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주의의 일어남과 발전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2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85.html
영국의 종교개혁이 교회의 개혁을 제창함에 따라 잔재하는 천주교의 독소를  제거하는 개혁주의자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소위 청교도 들이다. 메리여왕이 통치하던 기간에 많은 청교도들이 천주교 세력에 밀려 핍박을 피해 외국으로 유리하게 되었고.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그들은 칼빈주의 사상을 갖고 귀국하여 교회를 개혁하기를 바랬다.

157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수인 토마스 카트 라이트는 주교 제도를 포기하고 믿는 이들이 장로를 추천하고 세우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성공회의 주교에 대한 큰 도전이었으므로 그는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카트라이트는 한 무리의 청교도들과 종교회의를 조직하여 영국 장로교를 창시 하였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기 원하는 또 한 무리의 청교도들은  회중주의를 창시하였다 1580년에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로버트 브라운은 노리치에서 첫번째 독립 회중 교회를 세웠다.그는 교회가 참된 믿는이들로 구성되며 지방이나 지역이 교회 행정의 진정한 단위이며 그 지방의 교회는 치리 할 수 있으며 신약에 따라 믿는이들 스스로 표준을 정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청교도들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1577년 강경파에 속한 사람들이 대 주교직을  맡도록 위임하였고 천주교로 하여금 청교도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1593년에 의회는 믿는이들이 자체적으로 모일수 없다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발각되면 즉시 강제로 추방하였다.

그러므로 라이트와 브라운을 포함한 유랑했던 청교도들은 네델란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먼저 도착한 곳은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 이었고.그 뒤에 로빈슨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레이든으로 향했다.스미스는 성공회의 유아 세례가 결코 성경의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참된 믿는이만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1609년에 첫번째 침례교회를 세웠다.얼마후 스미스는 재침례파인 메노회의 믿는이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참된교회라는 것을 인정하여 그들과 손을잡기를 원했다. 1612년에 반대자들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런던에서 침례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입장이 아르미니안파에 가까워기 때문에 일반 침례교라 불리었다 그리고 칼빈의 주장을 찬성했던 일부 믿는이들은 분리되어 나가 칼빈파 침례교를 세웠다.

로빈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레이든에 정착해 독립교회를 세웠다. 이 양쪽에 있는 믿는이들은 후에 신대륙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왜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이 유럽을 떠나려고 하였을까요. 로빈슨은 이별을 고하는 말에서 그들이 떠나고자하는 이유를 다음과같이 말하였다."종교개혁은 매우큰개혁을 가져왔고 하나님의 새로운 움직임을 가져왔다.그러나 종교개혁이후에 루터파는그들이 본빛안에 머물렀고 칼빈파도 그들이 본 빛 안에 머물렀다. 각종파는 비록 로마천주교의 어두운면과오류에서 벗어났으나 그들의 빛은 단지 그들이 앞으로 조금나아가도록 인도 했을 뿐 여전이 그들이 걸었던 그곳에 머물러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전진하고 있다고 여겼다는 것을 말해준다.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더많은 빛과 진리를 그분의 백성에게 계시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당시의 보수적인 환경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새로운 빛을 더 추구하거나 실행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1620년에 이르러서 유럽에서 가장큰 종교전쟁이 발생했을때 종교전쟁의 장소를 떠나서 신대륙으로 갔다.

스피드웰호를 타고 네델란드를 출발하게 되었고. 영국에서  한무리를 태운 메이프라워호와 합류하였다.  그런데 스피드웰호가 파선하여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영국의 플리머스 항에 닺을 내렸다.

그래서 메이플라워호 한배로 다시 출항하였지만 폭풍이 너무 심해 사람들은 모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을 굳건히 결심하여  결국 9주 후에 메이플라워호을 타고 1620년 한무리의 청교도 들이 존 로빈슨과 존 스미스의인도하에 종교와 자유룰 추구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신대륙으로 가기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승객들은 대부분  박해 받았던 사람들이다.그들 대부분이 근면한 칼빈파에 열심이 있는 믿는이들이었기 때문에 미주에 도착한후에 그들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관리했다. 이것은 훗날 미국의 민주 정치체제의 기초를 세웠고 새로 일어난 강대국의 흥왕과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사람들의 속임수


그리스도인의교회생활 2014-12-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72.html
엡 4:14절 이것은 우리가 더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온갖 가르침의바람에 밀려다니거나 파고에 요동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의 속임수이며. 오류의 체계에 빠지게 하는간교한 술수입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의 사람들의 속임수는 사람에게 속한것이며. 오류의체계는  사탄에게 속한것이다.사람에게는 속임수와 술수가 있지만. 사탄은 오류의 체계를 가질수 있는 자이다.  사람의 속임수 사람의술수는 사탄적인 오류의 체계와 관계가 있다.

에베소서 4장 14절은 기독교 역사의 결론으로 간주될수있다.기독교는 사람들이 속임수와 술수로 가득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소위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에 사기와 기만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가르침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볼필요가 있다. 가르침의바람은 악한자에게 서 오는 마귀적인 바람이다.
악한자의 마귀적인 바람은 교회안으로 폭풍을 가져온다.나는 육십년동안 교회생활안에 있으면서 이러한 많은폭풍을 보아왔다.

폭풍은 바람과 파도에 의해 일어난다. 엡 4장14절은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 다니거나 파도에 요동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바람이 불때 파도가 뒤 따른다.바람에 파도가 더해질때 폭풍이 된다. 수년간의 체험으로부터 나는폭풍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낄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폭풍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폭풍은 왔다가 간다.

바울은 이단의 바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의 바람에 대해 말하고있다.그리스도와 교회로 부터 믿는이들을 벗어나게 하는 어떠한 가르침도  비록 그것이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중심목적에서 떠나게 하는 바람이다.

딤전1장3-4절 은 바울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다르게 가르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이단을 가르쳤다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신약경륜과는 다른것을 가르쳤다는 의미이다.그들의 가르침은  신약사역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과는 다른어떤것을 가르치는  즉 교회들을 건축하기 위한 하나님의 분배와는  다른것을 가르치는 어떠한 가르침이나 가장된사역을 조심해야한다.가르침의 바람은 성경과 영적인 것들에 관한 말을한다.

1933년에 우리중에 있었던 한 형제는 워치만니 형제님으로부터 이렇게 적힌 쪽지를 받았다.
"올바른 영으로 올바른 길안에서 올바른 일을 하십시오" 이말은 나에게 놀라운 격언이 되었다.나는 올바른 영으로 올바른 길안에서 올바른 일 을 하라는 것을 항상기억해야 했다.오늘날 가르침의 바람은 올바른 영안에 있지않다.

가르침의 바람의 목적은 원수사탄의 악한 목적인데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과 반대된다.가르침의 바람의 목적은 믿는이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몇몇 성도들이 믿음이 가르침의 바람에 의해 무너졌다.그들은 주님의 회복을 반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회복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정규적으로 집회에 나오지 않으며 이전처럼 주님의 권익을 많이 관심하지 않는다.그들은 손상되었다.우리의 지난역사에 따르면 회복안에 있었던 어떤 폭풍이든 그 선동자들은 매우 분열적으로 되었다.

가르침의바람의 목적과 내재적인 요소는 사람들을  사탄적인오류의 체계안으로 이끌어 가려는 사람들의 간교한 술수이다. 사탄적인 오류의 체계안으로 이끌린 이들은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중심노선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을 파괴한다.


영국의 종교개혁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71.html
16-17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은 영적인 각성 때문이 아니라. 영국국왕 헨리 8세의 혼인 문제로 야기되었다.런던교외의 템즈 강변에 위치 하고 있는 헴프턴 궁은 영국의 베르사이유 라는 별명을 갖고있다. 1514년 울치 추기경은 구기 사단에게 이땅를 사서 이곳에 대형 튜더 양식의 건축물을 지었다.

헴프턴궁은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마르틴루터와 동 시대인 16세기때 왕으로 재위하면서 거했던 곳이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와 밀접한 관계를 같고 있다. 그 당시에 울치 추기경이 있었다.이 사람은 매우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한 때 교황이 될 기회도 있었다.그런데 그와 영국왕 사이에 한 사건이 발생했다.

헨리에게는 스페인 출신의 첫번째 왕비 케서린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왕을 위해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헨리는 그녀와 이혼 하려고 생각했다.헨리는 후대가 없으면 국가 내란과 폭동이 일어날것이라고 염려하여.첫번째 부인과 이혼 하려고 했다.그러나 교황은 그에게 동의 하지 않았으므로 두사람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이런충돌로 헨리는 교황에게 분노하게 되었고. 헨리는 천주교를 버리고 영국 국교회의 인도자가 되겠다고 말했다.그는 이러한 이유로 영국의 종교를 개혁했다.이것이 영국의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헨리 8세의 아내 캐서린은 스페인의 공주였다. 캐서린은 독일 황제 찰스 5세의(신성로마제국) 고모였고. 교황은 찰스 5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요구에 즉각적인 답을 피하고 시간을 끌었다.그 당시 헨리 8세는 궁녀인 앰블린과 열애에 빠져 이혼 문제를 빨리 해결 하려 하였다.

이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인 크렌머는 이 문제에 대해 각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해 볼것을 건의 하였다.헨리 8세는 한면으로 학자들의 지지를 구하고. 다른 한면으로는 성직자들을 압박하여 국왕이 영국교회의 머리가 되고. 교황에게 세금을 납부 하는 것을 중단하게 하였다.1533년 헨리는 앰블린을 왕비로 취하고 크렌머를 대주교로 세워 그의 혼인을 승인케 하였다. 

다음해 영국 국회는 국왕이 영국 교회의 머리이며.영국 왕을 이단자 라고 칭하는 어떤 자도 반란자로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 하였다.1535년에 헨리는 왕국의 권위를 부정하는 유명 인사들을 처형하고 가기 수도원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378곳의 수도원을 해체하였다. 이로인해 영국은 수도주의가 완전히 근절되고 청교도주의로 그 지위를 대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교황 클레멘스는 즉시 반격에 나서 헨리의 교적을 파면 한다고 선포하였고 .헨리도 기도책 가운데서 교황의 이름을 삭제 한다고 선포하였다.이로부터 영국은 로마 천주교와 완전히 분리 하였다.  헨리 8세는 로마 천주교와 갈라졌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천주교의 교리와 예식을 정통이라고 여겼고.성찬의 변질성,죽은자의 미사,우상숭배등 의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였다.

1540년 헨리는 천주교 신자인 케서린 하워드를 아내로  취하고 개혁파를 거절한다는 뜻으로 찰스 5세와 군사동맹을 맺었다.1543년에는 또 중혼하는 동시에 번역본 성경을 한권도 남기지 말고 모두 불태워 없애라고 명령를 내리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엄벌에 처하였다. 그리고 루터파를 포함한 개혁주의 자들을 공격했다. 헨리는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을 왔다 갔다 하는 잔혹함에 "영국의 네로"라는 칭호를 얻게 까지 하였다.

1547년에 헨리가 죽자 그의 세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왕위에 오를때의 나이가 아홉살이 었으므로 그의 고모부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섭정을 하였다. 이때 와서야 비로서 총명한 크랜머가 대외 정책에 있어서 개신교 방식을 대대적으로 채택하였다.이것이 결국 영국 종교개혁 운동과 문화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어려서부터 개혁주의 자들에게서 훈련을 받았고 시모어도 수작농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 하였기 때문에 개신교의 세력이 크게 확장 되었다 1547년에 크랜머의 환영하에 루터 저서와유럽의 개혁주의에  관련된 저서들이 잇달아 영국에 들어왔다.이것이 개신교의 일을 강화 하였고 많은 우수한 성직자들을 배출시켰다.1553년에 크랜머는 여섯명의 신학자들과 함께  "42개 조항의 신조를 " 완성 하였는데 후에 39개 조항으로 고쳐서 영국교회의 규범을 제공하였다.

영국의 케임브리지는 학술의 중심지 일뿐아니라. 영국 종교개혁의 사상지 라고 말할 수 있다.당시 종교 개혁자들은 이곳에서 마르틴루터의 서적들과 선전물 들을 읽었다.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작은 독일이라고 불렀다.왜냐하면 이곳에 종교개혁의 사상들이 있었고 이러한 학술의 전당이 영국으로 옮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옆에는 성 메리 라는 예배당이 있다.이곳은 헨리 8세때 대 주교였던 크랜머가 있었던 곳이고 이곳에서 크랜머는 종교개혁의 진리를 선포하고 천주교의 부패를 비난했다. 그러므로 영국의 종교개혁의 역사는 이 조그마한 지방에서 싹이 텃다고 말할 수 있다.

1553년 에드워드가 16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누나 메리(헨리의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의 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메리는 에드워드 재위 기간에 있었던 모든 종교 법정을  폐지하고 영국을 다시 천주교로 돌이키고자 하였다.1554년에 의회의 각료들을 무릎 끓게 하였고 로마 천주교가 이교라는 죄명을 벗기고 영국이 다시 천주교로 돌아오게 했다. 또한 그의 삼촌 찰스 5세의 안배로 찰스의 아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 하였다.

이것은 영국 국민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하였고 외국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하게 하였다. 메리는 각지의 폭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주교로 돌아가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크랜머 등 300 여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박해로 많은사람들이 스코트랜드와 유럽 대륙으로 피난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메리는 "피의 메리" 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순교자들이 나타낸 용기는 영국 국민들에게 지을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사상은 켐브리지의 세명의 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다.크랜머. 라티머.미들리가 주된사상은 마르틴 루터의 면죄부의 공격에 대한 관점과 하나님과 사람의 합당한 관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마르틴루터의 사상을 계승했다.라티머와 미들리는 대학생때 청교도가 되었으며 대주교 크랜머와 좋은 친구 사이였다. 

미들리는 에드워드가 통치할 때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어 바알의 단을 파괴하였다. 메리 1세  황후가 다스릴때 라티머와 미들리는 이단으로 체포되어 1555년 옥스포드에서 함께 나무에 묶여 화형 당하였다. 라티머는 사형당하기 전에 "우리가 오늘날 잉글랜드에 서 점화한 촛불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영원토록 꺼지지 않으리라"라고 말하였다.

크랜머는 헨리 8세때 대 주교 였으나 메리 1세가 정권을 장악한 뒤로 그는 강압적으로 천주교를 믿도록 강요 당하였다.비록 크랜머가 신교를 포기 한다고 선포했으나 그는 여전히 메리 1세 황후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그도 화형당하였는데.그는 임종전에 신교를 포기 한것을 부인 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에 신교도가 될것이라고 선포했다.그는 자신에게 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마음이 원하지 않는 글짜를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길이 타오를때 그는 가장먼저 불살라져야 할것은 그 손이라고 했다.불이 그의 몸을 태우려고 할 때 그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오른 손이 먼저 불가운데로 들어가게 했다. 약300년후 1843년 옥스포드에서  이 세 명의 종교개혁자를 기념하는 순교자 기념비를 세웠다.

1558년에 아들이 없는 메리(단지 6년간재위)는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 (헨리의 두번째 아내인 앤불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온건한 정책을 펴 모든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1559년 의회가 교황의 권위를 폐지하고 영국왕을 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세웠다. 그러나 많은 주교들과 신부들이 이것에  서명 하는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주교들을  폐위시켰다. 천주교의 강력한 반발은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더욱 개신교로 돌이키게 하였다.1563년에 정부의 모든 관료들이 여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 하게 하고 천주교 신자들이 하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스코틀랜드는 엘리자베스의 조카이며 천주교 신봉자인 메리가 여왕으로 있었다.그때 1559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파가 된 존 녹스 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메리는 프랑스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엘리자베스여왕은 칼빈파와 맹약을 맺고 프랑스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저지 하였다.1576년에 칼빈파가 득세하자 메리는 그 세력에 밀려 퇴위 당하고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도망하였다. 그후 20년 동안 메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반대하는 구실로 삼았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569년 천주교는 엘리자베스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북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예수회 수사들을 비밀리에 영국에 침입시켜 음모를 꾸미고 무력으로 정권을 전복하여 그녀의 조카인 메리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1587년 메리는 이사건에 연루되어 처형을 받았다.

1588년 스페인국왕 필립(피의메리의 남편)무적함대가 칼레 앞바다에서 영국해군의 제독 드레이크의 맹공격을 받아 패배하므로서 이로서 세상에서의 천주교의 영향력을 정지시켰다.영국은 황금의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되었다.  이에따라 영국의 종교개혁도 형성되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영국교회는 성공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예수회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66.html

예수회 


예수회는 스페인의 군인 이었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창립 되었다. 그는 1521년 중상을 입어 퇴역 하였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것과 초기 성도들에 관한 서적을 읽고 깊이 감동을 받아 예수의 군병이 되어 규율을 엄수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을 맹세 하였다.후에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여행도 하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1528년에 그는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했다.

같은 시기에 칼빈도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으며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갔다. 1533년에 칼뱅은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하였고  1534년에 로욜라는 프란체스코와 다섯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자비를 베풀고 선교하며 교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1540년에 교황은 정식으로 예수회를 인정했다.

종교개혁 전에 천주교 내부에서도 영성을 고양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다. 천주교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서로 돕고 선행을 강조하는 조직과 수도회가 계속 세워졌다.예수회는 이러한 천주교의 위기를 배경으로 세워졌지만 이조직의 목적은 개신교를 타도하고 개신교인 들을 핍박하기 위한것이었다.

예수회의 세가지 주요 임무는 개신교를 대항하고 높은 수준의 교육를 제공하여 선교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었다.예수회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땅에서의 왕국이 로마 천주교에 있다고 믿고 교황을 대표 권위로 여겼다.그리고 교황청을 떠난 모든조직이나 교회는 이단으로 여겼다.
그들의 세력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칼 등으로 신속하게 확장되었다.그들은 종교 재판소의 지지하에 개신교를 공격하고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개신교의 위협 때문에  천주교의 신분이 낮은 성직자들과 더불어 학술계는 개혁을 위해 대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는 즉위한 후에 신속히 교회를 개혁 하려하였다.초기에 그는 루터를 통해 목적을 달성 하려고 하였으나 루터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다.

1521년 교황레오 10세가 갑자기 죽자 찰스5세의 압력으로 교황청에서는 찰스 5세의 스승이었던 하드리안6세을 후임으로 선출하였다. 하드리안6세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이전의 성경을 연구하고 성직자를 교육하며 설교하는 방식을 개선하는 등 많은 개혁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루터의 개혁을 경시하였다. 그는 재위 한지 20개월만에 과로로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라고 써 있다.



농민 혁명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62.html
   농민 혁명
1524-1525년 뮐하우젠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중세 천주교와 귀족들의 착취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들 이었다.천주교와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려온 농민들은 종교개혁을 빌미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하였다.당시 루터는 믿음과 자유를 강조했기 때문에 농민들도 자유를 쟁취하려는 생각이 일어났고. 농민들은 루터의 신학을 사회 운동의 기초로 이용하였다.

한편 토마스 뮨처(Muenzer)는 프랑크프르트 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회운동에 심취되었다. 루터와 같은시대에 살면서 루터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너무나 극단적 이어서 점차 루터와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루터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사상은 성경의 도움없이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성령을 받을 수 있다며.계시록을 인용하여 무력으로 불신자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세워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에 가져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개신교의 영향을 주었고 독일 남부의 제후들이 루터파를 박해 하였기 때문에 뮨쳐는농민들을 격동시켜 1524년 뮐하우젠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압자들을 살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폭동은 다음해에 스위스와 독일의 각지에 확산되어 하층 계급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삼십만명이 동참하였다.

초기에 루터는 귀족과 교회가 농민을 장기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하여 농민을 동정을 표하며 농민을 "사랑하는 형제" 친구라고 부르며 불합리한 영주들을 질책하였다.다른 한편으로는 농민들에게 사회적 정의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며 정부를 존중할 것을 훈계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폭동은 갈수록 잔혹해져서 살인과 방화를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 루터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루터는 "강도이며 살인마인 농민들의 집단 약탈과 대량 학살을 반대함"이라는 반박 글을 써서 복음을 구실로 노략하고 살인하는 농민은 사형에 처해야 하며 귀족들은 모든 방법으로 폭동을 제지 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루터파와 천주교와 귀족들이 연합 했으며 10만명의 농민들이 살해 되었다. 루터는 귀족들의 흉악함과 잔인함에 상심했지만 여전히 정부의 권위를 지지 했다.

 원래 농민들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루터가 자신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도울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때 이후로 농민폭동은  루터와 농민사이에 큰 간격을 가져왔고.루터와 농민은 서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그로 인해 그의 개혁 신학도 영향을 받았다.

농민이 자유와 평등을 구호로 한 폭동을 일으켜서 복음이 왜곡되자 루터는 즉시 로마서 14장과 디모데 전서2장을 신성한 권력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용하여 세상의 권위에 복종 하여야 한다고 말하게 되었다.그러나 각 국왕 하에 있는 제후정권은 루터의 말을 빌미로 영주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농민혁명후 독일의 북부는 루터파에 남부는 천주교에 속하게 되었다.귀족과 지주 계급들은 다시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제후의 권력을 강화하기 원했고 루터를 지지하여 독일의 국교의 형성을 촉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