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단체를 초청함으로서 야기된 어려움(1932년 초)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2-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78.html
이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이 영국에서 책을 샀기 때문에 우리는 영국 형제회 사람들과의 접촉이 있었다. 1931년 말에 칠팔명의 성도들이 우리를 방문하러 오고 싶다고 그들이 편지를 보내왔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영적인 서적들을 매우 많이 읽었으며 교회 역사와 형제회 안에 있는 일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방문하려 오는 사람들은 결코 모든 형제회를 대표하지 않으며 그들은 다만 "폐쇄파 형제들" 이었음을 그는 알았다.

또 한면에서 워치만니 형제님은 그들이 오는 것은 그들의 단체를 대표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면 그들의 단체를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니 형제님은 신중하게 그들에게 회답을 보냈다."여러분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 입니다. 여러분이 오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기쁘게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 개인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여러분이 대표하는 단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당신의 말에 절대로 동의 합니다." 라고 회답해 왔다. 

그래서 1932년 하반기에 그들이 왔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면으로 교통이 있었지만 또 한면으로 아주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어떤 어려움 이었는가. 이 형제회의 형제들이 소북의 형제들을 접촉한 후 소북의 어떤 형제들이 영향을 받아서 그들과 왕래를 하고 싶어 했는데 이것이워치만 니 형제님에게 아주 큰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형제회의 형제들은 동시에 상해로부터 복주 일대까지 다 돌아보고 싶어했다. 결국 거기에서도 똑같은 어려움이 발행했다. 그래서 워치만 니은 그 일 이후로 외국어로 된 서적의 도움을 받을수는 있지만 쉽게 사람을 오라고 청할수는 없다는 한가지 공과를 배웠다.  이후에 니 형제님은 유럽에 두번 다녀왔는데 두 번째 가서는 주로 스팍스 형제가 있는 곳에 머물렀다. 비록 워치만니는 스팍스 형제보다 열서너 살어렸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워치만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워치만니를 존중하였으며  워치만니는 또한 스팍스형제로 부터 상당한 도움을 얻었다.

1939년에 워치만니 형제님이 상해에 돌아와서 특별집뢰를 열었는데. 나도 특별집회를 위해 상해로 오도록 요청 받았다. 우리는 항상 함께 교통을 가졌다. 말할때 그는 항상 스팍스 형제를 매우 감상하였는데. 우리는 그에게 왜 스팍스 형제를 오라고 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워치만니 는 지헤가 있어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간단히 한 마디만 했다. 워치만니 는 형제회의 형제들이 그때 방문했을때 고통을 받았으며 경솔하게 사람을 오라고 청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워치만니는 스팍스 형제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비록 그가 말한다 해도 도리어 쉽게 오해가 생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혜롭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1955년 과1957년에 우리 형제들은 체험이 부족한 까닭에 외부 사람을 요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팍스 형제를 오게 했다. 그때 나는 비록 워치만니와 같은 그런체험은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지켜본 체험은 약간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계속하여 스팍스 형제를 대만에 오게 하자고 나를 밀어 붙였다. 나는 실제로 더 이상 거절할 길이 없어서 결국 오게 하였고. 이로  인해 번거로움도 함께 왔다.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모른다. 나는 일생에 그러한 고통을 맛본적이없다고 말할수있다.

일반 성도들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 거의 동역자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여러분은 가서 물어보라. 영적인 것을 말하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끝에 가서는 크고 중심이 되는 것을 주의하기 보다 사소한 것에 너무 치중하여 군인형제가 집회가 끝난후에 모자쓰는것을 비평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해할수 업었다. 최종적으로 스팍스 형제가 가장 해를 준것은 교회의 지방입장 이었다. 우리의 일은 처음부터 성령의 권위와 지방입장. 이 두가지를 기본 요건으로 삼았다. 내용 방면에서는 성령의 권위가 있고. 외형적으로는 지방입장이 있다.

이 두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결핍되어서는 안된다. 이 입장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매번 적어도 두 시간씩 최소한 삼십 번은 그와 길게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다 한후에 그는 그가 나를 변케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고. 나도 또한 그 사람이 바귈수 없음을알았으므로 두사람은 할말이 없었다. 여러분은 마땅히 이러한 것을 알아야 만한다. 이것이야 말로 참되게 역사를 읽는 것이며 역사로부터 빛비춤을얻고 공과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1922-1932년까지 처음 10년동안 우리 가운데 있었던 어려움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2-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77.html
1922-1932년까지 10년동안 우리 가운데 발생한 어려움은 어디에서 왔는냐는 것이다.1922년 워치만니 형제님은 성경에서 계시를 얻어 왕재 형제 부부와 복주에서 교파를 떠나 매주일 떡을 떼는 것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겨우 2년이 지나면서 왕재 형제는 기독교의 방법으로 돌아가 안수를 받고 전도자로 세워지는 것을 받아들였다.도대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 그가 만약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큰 대가를 지불하고 교파를 떠났겠는가.

그런데 왜 겨우 2년만에 그는 목사가 그에게 안수 하는 것을 받아들였는가. 이것은 그가 그 어떤 것보다 복음 전하는 일을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에 왕제 형재는 미국 시카고 부근의 기독교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교파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워치만 니 형제님을 보라. 워치만 니 는 일생토록 교파를 거절했다. 1932년 연대에 있는 중국 독립교회와 황현에있는 남침례 신학교에서 말씀을 전한후에 1952년 감옥에 갇히기까지 다시는 교파에서 워치만 니 를 초청하지 않았다. 이는 교파가 완전히 워치만 니 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1922년에 복주에서 시작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여 떡을 떼어 주님을 기념하는 작은무리 집회가 시작되었지만  한사람은 보편적인 길를 갔고. 워치만 니 형제님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 받는 길을 택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두사람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일을 위해 보편적인 길을 간 그의 영적인 결과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위해 좁은 길를 간 사람의 사역은 비록 잠시는 거절당했지만 오늘날 전세계에 확대 되었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가장 큰 유혹은 일의 확장과 확산이다. 당신은 유명한 복음전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왕재형제는 그런 애석한 길로 갔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회복안에 들어와서 잠시 머물다가 일의 확장을 위하여 떠나가 버렸다. 비록 그들이 아직 평가 받을 때는 아니라 해도. 여러해가 지나면서 주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실 길이 없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 후에 왕재 형제가 자주 복음을 전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에 어느날 마가렡 바버자매님은  그에게 "당신은 복주에 완전히 정착해야 하며 여기 저기 돌아다녀서는 안됩니다.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돌아 다닌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위해서나 확산을 위해 있지 않고 환영받는 것을 위해 있지 않고.오직 기꺼이 거절당하고 기꺼이 좁은 길을 가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주님의 회복은 출로를 얻을 수있기 때문이다. 

1922-1932년까지 주의 회복은 다른지방으로 확산 되었다.  1924년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말레이시아 시티아완을 방문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에 그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복건성 하문부근의 장주에 가서 복음은 전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장주에 집회가 시작되었다. 1926년 하문과 고랑여를 방문했고 그 후에 장주와 동안을 방문했다. 약 이 개월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 같은해 워치만니 형제님은 안휘성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한 이야기가 있다.

워치만니 형제님은 안휘성에서 복음을 전할때  접대하는 사람의 집으로 갔을때 방에는 서양식 철 침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침대위에는 홀이불만 하나 있을뿐 요는 없었다. 워치만니는 공과를 배웠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쉬다가 철 침대위에서 잠이 들었다. 워치만니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당신이 어느 곳에 갔을때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해주시오. 저렇게 해주시오.라로 너무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 말했다.  

1926년 하반기에 워치만니는 하문과 동안 일대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도 집회가 시작되었다. 1926년 전후로 워치만니 형제님은 병이 생겼다.그래서 워치만니는 한면으로 휴식을 취하고  한면으로 남경을 방문하였다.그의 방문으로 남경에서도 집회가 시작되었다. 그해에 워치만니는 영어로 된많은 영적인 서적들을 샀는데  대부분이 영국에서 부터 구입한 헌책들이다. 그래서 워치만니는 영국의 형제들과 접촉하였고 그들과 편지로 왕래하였다.1928년 1월에 상해에서 집회를 정식으로 문덕리로 옮겨 왔으며 같은해 2월에 워치만니는 거기에서 제 1차 "이기는 자 집회"를 가졌다.

이외에도 1931년 1월에 워치만니는 광동 산두와 갈양을 방문하여 이 두 지방에서 일을 하셨다.1932년 이전에 주의회복은 그렇게 크게 확장되지는 않았었지만 주요한 것은 복건성의 복주와 하문과 동안과 장주 등에 집회가 있었다는 것이다.또한 강소북부와 절강 남부 평양현에도 집회가 있었다.

중국에서의 주의 회복은 먼저 복주에서 부터 집회가 시작되었고 다시 복주에서 부터 서서히 북으로 올라가 상해에 이르렀다.  1932년에 이르로서는 북부로 나아갔다. 그해 3월말 워치만니 형제님은 왕등명 형제와 산동성 제남부를 방문했다. 니 형제님은 제노대학 의과 대학생들 80여명을 데리고 태산에 올라가서 삼일동안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으며 산에서 내려와 제노대학 본교에서 11일 동안 머물면서 대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했다.같은해 6월 연대에서 집회가 시작되었고 제남부에도 집회가 시작되었다,1933년 9월에 연대에 집회인수가 증가하였고 돌봄이 필요 했으므로 위트니스리는 직장을 내려놓고  전시간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제시 펜 루이스 여사와 오스틴 스팍스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2-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74.html
또 한면으로 기독교 안에는 모든 것을 다 영적인 것으로 만든 한무리의 성도들이있었다. 그들은 영에 속한 일은 영에 있는 것이고. 이런 물질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떡을 뗄때 누룩이 있는 빵으로 한 조각 한 조각 나누어 뗀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설령 매일매일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 할지라도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떡을 먹는 것에 있지 않고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에 있다.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그분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참되게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기념 하는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영적인 실제가 없다. 떡을 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영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강한 사람은 제시 펜루이스 여사이다. 그녀는 형식적으로 떡을 떼는 것이나 형식적으로 침례받는 것을 반대 하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을 뿌려도 충분치 않을 뿐아니라. 물속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이 물속에 백번들 들어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정한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할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살고 날마다 생활 속에서 침례받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침례이다. 성도들이 떡을 떼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한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그 생활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되게 전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게 떡을 떼는 것이다."

그 당시 펜 루이스 여사에게 한 젊은 동역자가 있었는데. 바로 오스틴 스팍스형제이다.이후에 그가 대만에 욌을떼에 그가 펜루이스 여사를 떠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내게 분명히 말했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가 주님의 상 과 침례받는 일을 너무나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자매로서 펜루이스 여사가 거기서 머리 노릇하는 것이 스팍스가 그녀를 떠난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는 펜 루이스 여사를 떠난후 자신이 직접 짐회를 세웠다. 그의 만찬집회는 실제로 형식에 형식을 더 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가 있는곳에  4주 동안 손님으로 머물면서 적어도 세번정도 만찬 집회에 참석했다. 앞에는 오직 탁자 하나만  놓여있었고 그가 거기에서 있었다. 시적부터 끝까지 그가 혼자 서서 찬송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셩경을 잃고 말씀은 전하였다. 오랬동안 해 보았 으므로 모두들 그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떡을 나누고 떡을 먹고 잔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떡을 나누는 것이 일곱차레의 순서가 있으며. 잔을 나누는 것도 일곱 차례의 순서가 있었다. 떡이 다 돌아가고 잔이 다 돌아가면 그가 다시 말을 했다.  이후에 그는 "지금은 모두가 자유로이 경배하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몇몇 사람이입을 벌려 기도를 하는데 그 시간은 약10분 정도 였다. 그런후에 그는 다시 "자유로이 경배하는시간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가 되면 아무도 기도 할수 없고 모두가 그의 말씀을 기다렸다. 영에 속한 사역을 하는 스팍스가 여전히 이렇게 형식 속에 갇혀 있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펜 루이스 여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이고 스팍스 형제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이 실제로 주의 회복안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 이네 방면의중점에 있어서 그들이 분명옳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심 삼았던 진리안에 "솜털이나. 눈썹. 코털.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이 혼잡하게 섞여 있다는 것이다.

1955년에 스팍스 형제가 처음으로 우리를 방문했을때 먼저 홍콩에서 말씀을 전하였고 다시  대만으로 왔는데  그 기간에 거의 내가 그를 위해 통역을 했었다. 그가 전한 말씀은 실제로 회복안의가르침이었고. 어떠한 혼잡도 없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우리 모든 사람은 매우 많은 공급을 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57년에 그가 두번째 왔을 때에는 "눈섭과 코털과 솜털"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어느날 대북의 어느형제의  식당에서 백여명의 동역자들이 그와 자유로이 교통을 가졌다. 그중 한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스팍스 형제님 당신은 여기에 두번째 오셨는데  우리의일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해 주시 겠습니까. 그는 처음에 왔을때 어떤것을 보고서 틀렸다고 생각했었으나 너무 빨리 말해서는 안되겠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이런 기회가 왔으니 이제 이야기 하겠다고  그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했다.

먼저그는 이렇게 말했다."여러분 중에 군복무를 하는 형제들은 왜 집회가 끝나자 마자 집회소를 나서지도 않았는데 모자를 씁니까 " 앉아있던 한형제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는 풍습에 의하면 군인들은 어떤 곳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회때에는 고린도전서 11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무릇남자로서 머리에 무었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것이요"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자를 벗습니다.그러나 집회가 끝나면 모자를 씁니다.라고 좋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스팍스 형제는 불쾌하게 느끼며 말했다. "여러분은 성경을 따릅니까. 아니면 풍속을 따릅니까. 내가 거기서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우리가 스팍스 형제를 절대로 따를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내속에서 분명해졌다. 비록 그가 영적이고. 내가 어려서부터 그의책을 읽고. 그를 따르고 존경하며 중시 하였었지만. 그날 내 안에서는 그러한 존경심이 사라져 벼렸다. 나는 마땅히 존경해야 할자만 존경할수 있을 뿐이다.

그다음에 그는 다시 말했다. "여러분이 떡을 떼는 순서는 너무나 혼라스럽고 질서가 없습니다. 이사람이 기도했다가 저 사람이 기도하고 이사람이 말했다가 또 다른사람이 말하고 하니 너무어지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듣고고 할말이 없었다. 1958년에 그는 런던에 있는 그의 집회에 방문하도록 나를 초청하였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그의 떡을 떼는 방식을 보고서야. 왜 그가 우리의 떡떼는 것이 혼란 스럽다고 말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가 거기서 인도할때 무엇이든지 다 그가 직접하고 사람들은 다 그가 하기를 기다리니 자연히 질서가 있고 군대처럼엄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다만 어떤 역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나는 여러분이 왜 회복안에 어려움 들이 있는지 보기 바란다. 회복 안에서 어떤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와 같은 주요한 계시" 를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떠 어떤 사람들은 큰 계시도 보고 아주 세세한 것들도 본다. 중심되는 계시는 사람들에게 공급을 주지만 아주작고 지엽적인 것들은 사람들를 죽이고 교회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 밖에 또 어떤 사람들은 큰 중점을 보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보고서 이 사소한 것들로 서로 다투므로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역사은 어려움이 발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무었을 중시해야하고 무엇을 주의하지 말하야 할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바울의 완성하는 사역의 중점과 지엽적인것(가지와 잎)branches and leaves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2-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68.html
고전 1: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고전 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 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중심적인 계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그러면 지엽적인 것은 무엇인가. 침례받는 것이나. 떡을 떼는 것과 같은 일들이 지엽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이 지엽적인 것들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많은 다툼이 생긴다.예를 들면 침례를 받을
때 담수에서 해야하는가. 흐르는 물에서 해야하는가. 물이 있는곳이면 가능한가.반드시 요단강에 가야하는가.욕조를 사용해도 되는가 등이 있다.
 
떡을 떼는 것도 주일 오전에 해야하는 가. 주일 오후에 떼야 하는가. 빵을 사용해야 하는가. 누룩없는 떡을 사용해야 하는 가.아니면 날마다해야하는가 아니면 1년에 네번혹은 한달에 한번 아니면 매 주일에 한번씩 떡을 떼야하는가 이것은 쟁론의 여지가 있으며 또한 저마다의 논리가 있다.

1600년대에 재침례파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받는것에 대해 유아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성경에는 유아세례가 없고. 유아는 자아의식이 없어서 그리스도를알수없다고 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하고 회개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받기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수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침례를 받는것이 물속에 잠기는것임을  회복하였다. 그당시에 이것은 놀라운 회복이었다.천주교는 이것을 반대했으며 그들을 박해했다. 심지어 마르틴 루터,쯔빙글리,칼빈도 이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재침례파성도들을 스위스의 리마트 강에 수장시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진리를 위하여 엄청난 순교를 하였고 또한 침례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본진리가 침례회를 만든 기초라는 것을 알수있다. 바울은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고전 3:11)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작은 진리 위에 그들의 모임을 세웠다. 침례를 받는 진리가 분명하지만 이것이 중심적인 진리는 아니며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 주님께서 중요시 하고 주의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말한 의미는 무었인가. 바울은 "나는 침례를 전하는 것을 중심 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침례주는 것도 중심 삼지 않았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나아 갈때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하였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큰 능력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만일 고린도 전서를 8장까지만 읽는다 해도. 바울이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를 매우 중심 삼아 말한 것을 볼수가 있다. 여기에서 영은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포함 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전서를 읽을때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보지 못하며 생명이나 교회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는 가 그들 대다수는 오직 지엽적인 것들만보며 그 사소한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다툰다.


워치만니의 1차 이기는 자 집회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5-01-3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949.html
제 1차 이기는 자 집회
1928년 2월1일 워치만 니 형제님은 상해 교회에서 제 1차 특별집회를 가졌는데 "이기는자 집회"라고 불렀다. 그 집회의 중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그리스도의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은  약 50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에 20-30명은 외부에서 상해에 온 사람들로 그들의 태반이 강소 북부와 절강 남부의 평양에서 왔다.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체험함
1928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은 영에 속한 사람을 다 써서 출판하였다.그책을 쓰기전에 워치만 니는 이미 폐병에 걸려있었다. 영에 속한 사람을 쓰는 까닭에 1929 년이 되어서는 의사도 치료할 약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워치만 니 의 폐병은 더욱더 심해졌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날수도 없었고 밥을 먹을수도 없었으며 밤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려 편안히 잘수도 없었다.

워치만 니는 스스로도 자신은 반드시 죽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워치만 니는 이를 위하여 전일하게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믿음을 주시도록 구하였을 때 결국 하나님은 워치만 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 암아 살리라."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돌 살리시리라."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 함이로라"(고후 5:7) 마침내 워치만 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치료함을 받았다.

부흥보와 주제별 진리연구기록을 발견함
1928년에 부흥보가 상해에서 다시 발간되었다. 부흥보는 본래 1923년1월에 복주에서 창간되었는데 1925년 워치만 니 형제님이 부담을 가지고 기독도보를 발간하면서 중단되었다. 기독도보는 1925년 말부터 발간되다가  1927년 말에 중단되었다. 1928년 1월부터 워치만 니 형제님은 다시 부흥보를 계속 발간했다. 부흥보는 비교적 깊은 간행물로서 영에 속한 원칙 부활의 생명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것들을 전적으로 논했다.

1930년 4월에 워치만니 형제님은 매달 한번씩 또 다른 간행물인 주제별 진리연구 기록을 발간했다. 이 간행물은 비교적 초보적인 것으로서 대부분이 워치만 니 가 상해에서 매 주일 전한 메세지거나 혹은 다른 때에 전한 생명의 메세지였다. 출판된 부수는 부흥보와 기독도보보다도 더 많았다. 그 당시에 작은 무리의 찬송이라고 불린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1930년에 이미 130곡이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제 2차 이기는자의 집회
1931년 10월 워치만 니 형제님은 상해에서 제 2차 이기는자의 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비교적 많았는데 그중 대다수가 여전히 평양과 강소 북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번 특별집회에서 말씀하신 메세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지혜로서 더 나은 언약 혹은 신약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이미 출판되었다. 책의 앞부분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전한 것이며. 뒤에 있는 두 편은 1946년에서 1948년사이에 내가 상해에서 전한 것이다 워치만 니 형제님은 언약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셨으며. 나는 언약의 체험에 대하여 말했다.  1950년 후에 이연여 자매님은 이 두 방면의 메세지를 하나로 합하여  새언약 (워치만 니 전집 제 1집 9권) 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는데 이후에 우리는 그 이름을 더나은 언약.또는 신약이란 무었인가 라고 바꾸었다.

여기 한가지 기묘한 일이있다.워치만 니 형제님은 1920년에 구원받고서 1922년에 정식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여 교회를 세웠다. 워치만 니의 일생은 1922년부터 시작해서 1972년 주님의 품에 가시기 까지 계산해 볼때 모두 50년이다. 마지막 20년은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혀있어 일할수 없었다. 전반부 30년은 세단계의 시기로 나누어지며 매 단계는 10년씩이다. 1922년 에서 1932년 까지가 첫 단계이며. 1932년에서 1942년까지가
또 다른 단계이고 1942년 부터  1952년 까지가 또 하나의 단계이다.

1932년에 워치만 니 는 북부에서  나와 만나 북부의 회복을 시작했다.그래서 1932년이  한단계의 시작이다. 1942년에 상해 교회에 큰소요가 있어 그는 사역을 중단하고 6년동안 물러나 있었다.그래서 1942년이 또 하나의 경계선이 된다.  1952년에 워치만 니 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되 되었다. 그는 1952년부터 1972년에 주님의 품에 가기 까지 감옥에 있었다.

**. 워치만 니 에 대한 이런 기록들은 1922년 워치만 니의 사역의 시작에서부터 1932년까지의 10년간  워치만  니 의 초기 사역을  위트니스 리가 기록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에 대한 두 권의 책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은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와 역사와 계시 라는 책이다. 위트니스 리는 자기가 워치만 니와 함께 하지 않은 1922-1932년 까지의 10년의 역사에 대해  자신이 상해에 와서 워치만 니와 동역을 시작할때에 워치만니 자신이  어떻게구원받았는지.어떤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말해 주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