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천년만년 갈것 같은가?


진리의 언덕 2012-05-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7777/40195.html

그날 저녁 저는 강원도 춘천에 있었습니다.

 

감사팀을 인솔하고 일선 영업소에 출장 나왔다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이 장림씨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고 외치며 휴거가 일어 날 것이라고 공언하던 바로 그 D-day였습니다. 

 

정작 회사 내부에서 예수쟁이로 알려진 저는 그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직원들은 진짜 휴거가 일어나는지 보려고 지정까지 TV를 틀어 놓고 지켜 보았답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날 하나 같이 깊은 허탈감을 맛보았습니다.주님의 재림과 우리의 휴거에 대한 성경의 예언과 징조에 대한 진리인식이 없었다면 아마 저도 그 날 다른 직원들처럼 잠을 설쳤을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진리가 우릴 자유케 한다는 말씀을 체험한 사건 아닌 사건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종말론 때문에 혼잡을 겪었던지요)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이 세상이 천년 만년 지속될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은 말 할 것도 없고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 심지어 교회 직분자 라는사람도 이런 부류에 드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경고합니다.

그래도 어떤 이는 죽어라 하고 돈을 추구합니다.

성경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세상'이 주는 헛된 영광을 구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때 주님은 뒷전에 둡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 . 만일 너희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그것은 간음하는 것이다' 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 이런 엄중한 경고를 마음에 담아 자신을 절제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의문입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요?  미친 사람들처럼 또는 마치 무엇엔가 홀려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마냥 세태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이 사람들을 정신이 버쩍 들게 하는 무슨 묘책이 없을까요?

요 며칠 사이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주님의 재림과 그에 관련 된 일들을 쓰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종말론이라는 '벌집'을 건드리는 셈입니다.

 

 

1. 언제 주님이 오시나?

 

요즘 한국 보다는 개스 값이 싸다는 이곳도 기름(개스)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이 큰 트럭으로 이곳 저곳에 배달하는 비지니스를 하고 계신데 요즘 개스 값이 오르는 추이가 영 부담스럽답니다.

이런 것이 어디 개인 뿐이겠습니까?

원가가 상승하면 모든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가 경영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또 악화될수록 앞으로 중동지역이 점점 주목을 받게 될 것을 점치고 있습니다. 거대한 기름 밭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어 거대한 경제 대국으로 무섭게 크고 있는 중국, 성경에서 곡과 마곡 등의 용어로 일컬어지는 러시아, 그리고 이스라엘과 중동 아랍 국가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인 적그리스도(Antichrist)....

우리가 장차 지구상에 다가 올 종말의 때를 거론할 때 이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전쟁(12, 16절)과 관련이 있는 변수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상황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가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던 그 날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그날은 아니라는 성경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나 휴거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성경적인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다니엘 9장 27장과 데살로니카 후서  2장 2-4절이 말하는 예언의 내용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위 예언이 성취되려면 특히 성전 제사가 이뤄지려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고, 예루살렘이 확보되고, 성전이 재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7년 조약을 맺는 등의 징조가 있어야만 합니다(살후2:3, 단9:27).

 

물론 2500년 동안 나라없이 떠돌던 이스라엘이 1948년에 정식국가로 독립되고, 1967년에는 예루살렘을 확보하는 기적같은 일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전이 재건되지 않았고 7년 조약을 맺을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은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존재할 수도 있으나 그것의 출현을 막는 힘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살후2:6-7). 그리고 성경은 자기 때에 그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믿는 이들은 이런 성경의 예언과 불법의 세력들의 은밀한 활동들에 무지합니다. 그러나 소수 깨어 있는 성도들은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말세에 일어나기로 예언된 이런 일들이 우리 눈 앞에서 거짓말처럼 성취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니엘이 본 거대한 금 신상의 거의 끝부분에 와 있습니다(단2:31-34).

 

그렇다면 쉽게 말해서 언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살후 2:3이 성취되어야 주님이 오신다고 답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제 안에 이에 대한 많은 느낌과 감상이 있습니다.

오 주님!

우리 모두를 깨우소서! 이 시대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정신을 차리게 하소서! 주여 우리가 다 자다가 깰 때임을 알게 하옵소서! 악한 자의 마취시키는 간교한 역사를 간파해 내는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하소서! 당신의 재림을 예비하며 간절히 사모케 하소서!

 

 

 

2. 그 날에 큰 재앙이 한국을 포함한 지구 온 땅을 덮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은 다른 표현대로라면 '주의 날'이요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두려운 날이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혹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4-5절)

 

요한 계시록은 이러한 주의 날에 있을 재앙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계시록이 묘사하는 대환란의 전조와 3년 반 대환란 기간에 이뤄질 혹독한 초자연적인 재앙과 심판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분들은 계8:7-12, 9:3-11, 16장 전체, 18장 전체를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약간만 그 내용을 여기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엔 해가 총담같이 검어 짐으로 기상이변과 농작물 작황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지축이 흔들리며 거대한 산이 갑자기 사라질 것입니다(계16:20). 피섞인 우박과 불이 땅에 떨어짐으로 나무의 1/3이 다 타버리고 푸른 풀도 다  타버릴 것입니다(계8:7). 심지어 우박의 무게는 한 달란트 즉 약 60킬로가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21절). 지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건물에 수다한 사람들이 깔려 죽은 비참한 뉴스들이 연일 보도될 것입니다. 기상 학자들도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어둠이 온 천지에 내리 깔릴 때 그 안에서 무슨 살 맛이 나겠습니까? 그 날에는 강과 바다의 물들이 피로 변하여 세수할 물은 커녕 마실 물도 마땅치 않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너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온 몸의 종기 난 것으로 인해 하늘의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계16:11). 그 날엔  전갈에 쏘이는 듯한 아픔과 괴로움이 있어 너무 괴로워 죽고자 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할 것입니다(계9:5-6). 이런 재앙은 최소한 7년 중 후 3년 반 (마흔 두달, 한 때 두 때 반때 , 1260일)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악착같이 모아 놓은 돈, 자랑할 만한 학벌, 막강한 권력, 박사 학위, 건강, 미모, 집안 배경 좋은 것, 누가 옳고 그르고, 잘 났고 못났고, ...이런 것들은 다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것입니다. 글쎄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록이 성경에 있긴 하지만 나 사는 동안에 설마 그런 일이 나겠어? 싶은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깊은 영 안에서 깨어 있는 성도들은 성경에서 예언한 것들이 현실 세계 내에서 성취되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설마가 사람 잡을 날이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깨어서 신부로 단장되는 일에 온 마음을 따 쏟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 교계신문이 보도하듯이 소위 정통 교회 신도끼리 내가 옳으니 니가 그르니 하며 각목을 휘두르며 싸울 때가 아닙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3. 누가 그런 초자연적인 재앙이 임할 이 땅에 남을 것인가?

 

글을 전개시켜 가다 보니 이제 논란이 많은 주제에 까지 왔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 또 이 땅에서 큰 재앙이 있던 말던 나완 상관없다. 난 이미 예수님을 영접 했고 어찌 살든 대환란 전에는 들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라고 생각하면 이 문제는 간단 할 수 있습니다. 소위 '환란 전 휴거교리'를 배운 분들의 사고 방식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휴거가 환란 전이나 후냐 하는 교리 싸움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환란 전에 자신이 휴거할 것이라고 믿는 확실한 성경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도 적용될 것임을 확신하느냐고... 만일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느슨하게 있어서 마지막 날을 대비하지 않았다면 정작 그 날에 가서 큰 낭패와 당혹감에 휩싸여 주체하지 못할 것임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긴가 민가 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자신을 점검해 보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현재 자신이 주님의 재림을 열렬히 사모 하는가? 아니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알지만 주님이 다시 오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어 본적이 없거나 아니면 조금 만 더 있다가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가?

 

만일 '전자'라면 그는 장차 다가올 무서운 대환란을 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 3:8-10을 보면 일부 성도들 즉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인내의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무리>에게, 그러한 전제를 단서로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심으로 대환란을 피할 약속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영적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위 계3:10 약속은 일반적인 인식처럼 예수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위 말씀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인내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한 부류'에 들지 않는다면-자신의 양심 안에서 이것을 알 것입니다- 대환란을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관련 성경 기록도 찾아보고, 자신의 지금까지의삶도 진지하게 점검해 보면서 이 주제에 대해 대비책을 세워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이 글이 일부에게라도 그렇게 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면 저는 이 글을 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4. 그런즉 어찌할꼬?

 

'주님의 재림'(파루시아)과 '성도들의 휴거 문제'는 매우 복잡하며 얽히고 섥힌 것이 많아 다루기가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놓고 교리적으로 따지고 들고 얼굴을 붉혀 보았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마귀나 좋아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제는 근본적인 부분들만 짚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계시록 19장이 말하듯이 주님의 재림은 신랑이신 어린양이 신부(단장된 믿는이들)와 혼인하는 이밴트의 한 과정이라는 인식입니다(고후11:2, 계19장).

 

 그러므로 이런 각도에서 이해를 더하도록 현실적인 예를 한 번더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한창 중동 건설 붐이 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남편들이 처 자식을 고국에 남겨 두고 뜨거운 모래바람 부는 중동 사막에 가서 고생하며 돈을 벌어 고국의 가족에게 부쳤습니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남편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착실히 모으며 더 나은 삶을 꾸려 나갈 부푼 꿈을 안고 남편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을 잘 견뎌 내었습니다. 이런 아내들은 이제 세월이 지나 얼마 후면 남편이 귀국할 것이라는 편지를 받아 든 순간 그 날을 손 꼽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게중엔 일부 아내들은 남편이 없는 동안 춤 바람이 나서 크게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아내들은 남편 온다는 소식이 반갑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하루라도 그 날이 늦춰지거나 아예 안 돌아왔으면 싶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귀가 임금으로 있는 이 세상(요12:31, 마4:8-9)을 심판하고 끝내기 위해서 다시 오십니다(계11:15).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한가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준비의 정도를 나타냅니다.

 

이제 주욱 벌려 놓았던 이야기들의 끝을 바짝 오무려 결론적인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고대하며 이 땅에서 정결한 처녀로서 주님 한 분만을 사모하셨던 분들은 조금만 더 인내함으로 그 날에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양심에 화인이 맞아 방향을 잃었거나 그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 모르는 숨은 부끄러움이 있고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분들은 조용히 빛 가운데 나아가는 시간을 빠른 시일 내에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효능있는 보혈을 의지하여 양심과 그영이 책망하는 그 모든 것들을 시인하며 철저하게 자백함으로 깨끗함을 입어야 합니다(고후7:1, 요일1:9).

그 동안 호세아가 말하는 '다른 남자' 따라 다니며 그를 연애하던 부끄러운 과거를 다 자백하고 피로 씻어야 합니다(호2:5-8). 그리고 이 우주가운데 남편 노릇 제대로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참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요동하는마음을 단단히 고정시켜야 합니다(고후11:2, 살전3:13). 

 

그래야 우린 그 날에 재림하시는 우리 신랑을 기쁨과 떳떳함으로 만나뵐 수 있을 것입니다.

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지방 교회 사람들 교만해요”


유향의 동산 2012-05-2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39862.html
                                       “지방 교회 사람들 교만해요

 

지방 교회 사람들, 교만해요지난   그룹 집회 신자가 어떤 대화 끝에 생뚱맞게 던진 말이었습니다. 분은 교회생활을 하시는 언니의 8 정도의 권유와 기도 끝에 최근에 침례를 받은 사랑스런 자매님입니다. 어떤 배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들어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오늘 최근에 교회 생활을 하시게 형제님과 브런치 함께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바욜라, 탈봇, 풀러에서 신학을 하셨고 선교사와 목회 생활을 오래 하셨던 분입니다. 자리에는 몇년 전부터 친밀하게 교제를 오고 있는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신 목사님도 동석했습니다. 분의 공통점은 주님의 회복 안에 밝혀진 귀한  진리와 실행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향해 소개하고 전파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은 대형 교회들 다니며 성경적인 교회는 이래야 한다며 세미나하던 내용이 이미 지방 교회들 안에는 오래 전부터 시행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말도 했습니다.

 

물론 신학한 분들을 대하는 일부 성도들의 태도 대한 가지 아쉬운 대목도 털어 놓았습니다. 이런 며칠 사이의 만남들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에 대해서 위와 같은 제목으로 글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밝혀진 진리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생명 되신 그리스도>(3:4) 사람들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의 >(1:23) 건축하시는 것입니다(1:5, 10:10, 16:18). 또한 몸의 최종완성이 어린양의 신부인 < 예루살렘>입니다(21:9-10). 따라서 <생명, , 예루살렘> 단어가  하나님의 뜻이자 성경의 핵심입니다.  진리는 소위 지방교회들 안에서 신실한 성경교사들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저서들을 통해 상세하고 선명하게 해방 되었습니다. 그외에도  워치만니 전집 목차만을 모아 하나로 만든 책을 보면 구원, 거듭남, 성화, 변화, 심판, 휴거 ..등등 다른 기독 단체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거나 부분적으로 다뤄지는 진리 항목들이 안에서는 균형있고 심도있게 밝혀진 것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이 아마도 지방교회 성도들을 자신도 모르게  (남의 눈에) 교만하게 비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행

루터는 만인 제사장을 선포했지만, 지방 교회들은 만인 제사장을 교회생활에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모든 사람이 전도하고, 모든 사람이 가르치며, 주일날 모든 사람이 신언(설교)하는 (고전14:4, 31) 목표로 지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실행들을 성경에 맞게 다듬어 오고 있습니다. 결과  아직은 목표에 이르지 못했지만, 틀은 완전히 바뀌었고 내용도  해가 거듭 될수록 진전이 있습니다. 행크 해나그레프도 지적했지만, 지방 교회측의 신언의 실행(고전 14:4). 기도로 말씀을 먹는 실행(pray-reading)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귀한 자산입니다. 이런 점도 자부심을 갖게 하는데 일조했을 있습니다.

  

태도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노정 안에 있는 것일 우리가 투명한 이상이 현실 속에서 완결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것을 묵묵히 실행하고 실재 안에 깊이 머물기를 추구하되, 다른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어서는 지금보다는 조금 겸손하고 낮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 있습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 조금만 온유한 태도로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에 대하여 말하고, 심지어 반대자들도 그리 대할 있기를 소망합니다(벧전 3:15-16, 딤후2:25). 어찌하든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만 크게 확대 되시는 것이요, 결과 그분의 몸이 건축되는 것입니다.(1:20). 이를 위해 그외의 모든 것을 버릴 있어야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비결


유향의 동산 2012-05-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39748.html
                                              모든 일에 감사하는 비결

  

마음의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트레스 (stress)라고도 할수 있는 마음의 병이 각종 신체 질환의 간접적인 원인인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대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아주 받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http://skiny.co.kr/home/bbs/board.php?bo_table=05_3&wr_id=512&page=0

http://www.medcity.com/jilbyung/stress.html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정도를 대폭 줄일 있는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살전5:18)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 니다. 사실 말씀은 문법상 명령형이라

반드시 그렇게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험에 의하면,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모든 >(everything) 감사할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 내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협력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8:28).

 

여기서 <모든 >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일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선이 이뤄진다> 것은 어떤 일들이 풀리고 좋게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음 구절(29) 문맥을 , 이것은

우리가 주어진 어떤 환경을 통과하면서 맏아들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어떤 환경, 어떤 손실 속에서든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얻는 >(gain Christ)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3:8, 10:10).

 

수년 어느날 성경을 보다가 어떤 환경이든 환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얻을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얻는 환경이라면 그것이 어떤 환경이 되었건 감사하지 않을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살다보면 말도 되는 기가 막힌 일들, 어이 없는 일들, 당황되는 일들, 뜻밖의 손실들, 성공 또는 실패등이런 저런 환경들이 다가오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얻고 못얻고를 기준으로 하는 가치관 앞에서는 어떤 환경도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대신에 주어진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고 그것을 주님을 얻는 기회로 삼을 있다면, 환경은

좋은 환경입니다(비록 일반인의 눈엔 불행한 환경일지라도). 하지만 아무리 사람 눈에 좋아 보이는 환경도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거나 심지어   환경으로 인해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저주이지 좋은 환경 아닙니다.

 

이런 자세로 살다보니 예전에 비하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현저히 줄어 들었습니다. 또한 양심을 두고

말하건대, 비록 입술로는 감사를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다가오는 모든 환경이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사역과 사역자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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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역과 사역자에 대한 묵상

 

지난 수요일에 지체분들과 고후1:1 깊이 누렸습니다. 우리는 구절 안에 신약 사역의  뼈대가 담겨

 있는 것을 보고 놀랐고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 사도가 바울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말씀을 잠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영원 전에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후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사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도된 바울같은 사역자들을 통해 성취된 것들을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계십니다. 결과는 고린도같은 위의 도시(city) 출현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신약사역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들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몸인 교회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분배하여, 그분의 표현인 몸을 세우는 이러한  신약사역을
단수로 사역’(this ministry)이라고 호칭했습니다(고후4:1).

 

이러한 신약사역과 사역자들에 관해 묵상할 , 다음과 같은 작은 빛이 임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또는 하려는) 분들은 사역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역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몸의 건축

 

사역 또는 일은 사랑의 결과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관심하게 되고, 그것을 이뤄드리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부터 우러나오게 것입니다(사랑하는

사람 사이를 생각해 보라). 이것이 헌신을 가져오고 결과적으로 종으로 수고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분의 <장성한 아들들>  휘오데시아’(5206) 얻도록
예정하셨습니다(1:5, 4:5). 이것은 쉽게 말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얻는 것입니다(1:23).

하나님은 몸을 통해 그분 자신이 충만히 표현되기를 갈망하십니다.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기는 분은 자신의 사역이 몸을 건축하는데 참으로 기여하는지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것입니다(4:12).

 

-사역자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목양

 

주님 안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목양으로 나타납니다. 최선을 다해 사람을  행복하게 주고, 또한 신성한
생명을 얻어 주님 안에서 바로 서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러한 참된 사역자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갈망인
교회를 관심했습니다(고후11:28). 또한 우리는 그가 고린도 전후서를 읽을 성도들을 책망하든 위로하든
안에서 성도들에 대한 그의 진한 사랑의 마음을 만질 있습니다. 이와 같은 되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삼분설, 이분설


진리의 언덕 2012-05-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39532.html

                                     삼분설, 이분설

 

1) 영과 혼을 나눠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

 

이 세상에는 실익이 없는 논쟁도 많다. 특히 성경말씀과 무관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의는 무익할 때가 많다. 혹자는 사람은 전인적임으로 이것을 이분, 삼분으로 나누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이 전인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이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거듭난 사람이 성경 말씀을 지켜 순종하려고 할 때 사람의 영과 혼을 나누어 이해해야 할 불가피한 현실에 직면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16:24). 이어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5) 고도 하셨다. 위에서 <목숨>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문은 <프쉬케>()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프쉬케)를 보존하거나 또는 부인하는 것은 주님을 계속적으로 따르는 노정에서 핵심 관건이 된다.

 

그런데 만일 <> <>이 같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가?

 

이 분설 지지자들은 마16:24-25이 말하는 <부인하는 주체> <부인되는 대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혹자는 우리 안에 오신 주님으로 자기 혼을 부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과 혼을 동일실체로 보는 이분설 시각에서는 '주님과 하나된 영혼' '주님과 하나된 영혼'을 부인하는 것이 되어 말이 안 된다. 논리구성 자체에 어려움이 있다. 이처럼 성도가 이 주제와 관련된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우발적인 체험은 있으되 지속적인 영적 진보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이분설 지지자들은 머리 속에 <자기부인>에 대한 객관적인 성경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실제로 체험된 자기 부인의 역사는 그리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그 원인을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영과 혼을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믿는 이들의 영적 생명과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 만일 믿는 이가 영의 경계를 모른다면...어떻게 영성이 성장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믿는 이들이 영과 혼을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에...그들의 영적 생명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한다. 그리고...혼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에 속한 생활에 거하고 영에 속한 것을 더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다수가 이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먼저...영과 혼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 다음 영에 속한 것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2000, 30-31). ('영에 속한 사람' 영어전문을 보려면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2%27%5FL%20%0A   참조)

 

따 라서 성도들은 영적 생명의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영과 혼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은 우리 깊은 속의 <연합된 영>(사람의 영+ 영이신 주님, 고전6:17)으로 우리의 <타락한 혼(생각, 감정, 의지)>을 부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2:20, 1:21). 물론 이런 이론을 아는 것이 이런 생활을 살도록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른 진리 인식이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에게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2) 영과 혼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근거

 

이 분설은 영(spirit, 루아흐, 프뉴마)과 혼(soul, 네페쉬, 프쉬케)이라는 두 말이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됨으로 사실상 그것들은 <한 실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에 불과하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a) 로마서 8 6 :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For the mind of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of the Spirit is life and peace"(Jay. P. Green,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Hendrickson, p 915). "Now the mind of the flesh[which is sense and reason without the Holy Spirit] is death-death that comprises all the miseries arising from sin, both here and hereafter. But the mind of the (Holy) Spirit is life and soul-peace[both now and forever](존더반 출판사의 '확대 역 성경'(The Amplified Bible, 1972)).

 

위 확대 역은 우리 영 안에 계신 성령이 주시는 평강이 영으로부터 우리의 혼으로까지 확대되어 '혼의 평강'(soul-peace)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0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1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2 

 

위 말씀은 또한 <생각을 육신에 두면 사망이고, 생각을 영에 두면 생명과 평안>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stockticker>NASB</stockticker>(토마스 넬슨 출판사, 1978)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1088)). 결국 위 본문은 <육체와 영>, <생명과 사망>을 결정짓는 권한을 <생각>(혼의 주도적인 부분)에 부여하고 있다.

 

만 일 2분설 주장처럼 생각이 '영혼의 한 부분'이라면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을 포함한 이분설 주장자들은 위 롬8:6에 근거하여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영과 생각>이 분리될 수 없는 <한 실체의 두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체험 상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영과 생각이 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제 영, , 몸을 각각의 실체로 보는 3분설로 이것을 설명해 보겠다. 만일 어떤 거듭난 성도가 주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묵직하고 피곤하여 어찌할까를 잠시 고려하다가 주일 집회를 빠지고 늦잠을 더 자기로 생각을 굳히고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생각을 육에 둔 경우). 그 결과 그의 몸은 다소 피로가 풀렸겠지만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주일 집회에 빠진 것에 대해 속은 편치 않을 것이다. 즉 영적 사망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몸은 피곤하지만 깊은 곳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하여, 더 자고 싶은 육신의 욕구를 거절하고 주일 집회를 가기로 생각을 굳히고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보자(생각을 영에 둔 경우). 이 때 그는 몸은 조금 고단하겠지만 주일 집회로부터 얻은 은혜로 인해 깊은 속에 평강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 16:24<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은> 경우에 해당된다.

 

위 두 유형 중 우리의 체험과 일치되는 것은 당연히 삼분설에 근거한 설명인 후자이다.

 

만일 2분설 주장처럼, <> <생각()>이 한 실체라면 어떻게 생각이 한 실체인 영을 거스리고 도리어 다른 실체인 <육신>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b) 누가 복음 1 46-47

 

"마리아가 가로되 내 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My soul doth magnify the Lord, And my spirit hath rejoiced in God my Saviour).

 

위 말씀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에 대해 반응한 대목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이 구주 하나님을 기뻐했고, <>은 주를 찬양한다고 했다. 이렇게만 보면, 영과 혼이 구별 없이 교대로 사용된 채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한 단어 한 단어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위 말씀에서 마리아가 <>으로 구주를 기뻐한 시점은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이다(hath rejoiced). 그런데 마리아의 <>으로 주를 찬양한 시점은 <현재시제> 동사를 쓰고 있다(magnify).

 

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리아의 깊은 속에 있는 <>이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였고 그 영의 기쁨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친 결과로 그녀의 <>이 주를 찬양하게 된 것이다. 두 동사 시제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영과 혼이 각각 다르며 두 존재의 반응시점도 각기 다른 것을 증명한다. 영과 혼은 이처럼 차이가 있다.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은 이런 설명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1679).

 

(c) 히브리서 4 12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되나(살전5:23),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인류의 타락으로 사람의 영의 기능이 약화된 이후 사람의 영과 혼의 기능상 구분은 더 어려워졌다. 이것을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믿는 이가 거듭나기 전, 그의 영은 혼 안으로 타락하여 혼으로 포위되고 조성되어 혼과 하나가 되었다. 결국 영의 기능과 지각은 혼과 섞여져서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영의 주된 기능은 상실되고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영은 혼의 부속품같이 되어 버렸다.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강해질 때 자연히 영의 기능은 사람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거듭난 후에도 혼과 영이 분리되는 역사가 필요하다"(위 영에 속한 사람, 45-46).

 

그 러나 거듭 난 사람은 처음엔 여전히 이런 구분이 희미하지만, 점점 우리 존재의 깊은 속 영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편의상 이것을 연합된 영, 속사람, 새사람이라고 해 보자)과 우리의 <변화 받지 못한 생각, 감정, 의지>(, 겉사람, 옛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구조가 형성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가 말씀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해 갈 때 우리 깊은 속에 있는 연합된 영의 원함과 이것을 거스리는 것과의 '대비'는 점점 더 선명해진다. 이것을 히브리서 4:12의 영과 혼을 찔러 쪼개는 역사로 볼 수 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안에 신체(body)는 아닌 두 세력 간에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즉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교제를 통해 영적 상태가 좋을 때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가 타락한 혼을 이기고 밖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성경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나쁠 때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는 묵살되고 우리의 옛혼(옛 사람의 생각, 감정, 의지)의 요구가 밖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반대로 <내 안의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사는> 경우이다. 이런 것들은 거듭난 성도들의 일상적인 체험이지만 영과 혼을 구분(분리)하지 않으면 체계적인 설명 이 안 되는 부분이다. 영과 혼을 다른 두 존재로 보아야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제 히브리서 4 12절의 '영과 혼'을 조금 폭 넓게 접근하여 해석해 보겠다.

 

4 장 전체의 문맥은 히브리서 수신인들에게 '안식에 들어 감'을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8절에서 '여호수아가 주는 안식'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우리는 이 안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11절에서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Let us labour...)고 말함으로 이 안식이 다만 물질적인 가나안 땅만이 아님을 암시한다. 즉 여기의 안식은 저자(바울)와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을 포함한 영적이고 현재적인 의미의 안식을 포함한다. 이어서 히브리 기자는 <안식에 들어감을 힘쓸 것> <순종치 아니한 본을 따름>을 대비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이어서 12절에서 현재 쟁점이 되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는 검보다도 더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도록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위 11절에서 언급된 '저 안식'(that rest)을 우리 영 안에 오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46). 왜냐하면 우리는 마11: 28에 근거하여 주님께 나아갈 때만 참 안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거하는 동안 자신들의 불신하는 생각, 변덕 많은 감정, 거스리는 의지()로 의심하고 불평하고 거역함으로 안식을 얻지 못했다.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를 영접했던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도 유대교 사회와 참된 교회 생활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혼 (생각, 감정, 의지)안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방황하는 오늘날의 믿는 이에게도 거의 동일한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늘 우리의 혼의 방황을 끝내고 우리의 영과 관계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릴 이끈다. 혹은 은혜의 보좌로부터 얻은 넘치는 공급으로 우리의 혼의 방황이 끝난다.

 

중 요한 것은 안식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영 안에는 늘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과 방황>은 거의 우리의 혼-특히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식과 방황은 결코 같은 실체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또한 <안식이 있는 영> <방황하는 혼(생각)>도 동일 실체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방황하는 혼은 깊은 속의 안식의 영에 의해 부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황하는 혼은 안식인 연합된 영에 순종함으로 안식이 우리의 혼 안으로도 역사 되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안식 안에 들어가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된 영의 요구를 거절하고, 굳은 마음과 따지는 생각 안에 머물므로 영적인 메마름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히브리서 4장의 해석방식은 우리의 체험에 기초함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1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2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