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의 적용(11)-생명과 빛과 하나되라


진리의 언덕 2014-01-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206.html
제가 1983년도에 회복되어 교회생활을 하던 중 그 당시 가장 신선했던 
충격은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임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예전에는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 그러면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 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대 사도이고 또 성경도 쓴 분들이고 난.... 
그러나 어느 날 보니 그들이나 저나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었습니다. 
다 형제들이고, 그들에게도 허물과 약함이 있고, 내게도 주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의 분깃이 있습니다. 분량과 은사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형제가...' 이렇게 말할 때 얼마나 사도 바울이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또 한 가지 깊은 인상은 성경은 삼국유사나 삼국지 같은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라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현재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살아있는 기록'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인식 이후 '주여 이 말씀을 우리 중에서 이루소서!' 
'오 주님 나로 이 말씀의 실재 안으로 이끌어 주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4장을 이런 관점에서 읽어 갈 때 다음 네 가지 비유(parables)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즉 4장 2-20의 씨뿌리는 비유, 26-29의 씨를 땅에 심는 이야기는 유사하며 
동일하게 생명이 있는 씨(생명)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면에 4장21-25는 등불 즉 빛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겨자씨 한 알에 대한 비유가 있지만 이 비유는 '공중의 새들'을 
앞의 4절과 15절(사단)에 근거하여 해석한다면, 그리 적극적인 면을 말하는 
것으로 볼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가복음 4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결국 
적극적인 면으로만 볼 때 생명과 빛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이러한 
왕국을 이 땅 위에서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1. 생명 

예전에 저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선이란 사람을 좋은 의도로 선대하는, 그러나 여전히 타락한 옛사람 안에서 
나온 그런 선입니다.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 수화를 배워서 자원봉사를 하려고 그 바쁜 대학 4학년 
무렵 순복음교회 국제선교센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수화를 배우려 다녔습니다. 
지나가다가 돈 달라고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친 적이 드물었습니다. 
군복무 시절 양지 바른 곳에 비스듬이 기대있는 힘없는 홈리스 아저씨를 
근무초소로 모셔다가 일회용 면도기로 더부룩한 수염을 말끔하게 깍아드렸 
습니다. 이런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겉으로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뿌듯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런 선 외에 
생명(조에)이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선악 지식의 나무 이외에 
생명나무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그러면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병든 사람 
관심 갖는 것이 틀렸단 말이냐', '그런 것들은 다 필요없고 오로지 생명만 
외쳐야 한다는 말이냐' 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에 
도취하여 생명을 주의하지 못한다면 속임 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선행은 
마가복음 4장이 말하는 생명의 씨앗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사실은 이러한 '천연적인 선과 생명의 차이점'에 대한 선명한 인식이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2절),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4절)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말씀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요일1:1-2)이 자신과 
하나되고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가는 존재가 되는 시간 만이 참 가치가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만일 1983부터 지금까지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고아원이나 찾아 다니고, 야학이나 하고, 
돈을 줒으면 한 푼도 안 쓰고 즉시 경찰서로 가져다 주고, 선행으로 신문에나 
나고, 눈이 오면 자기 집 앞 뿐 아니라 그 골목 전체를 쓸어주는 식의 삶을 살 
고 참 생명을 몰랐다면 전 인생을 낭비한 것입니다. 

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씨뿌리는 자가 뿌린 씨를 받아 삼십, 육십, 
백배의 결실을 맺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우리 안에 
떨어진 씨가 싹이나고 이삭이 패고 곡식을 맺어 추수를 예비하는 시간들이어야 
합니다. 나타난 선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2. 빛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뤼크노스,3088(들고다닐 수 있는 등))을 
가져오는 것은 (곡식되는) 말 아래나 침상아래 두겠느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막4:21)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2-23절).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읽고도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바로 위와 같은 때일 것입니다. 

'아니 당연한 말 아니요? 등불을 말이나 침상 아래 두는 사람이 어디잇어요 
없지. 그리고 등불은 당연히 등잔(lampstand)(뤼크니아, 3087)위에 두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 위 대목을 그냥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이런 
반문이 나올 법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처럼 평이한 말을 하신 다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니' 고 덧붙이셨습니다. 
도대체 '들을 귀'(막4:23, 9)라는 것이 무엇일까.... 



물론 문맥과 단어연구를 통해서 위 말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해석해 
내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위 대목이 '빛'과 
관련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빛 또는 등불은 과연 무엇 
일까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성경은 대체적으로 빛은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에 연관 
짓고 어둠은 사탄과 사탄의 왕국에 관련을 짓고 있습니다. 

일례로 요일1:5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고 말합니다. 골1:12는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이 있다'고 하고 13절은 
주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고 말합니다. 롬13:12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rioting)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strife)와 
시기(envying)하지 말고 정욕을 위하여 육체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엡5:6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합니다. 요1:4-5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빛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요, 어두움의 근원 
은 사탄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빛에 대해서 더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어두움이 
싫으면 사탄에 속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명문대학을 나오고 사회에서는 그처럼 박식하고 똑똑한 
사람들(국회의원, 기자, 교수, 평론가들...)이 왜 앞서 간 사람들이 
죽을 때 후회한 그 길을 대책없이 반복해서 따라가는지 잘 이해가 
안 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알수 있습니다. 사람이 빛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분들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지식이나 지위나 지혜나 권세는 하늘(말씀)로부터 오는 빛과는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그분들 안에 여전히 존재 
하는 이유는 사회에서 어떤 성취를 얻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그것이 바벨탑과 같아 사람보기엔 
대단한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줌의 흙에 불과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입니다. 잠깐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습니다. 빛이 비취어 
자신들이 가진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Dung'(빌3:8)과 같음을 보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죽음을 통과한 후에도 남아 있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 보시기에 배설물일 뿐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본질이 생명과 하나된 자들이요(빌2:15, 롬8:2, 10, 6, 11), 
교회 또한 그 본질이 금등대입니다(계1:20). 즉 생명과 빛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더 살아나고 더 강한 빛을 발합니다. 

이 사망의 그늘이 깊게 드리운 땅에서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고자 하는 
분마다 마땅히 생명과 빛되신 하나님과 깊고 견고한 연합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지속적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망과 어두움에 속한 
분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10)-말을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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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어떤 분은 입만 열면 말이 청산유수입니다. 


그 분의 말 속에는 듣는 사람을 자기 의도대로 설득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 분의 부모도 '너 이 다음에 크면 변호사 되라'고 했을 정도 
랍니다. 

현재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중 한 사람은 인물도 훤하고 말을 잘 합니다. 
그래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변호사도 되고 상원의원도 되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럽게 당한 아들의 죽음을 
더 큰 일을 하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답니다. 그의 말 
잘하는 재주는 크게 성공하려는 그의 야심찬 꿈을 달성하는데 유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말 잘함은 이런 유형의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말을 잘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벧전 4:11은 ‘만일 누구든지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처럼 하라’ 
(if anyone speak, let him speak as the oracles of God)고 말합니다. 
고전14:4는 ‘방언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고, 예언(신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인 성도들을 주 안에서 세우는 하나님 말씀을 
잘 하는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년 일독 스케줄을 따라 신약을 읽었습니다. 
막 3장에서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말함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1. 서기관의 말(거짓말, 무익한 말)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도 치료하시고 열 두 제자들도 세우셨습니다. 
그야말로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하셨습니다. 어디선가 예수님이 미쳤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던 서기관이 다음과 같이 한 마디 했습니다. 
‘예수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그리고 (그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 
낸다‘. 

그러나 이러한 서기관의 말은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1) 사실도 아니고, 2)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말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자체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는 쓸모없는 
말입니다. 성경용어 대로‘무익한 말’(idle word, 마12:36)입니다. 

마12:36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익한 말‘이란 ’역사하는 힘이 없는 
말‘(a non-working word)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적극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천연적으로 말 잘하는 재주를 힘껏 사용하여 이런 
무익한 내용의 말들을 청산유수처럼 쏟아낸다면 그 (지방)교회는 큰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봉사를 한다며 움직이고 말하는 만큼 성도들이 
세워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런 말함은 즉각 그쳐져야(STOP)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참된 말, 역사하는 말) 

자신이 미쳤다고 하고,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쫒아낸다는 비난을 
들으신 후 
주님은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쫒아낼 수 있느냐. 왕국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왕국이 설수 없고, 집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 
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늑탈 
하리라‘(막3:23-27). 

위 말씀은 사단에게 왕국이 있고 그의 집도 있음을 우리에게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의 세간인 “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강탈>(디아르파조, 1283)하는 
소위 복음전파 심지어 양육까지도 영적 전쟁임을 암시합니다. 이 점은 교회인 그리스 
도의 몸을 건축하는 하나님의 경륜이 바로 ‘음부의 문들’(로부터 나온 소극적인 생각 
들과 말들)의 방해와 공격에 맞서 싸우는 일임을 계시하는 마16:18과 통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뉴스에 단 한번도 보도되지 않았지만 성경은 오늘 날의 세상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다고 말합니다(요일5:19). 

그는 자신의 졸개들을 시켜 1) 불신자들의 생각을 혼미하고 복잡하게 합니다(고후 
4:4). 2) 불순종하는 자들 안에 자기 졸개들인 악령을 보내어 이 세상의 유행을 
따라 이런 저런 실없는 말, 거짓말, 훼방하는 말을 서로 주고받고 속아서 살다가 
늙어 죽게 합니다(엡 2:2). 3) 심지어 믿는 사람까지도 몸을 건축하는 말이 아니라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하게하여 듣는 사람의 귀를 더럽히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엡5:4). 


결론적으로, 

성경을 믿는 사람으로서 말을 잘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꾸준히 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말해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통과한 생명의 공급이면 더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켜 주께로 
이끌 것입니다. 

오 주님! 우리로 주 편에 서서 당신의 몸을 건축하는 말을 하게 하소서! 
우리의 말하는 습관이 빛 가운데 점검받는 진지한 시간이 있게 하소서! 
아무 말이나 입 밖에 내지 않게 하소서! 
오직 단물만 내는 입이 되게 하소서! 
오 주님! 우리의 입이 '음부의 문들'(the gates of hell)로 잘못 쓰임받아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을 더럽히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도우소서! 

하나님 보시기에 말을 잘 하는 사람들로 
새롭게 세워지게 하소서! 

그날 당신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한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또 우리의 말로 정죄함을 받을 것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9)-핍박 받을 준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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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못된 일을 하면 벌 받고 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칭찬과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이와는 정 반대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위했던 모든 사람들>-이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철저한 반대와 거절과 핍박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주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주님이 누구십니까? 가장 좋은 것(눅11:13)을 인류에게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못된 강도와 유사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더 혼란케 하는 것은 이러한 핍박이 외견상 사탄 마귀 
모습을 한 무리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안다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뜻을 위해 사도된 바울을 가장 괴롭히고 
힘들게 한 것은 무지한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고 성경을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에는 이런 일이 그쳤을까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절대적으로" 분투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분들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나요? 우리의 과거 체험을 돌아볼 때 적당히 예수를 
빋었을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절대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더 깊게 헌신한 이후로 끊임없는 고난과 핍박이 있는 것을 
양심가운데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며, 성경에는 어떤 사례가 있으며, 
주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배도의 물결이 도처에서 출렁이는 이 마지막 때에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좁은 생명길을 가려면 핍박과 고난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슬퍼하지 말고.... 



1.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치료한 경우 

어제와 오늘 아침에 마가복음 3장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안식일 문제로 대립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 갔을 때 거기 '한 손 마른 남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계명을 지키려면 '그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있던 유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를 분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면 송사할 거리를 찾으려고 지켜보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딱딱한 것(the hardness of their hearts)에 대해서 
주님은 근심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막3:5). 

그리고 그런 일이 문제를 일으키고 
심지어 자신을 핍박할 원인을 제공할 것을 아셨음에도 주님은 그 사람을 
치료하셨습니다. 성경은 바리새인들이 바로 나가서 헤롯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것인지를 의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절). 


이런 기록과 우리의 체험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는 자들은 
"사람 자체"를 관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참된 필요를 채워 주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칭 유대인들'(성경은 이들을 
심지어 사탄의 회당이라고 지칭함, 계2:9, 3:9)은 성경의 표면적인 기록을 
근거로 이런 사람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자칭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생명공급을 통해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지 못한 사람들, 성경의 문자적 기록만을 의지하여 사람들을 판단하고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 자신이 정통 교회에 속해 있다고 자부하나 그영의 인도를 
따라 사는 실제(갈5:16)는 없는 사람들, 회심 전의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자칭 유대인들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살면서 주 안의 
형제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요일2:11)이 사실은 하나님의 경륜을 가장 
방해하는 대적입니다. 


저는 교회 생활 어느 시점 쯤 그럴 권한이 있다고 스스로 느껴질 때가 있었 
을 때 한 부끄러운 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즉 주일 집회에 늘 5분 10분 늦는 
지체들을 몇 번 권면하다가 어느 날은 정시가 되어 집회소 문을 걸어 잠그는 
일의 선봉에 섰던 것입니다. 

주일 집회에 매번 지각하는 "기본이 안 된" 지체들을 향하여 저의 의로운 
요구가 집행될 때 저는 그런 일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게으르고 부주의하게 교회생활하는' 그 지체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런 일로 인해 그 지체들이 집회에 일찍오는 사람들로 
온전케 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깊이 상했고 심지어 실족했 
습니다. 몇 번 경고(광고를 통해)를 해도 무시하는 그분들의 태도로 인해 그 때 
제 마음은 굳어 있었습니다. 늦을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에 대해서 알려고 
도 하지 않았고 참되게 주 안에서 세우려는 사랑의 마음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왔다가 몇 년 후 다시 그곳에 갔을 때 저는 그 당시의 일을 그 
당사자들에게 회개했습니다. 

사람들을 참되게 주 안에 세우려는 사랑의 마음이 없이 성경 말씀이나 
'자기가 만든 율법'을 들이대는 것만큼 하나님의 경륜을 대적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날 행해지는 소위 이단 삼단 정죄의 상당 부분은 이런 관점에서 
반드시 재고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서기관들(scribes)의 판단 

마가복음 3:22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이 예수님을 향하여 
'저가 바알세불이 지폈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 낸다'고 
정죄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죄는 예수님이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분의 친척 중 하나가 예수님이 미쳤다고 말한 것에 
어느 정도 근거합니다. 

이 앞부분 2장에서 또 다른 서기관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하자 예수님을 속으로 참람하다고 생각했습니다(6절). 
즉 그의 성경 지식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능히 죄사함을 
줄 권세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7절). 


그의 이런 성경지식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인자로 오신 그분이 또한 하나님이심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진리의 양면 중 어느 한 쪽을 보지 못하고 다른 한쪽만으로 
주님과 그분의 지체들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큰 장애물입니다. 

또는 성경진리의 깊이에 있어서 피상적인 진리만을 붙들고 더 깊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고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성도들의 거룩'에는 위치적인 면과 성분적인 면이 있으나 
위치적인 거룩은 이해하되(고전1:2) 흠이 없는 거룩인 성분상의 거룩(엡1:4, 
히2:11)을 보지 못한 채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이단 삼단 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본 서기관의 판단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볼수 있는 눈이 
없는 한 그는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하나님의 경륜을 대적 
하다가 그냥 그렇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성경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정리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사람의 참된 필요를 관심하고 채워주는 사람을 사셨습니다. 

2. 그러한 삶에 대해 반대와 핍박이 있을 것을 아셨지만 피하지 않았습니다. 

3. 반대자들의 참소에 침묵하지 않고 알아듣도록 자신을 변호하셨습니다 
(막2:9-10, 3:23-29). 

4. 성경의 어느 한 면만을 붙잡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을 본 사람 
들에게 가하는 핍박은 계속 될 것입니다. 

5. 그러한 핍박은 주로 '자칭 유대인들'이나 '서기관들'로부터 올 것입니다. 

6. 이것은 사실은 어둠의 왕국과 빛의 왕국(골1:13, 마12:26,요일1:7) 
간의 대립입니다. 

7.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조만간 핍박과 반대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고자 하시는 분은 그러한 경우을 당할 때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고 미리 미리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고후6:8-10).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8)-죽고 사는 문제이다.


진리의 언덕 2014-01-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203.html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누가 했다면 어떤 답변이 나올까요? 아마 제 눈에 안경이라고 저마다 자신이 
중요시 했던 방면들이 강조되어 설명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을 사해주셨다고 할 것이고 
어떤 단체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 내셨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약한 자, 눌린 자, 소외된 자를 돌보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식의 답변이 예상되는지요? 각자 마다 어떤 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듣고 배운대로 그리고 양심 안에서 참으로 그렇다 라고 아멘이 되는 
방식대로 답변해 보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1) 인생을 사셨고 
2) 죽으셨으며 3)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런 답변이 어떻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런 답변을 듣고 '에이 뭐 그런 식의 설명이 있나'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너무 포괄적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답변의 세부 항목들을 설명 들은 후 '와~우 그거 말 
되네' 라고 승복하고 말았습니다. 



간략하게 그리고 조금만 그 설명을 소개드리자면.... 

주님은 <인생>을 사셨는데 그 의미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살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처럼 '인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 다윗, 
모세까지도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표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인간 
적인 약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삶의 궤적들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신 것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그렇고, 거센 파도 
가 일렁이는 폭풍우 속에서 배 한 쪽에서 주무신 것도 그렇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서 물 좀 달라고 말을 건네신 것이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예수 믿는 사람 
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 우리의 본이셨습니다(벧전2:21). 

오! 이런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삶은 얼마나 제 마음을 감동시키고 도전을 주는 
것이었던지요. 이것을 본 이후 저는 사복음서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 
셨다는 말은 너무나 일반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의미하는 것 또는 그 죽음을 통해 성취하신 사실들을 알고 나면 이 예수님의 
죽음 또한 깊은 감상과 누림의 대상입니다. 주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느냐고 누가 질문한다면 제일 먼저 나올 법한 답변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그분이 우리 '죄들'(sins-복수)을 사해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고전15:3, 벧전2:24 등 숱한 구절들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 뿐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더 많은 것들을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롬8:3은 '죄'(Sin)가 그분의 육신 안에서 정죄되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도 그 때 죽었습니다(롬6:6). 세상임금인 '마귀'가 그 때 처리 
(무효화 시킴)되었고 '세상'은 심판을 받았습니다(요12:31, 히2:14). 이것 뿐이 
아닙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의문에 속한 계명의 규례들을 폐하셨습니다 
(having abolished).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는 순간이기도 하셨습니다 
(요12:24). 그외에도 더 있지만... 

이런 진리의 지식들 중에 어떤 것은 깊은 체험까지 연결되고 어떤 것은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항목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이 깊어 갈수록 예수님이 
이미 죽음을 통해 이뤄놓으신 이러한 '사실'들은 점점 나의 체험으로 다가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일을 성취하셨을까요? 부활이면 그냥 
주님이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이지 성취는 무슨 성취냐고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독생자이시면서 부활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롬1:4, 행13:33, 롬8:29).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셨다. 거룩케 하는 자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한 근원)에서 났다 
라는 말씀은 매우 깊고 비밀합니다(히2:11). 부활은 또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눈에 일시에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게 했습니다(벧전1:3). 에베소서 2:6은 
이와 관련된 매우 깊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부활시 '생명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그러나 오늘 날 소위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경 전체가 계시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깨닫고 그 실재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적 죽음으로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옛창조를 끝내고 부활 안에서 
새창조를 산출하신 이 비밀(갈6:15)을 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에 맞추어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을 읽다가 주님이 자신의 죽음을 세번이나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에 깊은 만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었습니다. 


첫번 째 언급은 마16:21에서 입니다. 

이것은 그 앞 부분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과 음부의 권세(문들)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오셨음을 계시하신 직후였습니다. 

성경은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때 소위 수 제자라고 알려진 베드로의 반응은 매우 흥미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고 지지해야 할 그가 보였던 반응은 사실은 
옛사람 안에서의 우리 모두의 반응일 것입니다. 사탄은 다른 것은 그냥 그냥 
내버려 두고 묵인하다가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화악 몸을 일으켜 반응하는 
것을 우리는 한 두번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16:22-27까지의 주님의 뼈있는 
말씀은 우리가 액자에 써서 걸어 놓고 매 순간 바라보며 묵상할만 합니다. 


두번 째 언급은 마17:22-23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변화산에서의 변형 사건 이후에 말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겐 이런 말들이 큰 근심거리였습니다(were exceeding sorry). 
그들은 이런 말을 들은 직후에 뜬금없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이나 하고 
있었습니다(마18:1). 


세번 째 언급은 마 20:18-19 입니다. 

성경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 나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능욕하고' 라고 안 하시고 '그를 능욕하고'라고 하심으로 십자가 
의 죽음의 과정을 객관화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십자가 
에 달려 죽는 문제는 예수님에게도 그냥 턱하니 달려서 죽어버리면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을 우리는 그분의 간절한 기도내용 
에서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마26:37은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고민하고 슬퍼하셨다'(began to 
be sorrowful and very heavy)고 적고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주님은 
'내 혼(My soul)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9절에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민이 되셨으면 이런 동일한 기도를 세번이나 하셨겠습니까? 

또한 히5:7은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with strong crying and tears)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 
경외하심을 인해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대목이 성경에 쓰여있다는 자체가 기이합니다. 아니 죄인들을 위해 
죽으러 오셨으면 그냥 구세주답게 묵묵히 죽으시면 되지 무슨 예수님답지 않게 
슬프고 고민이 되는가, 또 민망하게 그런 것 가지고 울기까지 하시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은 죄만 없으시지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셨음 간과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음을 통해 짊어진 
죄악과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무겁고 가혹한 것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그러한 길을 가셨음으로 우리도 소망이 있고 
또 그분이 더욱 존귀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이제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리고 이미 성취된 사실들이 왜 우리에게 
다시 읽혀지고 묵상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을 되새겨 볼 시간입니다. 

그것은 마16:24, 롬8:13, 벧전2:21, 갈5:16, 24-25 등을 볼 때 에수님의 십자가 
와 부활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구속의 죽음의 방면을 이룰 수 없다는 것 뿐입니다. 

사실 오늘 날 그리스도의 몸이 이처럼 더디 이뤄지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인 
십자가의 죽음의 기회를 많이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말로는 십자가를 
외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지도록 꾸물거릴 때도 있습니다. 마치 함께 
밥 먹으로 식당에 가서 다 먹은 다음 내가 낼께 말은 하면서 구두 신는 시간을 
최대한 끌어 그 사이 성질 급한 다른 사람이 계산하게 하는 식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옛 사람, 옛 창조로는 새 사람, 새 창조 
를 만드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의 뜻을 알아 그분이 가신 길을 갈 수 있습니까? 

1) 자신의 뜻을 꺽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2) 자기 부인의 상황과 환경이 닥쳐 왔을 때 그 문제를 가지고 궁리하지 않고 
주 앞에 나아가 땀 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정 지방의 교회나 특정인의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수레 
바퀴가 앞으로 굴러가게 하려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들에게 먼저 
적용하려는'한 무리의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왜 어떤 지방에서는 주님 
의 빠른 전진이 있고 어떤 지방은 소리만 요란할 뿐 자꾸 헛 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줄까 깊이 고민한 필요없습니다. 아마도 그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깊고 간절하며 절대적인 기도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에 관한한 기도없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7)-책망하고, 용서하라


진리의 언덕 2014-01-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195.html
이 시간에도 많은 분들이 '당신의 뜻(Thy will)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소위 주기도문의 문구를 빌어 기도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반복해서 사용해 왔던 내용들이 가리키는 참된 
의미를 제대로 알 고 있는 분은 과연 몇 분이나 될런지요? 

즉 위 기도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땅에서 
이뤄진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누가 어떻게' 이룬다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해답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없는 분들은 아래 
제가 쓰고자 하는 내용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인 그분의 몸(교회)을 
얻는 것(엡1:23, 마16:18, 엡1:4-5, 4:13)임을 보신 분들,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이러한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데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쏟아 붓기를 갈망하시는 분들은 다음 두 가지 일들이 참으로 엄중한 것임을 
함께 새기기 원합니다. 



원칙적으로 '주님의 몸'은 '누룩없는 떡'으로 상징됩니다. 

즉 고운 밀가루와 같은 주님의 인성과 기름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연합된 것이 소제이며 또한 그 몸의 본질입니다(레2:4, 고전11:23-24). 
이러한 주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충만케 되시는 과정이 바로 주님의 
몸이 건축되어 가는 실재입니다(엡1:23, 골2:19).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누룩'으로 
상징된 거듭 난 성도들 사이에서의 '죄 짓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죄와 
허물이 있으되 한 번 거듭 난 성도라면 영원히 배제시켜 버릴 수는 없는 
몸의 지체들을 받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는 오늘 날 많은 경우 
소홀히 다뤄지거나 치우쳤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음부로 부터 올라온 
사망의 기운이 금등대로 예표되는 교회들의 간증을 흐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죄지은 자를 책망하는 문제와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죄 지은 동료를 용서하는 문제를 조금 더 상세하게 
보기 원합니다. 


1. 죄 지은 자를 책망함 

주님은 마18:15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tell him his fault, reprove)'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인 레19:17 은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rebuke)고 말합니다. 
갈6:1 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영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restore)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에서 더하여 당사자인 너 혼자 찾아가서 말해도 안 들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 말도 안 들으면 (하나님의 법도를 모르는)이방인과 
세리 취급을 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16-17절). 


여기에서 이런 실행을 실제로 하려고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세부적인 요점들이 있다고 느낍니다. 


1) 그 죄 지은 지체를 세우고 얻고자 할 목적으로 가야 합니다. 

이 대목이 99마리 양을 놓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말한 바로 다음에 언급된 것임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18: 15 하반절의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는 우리가 화풀이 
하거나 따지기 위해서 또는 지체의 허물을 폭로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각 사람 
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위함이지 넘어지게 함이 아닙니다. 


2) 피해를 입은 그 본인이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많은 때 피해 당사자는 '꼴도 보기 싫어서' 또는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해서 
찾아가면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것 같아서' 또는 직접 찾아가서 말을 하는 것이 
그냥 마음에 내키지가 않아서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우니까 당사자 아닌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말을 털어 놓곤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교회 안에 돌고 
돌아 원망과 시비거리가 되고 '가십' 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음부로 부터 올라온 말들은 얼마나 옛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빨리도 퍼져 나가는지요. 어렵더라도 본인들끼리 참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몸의 간증과 건축을 위하여 이런 상처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처리할 
수 있다면 주님의 몸 안에서 많은 누룩들이 제한을 받을 것입니다. 
오 얼마나 많은 때 소위 걸려 넘어진 사람들의 독이 묻은 말들이 다른 지체들의 
사기를 끌어 내리고 대적에게 틈탈 기회를 주어 왔던지요! 


3) 교회의 치리는 다시 얻고자 함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할 때를 알아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하지 못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약하면 많은 혼잡으로 전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죄를 지었고 심지어 교회 말도 안 들어 치리를 당해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김을 당할 뿐'(마18:17)입니다. 이방인과 세리도 
여전히 복음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무슨 세상 사람들이 전과자들을 선입관을 가지고 보듯이 '치리 받은 지체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식이 무슨 잘못을 해서 징계를 한 다음 그 자식이 마음을 열어도 냉랭하게 
대하는 부모는 그 자식을 다시 빗나가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모 자식 사이나 형제지간에 어떤 일로 인해 의를 끊자며 보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 연락도 안 한다면 그것은 그 가정에 큰 근심거리일 것입니다. 

이런 것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것과 다른 해법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방인과 세리로 여기라는 말씀 이후에 나오는 묶고 푸는 이야기 
나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 아버지가 이루시겠다는 말씀은 
이 치리를 당한 지체를 다시 얻으려는 기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무정한 말세에 엄격한 공의로 죄와 누룩을 제하는 일과 
무한한 사랑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만 
우리는 참되게 주님의 몸의 간증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마음의 중심 안에서 용서함 

주님은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18:7). 
심지어는 주님 자신도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 
니다. 성경은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닥달 하는 이야기(마18:28, 30)를 적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100억 빚을 탕감받은 자가 자기에게 1000원 안 갚은 
사람을 빚 안 갚았다고 감옥가게 할 수 있느냐고 혀를 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 다 할수 없는 죄들을 주님의 보혈의 댓가로 인해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누가 자기에게 말 실수 한 것, 금전적인 손해 끼친 것, 
자기 자존심을 깔아 뭉갠 것, 사람 취급 안 하고 무시한 것 등등으로 
다른 지체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례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지가 나보다 잘 난 것이 뭐가 있다고 나를 무시해... 
장로면 다야.... 나를 공개적으로 그렇게 무안을 줄수가 있어.... 등등 
다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사람마다 있습니다. 또 그 말을 
들어보면 수긍이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런 분들에게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닥달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시고 계십니다. 오 이 시간 이런 일에 연루된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말씀에 빛 비췸을 받고 해방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용서 못하는 마음 상태가 주님을 누리는 것을 방해하고 교회 
다른 지체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괴롭고 힘들지만 마지못해 
용서하고 화해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정도로는 참된 
화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from your hearts)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고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런 말씀들을 마음에 담아 자기에게 죄 지은 지체를 찾아가서 
사랑으로 책망 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까? 과연 누가 자기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상처와 손해를 끼친 지체(세상 사람도 아니고)를 마음 중심에서 용서를 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갈망이 이 허물 많은 지체들을 포함해서 모든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변화시켜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것임을 이상가운데 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이상이 없으면 그냥 생긴대로 당한 대로 대우하고 처신할 뿐입니다. 

2) 깊은 기도가운데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을 십자가로 넘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이제 세월도 흘렀으니 털어버리자 하는 결심만 가지고는 
어렵습니다. 

3) 아버지의 사랑은 한 마리의 잃은 양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찾고 찾아 
회복시키는 것임을 만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방치하거나 용서치 못하고 
미워하며 사람 취급도 안 하는 바로 그 지체도 하나님 아버지는 여전히 사랑 
하신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죄를 책망하여 바로 잡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무한한 용서가 이뤄짐으로 주님의 몸을 건축해 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