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회복역 성경이어야 하는가?


진리의 언덕 2012-09-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2004.html

회복역성경 번역의 우수성-  3:25 ‘힐라스테리온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한 것이우수한 번역성경입니다. 번역자들이 오역을 하게 되는 원인은 여러가지 입니다. 중에는 원문이 번역자의 일반 관념과 맞지 않을 그것을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따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종종 원문이 전달하는 영적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버립니다. 로마서 3 25절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원문에 맞게 직역하기로 유명한 신약성경 회복역(한국복음서원) 번역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와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드러내시어 화해장소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꼐서 이전에 사람들이 지은 죄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면서 지나쳐 가심으로 그분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며, “

 

본문에서 언급된 화해장소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오스’(2435)입니다. 단어는 9:5에서 속죄소라고 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번역자들은 인격체이신 예수님 자신이 속죄소(또는 화해장소)라는 개념이 생소함으로, 원문과 달리 이것을 화목제물’(개역성경, 한글 킹제임스) 또는 화해헌물(흠정역) 오역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물>에 해당되는 단어는 힐라스테리언 아니라 힐라스모스라는 별개의 단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역 성경들도 요한일서2:2, 4:10에서는 힐라스모스 화목제물로 바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를 같은 의미로 번역함으로 명백한 오역을 것입니다.

 

문제는 단순히 오역했다는 그 자체에만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오역이 ' 예수님 자신이 속죄소가 포함된 성막 자체이시다' 라는 심오한 계시를 가리는데 몫을  보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tabernacled, ‘스케노오’) (4637) 라고 하여, 예수님 자신이 성막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이것을 우리가운데 거하시며 오역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인인 사람들은 성막,   정확히 말하면 성막 안의 지성소 안에 있는 시은좌’(mercy seat)에서 짐승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만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있는 방법은 유일한 길이시자 장막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14:6). 로마서 3 25절은 이러한 심오한 계시를 담고 있는 핵심구절입니다.

 

회복역 성경 3:25 각주 내용(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구절의 힐라스테리온 화해제물 아니라 화해장소임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언약궤의 덮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덮다 의미하는 단어의 어근에서 카포렛이다. 칠십인역에서 단어는힐라스테리온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화해장소를 뜻한다.”

 

물론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화해장소’(힐라스테리언)이시자 화목제물’(힐라스모스), 이시며, 심지어 화해를 시키시는 ’(힐라스코마이)이십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화해제물> <화해장소> 다른 의미를 가진 별개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둘을 같은 의미로 번역해서는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고신 신학 대학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변종길 교수님은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생명의 말씀사) 160-161난하주에서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란 원어로 힐라스모스인데,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대신 하나님께 드려진 속죄제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화목제물보다는 속죄제물 옳다. 그러나 로마서 3:25 히브리서 9:5에서 사용된 힐라스테리온 속죄단(贖罪壇)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로마서 3 25절의 hilasterion”,신약신학저널 창간호(2000 여름), 서울:이레서원, 2000, pp 57-76 보라.”

 

현재 한국교계는 성경 선택에 있어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1998년에 번역이 완료된 <개정개역성경> 보급하는 과정에서, 대한성서공회 관계자가  앞장 서서 오랫동안 보적인 지위를 누려오던 <개역성경> 오류들을  지적하고 나서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후 시간이 지나면서 개정개역성경의 오류들이 발견되면서 일부에서는 다시 개역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대안이 아니며, 그렇다고 새로운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선택에 있어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입니다.

 

  비록 현재는 신약만 번역 출간되었으나, 원문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한 <신약성경 회복역>(한국복음서원) 대안으로 고려해 보는 것도 방법일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뇨?


진리의 언덕 2012-06-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0461.html

무엇을 보았느뇨?

 

사도 바울이 회심 받은 첫번째 명령은 눈을 뜨게 하라 것이었습니다 (26:18). 물론 이것은 영의 , 마음의 눈이 떠지는 것을 말합니다(1:18). 바울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숱한 사람들의 영의 눈을 뜨게 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게 했습니다. 생명의 길을 갔던 연로한 형제님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짧은 마디 말을 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만큼 간다.”

 

 1. 무엇을 보았는가?

 

주님의 구속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죽을 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아들을 보내사 죽게 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내주신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주님의 보혈은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요즘엔 정도의 체험도 없이 몸만 교회당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소위 구원파범주의 사람들 눈에는 전도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소위 구원파범주의 사람들이 상대하기 버거운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 했습니다. 생명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담 기용의 책을 읽습니다. 또는  로렌스 형제가 수도원에서 설겆이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린 것을 아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영성 훈련에 관련 되거나, 아니면  여기 저기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인터넷 안에서도 간혹 그런 분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분들과는 소위 생명의 교제’(1:3) 가능합니다. 주관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개인적인 생명의 체험이 귀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인은 단계로도 만족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단계로는 만족하실 없으십니다.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신 것은 각각 떨어진 밀알들을 얻을 뿐아니라 밀껍질이 깨어져 나온 밀가루에 기름이 더해진 누룩없는 떡을 고대하시기 때문입니다 (16:18, 12:24, 고전10:17). 밀껍질이 깨지려면 자기가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다른 밀알들과 덩어리로 반죽되려면 싫든 좋든 다른 지체들과 뒤섞여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길을 갔습니다(26:19). 워치만 니도 길을 갔습니다 . 그러나 오늘날 눈이 열려 이러한 하나님의 갈망을 밝히보고 기꺼이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같습니다.

 

2. 본대로 가고 있는가?

 

질문은 참으로 엄중합니다.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은 최소한 프랭크 바이올라가  <이교에 물든 기독교>에서 지적한 내용만이라도 실행 해야 합니다( http://www.daejanggan.org/shop/item.php?it_id=1324102512 )  ( 책이 다룬  핵심 요점들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워치만 니의 <교회의 정통> 또는 형제회의 실행에서 발견됨).  

 

이것은 현재 소위 주류 교단들의 실행을 불가피하게 부정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을 가리킴으로 그분들과의 긴장관계 내지는 정죄와 배척을 감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런 분들은 소위 제도권 교회를 이상 출석할 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냥 집에 머물거나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가정교회 형태를 띄는 것이 대부분 입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기존 교파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딜레마가 있습니다(1:23, 16:18). 참된 몸의 건축은 우리의 존재 내면 깊숙이 숨겨진 자아와 개인주의 성향이 십자가에 의해 깊숙히 만져지고 처리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으로 존재가 충만될 것을 요구합니다 (4:13). 하지만 이런 유형의 분들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 만나니 좋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선택해서 할수 있기에 오히려 자아처리의 기회가 좁아져 있을 있습니다.

 

3. 성경적인 교회생활을 체험하는

 

성경적인 교회생활은 마디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가 단체적으로 표현되는 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호권면의 실행과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오래 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는 불가피 합니다.

 

1)      권면을 받음

 

정상적인 교회생활에서는 다른 지체들의 권면을 받거나 반대로 권면할 상황이 수도 없이 생깁니다(18:15-17, 1:28). 우리가 변화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을 권면하되 정작 자신은 누구의 권면도 받지 않는다면 실제적인 몸의 건축은 요원해질 것입니다.

 

2)      오래 참고 서로 짊어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면서 구체적으로 겸허하고 온유하며 오래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 짊어짐으로하나를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4:2-3). 그러나 제도권을 나와 자기 혼자 있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해도) 자기 마음에 맞는 일부와만 모임을 가진다면, 이런 미덕들을 실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주님의 몸의 이상을 보았던 사도 바울이나 워치만 니는 이상은 하늘보다 높고 깊게 보았으나 땅에 발을 딛고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안배해 주신 변화된 지체들 함께 거하며 안에서 자신이 이상을 실행했습니다. 예로 상해교회는 워치만 니를 배척하고 치리했으되, 정작 워치만 니는 상해 교회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후  교회가 다시 그를 받아들였을 워치만 니는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지체의 분량을 다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길을 가고자 하던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상을 만큼 갈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이 우리 모두에게 투명하게 보여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상추쌈 점심을 먹었습니다.


유향의 동산 2012-06-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0384.html

오늘 점심은 상추에 실란츠로(고수)를 몇개 얹어서 쌈을 싸먹었습니다.

월남 국수에 들어있었던 실란츠로의 이상한 맛에 질겁을 했던 예전에 비하면

사람의 입맛은 살아가면서 변하는 모양입니다.

 

상추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라 여러개를 겹쳐 싸야 하지만 무공해이고

싱싱합니다. 한 자매님의 뒷 마당에 씨뿌려 심으신 것을 수확한 것인데

쌉싸롭한 것이 입맛을 제법 돋구네요. 일주일에 최소한 일곱번 이상을 뵙는

가정(매일 새벽집회를 함께 함)인데, 이것 저것 저의 가정에 나눠주십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가장 쉬운 정의는 '먹거리를 주는 것'

또는 '먹이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영육간에 다 해당됩니다.

 

어제는 김자매가 나가는 직장에서 첫월급 탄 기념으로 소그룹식구들과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부페식당에 가서 함께 식사하고 이런 저런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집회'를 대신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감기때문에 집회에 못나온 한 자매님 가정과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식당 문을 나와 차를 타고 오면서 둘이 '오늘 참 잘했다.'고

서로 칭찬했습니다. 집 사람 생일날에 이런 만남, 이런 함께 먹음의 시간을

가진 것이 스스로도 보람이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고등학생들을 어떻게 목양을 좀 하고 싶은데 마땅한 길이 없어서(그들은

영어세대이고, 또 거의 미국 아이들과 같아 몇 마디 나누면 그 다음엔

서로 어색), 주님 밥을 좀 함께 먹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후 주머니 사정이 괜찮게 된 몇 번 그들과 함께

식당가서 밥/짜장면/새우튀김..을 먹었는데 전보다 상당히 친근해 지고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오늘 어떤 형제님이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들의 '직업병'과도

같은 목과 어깨 근육 뭉침...을 손으로 만져 풀어주셨습니다.

"형제님, 우리 00교회 초기에 왜 사람들이 늘었는지 아세요? 자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에게 어디 밥 먹으로 함께 가자고 하면

부담없이 따라가잖아요. 그러면 함께 밥 먹고 난 다음 같이 찬송하고

그러면서 인수가 차츰 늘었어요."

 

저 남쪽 어디에 소재한 명문대학 출신 자매 최소한 세 명이 학교다니는

동안 어느 한 가정의 헌신적인 목양으로 교회에 들어왔고 미국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간증은 한결같이 대학다닐 때 그 가정이 편하게

쉴 자리를 제공하고, 먹여서 교회 안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먹이는 것입니다.

라고 답할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의 죄들의 사함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우리의 '먹거리'(요6:57)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오늘 점심에 한 자매님이 주신 상추쌈을 싸서 입에 넣으면서
한 지체가 주신 사랑을 싸서 먹은 셈입니다.



생각 관리 하기


유향의 동산 2012-06-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0247.html

 

요즘 '생각'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영을 좇아 행하라' 라는 신약의 결론적인 명령을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를 주님 앞에서 추구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

3권을 읽으면서 생명의 성숙이나 영을 따라 사는 삶(갈5:16)이 우리의 '생각'과 매우 많은

관련이 있는 문제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생각을 피동적인 위치에 두지 말라'는 조언이

저의 오랜 잠을 깨웠습니다. 오늘은 이 생각의 문제를 좀 다뤄보려고 합니다.

 

1.

 

저는 천재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해야 하겠다고 작심한 것은 다 기억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로 중학교 때 그랬습니다. 그 때는 제가 저건 기억해야 하겠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중을

해서 들어 두었습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생각을 사용합니다. 그럴 때는 앞 머리 이마 쪽이 뜨뜻

해지고 입력되는 정보들을 제가 취사선택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아예 관심을 끊어

버리는 적극적인 결단이 함께 작용했던 것이 회상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빈 방에 누워서 그날 국어 시간을 회상해 봅니다.

그러면 국어 선생님이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 오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몇 발자욱을

떼어 교단으로 올라 오고 출석부를 펴서 1번 아무개, 2번 아무개....60번 아무개를 부른 다음

(이 이름들이 다 회상이 됨) 국어 교과서 몇 페이지를 펴고 읽었는데 그 책 왼쪽 첫 줄에 무엇이

쓰여 있고 그 다음 줄 그 다음 줄...맨 밑줄까지 끝나면 이제 오른 쪽 첫 줄...이런 것이 다

눈 앞에 마치 책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회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리 길을 걸어 오면서

중간 쯤 어떤 가게 앞을 지날 때 틀어 놓은 라디오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생각이 나고... 그러나 제가 저런 것 나와 무관하니 알 필요없다 싶어서 집중해서 듣지 않은

것은 생각이 안 납니다. 아니 생각도 안 해버립니다.

 

이런 일은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 할 무렵 막을 내렸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생각해야 할 것이 갑자기 불어 났고 그 당시 몸도 허약해져서 생각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눈에 들어 오는 대로 외부 정보들을 거의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는 습관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러 길 근 30여 년...그러나 아주 최근에

그런 <저의 피동적이고 느슨한 생각 관리>가 <영적 생활의 승패>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정신이 퍼뜩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부 정보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생각

하여 받고 차단하는 기능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다시 앞 이마가 뜨뜻해 지는 느낌입니다.

 

2.

 

생각 관리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들이 머리 위로 지나 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서울 노량진 쪽엔가 가면 상수도 정수장이 있었습니다.

그 정수장 안으로는 대개는 정수가 필요한 '오염된 물'(?)이 흘러 들어 들어옵니다. 아마

상류 쯤에서 처음엔 맑은 물로  흐르다가 도심을 지나면서 차츰 오염이 된 물로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일단 정수장 안으로 들어 온 물이 밖으로 나갈 때는 맑은 물만 나갑니다.

이것이 한 원칙입니다. 즉 정수장 안에서 여과 장치로 거르는 과정이 우리의 생각 내에서 이뤄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가능하면 더러운 물이 우리 생각 속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생각을 관리하는 것도 한 원칙입니다.

 

야고보서 3장 11은 '어찌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3:11)라고 말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이것이 우리 안에서 나가는 말과 관련이 있음을 알았지만

아니 사람이 살다보면 어떻게 단물에 해당되는 말만 할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타락한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가능하면 '맑은 물'만을 안에 받아 들이도록 분별력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우리 생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 저거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정보구나 그렇다면 저것은

신경을 끊자(천연적인 호기심을 잘라 버림)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더러운 생각들도 있는지라  이러한 '유입'에 대한 통제 만으로는

'맑은 물'만 흘러 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것들을 '말'로

밖으로 내 보낼 때는  '생각' 안에서 정수 작용을 거치는 2차 잠금 장치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생각을 잘 관리하다보면 우린 단물과 쓴 물을 교대로 내는

샘에서 어느 새 단물만 내는 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물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제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아침에 '영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생각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님 앞에서 묵상 할 때

다음 두 가지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빌립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입니다.

 

빌립은 천사를 통한 주님의 인도를 따름에 있어서 생각으로부터의 저지나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8:26-27은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 하되, 일어나 남쪽으로 나아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하니 그 길은 사막이더라.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보라 이디오피아 사람 곧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그녀의 모든 국고를 맡아

큰 권세를 가진 내시가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라고 적고 있습니다.

 

빌립은 '아니 왜 제가 사막으로 간대요? 무엇 때문에 저를 그리로 보내시는지 들어보고

가도 가겠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냥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라고 적고 있

습니다. 빌립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방향을 '어쨌든 믿고 가 보자' 쪽으로

정했을 것입니다.  

 

빌립의 사례보다  2 장 뒤인 사도행전 10 장에 소개된 베드로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하늘이 열리며...큰 보자기 같은 그릇 하나가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니 그것이 땅으로

내려 오더라...그 안에는 땅에 있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

짐승이 있더라. 또 한 음성이 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그 까닭은...'(행10:11-14).

 

베드로의 생각은 좀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달고 감히 주님의 명령을 일차 거절하기

까지 하는 대담성을 보입니다. 역시 베드로 답습니다. 위 두 사례는 아무리 신령해도 '생각'

안에서 주님의 인도에 기꺼이 동역함이 없이는 주를 따름에 장애를 가져 오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우리 생각의 통제와 동역이 매우 중요합니다.

 

4.

 

우리의 생각은 많은 때 주인없는 빈집처럼 방치 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도 어떤 때는 차를 타고 가다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 들어오는 이런 저런

정보들을 별 생각이 들음으로 그대로 자신 안에 유입되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들어 온 정보는 제 뇌리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제 입을 통해 흘러

나가는 것을 봅니다.

 

만일 자기 집 안방에 흙 강아지가 갑자기 뛰어 들어온다면 아마 길겁을 하고 때려서라도

즉시 내어 쫒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의 방엔 많은 때 개도 소도 지나 가다가 흙 발

자국을 남겨도 '문 빗장'도 없고 '저리가 !' 하는 한 마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래 저래 유입된 정보와 자료들이 성령의 전인 성도들을 더럽히는 구정물로

힌 옷을 더럽히는 깜북이 가루로 귀를 더럽히고 생각을 더럽히는 기름찌거기로  우리 입의

말을 통해 그냥 흘러 나가 버립니다. 그러고도 그것이 거룩한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

는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신의 간증에 어떤 타격을 가했는지에 대해 전혀 감각도 없이

그런 일이 반복됩니다.

 

5.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차적으로는 대적 사탄 때문입니다. 

그리고 2차 적으로는 생각을 피동적으로 방치한 우리 책임입니다.

날아가는 새가 우리 생각에 새똥을 싸도 비키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것은 어리

석은 것입니다. 대적이 '더러운 구정물'을 슬쩍 방류해도 즉시 입구를 차단하지 않고

그대로 그 썩은 물이 하루 종일 자기 안으로 유입되도록 자신의 생각의 문을 수동적으로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보냅니다.

 

 생명을 공급하지 못하고, 우리의 육을 자극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롬13:14) 하는

모든 정보들은 우리 생각 속으로 들어 오려고 할 때 능동적으로 선별해서 가려내야 할 것

입니다. 그래도 부득이하게 들어 온 정보는 우리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마땅히 통제를 가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말만 해 내어야 마땅합니다.

 

6.

 

저는 '그영을 따르는 자들은 그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라는 말씀에 큰 자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영을 따라 살았는지 여부는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는가'를 되 돌아 보는 일은 쉽게 파악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육을 따라 산 사람이 영의 일을 생각할 수가 없고 영의 일을 생각한 사람이

육을 따라 살수가 없다>는 점은 하나의 원칙으로 붙들만 합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말

해서 영을 따라 살려면 어찌하든지 <영에 속한 생각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보통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생각을 피동적인

위치에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 갑니다. 아니면 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에 생각을 과도하

게 사용함으로 영에 속한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뚫어

낼 것인가 하는 점을 진지하게 고민하다보면 <생각>에 대해 우리가 더 성경의 빛 가운데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필요에 대해서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3권을 적극 추천

합니다.

 

 주님은 지금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건축 중이십니다.

 

그런데 음부의 문들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나오는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없는 말들

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어떻게 건축되는가? 우리 입에서 나오는 생명을

흘러 보내는 신언을 통해 건축됩니다(고전14:4). 그렇다면 이 둘은 결국 우리의 말의 내용에

의해 좌우 되며 우리의 말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롬 8:6이 지적하듯이 우리의 생각관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인가?


진리의 언덕 2012-06-0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40216.html

지방 교회들 관련 가지 핵심 현안

 

글은 지방 교회들을 향한 가지 근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첫째, 지방교회 사람들은 많은 성경 교사들 중에서도 유독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게만 집중하는가? 둘째,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들인가?  

 

질문은 사실 가지 답으로 모아집니다.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통해서 알게   <하나님의 >(3:9-10, 4:11,1: 4-5)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 (16:18, 1:23) 목숨을 사람들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 교사들과 각종 기독 단체들 역시 몸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부분적이고, 피상적이며, 교리에 불과한 면이 많고 심지어 상당 부분은 비성경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 교사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몸의 건축에 관한 종합적이고, 심오한 청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각종 공격과 훼방 앞에서도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초지일관 <교회의 > 가다가 일생을 마감함으로 우리 앞에 좋은 본을 남겼습니다. 이와 비교할  T. 어스틴 스팍스 정도가 이들에게 근접했다 말할 있지만, 그는 몸의 이상을 실행하는 방면에 부족이 있습니다. 세부항목들로 들어가면 많은 말을 있으되 일단 이것이 질문들에 대한 대략적인 답변입니다.

 

이제 세부적으로 조금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몸의 건축을 진지하게 관심하고 그것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매우 관심한 다음 가지 항목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것입니다. 그것은  <믿는 이들의 하나>(17:23) <몸의 모든 지체들의 온전케 >입니다(4:11-16).

 

-몸의 하나 (4:4)

 

우주가운데 주님의 몸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경은 하나를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4:3). 그러나 교계의 현실은 현재 이런 저런 이유로 4만개의 분파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물론 소위 에큐메니컬 운동을 하는 분들이 하나를 추구하지만, 현실 인식이나 접근방법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와는 많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성경적인 하나의 본질>(17:21-23, 4:3) <하나를 이루는 >, 그리고 <하나를 깨뜨리는 내적 외적 요인들> 관하여 성경을 근거로 다룬 많은 책들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아니라  소위 지방 교회들은 워치만 니가 사역을 시작한  1922년이래  90년간 하나를 관심하고 지키기 위해 싸워오고 있습니다. 

 

소위 지방에 교회 몸의 하나를 이루는 길의 일부일 , 본질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성경 교사 그리고 주의 회복의 성도들이 지향하는 몸의 하나는 17:21-23 말한 삼일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하나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4:3).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빠진 곳엔 하나가 없습니다. 하나의 근원이자 요소이신 삼일 하나님 자신이 지체들인 우리 안에서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하나되는 유일한 길입니다(2:19). 이럴 사도 바울이 권면한 대로 몸의 지체들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될 있습니다(고전 1:10). 심지어 한마음 한뜻과 ”(15:6) 가질 있습니다. 이것을 획일화 로마 천주교와 같다느니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런 하나를 이루는데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지로  <지방을 교회의 범위로 삼는 >(외적 조건)(8:1, 13:1, 1:11)  구성원 각자가 자신들의 지역 교회 안에서  모든 일에 겸허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는 ”(내적 조건)(4:2) 실행하는 것을 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몸의 하나에 대한 계시> < 하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이 가지를 상세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중에는 영적이고 능력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행적으로 성경적인 몸의 하나와 몸의 건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점에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견줄만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을 온전케 (4:12)

 

하나님의 뜻인 몸의 건축은 영적인 은사자들의 계급주의와 개인주의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달란트를 가진 모든 성도들의 온전한 기능 발휘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4:11-16). 그러나 2세기 안티오크의 이그나티우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비롯된 <성직자 평신도 제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니골라당의 행위> <니골라 당의 가르침>(2:6, 15) 미워하십니다. 목사 전도사는 성직이고 신학을 하면 평신도라는 계급구조가 낳은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적인 틀이 형제회 내에서 깨졌습니다. 성공회 사제였던 넬슨 다아비가 자신의 사제 지위를 과감히 버리고 많은 형제들 하나로 내려 앉은 사건이 예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형제회 밖에서는 이러한 실행은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형제회의 도움을 입어 방면에서 매우 단호했습니다. 자신들 스스로의 처신은 물론(내부에서 위트니스 리에 대한 가장 흔한 호칭이 ‘Brother Lee’), 기회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바른 진리를 지속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성경 교사들이 교계의 미움을 받는 상당 부분은 바로 방면의 진리를 성경대로 외친 것에 기인합니다.

 

유기체인 몸의 건축을 위한 이러한 소위 성직 개념의 타파 외에 다른 방면 면의 과제는 소위 평신도들의 수동성과 무지입니다. 우리 육신의 몸도 기능이 정상적으로 발휘하지 않을 전체가 불편하고 제한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2천년이 넘도록 이러한 몸의  의식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것은 바로 <생명의 거듭남>(3:6, 3:4) 진리가 충분히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Churchgoer) 상당수가 사실상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함으로 몸의 지체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한 참되게 거듭났어도 그들 모두가 직접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모두 직접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이 모두 직접 주일 날에 신언(짧은 설교)(고전 14:4) 하게 함으로 만인 제사장 제도(벧전 2:5, 9) 실제적으로 회복하는 일은 많은 난관과 장애물과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성경적이고 종합적인 청사진이 없이 교계 일부에서 시도 되고 있는 소위 <가정 교회 실행>, <평신도 제자 훈련>등은 성경 근거나 타당성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실행적으로 성도들을 영적으로 살아있고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living functioning members) 만드는 것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지침과 본들을 산출했습니다. 이에 관련된 책들이 넘칩니다. 이것이 교계에 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을 적지 않습니다. 최근에 유기적 교회 세우기운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프랭크 바욜라> < 애드워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유기적인 몸의 건축에 관한 종합적인 계시와 실행적인 지침에 있어서와 삶의 궤적에 있어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능가하는 성경 교사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점이 주의 회복이 성경 교사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저를 포함한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위에서 이뤄지는 >(6:10)만을 추구합니다.  또한  같은 주제를 진지하게 관심한다면, 결국 우리 모두가 동일한 길을 가게 것으로 확신합니다.

 

 

질문은 사실 가지 답으로 모아집니다.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통해서 알게   <하나님의 >(3:9-10, 4:11,1: 4-5)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 (16:18, 1:23) 목숨을 사람들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 교사들과 각종 기독 단체들 역시 몸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부분적이고, 피상적이며, 교리에 불과한 면이 많고 심지어 상당 부분은 비성경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 교사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몸의 건축에 관한 종합적이고, 심오한 청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각종 공격과 훼방 앞에서도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초지일관 <교회의 > 가다가 일생을 마감함으로 우리 앞에 좋은 본을 남겼습니다. 이와 비교할  T. 어스틴 스팍스 정도가 이들에게 근접했다 말할 있지만, 그는 몸의 이상을 실행하는 방면에 부족이 있습니다. 세부항목들로 들어가면 많은 말을 있으되 일단 이것이 질문들에 대한 대략적인 답변입니다.

 

이제 세부적으로 조금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몸의 건축을 진지하게 관심하고 그것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매우 관심한 다음 가지 항목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것입니다. 그것은  <믿는 이들의 하나>(17:23) <몸의 모든 지체들의 온전케 >입니다(4:11-16).

 

-몸의 하나 (4:4)

 

우주가운데 주님의 몸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경은 하나를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4:3). 그러나 교계의 현실은 현재 이런 저런 이유로 4만개의 분파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물론 소위 에큐메니컬 운동을 하는 분들이 하나를 추구하지만, 현실 인식이나 접근방법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와는 많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성경적인 하나의 본질>(17:21-23, 4:3) <하나를 이루는 >, 그리고 <하나를 깨뜨리는 내적 외적 요인들> 관하여 성경을 근거로 다룬 많은 책들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아니라  소위 지방 교회들은 워치만 니가 사역을 시작한  1922년이래  90년간 하나를 관심하고 지키기 위해 싸워오고 있습니다. 

 

소위 지방에 교회 몸의 하나를 이루는 길의 일부일 , 본질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성경 교사 그리고 주의 회복의 성도들이 지향하는 몸의 하나는 17:21-23 말한 삼일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하나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4:3).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빠진 곳엔 하나가 없습니다. 하나의 근원이자 요소이신 삼일 하나님 자신이 지체들인 우리 안에서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하나되는 유일한 길입니다(2:19). 이럴 사도 바울이 권면한 대로 몸의 지체들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될 있습니다(고전 1:10). 심지어 한마음 한뜻과 ”(15:6) 가질 있습니다. 이것을 획일화 로마 천주교와 같다느니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런 하나를 이루는데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지로  <지방을 교회의 범위로 삼는 >(외적 조건)(8:1, 13:1, 1:11)  구성원 각자가 자신들의 지역 교회 안에서  모든 일에 겸허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는 ”(내적 조건)(4:2) 실행하는 것을 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몸의 하나에 대한 계시> < 하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이 가지를 상세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중에는 영적이고 능력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행적으로 성경적인 몸의 하나와 몸의 건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점에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견줄만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을 온전케 (4:12)

 

하나님의 뜻인 몸의 건축은 영적인 은사자들의 계급주의와 개인주의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달란트를 가진 모든 성도들의 온전한 기능 발휘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4:11-16). 그러나 2세기 안티오크의 이그나티우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비롯된 <성직자 평신도 제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니골라당의 행위> <니골라 당의 가르침>(2:6, 15) 미워하십니다. 목사 전도사는 성직이고 신학을 하면 평신도라는 계급구조가 낳은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적인 틀이 형제회 내에서 깨졌습니다. 성공회 사제였던 넬슨 다아비가 자신의 사제 지위를 과감히 버리고 많은 형제들 하나로 내려 앉은 사건이 예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형제회 밖에서는 이러한 실행은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형제회의 도움을 입어 방면에서 매우 단호했습니다. 자신들 스스로의 처신은 물론(내부에서 위트니스 리에 대한 가장 흔한 호칭이 ‘Brother Lee’), 기회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바른 진리를 지속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성경 교사들이 교계의 미움을 받는 상당 부분은 바로 방면의 진리를 성경대로 외친 것에 기인합니다.

 

유기체인 몸의 건축을 위한 이러한 소위 성직 개념의 타파 외에 다른 방면 면의 과제는 소위 평신도들의 수동성과 무지입니다. 우리 육신의 몸도 기능이 정상적으로 발휘하지 않을 전체가 불편하고 제한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2천년이 넘도록 이러한 몸의  의식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것은 바로 <생명의 거듭남>(3:6, 3:4) 진리가 충분히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Churchgoer) 상당수가 사실상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함으로 몸의 지체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한 참되게 거듭났어도 그들 모두가 직접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모두 직접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이 모두 직접 주일 날에 신언(짧은 설교)(고전 14:4) 하게 함으로 만인 제사장 제도(벧전 2:5, 9) 실제적으로 회복하는 일은 많은 난관과 장애물과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성경적이고 종합적인 청사진이 없이 교계 일부에서 시도 되고 있는 소위 <가정 교회 실행>, <평신도 제자 훈련>등은 성경 근거나 타당성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실행적으로 성도들을 영적으로 살아있고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living functioning members) 만드는 것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지침과 본들을 산출했습니다. 이에 관련된 책들이 넘칩니다. 이것이 교계에 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을 적지 않습니다. 최근에 유기적 교회 세우기운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프랭크 바욜라> < 애드워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유기적인 몸의 건축에 관한 종합적인 계시와 실행적인 지침에 있어서와 삶의 궤적에 있어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능가하는 성경 교사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점이 주의 회복이 성경 교사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저를 포함한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위에서 이뤄지는 >(6:10)만을 추구합니다.  또한  같은 주제를 진지하게 관심한다면, 결국 우리 모두가 동일한 길을 가게 것으로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