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면을 다루는 법


유향의 동산 2012-11-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2728.html

1.

믿음 생활은 1차 적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드는 삶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께서 지체들을 통해 권면하시기 때문에

교회 생활 안에서 다가오는 지체들의 권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몸의 지체들을 통해 오는 권면은 크게 두 종류로 대비됩니다.

 

하나는 주님을 근원으로 하며 몸을 세울 목적의 권면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가 근원이고 몸을 무너뜨리려는 권면입니다.

 

몸을 세우려는 권면은 당연히 기꺼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몸을 망치려는 목적으로 마귀로부터 온 권면은

단호히 거절함으로 흔들림없이 믿음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2.

다마스커스 회심 직후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한 권면은 주님을

근원으로 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몸 안에서 그리 두드러진

지체가 아니었지만, 주님은 사울을 다루실 때 아나니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행9:10).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제 무얼 주저하십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침례를

받고, 그대의 죄들을 씻어 버리십시오"(행22:16).

 

사실 주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사울이 제일 싫어했고 그것때문에

믿는 유대인들을 핍박했던 것이었습니다(행9:14, 21). 그런 그에게

주님 이름을 부르라는 아나니아의 권면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선호를 부인하고 지체의 권면을 받고 순종했을 때

사울은 그의 삶에서 큰 전환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이와 달리,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권면은 마귀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 삼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듣는 순간,  베드로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한 쪽으로 가서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며 책망하기

 시작하였다" (마16:22).

 

얼마 전에 '주님을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로

고백했던 바로 그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께

절대 죽지 말라는 강한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리도 없지만 만일 주님께서 이런 권면을 받아들이셨다면,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생명으로 사람 안으로

들어오셔 내주하시면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고,사람을 통해 권위로

다스리시려는 그분의 경륜은 결코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 두 가지 대조되는 내용의 권면은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

모양만 약간씩 다를 뿐 반복적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맑은 생각을 가진 영적 분별력을 토대로 권면 받을 것은 기꺼이 받고,

거절할 것을 단호히 물리치는 것은 영적 전쟁이고, 죽고 사는 일입니다



참된 종말론은 무엇인가?


진리의 언덕 2012-11-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2582.html
1.

<오늘날의 교회의 모든 문제는 새예루살렘을 보지 못한 것에서 온다>

라는 말을 한 신실한 성경교사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 당시는 '새예루살렘'(히12:22, 계3:21, 21:2, 9-10) 에 대한 빛이 충분치

못했고, 온갖 교회 안팎의 문제들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깊이 고려해 본 적이

없었을 때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되돌아 볼 때, 참 계시가 있는 말이었음이 느껴집니다.

 

먼저 교회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주님의 몸이 교회라고 말합니다(엡1:23).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우리가 가득하고 주님의 몸 안에는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만이 충만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아닌 것이 교회 안에 들어왔고,

원래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님에도 교회의 일부인양 여겨질 때 그 '이 물질'은

주님의 몸 안에서 두고 두고 고통과 문제를 야기시켜 왔습니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나, 잘 맞지 않는 틀니를 해 넣었을 때와도 같습니다.

 

또한 몸된 교회의 최종완성인 새예루살렘은 개인이 아니라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단체적인 유기체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생활에서 이 단체의 방면은

소홀히 여겨지고 개인의 영성이나 기능만 두드러질 때, 다른 구성원들과의

부조화, 즉 시기, 질투, 경쟁, 우월감, 열등감 등이 교회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 몸 안의 암세포처럼  영적인 몸 안에서도 지나치게 두드러진 지체는

많은 경우 주님의 몸 안에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육신의 몸도 그 원리를 잘 알아서 관리하면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의 최종완성인 새 예루살렘의 원리를

잘 알아서 현재의 몸 안의 생활에 적용하면 믿음생활이 건강하게 됩니다.

 

문제는 거의 대다수의 믿는 이들에게 '새 예루살렘' 진리가 가려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종말론은 단지 무대배경에

불과한 <새 하늘 새 땅>은 큰 관심거리지만, 정작 그 안의 주인공인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소홀이 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것을 봅니다.

 

2.

오늘 아침에 몇분 지체들과 에베소서 4장을 읽으면서 '실재'와 '거짓' 그리고

'몸의 건축을 관심하는 것'과 '소홀히 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1) 실재(the reality, 알레데이아, 225) 와 거짓(the lie, 퓨스도스, 5579)

 

계시록 12장을 보면 <옛뱀 큰용 마귀 사탄>이 온 세상을 속이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9절). 이 부분이 참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사탄은 지금 무엇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 것인가?

 

어느날 성경을 보다가 빛이 왔는데, 바로 이것이다 싶었습니다.

그것은 '실재'를 놓치고 '거짓 것' 인생을 쏟아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21은 이 실재 즉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고 선포합니다.(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실재이고 다른 것은 다 그림자입니다.) 그후 본문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말한 다음 25절에서 "그런즉 '거짓된 것'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짓된 것은 말뿐 아니라 '본성에 있어서 거짓된 모든 것'을 가리킴)

 

이것을 본 사도 바울은 유익하던 것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것(거짓된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실재 때문에)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빌3:8).

또한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to gain Christ)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거짓 것을 버리고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얻고 또

얻어 마침내 거짓 것은 다 사라지고 실재되신 그리스도로만 충만케 된 유기체가

주님의 몸이자 새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을 보았다면 썩어져가는 옛사람에게나

가치있는 것들을 새사람인 교회 안에서도 얻으려고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2)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몸 의식(Body consciousness)

 

어떤 사람이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는 비싸서 못 먹던 오렌지가 흔하니까

(그 당시 한 자루에 4불) 매일 오렌지를 먹었답니다. 그 결과 얼굴색깔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물론 그후 양을 줄이니까 얼굴 색이 정상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 몸은 이처럼 어느 하나도 따로 놓는 것이 없이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롬12:5). 몸 안에서 어느 한 사람의

상태나 움직임은 불가피하게 다른 지체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몸 의식'이 없이 각자 자기 입맛에 맛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그 본인도 영적

성장이 더딜 뿐 아니라 다른 지체들(몸)에게 손상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따르거나 생명이 성숙하려면 자아를 부인해야 하는데, 몸의식이

없으면 자아부인은 그렇게 철저하거나 깊을 필요를 못느낍니다. 그러나 몸의식이

있으면 어느 하나  본인 스스로 할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단계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분명 속박이지만, 그러나 다른 각도로 보면 참된 해방이요 구원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몸의 건강은 나몰라라 하고 혀끝의 감각만 생각한다면, 어떤

음식을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생각한다면

입에서는 쓰지만 그것을 삼킵니다. 몸을 위해 따끔한 주사도 맞습니다.

 

3.

오늘 아침에 이런 각도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볼 때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요!

 

"각자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엡4:25).

 

"어떤 나쁜 말도 여러분의 입밖에 내지 말고, 오히려 듣는 사람들을 건축하는데

좋은 말을 필요에 따라 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하십시오(29절).

 

우리가 가고 있는 끝(새예루살렘)의 광경을 보았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그 끝에 없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나무, 풀, 짚). 또한 그 끝에 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지금 이 때에 부지런히 수고하여 얻어야 합니다(금, 은, 보석)(고전3:12).

 

이처럼 새예루살렘의 이상을 따라 오늘을 사는 것이 참된 종말론입니다.

 



육체란 무엇인가?


진리의 언덕 2012-10-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2388.html

성경에 쓰인 영적인 단어는 평이하면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생명, 구원, 믿음, 육체..이런 말들은 어려운 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렵습니다. 오늘은 육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문제제기

 

로마서를 공부한 적이 있으신 분들은 '육체'(사르크스, 4561, flesh)라는

단어를 묵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안 좋은

말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와 연관이 있기도 합니다. 관련 구절 몇 곳을

인용하여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육체에 생각은 죽음이지만(롬8:6).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8:13).

육체에 둔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8:7).

육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습니다(8:8).

육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 할수도 없기 때문입니다(8:7하).

 

육체가 뭐길래 육체에 생각을 두거나 육체를 따라 살면, 즉사할까요?

(물론 영적으로 죽는 것이지만) 왜 육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

(이 말이 보통 말입니까...)가 될수 밖에 없는지, 육체는 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2. 육체의 정의

 

성경에서 육체는 이중적으로 정의됩니다. 즉 1) 사람의 영, 혼, 몸 중에서 몸만

관련된 개념(롬7:17-18)과, 2) 타락한 사람 전체(갈5:19)인 경우입니다.

 

먼저 바울은 로마서 7 장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을 것을 할 경우도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라고 실토합니다(17절). 자기 안에 (단수의)'죄'(SIN)가

들어 앉아 있다 식의 바울의 표현은 매우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바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은 입장

입니다. 이제 조금 복잡해지는데, 왜냐하면 바울은 "내 안에 죄가 거한다"라고

말한 후 바로 다음 구절인 18절에서, '내 안에'를 '내 육체 안에'라고 둘을

동일시 해버립니다. 따라서 육체의 첫 번째 정의는 '타락한 사람의 몸 '입니다.

이것을 최대한 단순하게 도식화 하자면 육체= 몸+죄(인격화된 단수의 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로마서 7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인격화 된 이 <단수의 죄>(롬5:12)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죄는 '수수께기'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인간론, 223).)

 

두번째 육체의 정의는 '타락한 사람 자체' 또는 '옛아담의 표현'입니다.

갈 5:19는 '육체의 일들'이라는 표현을 했고, 그 세세한 항목들을 21절까지

나열합니다. 타락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답답하고 더러운

것들이 다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육체의 일들은 이방인들(불신자들)의 존재와 삶의 표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참된 기독교인들도 생각 속에서는 육체와 영을 수시로 넘나

듭니다(롬8:6). 그야말로 하루에도 몇번 씩 생사를 오고 가는 것입니다.

 

3. 육체와 영

 

그렇다면 이러한 육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기는 한 것인지요?

물론 있습니다. 먼저는 '육체가 육체를 낳는' 일들이 반복되는 속에서

주님을 믿어 (사람의)영이 그 영(the Spirit)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요3:6).

 

즉 그영이신 주님을 우리의 영 안에 영접해 드림으로써, 우리가 참되게

거듭나서 그분과의 비밀한 연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고전6:17).

이것이 육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첫 단추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이 상태 까지 경험하신 분들은 그 다음에는 아래 세 구절의 의미를

잘 깨달아 알고 그대로 실천하시면 됩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내가 말합니다. 그 영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욕망을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갈5:16)

 

- 육체에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8:6)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8:13).

 



초대교회의 특징(2)-사도들의 교통


진리의 언덕 2012-10-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2387.html

1.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 2010년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

약 4만 1천개의 기독교 교파 (교단)들이 있다고 합니다.  원래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에는 단 하나의 교회만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단 하나의 교회가 약 4만 개의 교파들이 된 뒷 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분열의 요인은 바로

초기 교회의 특징인 <사도들의 가르침>을 주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바로 여기에서 수 많은  서로 <다른 가르침들>(딤전1:3)이 파생된 것입니다.

 

가르침 즉 교리가 다르면, 그에 따라 이어지는 '교통'(교제, 사귐, 코이노니아,

2842)의 범위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무리를 짓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분열'이 생겼습니다.

 

이와 달리 초기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의 요체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삶속에서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실행함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즉 그분의 죽음, 즉 십자가로 우리의 옛사람을 끝낸 실재를 산 것입니다(롬6:6).

오늘날 모든 분열의 씨앗은 바로 이 끝난 옛사람, 자아, 의견이 처리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부활의 실재 안에 있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나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인격이자 신성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

머물 때, 우주적인 하나의 교통(fellowship)에 참여하고(요일1:3), 또한 하나의

교통을 확대합니다.

 

이 <사도들의 교통>(요일1:3)은 부활 영역 안에서의 공통참여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 많은 전구들 안으로 전기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전구들은

각각 떨어져 있어도 동일하게 환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계시록22:1이 말하는 보좌로부터 나온 하나의 강의 흐름 안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이러한 전구를 통한 빛의 밝기가 강렬했습니다. 또는 신성한 강의

흐름이 어디든 적심으로 그들은 신성한 물로 촉촉히 적셔져서 기쁨과 역동성과

하나의 간증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신성한 흐름이 막히거나 수 많은 갈래로 쪼개지다보니,

성도들의 목은 타들어 갑니다. 그 결과 도처에 까칠한 '가시와 엉겅퀴'만 무성합니다. 

어느덧 기쁨이 사그라들고 이런 저런 종교적인 의무만 어깨를 짓누를 때가 많습니다.

원래 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들의 교통 안으로, 사도들의 가르침 안으로!

 

2.

거의 모든 다른 가르침도 사도들의 가르침처럼 성경이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는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일까요? 그것은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다른 가르침은 성경을 연구의 대상, 분석의 대상으로 생각한 결과라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한 인격을 만나고자 하며(요5:39-40), 또 다른 면에서

성경을 먹을 것 즉 음식과 생수로 대한 결과입니다.

 

주님은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요6:57).

 

이것을 고작 일년에 몇번 하는 '성만찬'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밖의 어떤

것을 나의 존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실 때(요10:10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분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더 풍성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으니(요6:63)...

 

사도 바울은 몸의 지체들 된 우리가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받은 후

해야 할 한 가지는 ' 한 영을 마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12:13).

 

이처럼 '주님'(나)을 '먹고', '령을 마심'으로 삼위 하나님이 생명과 거룩과

빛으로 우리 안에 받아들여진 결과는,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의 실재인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실재 안으로 이끌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교통'의 실재 안에 머물게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교통을 갖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통(사도들의 교통)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요일 1:3).

 

아무리 4만 개 이상의 교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혼잡해도 우리가

주님을 먹고, 마심으로 그분과 깊은 연합을 이룬다면, 위 본문이 말한

사도들의 교통 안에 머물 수 있고, 초대교회의 실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많은 방황이 있었고 머리로 따지고 분석하기를 즐겨하던 자에게, 이러한

신성한 빛과 교통의 실재 안에 참여토록 긍휼로 대해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1)-사도들의 가르침


진리의 언덕 2012-09-2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2229.html

1.

요즘 하두 교회라는 곳들이 실망을 안겨주다 보니, 일부에서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소위 초대교회(또는 초기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두 곳의 말씀들로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교통 안에 꾸준히 머물며,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였다"(행2:42)

 

"그들이 날마다 한마음 한뜻으로 성전에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떡을 떼기를 꾸준히 계속하고, 기쁨과 단순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은혜를 얻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시어 합치셨다."

(46-47절).

 

앞의 말씀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떡뗌과 기도..이렇게 네

가지 핵심내용으로 구성됩니다. 뒤의 말씀들은 이러한 네 가지를

기초로 꽃피운 일종의 생활의 열매라고 할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의 교회의 하락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42절의 위 네 가지를 벗어난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46-47절의 믿는 사람다운 아름다운 열매를 보기 어렵고 오히려

교회가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면이 있습니다.

 

2.

사실 42절에 열거된 4가지 중에서도 가장 근본은 첫번 째인 '사도들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이 '사도들의 가르침'(the teaching of the apostles)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형제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개신교파들은 이 단어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형제회가 이 단어의 중요성을 보았지만, 세세한

적용과 실행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의해서

입니다(한국복음서원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참조).

 

사도들은 복수인데, 가르침은 단수입니다. 이 말은 여러 사도들이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가르침을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28:20이 말한 '주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명령한 모든 것'

입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명령에 뿌리를 둔 것임으로

동일한 가르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가르침은 사실상 신약 성경 전체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너무나 범위가 넓어서 금방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주제를 놓고 지난 94년부터 묵상하고 나름대로 소화한 바에 의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그 '실재 안에

머무는 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지키는 것"입니다(빌3:10).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나의 인격입니다(요11:25). 또한 죽음을 통과한 저편에 있는

하나의 '영역'(부활영역)입니다.

 

3.

이러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붙잡고 다른 가르침을 물리칠 때 우리는

사도들의 교통(요일1:3)의 실재 안으로 이끌릴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한 몸으로서 또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만찬을

뗄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신성한 영역이 이 땅 위에서 더 확대되도록

우리는 하나된 기도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가르침 이외의 가르침이 있게 되면 그 각각의 가르침은

다른 교통을 불러 오고 성만찬을 해도 하나의 몸을 증거할 수 없게 되며

기도도 분파적인 성향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계를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기를 참으로 갈망한다면, 제일 먼저 자신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의

실재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