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의 다른 개혁자들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58.html
슈벵크 벨트 (1489-1561)
슐레지엔의 귀족 슈벵크벨트 는 로마 천주교에 동조 하지도 않았고  루터파나 재 침례파와도 함께 하지않았다.  슈벵크벨트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성경 전체의 총합은 그리스도라고 하였으며 성경을 읽을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상하문맥을 연구하여 성경으로 성경을 플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교회는 신약의 초대교회를 모형으로 하여야 하며 각 지방에서 출현 하여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성령께서 다스리시게 해야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살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침례에 대하여 "믿고 침례 받는것은" 한실체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어느것도 소홀히 할수 없다고 하였다.그러나 그는 재 침례파에 가입하지 않았다.

성찬의 교리에 있어서는 루터와 다른 관점을 가졌고 그가 성경을 근거로 세운 교회가 갈수록 흥왕 하였기 때문에 루터파와 당국의 공격과 박해를 받아 30년 동안 유랑 하였다. 그가 자기가 세운 단체를 감히 교회라고 인정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파가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더 많은 믿는이들을 섬길 기회를 잃을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슈벵크 벨트와 그의 무리는 또한 잠시 침례와 떡을 떼는 것을 멈추고 교회가 하나될 수 있도록 성령의 부르심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렸다. 그들의 소임은 사람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었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을 공급하고 장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후 독일의 발전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54.html

슈파이어 회의와 아우구스 브르크 회의

1521년 교황의 재촉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5세는 보름스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며. 루터에게 출석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보름스회의가 있은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5세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자로 판정하고 그의 모든 저작을 없애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외국과의 전쟁이 빈번하여 그 명령은 철저하게 이행되지 못했다. 독일 남부 의 제후들은 모두 천주교에 충성했고 북부의 제후들은  루터를  지지했다.

1526년에 제1차 슈파이어에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는 개혁파 제후들의 회의였다.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제후들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할 수 있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보름스에서 루터에게 내린 처벌은 잠시 유보되었다.

1529년 제 2차 회의가 열렸다. 찰스 5세의 지지 아래 천주교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보름스에서의 왕명을 단호하게 관철하고 개혁파의 지역을 천주교화 하려고 하였다. 루터파는 루터 교리 배척에 대항하여 신랄하게 항의 하였다. 이 항의로 기독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나뉘게 되었고.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1530년 찰스 5세가 국경을 침범한 오스만 터키 군대를 격파한 후에 신성 로마제국내의 종교 문제를  다시 자세하게 파악하려고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신앙을 진술하도록 했다.  루터는 당시 불법자의 신분으로 제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멜란히톤을 대표로 출석하게 하였다. 멜란히톤는 회의에서 그 유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를 발표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문헌이 되었을 뿐아니라 후에 루터파의 신앙을 성명하는 표준이 되었다.

로마천주교 측은 즉시 그 성명을 반박하는 반박문을 발표하였으며 찰스5세에게 그것을 금지 해줄것을 요구함으로 양쪽 협상은 다시 깨졌다.루터를 지지한 제후들은 찰스5세가 군대로 진압을 할까 두려워서 1531년 2월말에 슈말칼덴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다.그때 오스만 군대가 다시 국경을 침범하여 쌍방은 휴전을 체결하고 협력하여 외적을 막기로 하였다.

제2차  슈파이어 회의가 끝난후 헤센왕 필립(독일의 오래된 명문 가문중 하나이다) 은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다른 개혁자들을 마르부르크의 협상에 초청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교리의 관점이 달라서 합일하려는 헤센공의 목표는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1544년 찰스5세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쌍방이 국경내에 개신교를 제거할 것을 동의 하였다.1545년 교황은 십자군을 일으켰는데 십자군에 가입하는 사람마다.모두 죄를 용서 받을수 있다고 했으며 찰스 5세 에게 군자금을 원조 했다. 

1546년 2월 18일 새벽 루터는 그가 태어난 작센주 아이스레벤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비텐부르크성당에 안장되었다.개혁파에 속한 제후들의 슈말칼덴 동맹이 실패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헤센 공 필립은 갇히게 되었으며. 찰스5세는 개혁파에 속한 제후들을 상대로 이겼다. 이로서 종교개혁 운동의 불길이 점점 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와 찰스5세는 결탁하여 개신교룰 분쇄 하였으나.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더니 후에는 서로 상극의 관계가 되었다.

더이상 내전이 격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찰스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를 통해 잠정적으로 개신교를 어느정도 허용해주었다.그러나 개신교 제후들은 잠정적 협정을 받아 들이지 않았고 1552년 프랑스왕 앙리2세와 결탁하여 찰스의 군대에 대항하였다.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에서 대 타협이 이루어짐으로서 독일은 카토릭이아닌 루터교가 성립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지배자의 신앙이  곧 지배지의 신앙"이라는 원칙이 세워졌다.각 제후들은 하나의 신앙을 선택해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쯔빙글리파나 칼빈파. 그리고 소위 급진파는 배제 되었다,



재 침례파의 발전 및 영향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49.html
16세기의 재침례파는 천주교와 당시 유럽 전체의 정치 및 기독교의 주류인 루터.쯔빙글리. 칼빈파의 일치된 공격을 받았다. 취리히의 리마트 강이 과거에 인류의 추한 형집행장소였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할수 없을것이다.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이 재침례파라고 불렸기 때문에 핍박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익사 시키는방식으로 그들이 고수하는 침례를 비웃고 부정했다.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이후에 재침례파를 반대했다.재침례파는 계속해서 개혁파의 행렬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쯔빙글리는 그들과 함께하는것을 거절하고 그들을 반대당으로 몰아부쳤다.그리고 팰릭스 만쯔를 나무에 묶어서  리마트 강에서 익사를 시켰다. 재침례파는 유아세례 반대했는데. 유아는 자아의식이 없어서 그리스도를 알수없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들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침례받을수 있다고 말하였다.그러므로 1527년 개혁파와 천주교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재침례파를 뿌리뽑기로 결정한후에 장장 25년동안을 핍박을   단행하였다. 4반세기 동안 천주교는 화영으로 그리고 개혁파는 익사나 참수형식으로 수천명의 재침례파신자들의 생명을 탈취하였다.

정교연합을 반대하고 유아세례 등을 반대하는것외에 소수의 재침례파신자들이 극단적인 개혁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급진적인 사람들이 일으킨 사회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재침례파는 이단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뮨쳐(Tomas Muenzer)와 같은사람은 사회운동에 심취되어 자신에게 성령의 인도가 있다고 선전하며 신권단체를 세우려고 하였다.그는 1524-1525년 뮐하우젠에서 농민폭동을 일으키고 개신교 사람들과 천주교 사람들을 쫓아내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유럽인들에게 재침례파가 극도로 과격하다는 인상를 남겼다.

호프만이란 사람은 원래 루터파 신도였는데 프랑스로가서 재침례파에 가입하였고 말세 사상을 제창하였다.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이므로 자기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멸망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1533년에 슈트라스 브르크로 강림하실것이라고 예언하였다.또 호프만의 충성된신도인 마티스는 일찍이 스스로를 에녹이라고 칭하였다. 1533년 호프만의 예언이 실현되지않자 마티스는 호프만의 예언이 틀렸다고 하면서 참된 새 예루살렘은 슈트라스 브르크가 아니라  네델란드의 뮌스터라고 선포하고.마티스는 무리를 이끌고 뮌스터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성도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기도하였으나 루터와 천주교에 의해 저지 당하였다. 뮌스터 사건으로 재침례파는 정부 사회 도덕 및 종교 각 방면에서 악명을 얻었다.

상술한 이러한 사람들이 결코 모든 재침례파의 모든 믿는이들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급진단체는 개혁파와 천주교에게 그들을 심하게 핍박할 빌미를 제공했다.  대부분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은 대부분 평화주의자였으며 그들은 성경을 분명히 따랐기 때문에 현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 졌다.그들은 핍박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는 더 엄격하고 다른사람에게는 선대 했다.그들은 사도시대로 돌아가는 성결한 생활을 신실하게 살아내었다. 참되게 재침례파를 대표하는 단체들은 스위스의 형제단. 모라비아의 후터파 형제단. 메노파및 아미쉬파 라고 말할수있다.

모라비아후터파는 공동체를 세우고 물건을 통용하는 것을 실행하였다.후에 많은 재침례파 믿는이들이 핍박을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세워졌고 모라비아 후터파 형제단이라고 불렸다. 후터는1536년에 기둥에 묶여 화영당하였다.

재침례파의 또 다른 분파는 메노파 이다.메노는 원래 천주교 신부였으나 1530년에 로마천주교를 떠나 재침례파에 가입하였다.스위스의 동남쪽 베른시 부근의 랑나우 라는 지방는 메노파의 발상지이다.메노파는 1530년 랑나우에서 시작하였다.  메노파 사람들이 핍박받을때  랑나우사람들은 그들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재침례파 사람들이 경건하고 좋은 사람들이며 핍박할 이유가없다고 생각하여 그들이 남아있도록 받아주었다.정부에서는 그들을 쫓도록 사람을 파견하여 찻으려고 하였지만 발견하지 못했읍니다.그래서 그들은 이곳에서그들의 최초의단체를세웠는데 이들이 메노파이다.

16세기 말에 메노파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는데  보수적인 제콥 아만(Jakop Amman) 과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엄격한 교파를 스스로 형성해 아미쉬파라고 칭했다.  그들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수염을 자르지않고  사회에서 스스로 분리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아미쉬파는 지금도 미국의 일리노이주나 펜실바니아주에서 여전히 중세기농장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고. 어떠한 전기용품도 사용하지 않으며 사진을 찍지 않고 또 마차를 자동차 대신 사용하고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영적 실재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16세기의 재침례파는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유럽의 기독교. 예를 들면 영국의 독립교회. 침례교. 퀘이커교등에 지대한 영햐을 끼쳤다.개혁파의 주류피 였던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은 재침례파 믿는이들을 심하게 반대하였다.개혁자들도 그들의 개혁초기에 로마천주교의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 새로운시대를 열었다 그것은 참으로 주님께서 가지셨던 그 시대의  큰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개혁을 이룬후 안타깝게도 그들은 재침례파 믿는이들을 박해 하게 될줄을 자신들도 예측하지 못했다.이것은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경계가 된다. 엡4장의 말씀을 기억하자. 1-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 



재 침례파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46.html

재침례파
재 침례파에는 콘라드그레벨과 헬릭스 만쯔와 브라우로크 이렇게 3명의 지도자가 있었다.콘라드그레벨의 부친은 영주였으므로 그레벨은 귀족으로 대 저택에서 부유하게 자랐다.그는 비엔나와 파리에서 그당시의 가장높은교육을 받았다.그레벨과 만쯔는 오랫동안 실행해온 유아세례를 강하게 반대 하였다. 그들은 성경에는 유아세례가 없고. 유아는 자아의식이 없어서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고 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하고 회개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받기 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혁을 추진할때 유아 세례라는 매우 민감한 문제에 봉착했다.재 침례파는 그들의 의견을 쯔빙글리에게 표명했고 쯔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폐지 할것을 의회에 촉구하였다.그래서 1525년 취리히의회는 유아세례에 대한 공개적인 변론을 가졌다.

그러나 의회는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면 정부는 전복되고 실각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아 세례를 계속 실행 하기로 결정했다.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이 출생하면 8일안에 세례를 주어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부모들을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라고 명령했다.그래서 쯔빙글리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것을 고려로 시간을 끌며 행동을 늦추었다.

쯔빙글리와 재침례파
쯔빙글리가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 했던 초반기에 그와 매우 가까웠던  두 명의 동역자 그레벨과 만쯔는 쯔빙글리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쯔빙글리에게 신약교회의모형을 빨리 회복하라고 자주 재촉하였으며 특별히 유아세례를 폐지 할것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급진적이기를 원치 않았다. 쯔빙글리는 처음에 그들을 동정하고 이해하였으나 그들의 급진적인 말과 행동을 점차 인내 할 수 없게 되었다. 1528년 회의를 통해 베른시는 기독교로 개종 하기로 결정하였다.그러나 시 정부사람들은 재 침례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쯔빙글리도 재 침례파를 정죄하고 반대하였다.그리고 재침례파를 베른시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하였다. 당시에는 한 도시에 한종교만있어서  도시의 모든사람이 그 교회의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에 재 침례파가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또 재 침례파는 종교와 정치가 절대적으로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교회와 정치의 연합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정치세력에 계속 의지해 온 쯔빙글리는 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들의 견해는 쯔빙글리의 견해보다 앞선것이었다. 재 침례파는 성경과 백 퍼센트 일치 하기를 갈망했고. 종교를 개혁 한다면는 철저히 개혁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루터와 쯔빙글리가 주장한 정교 연합을 반대하였고 또한 형식화된 조직과 성직자 계급을 반대 하였다."믿는이들 사이에는 오직 은사와 사역의 분별이 있을뿐 사역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믿는 이들을 돌보고 집회를 인도하는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침례 방면에서는 오직 참된 마음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향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침례받을 수 있었다.

성찬 방면에서 그들이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형제 자매들이 함께 누리는 애찬이라고 생각했다.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집에서 떡을 떼고 함께 애찬을 나누고 가정의 따뜻함을 누렸다. 또 한면으로는 형식이 가져온 미신적인 것을 피했다. 이 외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위임을 중시 하였는데  특히 복음전파에 적극적이었다.

1525년 취리히 정부는 재침례파의 집회를 금지시켰다. 그 명령이 공포된날 콘라드그레벨은  취리히 근교에서 그의 친구들과 함께 비밀리에 가정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가정집회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들은 집회 중에 성경에 있는대로 성인에게 침례를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서로에게 침례를 주었다. 이렇게 재 침례파는 성인에게 침례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재 침례파라고 불렀다."재침례파"는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고 놀리던 명칭이었다.

16세기 정치가와 종교 지도자들은  교회와 정치가 연합하는것을 반대하는 재침례파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이었다.재침례파는 천주교와 개신교에게 공동의 적이 되었다. 그리고 반전통적이고 반질서적인 이단으로 간주되어1525년 그레벨과 만쯔.블라우로크 와 20명의 재침례파 믿는이들이 체포되었다.

콘라드그레벨은 귀족출신이었지만 귀족이라는 배경을 배반한 사람이라고해서 핍박을 받았다.그리고 그는 취리히에서 쫓겨난후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높은 지식를 가졌던 그의 친구 헬릭스 만쯔도 1527년 체포되서 취리히베렌베르크감옥에 구류되었고.후에 그를 나무에 묶어서 리마트강에 익사시켰다.브라우로크도 취리히에서 피신한뒤 도처에 다니며 전도하다가 1529년에 천주교에 체포되어 화영당하였다.

재 침례파가 이단으로 불린 후에 많은 신도들이 잔인한 핍박을 받았다.어떤이는 감옥에 갇히고. 어떤이는 맞아죽고.어떤이는 익사당하고 어떤이는 화영당했다. 그들은 죽기 까지 고통을 당했다.1529년 슈파이어 회의에서 천주교와 루터파는 신성로마 제국내에 있는 모든 재침례파 신도들을 죽이기로 의견을 모았다.그들은 말하기를 "재침례파는 성인이되어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좋다. 당신들이 침례를 그렇게 좋아하면 우리는 당신들을 몇번이고 침례주어 물속에 잠겨 죽게 하겠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재 침례파 사람들이 취리히 리마트강에서 익사 당하여 죽었다.1520-1530년까지 수천명의 재 침례파 믿는이들이 신앙을 위해 순교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재 침례파는 200년동안 핍박을 받았다.그리고 남은 20만명정도가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들의 후대가 미국에 있다.그리고 캐나다에도 20만명의 재 침례파가 있다.

재 침례파가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주의회복 이었다. 종교을 개혁하는  것보다 사도 시대 상태로 회복하는데 중점이 있었다.그들은 그곳의 교회가 사도시대와 완전히 일치하기를 원했다. 재 침례파는 참으로 교회를 관심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은 참된 교회생활을 강조했으며. 19세기의 영국의 형제회와 20세기 워치만니의 작은무리와 동일한 교회관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계시한 교회의 참된상태를 회복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고전 1: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고전 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 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중심적인 계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그러면 지엽적인 것은 무엇인가. 침례받는 것이나. 떡을 떼는 것과 같은 일들이 지엽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이 지엽적인 것들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많은 다툼이 생긴다.예를 들면 침례를 받을
때 담수에서 해야하는가. 흐르는 물에서 해야하는가. 물이 있는곳이면 가능한가.반드시 요단강에 가야하는가.욕조를 사용해도 되는가 등이 있다.
 
떡을 떼는 것도 주일 오전에 해야하는 가. 주일 오후에 떼야 하는가. 빵을 사용해야 하는가. 누룩없는 떡을 사용해야 하는 가.아니면 날마다 해야하는가 아니면 1년에 네번 혹은 한달에 한번 아니면 매 주일에  한번씩 떡을 떼야하는가 이것은 쟁론의 여지가 있으며 또한 저마다의 논리가 있다.

1600년대에 재 침례파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 받는것에 대해 유아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성경에는 유아세례가 없고. 유아는 자아의식이 없어서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고 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하고 회개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 받기 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침례를 받는것이 물속에 잠기는 것임을  회복하였다. 그당시에 이것은 놀라운 회복이었다.천주교는 이것을 반대했으며 그들을 박해했다. 심지어 마르틴 루터,쯔빙글리,칼빈도 이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재침례파 성도들을 스위스의 리마트 강에 수장시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진리를 위하여 엄청난 순교를 하였고 또한 침례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본 진리가 침례회를 만든 기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고전 3:11)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작은 진리 위에 그들의 모임을 세웠다. 침례를 받는 진리가 분명하지만 이것이 중심적인 진리는 아니며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 주님께서 중요시 하고 주의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이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말한 의미는 무었인가. 바울은 "나는 침례를 전하는 것을 중심 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침례주는 것도 중심 삼지 않았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나아 갈때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하였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큰 능력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만일 고린도 전서를 8장까지만 읽는다 해도. 바울이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영과 생명과 교회를 매우 중심 삼아 말한 것을 볼수가 있다. 여기에서 영은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포함 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전서를 읽을때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도 보지 못하며 생명이나 교회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는 가 그들  대다수는 오직 지엽적인 것들만 보며 그 사소한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다툰다.



존 칼빈과 스위스 불어권의 종교개혁 운동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2-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644.html
존 칼빈 (장 칼뱅)
칼빈은 1509년 프랑스의 노용에서 출생 하였고 파리 대학 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1530 년 칼빈은 대학에서 히브리어와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1536년 26세에 개혁운동의 가장 완전한 교리서라고 할수있는 기독교 강요를 출간하였고 이책이 출간된지 얼마안되어 파렐의 요청으로  칼빈은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
칼빈은 원래 로마 천주교를 떠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의 종교개혁운동에 연루되어 지명 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칼빈는 로마 천주교와 결별하고 개혁 운동가들과 같은 전선에 서야 될 필요를 갖게 되었다.

스위스는 종교개혁이후에 기독교 도시로 변했다. 그것은 시 정부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 정부의 의원들은 말씀을 전할줄 몰라서 칼빈을 찾았다. 칼빈이  처음 왔을때 그의 개혁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시 정부의 사람들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고 그를 쫓아 냈으며. 칼빈는 스트라스브르크로 갔다.

1540년의 선거에서 칼빈을 반대하던 당파가 정권을 잃게 되자. 제네바의 시 정부는 그들을 인도해 줄 영적인 인물을 찾고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길이 없었으므로 칼빈을 다시 초빙하였다. 이때 칼빈은 허락하는 조건으로 자기의 개혁에 완전히 협력 해햐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정부는 허락 하였고.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교회 법규를 제정하였고. 열두명의 덕망있는 있는 장로로 구성된 교회 법정을 설립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모범적인 사회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말은 매우 권위와 힘이 있었으므로 만약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  죄가 있다거나 풍기가 물란 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정부로 넘겨졌고 정부는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둘 수 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실행은 정부를 배후로 한 실행 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어떠한 정권과 비교 하더라도 이러한 정권과 이러한 실행을 찾아볼수가 없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20년이 넘도록 거하면서 주로 제네바 대성당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가 매주 전한 말씀은매우 능력이 있어을 뿐만아니라.동시에 매우 큰  권위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시 정부가 그에게 있었고.그의 뒤를 받치고 있었기에  20여년의 시간을 들여 제네바 전체를 마치 신성한 통치가 있는 도시처럼 변화를 시켰다.

영국에서 메리1세가 집권하고 있을때 스코틀랜드에서 피난온  수많은 난민들은 불어를 알아들을 수 가 없었기 때문에 칼빈은 그들에게 영어를 사용하는 조그만한 예배당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존 녹스로 하여금 영국의 난민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제네바에는 칼빈을 지지하는 많은사람들과 칼빈을 반대하는 많은사람들이 살고있었다. 그리고 16세기 초의 제네바는 종교 핍박을 피해 피난온 난민들이 밀집한 지방이 되었다.

개신교 중 특별히 개혁 종파는 제네바의 실행이 가장 성공 했다고 여겼으므로 어떤사람은 제네바가 마치 당시 인간의 천당이며. 종교가 가장 자유로운 지방이고. 성경적인 실행을 하는 곳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칼빈이 이곳에서 그의 이상을 실행할수 있었던것은 정치 권력이 그를 부축하고 지지 했기 때문이라고 말 하였다. 게다가, 칼빈 본인도 매우 엄격하고 고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사람 들을 리버틴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바로 자유주의 자라는 뜻이다.그는 왜 그들을 자유주의 자 라고 칭했을 까. 이는 칼빈이 매우 엄격하여 술집을 열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춤출수도 없었고 술도 마실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유를 갖기 희망하는 것은 칼빈을 반대 한다는 의미였다. 어떤이들은 칼빈의 독재 정책을 반대 하였다. 그는 너무나 독재적 이었다.

예를 들면 칼빈은 삼위일체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그다지 정확하게 전하지는 못했다.스페인에서 온 급진종교 개혁자인 미첼 세루 베투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외과 의사로서 인체의 혈핵순환을 발견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그는 신학의 글들을 썼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를 논한다 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기독교 강요를 재고함이라는 책를 발간하여 칼빈을 크게 비판하였다. 때문에 칼빈은 그를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한번은 그가 제네바를 거쳐 갈때, 칼빈에게 발각되었다.그날은 주일날 이었는데  칼빈은 시 정부 사람들을 동원하여 그를 체포 하였다. 제네바 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결정하여.화형을 언도하고 제네바에서 1553년 기둥에 묶여 화영에 처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배후에서 조정한 것이었다.그러므로 그가 여기에서 실행한 교회생활 기독교의 신앙의 생활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갖고있다.

긍정적인 면을 천주교를 뒤엎고 성경의 방식에 비교적 접근한 교회생활을 실행 했다는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그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반대하는 어떠한 상황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상대방을 죽일 정도로 미워 했다는 것이다.세루베투스를  화영에 처한것은 가장 분명한 독재였다고 볼 수 있다.이 사건으로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명분을 주었으며 칼빈의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

1550년 부터 1564년까지 칼뱅은 성경 해석에 관한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성경에 대한 그의 인식과 성경의 영적인 의미에 대한 통찰력으로 그의 성경 해석 저술들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1549년 쯔빙글리파는 불링거 의 인도로 칼빈파와 연합하였다.

스위스의 개혁은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개혁의 기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그과정에서 교회조직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으나 이것은 결코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시대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깨끗한 교회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