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로마 제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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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는 고대 로마 도시 였다.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은 이 도시를  화산재로 덮어버렸다. 그동안의 발굴로 도시의 5분4가 발굴 되었다고 한다.   

2000년전 사람들이 살던 도시를 본다는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도시는 화산재로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원형 경기장.포럼(광장).신전.상가. 빵집. 대중 목욕탕등이 있고.상가 앞에는 돌로 만든 도로가 있었는데 마차들이 얼마나 많이 다녔던지 마차 바퀴 모양을 따라 돌이 움푹 파여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간 모습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거의 똑같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대중목욕탕은 바닥과 벽이 모자이크 식으로 타일이 깔려 있었고 사물함을 두는 곳도 있고 남탕에는 냉탕도 있었다.빵굽는 화덕도 오늘날의 모양과 거의 같았다. 폼페이는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도시였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항구 도시였다. 그곳을 보면서 2000년전 사도바울도 이곳을 지나 갔을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행28장13절 거기서 우회 하여 레기온에 도착 하였다. 하루가 지난 후 남풍이 불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간청으로 그들과 함께 칠일 동안 머물다가 로마로 갔다.)


행18장2절: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를 만났다. 아굴라는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왔는데 이것은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순절이후 복음은 안디옥. 마케도니아. 아가야 등으로 확산되고 결국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로 아굴라는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서 바울를 만났다.바울은 유대인의 고소로 64년경 로마 감옥에 갇혔었다.그 기간에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를 썼다.그리고 자신을 위한 변호에서 승리를 거두고 석방된 뒤 에베소와 마케도니아를 방문 하였고 (딤전1:3절)그곳에서 디모데 전서를 썼다.

67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 두번째로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순교하기전 감옥에서 디모데 후서를 썼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도 바울과 거의 같은 시기인 네로의 재위기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네로는 천성적으로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65년에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였다. 자신의 아내 옥타비아도 누명을 씌워 죽였다.자신의스승 세네카도 죽였는데 세네카는 네로에게 충고로  황제는 모든것을 할수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도 괜찮으나 황제가 노래하거나 연극을 해서는 안됀다고 말하였다고 죽였다고 한다 .네로는 31세 나이로 자살하여 죽었는데 죽을때 마지막으로 남긴말이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딤전1:9절 율법이 제정된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사람들과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경건하지 않는 사람들과 죄인들과 거룩하지 않는사람들과 세속적인 사람들과 자기 아버지를 치는 사람들과 자기 어머니를 치는사람들과 살인하는 사람들과")

클레멘트. 오리겐. 이그나티우스등과 같은 초기 교부들은 그들의 서신 가운데서 이 일을 언급 하고 있다. 네로가 죽은 뒤 도미티아누스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와 신으로 존칭할것을 요구하였다.사도요한은 도미티아누스 재위시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계시록을 썼다고 한다.그 후에 트랴얀황제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통치기에 예루살렘 감독인 시메온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안디옥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사자에게 물려죽었다. 서머나 감독인 폴리갑도 피우스 재위기에 화영 당하여 순교하였다.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와 잔혹함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주후 67년 부터 222년 까지 교회는 매우 큰 박해를 받았다.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핍박을 받을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 해졌고 인수도 크게 증가 하여 귀족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성경을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거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을 것을 강요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살아남은 교회 역사학자인 에우세비우스는 친필로 기록하였다.

히 11:35 .어떤 사람들은 고문을 받아 죽게 되어도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풀려 나기를 원하지 않았읍니다.또 어떤 사람들은 조롱받고 채찍질 당하는 시련을 겪었고. 심지어 결박되어 감옥에 갇히는 시련까지도 겪었습니다.그들은 돌에 맞아 죽었고 톱으로 잘라졌으며.

1.초기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안에 견고히 머물며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며 주님의 구원을 온땅에 전파하였다.

2.박해로 인해 믿는이들은 대부분 소규모로 집에서 집회를 하였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바랬으며.생명의 위협에도 두려움없이 가정집회를 하였고 지하동굴무덤에서도 집회를 가지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3.초기 교회 교부들은 신앙을 위한 변증과 진리에 대한 변호를 힘쓰므로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간략한 로마 제국사 1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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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설령 인류의 역사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세계정세는 바로 하나님의 안배하에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으며 주전 753년에 티베르강에 인접한 일곱개의 언덕위에 세워졌다.로마 황제들이 살던 왕궁이 위치한 팔라티노 언덕과 유티테르 신전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 로마광장을 중심으로 첼리오 언덕 에스퀼리노언덕 비미나레언덕 퀴리날레 언덕이다.

오늘날의 팰리스는 로마 황제들이 살던 언덕 팔라티노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팔라티노언덕아래에는 영화 벤허에서 볼수있는 전차 경기장이 있다.

교회사에서 로마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믿는이들 수 많은 순교자들이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위해 흘린 피와 땀으로 얼룩진 도시이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인의 시조는 늑대젖을 먹고 자란 두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한다. 로마도 로물루스라는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고한다.

(행28:11절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 배에는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의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주전 509년부터 60년 삼두정치(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마는 공화정을 시행하였다.주전 54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평정하고 전제정치의 기초를 닦았다.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 당하고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일어나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와의 2차 삼두정치를 마감하였다.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기 27년전에 원로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아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로마 대 제국을 건설할수있었던 원동력을 보자. 영토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해 점령한 땅을 식민지화 하지않고 속국화 하여 지배하였다. 수탈하거나 착취하거나 학대 하지않고 집정관을 두어 로마의 문화와 정치 경제를 받아 들이도록하고 지배한 지역에는 도로와 상수도를 설치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하여 로마시민과 똑같은 지위와 특권을 가지도록 하였고 세금을 걷어 들이도록했다.

그리고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유피테르 신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피아 가도를 통하여 지중해 연안과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 까지와 북 동쪽으로 에스파냐(스페인) 갈리아 (프랑스)와 브리타니아(영국) 메소포타미아 까지 영토를 넓혔다.

(행28:15절 그곳 형제들이 우리에 관한 소식을 듣고 아피온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라는 곳까지 우리를 맞으로러 나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기를 얻었다.)

고대 로마는 시멘트를  발견하여 석회암 대리석을 사용하여 웅장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로마시대의 수로 건설은 놀랍다. 높은산에서부터 수로를 통하여 시민들이 물을 사용 할수있도록하고. 수천명이 동시에 목욕할수있는 목욕탕도 건설하였다.

도시의중앙에는 급수탱크시설이 되어있고. 그곳에서부터 물은세갈래로 나뉘어 귀족들과 공중목욕탕과 일반시민들의 가정으로 물을 공급하였는데 가뭄이들어 식수가 부족해지면 가장먼저 귀족집으로 가는물을 끊고.다음으로 공중목욕탕. 마지막으로 시민들의 물을 끊었다고한다. 

주 예수님은 아우쿠스투스황제 통치기에 태어나셨다. 아우쿠스투스 왕정이후 로마는 안정된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때를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부른다. 시대에는 언어가 통일되고 정치가 통일되었으며.상업이 발달하고 통상범위도 확대되었으며 치안도 안정되었다.

이렇게 세상이 통일된상황은 복음이 확산되는 편리성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경륜과 깊은관련이 있음을 보아야한다.만약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알렉산더가 남긴 지중해 연안의 수많은 나라들이 분열되어 요동과 불안으로 통일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성경의 예언대로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호적신고를 명한것이나.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리라는 예언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언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로마제국은 주님께서 오시기 72년전에 스파르타쿠스난을 통해 붙잡힌 포로들을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참하게 죽였고 그 십자가의 행렬은 수십리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로마제국으로 인해 통일된 언어와 온땅으로 통하는 도로와 안정된 치안을 가졌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것이 성의 경계를 넘으면 되는 것처럼 쉽게되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볼때 로마제국의 패권을 위한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복음의 개척을 위해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볼때 일반인들처럼 수 많은 자료를 갖고 결과을 알수없는 원칙과 노선으로 임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의 노선에 따라 역사를 연구해야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것은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완성된사역을 확산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것임을 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