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굴욕과교황제도의 몰락.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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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굴욕

11세기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정욕을 방종한 상황들이 곳 곳에서 볼 수 있었다. 1073년 그레고리7세가 교황자리에 오르자 전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성직 매매를 엄격하게 금지하였고 성직자 독신제도와 그때 까지 국왕이 갖고있던 성직 임명권을 교황이 갖는것 등의 교황의 권리를 확고하게 확립 하므로서 교황과 황제들 사이에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언급할 만한 일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노사의 사건이었다. 1075년 정치와 종교간의 희극적인 투쟁이 있었다. 두 주인공은 그 당시 강자 들로서 정치에서는 하인리히 4세이고 종교에서는 그레고리 7세였다.하인리히는 그레고리가 교황으로 선출되는것을 반대하였다. 그레고리가 교황이 된후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독일국경 내에 있는 각 교회의 주교 임명권을 포기 하라고 명령함으로 성직자 서임권 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교황은 하늘로부터 성직자 서임권을 받았다는 말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하인리히 4세를 파면하고 왕위를 폐위 시켰다. 파면후 하인리히 4세에 동조하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1077년에 하인리히4세는 걸인의 모습을 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추운 겨울에 험준한 알프스산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에있는 카노사 성으로 찾아가 눈 덮인 성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베옷을 입고 죄인의 모습을 연출하며. 맨발로 3일동안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황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그레고리는 하인리히가 자신을  폐위 시켰다는 이유때문에 그를 만나지 않았지만.그레고리교황 자신은 평범한 목수 출신이었고 .귀족인 독일의 왕이 3일동안 꿇어 앉아있는데 사면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레고리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3일이지난뒤 성문을 열고 사면을 해주었다.

그당시 교황의 파면은 황제나 귀족이 죄를 짖고도 순종하지 않을때 교황은 성례 금지령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성례가 금지되면 그나라에 장례를 제외한 성찬,침례,혼례등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반항하게 된다는것을 하인리히4세는 두려워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압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수모를 당한 하인리히 4세는 세력을 키워 그를 반대했던 귀족들을 정복하고 3년뒤 군사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하여 1084년 점령하고 클레멘스 3세을 새 교황으로 취임하게 하고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7세는 3년뒤 정의 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배 신세가 되어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레고리7세가 새로운 통치 방법을 강구하고 권위를 새로 회복하기 위하여 시도 하였으나 종교와 정치의 추악한 투쟁만 있을뿐이었다.

중세 교황과 정권의 관계는 복잡하여 때로는 결탁하고 때로는 충돌 하였다. 정치와 종교사이의 야합과 대립.신권과 왕권의 권력 투쟁을 볼수있다. 중세 시대는 부패하고 변절되고 정권야욕이 가득한 암흑 시대였음을 볼 수있다.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마져 죽고 난 다음 성직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고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 아래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협약에서 통과 되었다.

교황제도의 몰락

1305년에 교황이된 클레멘트 5세는 프랑스의 영향아래 있었고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1309년에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겼다. 아비뇽 교황청은 70년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역사는 이기간을 "교회의 바빌론 유수시기"라고 말한다.

당시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 주된 원인은 교회의 부패함과 십자군 원정을 위하여 교회는 책임질 수 없는 영적인 구호로 사람들의 참가를 격려하였고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죄를 사하여 줄 뿐아니라 사후에 천당에 갈 수 있고 하늘의 보상이 있다고 약속을 하였다.

교회는 영적인 약속을 남용하여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게다가 원정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 재원을 충당 해야만 했다. 1300년 보니페이스 8세는 로마로 성지 순례를 와서 침례를 받으면 죄가 청산된다고 하였다. 또한 무릇 로마로 오지 못하는 이들은 금전으로 대체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황청은 재화가 쌓이게 되었다.

이후로 성당를 보수하려 하거나 재정이 궁색해 지면 속죄 증명서를 대량으로 찍어 판매하는 면죄부 제도를 세웠다. 또한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재물을 거두어 들이는 일들이 수 없이 발생했다. 성인의 유물.뼈.아론의 지팡이.예수님이 심판 받을때 걸었다는 계단 등이 모두 사람들이 자신이나 연옥에 있는 가족의 속죄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 "금화와 은화가 헌금통에 떨어지며 딸랑 소리를 낼때 영혼이 즉시 연옥 가운데서 나온다."

14세기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교황청과 국왕 사이에 충돌이 갈수록 빈번하게 되었는데 교황 보니페이스 8세와 프랑스왕 필립4세 사이에 세금과 권력의 문제로 인해 일련의 투쟁이 발생하였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프랑스 국왕은 교회에 세금을 징수했다.

교황은 어떠한 정부도 교회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금지하며 그렇치 않다면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라고 명령하였고 더나아가 교황은 자신이 영적인 일을 주관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동시에 땅에 속한일을 주관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모든사람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공고를 반포했다.1303년 필립4세는 교황을포로로 잡아 감금하였고. 얼마안가 보니페이스8세(1294-1303)는 감옥에서 죽었다.

단테

이탈리아 문학에서 신곡을 쓴 단테라는 문학가 가있다. 단테는 당시의 교황이었던 보니페이스  8세를 매우 미워했다고 한다. 단테는 플로랑스 사람이었는데 플로랑스에서 민주운동이 일어났을때 보니페이스 8세는 플로랑스의 귀족들을 도와 단테를 포함한 민주 운동가들을 진압하였다.

결국 탄테는 감옥에 가게되었는데 신곡에서 단테는 보니페이스 8세를 지옥의 가장 낮은곳으로 보냈다. 1300년에 보니페이스 8세는 로마로 성지 순례를 와서 침례를 받으면 죄가 청산된다고 하였다. 단테는 1300년 희년 성지순례에 참석 하였는다.로마에는 성 천사의 성이 있는데 그 앞에 다리가 있다.

그당시 그다리에는 희년 성지순례하는 사람들로 메워져 있었는데. 그때 단테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밟히며 심지어 다리에서 떨어질 정도로 많은사람들을 보고. 신곡에서 사망의 지옥으로 향하는 다리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걸어갔다고 썼다. 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인지 이다리가 사망으로 가는 것과 같다는 느낌은 성지 순례때 얻은 영감일 것이다.

단테가 감옥에 같히게 된것은 보니페이스 8세  때문이었으므로 그는 보니페이스 8세를 죽도록 미워했고.그 아픔과 증오를 신곡에 썼던 것이다.

성 천사의 성은 티베르강가에 있고 베드로 성당에 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원래 이곳은 하드리아누스황제의 묘가있는 곳이었다. 천주교는 후에 그곳을 도피성으로 만들었다. 외적이 로마성을 공격한다거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교황은 이곳으로 피신 했었다.

또한 죄수들을 감금하거나 교황이 다른교황을 타도한 후에 감금하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중세의 천주교는 성례를 주관하고 심지어 황제의 대관식도 주도하였다. 종교의 권위로 왕권에 대항하며 국가의 대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성 천사성은 중세에 왕권과 신권이 투쟁한 또 하나의 전쟁터라고 말할수있다.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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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1074-1270년 동안 유럽에서는 8차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 이 때에 예루살렘은 셀주크 투르크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셀주크 투르크인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써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세력을 급속히 팽창시켰다. 그런데 셀주크투르크인은 다른 이슬람 교도와 달리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를 금지 시켰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하는 사람들의 안전 문제로 인해  1095년 동 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로마교황은 이기회에 동 로마제국의 교회를 로마교회에 복속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동 로마 제국과 로마 교황은 서로 대립상태에 있었으며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1095년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열고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하였다. 이전쟁의 목표는  성전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이라고 말하며. 십자군에 가입하면 죄를 사하여 줄뿐 아니라 사 후 에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확신을 시켜주었다.

1099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약탈과 살육을 자행 하였다.이슬람인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혀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러나 100년후 예루살렘은 곧 다시 이슬람인의 수중에 들어갔고 교황은 계속해서  십자군을 파견하였다. 8차례의 원정 중 목적을 달성한 것은 1차 원정 뿐이었다. 원정 군대는 오합지졸 이어서 유럽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을뿐 아니라 자원도 소모하였다.

1212년에 교황청은 수천명의 어린이로 조성된 어린이 십자군을 불러 모았는데 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 심지어 4차 원정 때 는 동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라틴제국을 세운일도 있었다.

200년에 걸치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그 결과 사람들은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영지를 돌보지 못한 탓에 수입이 줄고 가산을 탕진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반면에 왕과 상인들은 세력이 커졌다.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왕은 교황과 영주들을 누르고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인들과 손을 잡았다. 십자군 전쟁은 봉건제도를 뒤 흔들었고  유럽사회 구조를 철저히 바꾸었다. 귀족의 지위는 하락했고 새롭게 일어난 상인과 지주가 세력을  떨쳤다.

십자군이 출발한 장소가 베네치아 였었는데 베니스 항의 안정과 활발한 상업으로 인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로 인해 향후 르네상스를 촉발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1400년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발원하였다. 이 시대의 주제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이상주의 였으며  사회 중심도 봉건 제도 아래의 군왕 귀족들로 부터 점진적으로 경제적인 실권을 가지고 있던 상인들과 평민에게로 전환되었다.

이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었다.메디치 가문의 통치로  피렌체의 경제는 활기차게 발전하였고 정치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문예 부흥의 중심이 되었다.원래 귀족이었던 이가문은 13세기에 금융업으로 가문을 일으켰고 거대한 부 를 쌓았다.






수도주의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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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체제 하의 개혁
중세 천주교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수도 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 주의는 당시 부패한 사회 분위기를 올바르게 인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가 효력를 발하게 되고 더욱이 교황에게 재판권이 부여되자 성경의 진리를 지키려던 수도회마져 진리로 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우리는 역사적인 영적 위인을 받아들이는데 분별력이 필요하다. 예를들면 마담귀용은 매우 영적이었지만 믿는이들이 마리아를 경배하도록 인도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틀린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가 쓴 찬송가는 매우 영적이지만 어떤면에서 눈이 가려진 면이있다. 베르나르도도 교황을 높이고 마리아을 숭배하였다.
우리는 분별력이 있어야한다. 한면으로 그들로부터 취할것을 볼 필요가 있고 다른면으로 거절해야할것을 볼필요가 있다.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 읽을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수도원운동에는 은둔을 강조하는 수도원과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도하는 탁발수도회가 있다.
베네딕트수도회.시스터시안수도회는 고행을 하며 수행하는 은둔수도회이다.그들은 권력보다 선지자의 정신을 중시했다. 그리고 일을 신성시 했기 때문에 학술보다 노동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후에 농업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탁발수도회(거지.구걸.수도원에서 나와각지를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는 수도회)
교회가 세속화되자 수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원 운동은 은둔을 강조한 수도원과 각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가 있다.

탁발수도회 의 수도 단체 중 가장 유명한 두파가 있었는데  한파는 프란체스코 회이고 다른 한파는 도미니크 회이다.
도미니크회
도미니크회의 창설자는 스페인 사람 도미니크이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신앙을 지키고 이단인 알비파의 믿는이들을 다시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다. 도미니크는 오직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야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유사한 체제를 세울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이 수도하는 이단자들의 신앙을 바꿀수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식과 학문을추구하는 이들과 이단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부담을 가진 이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종교 재판소의 전신이 되었다. 그의 주장은 대학에서 인정을 받았고 학술계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233년 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도미니크회에게 알비파를 소멸할 것을 명령하였고. 그결과 알비파는 14세기 말에 멸절되었다.

프란체스코회
프란체스코회는 1209년아시시 에 세워진 소 규모의 구걸 수사단 이다. 그들은 마태복음10장 7-9절 까지의 교훈을 준수하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사도의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며.재산을 소유하지않고 자아를 버리고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 복음을 전파 하라는것. 주교의 허락없이는 선교하지 않으며.신학 문제에 관여하지 않음.원수와 화해함.등의 사상으로 세상사람들로 칭송을 받았다.

프란체스코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을 강조하였으며.그러므로 교황의 인정을 받았으며 후에 교황의 권위의 중요한 버팀대가 되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전도하는 수도회가운데 유명한 무리는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 까르멜회 아우크스티누스 수도회가 있다. 마르틴루터는 아우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다. 이러한 수도회는 모두 청빈하고 순복하는 생활을 하고 자선사업과 기도회를 중시했으며 엄격한 단체생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기 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부유한 자들로 구성된 수도회라고 말할수 있고. 프란치스코회는 빈궁한 사람들로 구성된수도회라고 말할수있다.원래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집의 자제였으나 구원받은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기꺼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그래서 프란시스코 수도회를 빈궁파라고도 한다.



왈도파

1173년 중세기 로마 천주교가 교황의 권력를 확장하고 정치 권력과 다투며 부를 축적 하려고 힘을 다하고 있을때  프랑스 서부와 이탈리아 북부의 산악지역에서 성경으로 돌아가 사도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결한  단체인 왈도파가 출현하였다.

그들은 로마천주교의 영향을 받지않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악지역에서 주님은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한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에 근거한 순박하고 단순한 교회생활을 시작했으며.먼저 그들는 라틴어 성경을 그 지방의 언어로 번역했다.

종교개혁 수백년 전에 존재했지만 그들이 지킨것은 사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힌 것이었다. 왈도파는 첫째로 성경을 높혔고. 둘째로는 교회생활을 하였으며  셋째로 복음전파 방법이고 넷째로 그들의 영적 생활이다.비록 이 단체가 천년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는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가복음 10장21절의 말씀에 따라 모든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공공장소와 사방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 하였다.이 운동은 프랑스 남부로부터 이탈리아 와스페인. 독일의 라인강 지역으로 퍼졌고 심지어 보헤미아 폴란드 까지 확장되었다.

왈도파는 13세기 두 파로 나누어 졌는데 보수적인 한파는 로마교회로 돌아갔고.진보적인 파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견지하였다. 왈도파는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그리스도를 신앙의 유일한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들은 인위적인 신조를 거절하며.평신도들이 성경에 따라 복음을 전파할 권리가 있음을 견지하였다. 마리아를 숭배하는것 성인을 숭배하는것 성체의 변화를 반대하였다. 또 연옥교리와 미사를 부정하였으며. 침례와 떡 떼는 것 이외에 모든 성례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교회가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갈때 주님의 부르심에 충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대로 교회가 세상 권세와 부 를 포기 하기를 원치 않을때 교회는 세속적으로 변하고 교회의 실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인과 성상 성물을 경배하기를 원치 않았고 십자가도 경배하지 않았다. 종교 재판소 십자군과 사형등 성경에 위배되는 실행을 반대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로마천주교로 하여금 그들을 매우 미워하게하여 역사적으로 최소한 다섯번의 큰학살이 있었다.

로마 천주교는 이 세상 정권을 사용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어떤때는 한번에 5000명 이상의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 깊은 산과 험준한 산악지대는 그들에게 낮선 곳이었고 이지역은 왈도의 향민들이 지주였기 때문에 돌로 대항하여 그들은 몇번의 공격이 모두 실패하자.15000명이상의 군대를 파견하여 1655년에 피에 몬테 계곡은 대학살의 피로 물들게 하였다. 

왈도파는 로마 천주교와 적대적이 아니었으며 자신들이 교회 밖에있는 다른 단체라고 느끼거나 생각하지않았고.교회를 대적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취하는것 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로마천주고는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 했고. 그들은 사도의 계승을 받은 성직자만 복음을 전하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가난하고 학식없는 이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왈도파는 어떤 조직도 없이 가정에서 모이고 나이든 사람이 어린이를 가르치고 복음 전하러 나갈때는 상인으로 가장하여 나이든 사람의 인도하에 2명이 한조가 되어나갔는데 이러한 실행이 로마천주교로 하여금 뼈에 묻힌 원한을 가지게 하였다. 

13세기 의 로마 천주교는 왈도파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척하였다. 왈도와 동시대에 있었던 프란체스코도 청빈을 주장하고 실천하였으나 로마 교황청은 그를 교회의 성인으로 추앙하였다.왈도파의 복음 이상은 잘못된것이 없었으나 로마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단정되어 심한 박해를 받고 대학살을 당하였다.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뒤 왈도파는 신교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다.

중세의 수도주의 운동은 마치 맑은물이 천주교의 부패한 탁한 물 가운데로 흘러 들어간것 같으나 이 맑은물이 권력의소용돌이에 빠진뒤 교황은 자신을 위해 이색분자를 제거하는 집행자가 되었다. 수도회가 일어나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심오한 신앙 연구나 고행의 수도 생활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종교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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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재판소는 교회 역사 가운데 있어서 가장 어두운 한 페이지이다. 로마 천주고는 이단을 소멸 하는것을 목적으로  1233년에 로마 교황청을 따르지않는 이단을 전문적으로 심판하는 교회 법정을 세웠다.법정에서 이단으로 고소된 사람은 변호사를 둘수없었고  원고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이단으로 고소되면 어린이나 범죄자의 증언.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도 모두 정식 증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무고함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피고는 유죄로 간주되었다.

법정에서 회개한 자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면되었다. 무릇 피고의 변호자도 공범으로 간주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교회에 조사기관을 설립 하고 파문 규정을 만들고 이단 용의자들을  심리하기위해 종교 재판소를 설립했다.

종교재판소는 1만여명에 달하는 중세 유럽 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종교 재판관에게는 이단 용의자들을 고발할 권한이 주어졌다. 용의자들은 고문과 매로 죽음의 공포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만했다.

알비파

1145-1244년 사이에 존재한 알비파 기독교인 들이 있었다.이들은 프랑스의 알비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알비파 라고 불렸다. 당시 로마천주교가 권력을 탐하고 뇌물을 받는등 부패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순수하고 소박한 기독교가  랑그도크에 서 신속하게 퍼졌다. 현지 주민들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수도원과 성당를 탈취하였으며 이러한 시설물을 접수하고 관리 하였다.

이파의 분포는 매우 광범위 하여 로마 천주교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고행하며 수도하는 것을 실행하였고 고행으로 수도하여 영혼의 불결함을 벗고자 갈망하였다.그들은 혼인과 출산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였고 십자가와 성례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 하였으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신약을 연구하였으며 또한 신약을 그 지방 언어로 번역하였다. 

알비파 신도들은 로마 천주교를 반대함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선고 받았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재위하는 동안 알비파가 유럽에서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랑그도크에서 세력이 가장 큰 레이몽 백작에게 알비파를 영지 내에서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레이몽은 교황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의 특사를 죽였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1208년에 칙령을 공포하여 각 나라을 불러 십자군 원정대를  조직하여 이단을 징벌하고자 했다.

사실 박해는 1145년 부터 시작되었는데 몇 명의 알비파의 신도들이  퀼른 에서 화형 당하였고 그후 1209년 교황청은 알비파를 공격하라고 분명히 명을 내렸다. 심지어 이단을 신봉하는 것을 사형죄에 해당한다고 선포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으로 프랑스 남부는 20년동안 대대적으로 유린 되었다. 이노센트3세  후에 교황이 된 이들은 모두 알비파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으며 또한 종교재판소가 정식적인 기구가 되어 이러한 이단을 소멸하는 직무를 계속해서 집행하였다.



부활한 서로마제국 과 봉건사회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16 / 추천수 1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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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의 새 실력자는 프랑크 왕국 이었다. 당시 서 로마 제국은 무너졌지만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로마교회는 동로마 황제의 후원 밑으로 들어갔지만. 점차 독자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로마교회와 동 로마 제국의 관계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교황권의 독립성을 인정 하지 않는 동 로마 황제의 잦은 침해 와 마찰로 항상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726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발표한 우상 파괴령은 로마 카토릭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를 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로마 카토릭 교회는 게르만족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십자가상 및 예수와 성인들의 형상과 같은 성상을 활용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런데 동 로마 황제는 원래 기독교가 우상을 금지한 종교라는 이유로 성상의 활용을 금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732년에 로마교회는 비잔틴제국 과 결별하게 되었고 이후 양 지역은 로마 카토릭과 동방 정교회라는 별개의 문명권을 이루게 되었다. 

6세기 말경에 이르러 로마의 대주교가 교황이라는 칭호를 갖고 동 로마 제국 황제와 겨루며 기독교 전체를 장악 하게된다.

게르만 인들이 로마로 이주해 오기 전 부터 포교 활동을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로마교회가 이단으로 여기는  아리우스 파에 속했다. 그런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는 아타나시우스 파로 개종하여 로마교회의 지지를 얻었고. 그힘을 빌어 영토확장에 성공하였다.

카롤루스대제 때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강의 왕국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카를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있었다. 당시 로마 교황은 동 로마 제국의 간섭과 보호 아래 있었다.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로마제국 전체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 황제와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었다.

로마교황은 새 후원자가 필요했고.카롤루스는 유럽 전체를 석권하려면 교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에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서 로마제국황제의 제관을 씌워 주었다. 동 로마제국 간섭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후원자가 일 개 국왕이 아닌 황제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프랑크왕 카롤루스는 서 로마 제국의 계승자요 수호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카롤루스대제가 죽은뒤 프랑크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은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루트비히 2세는 동 프랑크를  칼은 서 프랑크를 각각 물려받았다.이를 확정한 것이 843년의 베르딩 조약이다. 그때 그어진 이경계선이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이탈리아의 기원이다.

봉건제도

봉건제도란 주종제도와 장원제도가 결합된 중세 특유의 정치.군사.경제 사회적 지배 질서를 말한다. 주종제도는 주군이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신하는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고 주군은 신하를 보호하고 부양할 책임을 지며 신하는 주군을 위해 군사력 제공의 의무를 지는.생명과 재산을 상호 보호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는 당시의  혼란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계약 관계로 부터 출발했다. 땅을 매개로 한 이 주종 관계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었다. 황제가 맨 꼭대기에 있고 그 밑에 공작이.또 그밑에 후작과 백작이 남작 ....평기사는 지배 계급의 최말단 이었다.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농민이 자리했다.숫 적으로는 이들이 제일 많았다. 땅은 중세 사회를 유지하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봉신들은 자기 땅을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하나의 경작단위로 만들었다. 이를 장원 이라한다. 장원의 주인을 영주라 하는데 . 농민은 영주로 부터 농사 지을 땅을 받는 대신 영주에게 세금과 부역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영주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최말단 평기사라 하더라도 자기 영지 내에서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중세 농민들의 삶은 자유롭지 못했다. 생사 여탈권이 영주에게 맡겨져 개인은 그에 매인 상태였다. 그래서 중세 농민들을 가리켜 농노라 한다. 반은 노예요.반은 농민이란 뜻이다. 중세 교회는 또하나의 영주로서 농민들 위에 군림했다.

농민에게 부과된 세금과 노역은 매우 무거운 편이었다. 다음은 노르망디 지방에서 나온 기록의 한대목이다.5월에는 영주의 풀밭을 깍고 건초를 나른다.그다음은 도랑을 치운다.8월에는 곡물을 거둬들이는 부역을 해야하고 9월에는 돼지세를 영주에게  가장좋은돼지 2마리를 바치고 한마리당 각각 세금을 내야한다.10월에는 땅세를내야하고 겨울이 다가오면 겨울 준비를 위한대대적인 부역이행해진다.

크리스마스가 오면 케이크와 암탉을 바쳐야한다. 그밖에도 방앗간 사용료. 통행세. 사망세. 영주의 여행비부담.  결혼하면 결혼세를 바쳐야 했다.초야권이란 것도있어서 신부가 결혼 첫날밤을 신랑 아닌 영주와 함께 하는 일도 있었다.

함부르크.아우그스 부르크. 페테르부르크 등 유럽의 유서깊은 도시는 부르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이는 독일어로 성곽이란 뜻이다.중세 유럽의 도시는 이름그대로 두터운 성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문에 들어서면 교회와 광장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구불구불한 좁은 길가에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가계와 살림집을 겸한 집들이 들어서 있다.

비나 눈이 오면 포장 안 된길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하고 소나 말. 돼지 들이 아무때나 길가로 튀어나온다. 쓰레기와 상하수도도 심각한 문제.몇개 안되는 공동우물로 상수도를 해결하고 하수도는 얕고 좁은 도랑뿐이다.이것이 중세 유럽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