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스크랩]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생명의말씀 2009-01-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2019.html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눅10: 36)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서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주님이 보실 때는 그가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 상황은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으로 인해 자기들 외의 이방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을 몹시 무시하고 싫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이웃이란 개념을 자기 백성들,

더 좁게는 자기 계층의 사람들만을 한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 레위인들은

단지 율법을 빙자해서 그들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는

󰡒게토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게토는 유대인들만 사는 집단 거주지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율법에 의해 정죄 받고 상처 입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치료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사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이 보실 때

그 자신이 율법에 의해 정죄 받아 거반 죽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웃이라는 개념을 어떤 특정 계층만이 아닌

온 땅의 사람에게 주신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멸시하고 있던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묵상하면서 저의 과거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 거반 죽게 되어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을 때

어느 날 주 예수님이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 분은 저의 상처 위에 기름(성령)과 포도주(영원한 생명)를

부으셨습니다. 즉 생명주는 영을 부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분을 인격적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저를 주막(교회)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저의 모든 상처를 치료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뭔가 답답함이 좀 생겼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과 성도들의 상태를 볼 때

우리들끼리만 좋다고 울타리를 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생각이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대해 하나의 게토화가 되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 성도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 처음에는 세상과 종교로부터 나와야 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한 다음에는 온전케 되어서

다시금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죽게 된 사람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상황을 바라볼 때 복음의 영이 없거나 약합니다.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 냉냉한 종교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들만을 위해서 울타리를 쳐놓고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주하고 만다면

유대인들의 게토화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제 저 자신부터 회개하고 분발해서

상처받은 이웃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 주고 싶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싶습니다.

99마리 양을 남겨 두고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내 자신이 주님을 태운 나귀가 되어

강도만난 사람들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스크랩]노아의 때 롯의 때 인자의 때


생명의말씀 2009-01-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2018.html

노아의 때 롯의 때 인자의 때

 

누가복음 17장26절-30절에서 주님은 두 가지 구약의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창6장)와, 롯의 때(창 19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 두 사건을 인용하셨을까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17:27-28)” 하신 것을 보면

인자의 때를 강조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자의 때를 강조하기 위해서

주님의 심판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홍수가 왔고,

롯이 소돔 땅에서 나갔을 때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졌듯이

인자의 때도 교회가 건축될 때

즉 신부로 단장될 때 주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별로 주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자의 때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고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사람의 생존을 위해

합법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욕으로 인해

사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스크랩]영적 건강의 비결


생명의말씀 2009-01-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k505/2017.html

몸의 교통-영적 건강의 비결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은 우리 몸의 혈액순환과 비슷하다.

혈액순환은 우리 몸의 교통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 또한 일종의 순환이다.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 순환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교통은 그 영의 순환이다.

오늘날 그 영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피이다.

우리 몸에 피가 없다면 우리 몸은 메말라 죽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에 그 영이 없다면 몸은 시체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은 단순히 말해서

그 영의 순환(다만 성령이나 하나님의 영이 아닌)이요 흐름이다.

 

신약에서 그 영은 완결된 영으로서 이제는 분배하고 계시는 영을 지칭한다.

이 영안에 신성과 인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 모든 요소들이

이 한 영안에 복합되어 있다.

이 한 영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순환할 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순환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혈액순환은 자양분을 우리 몸의 각 부분에

전달해 주고 또한 우리 몸을 양육한다.

혈액순환이 정상적이지 않으면 우리 몸에 많은 병이 발생할 수 있다.

정상적인 혈액순환은 모든 종류의 세균을 삼켜버린다.

 

오늘날 교회들 안에 있는 문제는 혈액순환과 같은 교통의 부족에서 온다.

이러한 교통의 부족은 원수가 들어올 기회를 준다.

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길은 더 많은 피를 받아들이고,

더 많은 피를 내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순환인

교통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하고

몸의 치료를 촉진시킬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몸이 약한 것은 너무 많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너무 자신 안에 갇혀 있고 섞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지체들과 더 섞이고 교통해야 한다.

다른 교회들과 섞이고 교통해야 한다.

그럴 때 몸 안의 모든 노폐물들이 사라질 것이다.

(위트니스 리 “주의 회복에 관한 간략한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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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흥 한 후에 나는 근린공원에 가서 30분간 운동을 한다.

그러한 운동은 몸의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18가지 정도의 운동을

고루고루 하고 나면 온 몸이 날아갈 것 같다.

몸 안에서 혈액순환은 약 21초마다 한 번 순환한다.

그래서 운동을 할 때 하나의 동작을 21초 정도

멈추면서 정지 동작을 취하였다가 다음 동작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것을 5년 째 계속하고 있다.

이런 운동은 태권도 고수인 형제님이 가르쳐 준 것이다.

 



광희형제


워치만니 2009-01-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3 http://blog.chch.kr/k505/1998.html

광희 형제

 

내 마음속에 계속 자네에게 편지하고 싶은 느낌이 있었네. 그러나 나는 나의 생각이 성숙하지 않은 것일까 두려워 계속 지체해 왔었네. 내 생각에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네. 나는 자네가 이 편지를 하나님 앞에 놓고 기도하기 바라네.

 

인도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모든 것을 주어야 하네.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인도할 자격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훈련을 하고 자기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주는 사람에게 주님은  축복을 하신다네.

 

사역하는 사람의 속에 있는 역량이 밖으로 나오는 사역이 되야 하네. 만일 억지로 과장할 때는 흘러나오는 것이 적게 되며 이러한 상태는 다 주님 앞에 바른 것이 아닐세. 속이 풍성할 때는 억지로 하지 않아도 무엇이든지 다 흘러나오게 된다네. 오직 자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어야 하며,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되네.

 

사역에 있어서 듣는 것을 배우게. 사도행전 15장의 가르침은 곧 듣는 것일세. 다른 형제의 뜻을 듣고 그 안에 있는 성령의 음성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하네. 형제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성령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일세. 모든 사역자들과 장로들은 형제 자매의 말을 잘 들어야 하네. 반드시 형제 자매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게. 부드럽게, 부서져서, 들어야 하네.

 

많은 사람의 문제가 부서지지 않은 데 있네. 부서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엇이 부서지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지. 부서지고 나면 어떤 일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말씀에 대해서도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가 잘 안다고 하지 않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잘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네. 함부로 권위를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도 않는다네. 또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일에 신중하다네. 부서진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지 않고 더 이상 자기 분석을 하지 않는다네.

 

집회 가운데에서나 교회생활 가운데에서 너무 긴장하지 말게. 교회 일에서 "자기 혼자"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하네. 많은 일을 형제 재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이 결정하도록 하게. 자네는 다만 일하기 전에 그들에게 분명한 원칙을 알려주고, 일한 후에 그들이 어떻게 일했는가를 살펴보게. "자기 혼자" 한 일은 대부분이 착오를 낳는다네. 형제에게 맡겨주고 나눠주는 것을 배우게.

 

하나님의 영은 교회 가운데에서 억지로 하시지 않는다네. 자네가 그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그는기름부음의 공급을 해주시지 않으므로 교회는 피로와 권태를 느끼게 돼. 자네의 영이 강할 때는 10분 내에 그것을 뚫고 청중을 제압할 수 있지만, 영이 약하면 "큰소리" "위협하는 말"을 하고 "많은 시간 동안" 얘기해도 그것으로 형제 자매를 도울 수 없고 오히려 해를 입히게 된다네.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말씀을 전하지 말게. 그렇지 않으면 신도들의 영이 피로함을 느끼게 돼. 말씀이 많으면 마음이 무거워지므로 기도 집회는 실패하게 된다네.

 

1948, 내가 고령(鼓嶺)에서 다스린 것은 특별히 예외적인 것이었네. 사역하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부터 배워야 해. 배우는 것이 적고, 아는 것이 적고, 부서지는 것이 적으면 결정을 옳게 내를 수 없고 사람을 다스릴 수 없어. 너무 급히 확신을 갖고 일하지 말고 두려우며 떨며 일을 해야 하네. 절대로 영적인 것을 쉽게 보지 말게. 마음속에서부터 배워야 하네.

 

자기의 판단을 믿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하네.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이라고 다 옳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르다 여기는 것이라고 다 그른 것이 아닐세. 겸손을 배우는 데는 적어도 몇 년이 걸린다네. 그러므로 지금은 그렇게 확신 있게, 완벽히 하려 하지 말게.

 

자기의 판단이 정확한 데 이르기 전에 사람들에게 듣도록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세. 주님이 자네의 몸에서 역사하여 생각이 처리되고, 자신이 부서질 때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권위를 가질 수 있네. 권위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그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주님의 뜻과 마음이 없을 때에는 권위도 없게 되네.

 

하나님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도량(度量)이 넓혀져야 하네. 나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네. 자네 스스로 자신 속을 들여다 보지 말게. 들여다 볼수록 실망하게 된다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인도하는 책임을 지게 하실 걸세. 홍콩의 사역은 인도하심을 따라 사람을 보내게 될 걸세. 우리는 다만 안식해야 하네.

 

 

이 긴 편지를 자네가 주님 앞에서 자세히 읽기 바라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어려운 것임을 알지만 주님이 자네를 깨뜨려 그의 손 안에서 유용하게 되기를 바라네.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1950 3 1일 니토셍

 



성경은 영향력에 있어서 가장 탁월함


진리의말씀 2009-01-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1992.html
성경은 영향력에 있어서 가장 탁월함
 
성경을 가장 독특한 책으로 분류하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요인은 사람에 대한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이 인류에 대한 문학적이며, 철학적이며, 역사적인 기여에 있어서 위대한 보배임이 틀림없지만,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개개인에 미친 커다란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 매 장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참된 상태가 폭로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이 사람의 논리와 변명을 꿰뚫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죄를 책망한다(히 4:12). 성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통제할 수 없이 방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가 성장하는 동안 그를 위해서 계속 기도했었다. 수년간의 방탕한 삶을 보낸 후 31세가 되던 어느 날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되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이 말씀이 그의 죄를 책망했고, 그는 주님께로 돌이켜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종이 되었다.

역사를 통하여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음으로 주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패배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추방된 후, 그와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자신의 왕국을 세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그분의 왕국을 세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또 고백하기를 그는 얼굴을 맞대고 말해야만 사람을 고무시켜 자신을 위해 죽게 할 수 있지만, 지난 18세기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위하여 기쁨으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위해 순교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경 안에서 계시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감동의 근원이다. 과거 이천 년 동안 많은 왕들과 황제들과 통치자들이 성경을 없애 버리려 했다. 1세기의 로마 황제들로 시작하여 20세기의 공산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권세도 이 책과 이 책이 담고 있는 놀라운 인격에 매료되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이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선하다. 이 세상의 어떤 전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만큼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가르침과 계시의 변함없는 근원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의에 대하여 책망하고 교정하고 가르치며, 그들에게 모든 선한 일을 장비시킨다(딤후 3:16-17).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기질을 바꾸고 혼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준다. 성경은 죄와 사탄을 이기는 능력을 주며, 하늘에 속한 음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을 먹인다. 또 성경은 믿는 이의 영적인 젖이며(벧전 2:2) 생명의 떡(마 4:4)이다. 때때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의 한 구절이나 한 단락을 읽을 때, 그들의 마음은 인내할 수 있는 힘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와 기대하지 못한 소망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