 된 그분에 대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합니다. 육신 된 그분이 ‘독생자’ 즉 ‘아들‘이 아닙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말씀’이 ‘아들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여기서 억지를 부립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부분을 첨가하여 ‘온전한(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함께 계셨던 것은 사실이나 이 사실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말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하며, 성경이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고 말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성경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아들이 육신이 되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도 육신이 되셨고, 성령도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지 ‘아버지’가 육신이 되거나 ‘성령’이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구별이 없을 때 결국에는 ‘성부고난설’까지 주장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래 8번의 그의 주장은 더욱 심각합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비판할 때는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 인용해야 합니다. 위트니스 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고 말했지, 성부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하셨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부와 성령이 제외된 1/3위격인 아들만이 아니라, 아들이 성육신하셨지만 그 아들 안에 구별되나 분리가 되지 않는 성부와 성령이 포함된 하나님 전체가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견해는 그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For in him dwelleth 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 bodily)(2:9)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성경은 신격의 일부(예를 들어, 아들)만이 아니라 신격의 모두가 육체로 거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육신의 주체를 말할 때는 다음과 같이 삼위의 제 2격이 육체를 입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단지 그 제 2격이 1/3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한( 10:5) 성육신으로 보내셨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193 )

(차영위)


8.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아래 문장들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


-- 1)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해석할 필요도 없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합할 때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위트니스리는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과 합할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를 떠나 믿는 사람에게 오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더 이상 보좌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 황당한 주장이며 성경 진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난해한 어떤 부분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사실을 시인하는가 부인하는가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위트니스리는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과 합해진 오늘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방교회 반박>

 

우선 지적할 것은, 원문에는 전통적인 설명’ ‘삼신론이란 말에 따옴표가 없습니다. 더구나 ‘(아래 문장들은)’ 이란 말도 원문에는 없습니다. 포도가지 님(또는 이인규님)이 임의로 써 넣은 다음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위 인용문의 소제목은 삼일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입니다. 따라서 위 내용은 문맥이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삼일성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을 소개하는 문맥이지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한 가지 해명만으로도 마치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믿고 말한다고 착각하는 포도가지님의 위 비판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아래 위트니스 리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16:32)(위트니스 리 ,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 26)


 (차영위)

“2) 위 문단에 들어있는 위트니스리의 다른 비판을 살펴봅시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6:57, 14:16.
<time hour="15" minute="26">15:26</time>).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위트니스리는 이 말씀을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다만 니케아 신조라고 말합니다. 그가 위의 예수님 말씀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렇다면 그는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어떠한 악행입니까? “

 

(지방교회측 반박)

위 비판 역시 저자의 의도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말꼬리를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격입니다. 저자의 의도는 각 위격을 삼위 전체로 보지 않고 각각 분리된 1/3으로 보는 사상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라든지,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라는 대목에서 알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가 (하늘 보좌에 계심과 동시에) 이 땅에 오신 아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8:29). 오늘날 대부분의 믿는 이들 특히 한국의 이단 감별사들은 이런 방면의 인식이 크게 결여되어 있음으로 이런 오해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차영위)


“3)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3:15)’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타 여러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들이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성경의 계시가 아니고 니케아 신조란 말입니까?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트니스 리는 위 글에서 포도가지님의 지적처럼 기도하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만 기도하고, 아들이나 성령님에게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이런 점에서 다른 두 위격들에대해 대단히 미안해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단지 제 1격만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포함된 삼일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 개혁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의 지적입니다.

 

이런 균형잡힌 삼위일체관이 전반적으로 특히 한국 교계 내에서는 크게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포도가지님부터 이런 관점이 결여됨으로 반복적으로 오해된 비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포도가지님보다 상식이나 영적 분별력이 없다고 전제하는 그 자체가 스스로 높은 위치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거나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악행이니 터무니 없다느니 라고 비판부터 해 놓고 보기 보다는 이 부분은 어떤 의미인가 라고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들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차영위)


4) 위트니스리는 ‘구별’을 모두 ‘분리’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런 혼동 때문에 그는 양태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경적인 실행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는 태도를 향해 ‘분리’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는 ‘구별’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가 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향해 ‘삼신론에 가깝다’고 정죄하는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에는 이와 같은 오류의 체계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직접적인 말씀조차 무시하고 대항하는 위트니스리의 가르침을 무조건 옹호하는 지방교회는 과연 성경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인지

 

(지방교회측 반박)

 

위트니스 리처럼 구별분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우선 그는 에베소서 1장을 설명할 때 선택과 예정을 성부에게 돌리지 성자나 성령께 돌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속은 성자의 일이며, 인침과 보증은 그영의 일입니다. 이 셋을 혼잡하지 않습니다.

 

또한 반대로 그가 양태론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은 삼위를 구별하되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분리 불가를 참으로 믿는다면 어느 한 위격(성자)이 성육신 하셨을 때 다른 두 위격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일 것입니다. 또한 어느 한 위격(그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실 때 역시 다른 두 위격이 함께 내주하심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제 1격만이 아니라 <삼위 전체>라는 로레인 뵈트너의 지적은 삼위의 분리불가를 믿는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서두에서 소개드렸듯이 어거스틴을 포함한 정통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각각의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통에 해당되는 삼위일체론이 한국에만 오면 최삼경목사, 이인규권사, 차영배 교수, 심지어 포도가지/차영위 님에 의해 반복적으로 양태론으로 정죄되는 이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차영위 님은 자신도 틀릴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로 서두에 소개드린 정통 신학자들의 말들과 자신의 현재의 삼위일체관을 비교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과 그리스도


유향의 동산 2013-04-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7082.html

율법과 그리스도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기여하면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여러 방면에서 답변을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4:4-5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셔서 우리로 아들의 신분(휘오데시아)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숙고할 때 이 아들의 신분을 갖는 것이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긴 과정임을 알수 있습니다. 1) 먼저는 구속이 필요하고, 그후 2) 생명의 거듭남(1:12), 3) 거듭남 이후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사는 단계를 갖는 생명의 성숙(8:14), 4) 우리의 몸의 구속 (8:23)에 이르러 최종완성됩니다. 혹자는 이것을 완전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7:25).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은 맏아들을 통해 그를 닮은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로마서 16개 장의 압축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휘오데시아 즉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로 오신 아들자신이 우리 안에 더 계시됨으로 우리가 그분을 생명과 생명의 풍성으로 매일 받아드리고, 그리스도 아니면서 우리를 점령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배설물로 여겨 씻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말씀이 빛을 비추게 하고, 그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이 우리 존재를 통과하게 해야 합니다(5:26).

 

오늘 아침에 주님 앞에서 이 주제를 묵상할 때 이것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 율법이라는 것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율법은 631가지 공식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 혹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세운 기준들이 그와 맞지 않는 나와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율법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그리스도 자신을 놓치게 하는지를 알게 하는 다음 세 구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율법아래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여(ye that desire to be under the law)(4:21)

 

-그대가 아는 대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은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21:20)

 

-게바가할례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떠난 일입니다. 나머지 유대인들도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휩쓸렸습니다(2:12-13).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그 한분 만을 앙망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며, 그분과만 깊이 연합하고, 그분을 살아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관심해야 할 유일한 한 가지 입니다. 자기를  잘 보이려는 노력은 다 헛것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6)-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진리의 언덕 2013-03-01 / 추천수 1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5047.html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6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저기요. 제 친구 한명이 지방교회를 다닙니다. 한번은 그 친구와

함께 지방교회 나가는 분들과 식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기도를 한 사람만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하더라구요.

좀 생소했지만, 그것은 이해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안 붙이는 것은 왜 그래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생략하기도 합니다.

 

 -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안 한다니요? 성경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나요?

 

   아 예, 기계적으로 하지 않고 융통성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안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만 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영의 인도를 따라서 융통성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

성경구절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전후문맥을 잘 보면 기도할 때

항상 그런 말을 끝에 붙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통교단에 속한 곳은 거의 다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지 않나요? 가능하면 이질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같은데요.

 

맞습니다. 저희도 핵심진리에 반하거나 죄 짓는 실행만 아니라면

덕이 되는 쪽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성경 문맥의 의도와 다르게 실행할 경우, 적극 동조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더군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붙이는 것이

해당 성경 문맥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는 취지의

말씀은 요한복음14:13-14, 15:16, 16:23-24 에 있습니다.

이 본문의 문맥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요, 우선 기도시 맨 끝에 그런 후렴구를 꼭 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글에 검색을 해 보니 의견이 나뉘더군요.

 

어떤 분은 그렇게 안하면 기도에 효력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 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꼭 기도할 때마다 그 후렴구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융통성을 두는 쪽도 있었습니다.

 

-정통교회 나가는 분들 중에 꼭 안 붙여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 두 가지 예를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한 분은 고신대 대학원

교수로 계신 변종길 교수님입니다. 이 분이 <크리스챤 Q&A >라는

곳에서 답변하신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안 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칼빈의 기도에 보면 이런 문장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http://www.christianqna.org/bbs/board.php?bo_table=z3_3&wr_id=829

 

다음은 이광호 목사님 답변 중 일부인용 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그런 후렴구로 마무리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후렴구를 붙이지 않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오용하는 것이거나 도용하는 것이 되며, 지나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http://www.siloam-church.org/lecture/sesin/sesin%20195.htm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기도 끝에 그런 후렴구를 붙이는 것만

듣고 자라와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줄 알았지 솔직히 이 문제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정통 교회 신학자가

심지어 칼빈 기도문에도 그런 후렴구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렇게 안 하면 이단 뭐 이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사실 성경에 쓰여진 기도문들에도 그런 후렴구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주기도문도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6). 그리고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심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는 심지어

아멘도 없습니다(24-30).

 

또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에베소서에서 두 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장의 기도(17-19) 3장의 기도(14-21)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없이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

 

 - 그런데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기도라고 하는 목사님도 있더라구요.

 

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런 논리라면 위에서 소개드린 성경본문들도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할 때, 누구를 생각하나요?

삼위의 1격만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레인 뵈트너라고요

개혁신학을 공부한 분들은 다 아는 정통 신학자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성부만 배타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성자, 성령이 포함된 <삼일 하나님>(Triune God) 전체를 가리킨다

고 말합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니까 이 분이 한 말의 영어원문을

직접 소개해 보겠습니다.

 

“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107)   

                  

사실은 이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은

셋으로 구별되시지만 결코 분리된 분이 아니니까요. 한국교계

내에는 무의식중에 세 하나님들을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인데, 뭐 삼위일체도 나오고 좀 복잡하게

되돌아가는 것같아 좀 그렇긴한데좀 정리를 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를 꼭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그 구절의 전후 문맥이 의미하는 내용이 기도에 담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뭐 이런 것인가요?

 

맞습니다.

 

-그러면 내 이름 안에서라는 문맥이 뭘 의미하나요?

 

우선 요14:13절만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요?

 

또 여러분이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내 이름 안에서라는 말이 중요한데, 이 말은

주님의 인격(이름)과 연합된 상태에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18:20두세사람이

네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위 이름 안에(안으로)’에 대한 회복역 성경 각주 취지는

집회에 올 때는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문제들과

일들에서” (나와서) “그분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는 상태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해서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생각은 다른 것에 빠져있지 말고 거기서

나와서 모임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위 요14:13만 봐도

나의 필요, 나의 선호와 갈망을 이것 저것 구한 후 끝에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첫째 다 이뤄

지지도 않고”, 둘째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지도

않음으로 위 본문에 따른 기도가 아닙니다. 대신에 주님의 뜻과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의 인격과 연합되어 마치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직접 기도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면,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도 되고 아버지 하나님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기도를 하려면 쉽지는 않겠네요.

예수님과 하나되는 상태라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에 맞춰

기도하라는 말씀이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 저희의 기도생활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늘 배우고 있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네요. 나중에 위에서

소개해 주신 본문들을 좀 차분히 살펴볼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실 후렴구를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진리 자체는 깊은

연합을 전제한 것이라 신약의 핵심진리에 해당될 수 있지요.

사실 요한복음 14-16장은 그런 연합사상을 담고 있어서

겉보기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저도 사실 이런 교제가 쉽지 않은데, 무익한 변론으로 빠지지

않고 좋은 대화로 마무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아타나시우스에 있어서의 신격화


신화관련 자료 2013-02-2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4942.html

본 논문은 고신대학교 김경식님의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의 신격화>라는 신학석사 논문입니다.


아타나시우스에 있어서의 신격화


1. 아타나시우스에 있어서의 신격화의 의미


1-1) 신격화에 대한 분석

여기서는 우선 아타나시우스의 저술을 분석해 보고난 후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그의 저술에서 신격화의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들의 전후 문맥을 통하여 신격화의 말이 사용된 의미들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그 가(말씀)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신격화 되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가 자신을 육신으로 나타내신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개념(idea)을 받게 위함이다. 그리고 그가 인간들의 모욕을 참으신 것은 우리가 불멸성을 상속받게 하기 위함이다.(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54, 3, in NPNF 4, 65.)


문 맥상 여기서는 ‘신격화되어짐’과 ‘하나님의 개념을 받는 것’, 그리고 ‘불멸성을 상속받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뒤의 두 문장은 첫문장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수 있다. 성육신의 이중 목적이 신격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격화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또한 불멸성을 상속 받는 의미를 내표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우선적으로 성육신과 신격화를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그것은 성육신은 곧 성자가 신격화를 일으키는 근원, 주체가 됨을 보여준다.


그 는 그의 낮아지심에서 승격하신 것이 아니라, 되리어 그 자신이 승격이 필요한 것들을 승격시키셨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들의 승격을 효력있게 하기 위해 내려오셨다면, 그는 하나님과 아들의 이름을 보상으로 받지 않았다. 되리어 그 자신은 우리를 아버지의 아들로 만드셨고, 그 자신이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들을 신격화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된 인간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셨으며, 우리를 위해 신격화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1, 39-39, in NPNF 4, 329.)


이 구절은 철저하게 성자의 신성을 옹호한다. 곧 그는 어떤 수여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하나님셨음을 강하게 변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자가 우리를 신격화하는 것이 아버지(성부)의 아들됨을 만드는 것으로 병행하여 언급되고 있다. 이후에도 신격화와 입양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말씀)가 인간의 육신을 취하심으로 마치 세공자처럼 그것(인성)을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다.그는 그것(인성)을 자신 안에서 신격화하셨고,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그를 닮음으로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만일 피조물과 결합하거나 아들이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사람은 신격화되지 못햇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육신을 입으신 말씀이 본성적으로 그리고 참된 말씀이 아니라면 사람은 아버지의 앞으로 데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본성상 인간의 육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죄와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만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말씀이 본성상 아버지로부터 나오지 않으셨고 참으로 그에게 적절하지 않으셨다면, 그(인성)는 신격화 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연합은 그(말씀)가 본성상 사람(인성)을 본성상 신성을 가지신 그(말씀)에게 연합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그(인성)의 구원과 신격화가 확실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다.(Ibid, 2, 70, in NPNF 4, 386)


우 선 그는 우리의 신격화를 위해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신격화를 ‘새롭게 함’과 동시에 ‘그를 닮음’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필수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점에서 신격화는 결코 최종적인 단계에서만 도달하는 어떤 상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격화를 아버지의 앞으로 데려감으로, 그리고 죄와 저주로부터의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곧 죄로부터의 구원과 신격화가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동방의 교부들이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하여 등한히 여기고 있다는 주장을 무효화 시킨다. 아타나시우스는 이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다만 우리의 구원을 그러한 것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격화라는 보다 넒은 의미에서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아타나시우스)는 성자의 신격화를 역사를 ‘신성하게 하는것’과 동일하게 보기도 한다.(Ibid, 3, 39, in NPNF 4, 415. "...and that He might hallow and deify them..."))


“ 잠언에 나오는 ‘그(하나님)가 창조했다’는 우리가 온전하신 말씀이 본성에 있어서 창조물이라고 인식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그분(말씀)은 창조된 육신을 취하셨고, 하나님은 그을 우리를 위하여 창조 하셨다는 것은, 그를 위해 창조된 육신(인성)을 예비하신 것이다. 쓰여진 것처럼 그분 안에서 우리는 새롭고 신격화된 존재가 될 수 있다.”(Ibid, 2, 47, in NPNF 4, 374.)


그는 ‘새로워짐’과 ‘신격화됨’을 같은 의미로 논하기도 한다. 이 말씀은 잠언8장22절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에 대한 해석의 문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변호의 흐름이다. 여기서 특별한 것은 성부 하나님이 신격화를 위한 보다 근원적인 입장에서 준비하심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준비하심인 성자 안에서 새로워지고 신격화 될 수 있다.


“말 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모두를 위하여 이 몸을 바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성령에 참여함으로, 신격화 되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이 선물은 그 자신이 우리의 창조된 육신을 입으심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이 사실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우리의 이름을 끌어낸다. 그러나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래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듯이, 주님도 비록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도 열등한 하나님이 아니셨다. 왜냐하면 그는 육신의 포장에 의해서도 열등해지시지 않고 되리어 그것(인성)을 신격화 시키고, 그것에 불멸을 건네셨기 때문이다."(Athanasius, Defence of the Nicene Definition, 3, 14, in NPNF 4, 159.)


여 기서도 성육신의 맥락에서 신격화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는‘그의 성령에 참여함’(partaking of His Spirit)이라는것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신격화가 성령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신격화를 ‘선물’로써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사람’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으로 설명된다. 곧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신분적인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단 한마디로 언급하는데 곧 ‘성령을 받음으로’(by receiving the Spirit)라는 것이다. 이 성령의 신격화의 사역은 그의 서신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만 일 우리가 그분의 도우심으로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성령은 결코 피조물에 속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고 있음이 명백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분 안에 있으면 결국 신격화 되는 것이다. 그분이 신격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을진대 누가 감히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Athanasious, The letters to Serapion, 1, 23, 함세웅, 아타나시우스 4, 59에서 재인용)


신 격화는 기독론과 성령론의 문제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신격화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옹호의 견지에서 비교적 언급되고 있다. 곧 신격화 성령을 받은 우리일찌라도 우리의 본성의 변화는 아니라는 점이 부차적으로 언급되고 있다.(이점은 Athanasious, Against the Arians, 1, 9, in NPNF 4, 311.에서도 언급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성부와 한 본질에 공존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너희들은 하나님이다‘고 말한 자들은 말씀에 참여함으로 성령을 통하여 성부로부터 이 은혜를 받는다“ 유해무, 삼위한님의 사역으로서의 신격화, 218에서 재인용)

이 것은 부차적으로 언급되지만 매우 중요하다.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신격과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어떤 본성적인 동질, 곧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동일본질)를 주장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하르낙과 리츨의 신격화에 대한 비판이 부당한 것임을 알수 있다.


아 타나시우스의 신격화는 어떤 단계적인 상태에의 진입이나 물리적인 변화, 혹은 최종적으로만 획득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됨의 시점에서 신격화는 시작되는 것으로 신분상의 변화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론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실제적인 변화임을 동반하는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되지않으며, 그는 먼저 자신의 몸을 신격화 시키신다.(Ibid, 1, 42, in NPNF 4, 330. "He deified that which He put on, and more then that, 'gave' it graciously to the race of man")


그가 사람이 되심으로 그는 우리를 자신 안에서 신격화할 수 있으며, 그는 동정녀로부터 나셨는데, 이는 우리의 부정한 세대를 자신에게로 양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부터는 거룩한 종족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또한 베드로가 쓴 대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Athanasious, Letter of Adelphius, 4, in NPNF 4, 576)


아타나시우스는 신격화의 성경적인 근거로서 벧후1:4을 들고있다. 말씀의 성육신을 통한 신격화의 사역은 우리가 ‘거룩한 종족’이 되게 하는 것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자’가 되게 하기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격화‘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황홀경이나 자아의 상징, 혹은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적인 성품으로 거룩한 종족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