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교회사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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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500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을 고대라고 부르고. 500-1500년을 중세라고 하며.1500년이후를 근대라고 부른다.

중세의 천주교는 2000년 교회사 가운데 가장 부패한 시기였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때 만약 천주교의 부패 상만 비판 하는데 머문다면 그것은 추한 장면만 재현하는 의미 밖에 없다. 우리는 성령의 빛비춤을 통해 부패의 원인을 정확하고 분명 하게 보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얻어야 할 교훈이다.

로마에는 성 라테란 대 성당이 있다. 이성당은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한후 그의 장인 라터라니의 별장을 개축하여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1307년까지 교황청으로 사용하던 성당이다. 십자군 전쟁 후 프랑스 아비뇽 성당에 피신해 가있던 교황이 돌아와서 구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여. 베드로성당은 1600년대부터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성당이 되었다.

계시록에 예언한대로 중세 천주교는 버가모 예표이다. 버가모는 세상과 결혼. 높은탑을 의미한다. 라테란 성당 내부를 보면 많은 성상과 모자이크 많은 조각상을 볼수있다. 천주교는 외적으로 정치와 결혼했고. 내적으로는 세상과 결혼한 상태를 보여준다. 원래 이땅에 있는 교회는 겨자씨처럼 작고 감취어져있고 생명으로 가득해야하지만. 교회의 변질은 높은 탑이되었고. 높은 성당들은 주님의 겨자씨에 나오는 큰나무의 경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 로마제국은 정치적 혼란과 이 민족의 침입이라는 상황하에서 교황이 정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다. 452년에 훈족의 침입과 455년의 게르만의 반달족의 침입으로 점령 당하였을때 교황 레오 1세의 간곡한 부탁으로 군대가 철수 하였다고 한다. 그후 고트족.부르군디족.프랑크족.등의 이 민족 침입과 정치 권력의 무질서로 로마교황이 백성들을 보호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590년 교황이된 그레고리시대에 고대 로마왕국이 중세기의 로마천주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나타낸다. 그레고리는 로마교회의 주교 였을 뿐아니라 중세기의 첫번째 교황이었다. 로마교회는 사도들의 계보를 강조하며 교황권력의 이론을 점진적으로 형성하였다.

레오1세(470) 때에는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이고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는 주장을 내세웠다.그레고리 시대부터 로마 천주교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각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각지 주교는 교황의 명령을 들게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교황의 권력을 대대적으로 강화 시켰다.

성 라테란 성당 입구중앙에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다. 성라테란교회는 전세계와 모든 도시의 중심이 되는 교회이며 "어미와 머리" 이다.또 성당 안에는 많은 성상과 교황의 좌 가있다.교황의 제단(좌)은 베드로가 사용하던 곳이어서 교황만 앉을 수 있는 곳 이라고 한다.

이것은 계시록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녀가 모든교회의 어미로  많은 물위에 앉아있는 음녀이다.그러므로 여기서 모든교회의 어미와 머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 천주교는 정치와 연합 함으로 점차적으로 변질되어 영에속한 유기체로 부터 세상적인 조직으로 변했다. 결국 더 큰성당. 더 복잡한 계급. 더 죽은 의문. 더 죽은 교리가 천주교의 가장 큰 특징이 되어버렸다.

라테란 대성당은 323년에 콘스탄틴이 지어주었다. 침례당건물은 432-440년에 건립한 것이며. 내부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1650년 에는 전면적으로 개장하여 내부에는 콘스탄틴황제와 열두사도의 조각상이 외부에는 초기 교부들의 조각상등이 있다.

라테란 성당 옆에는 성 계단성당이 있다. 이곳에는 예수님께서 심판받으실때 올라가신 계단이 있는데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천주교는 이것에 대해 매우 미신적이다. 믿는이들이 이계단을 오르면서 기도하고 입마추면 그들의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나올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마르틴 루터도 16세기 이곳에 와서 무릅으로 한계단 한계단 올라갈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다. 그때 그는 내가 여기서 하고있는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런방식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때 부터 그는 천주교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갈3장1.3절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잃어버리므로  남은것은 육체의 경건함과 종교의 미신적인 것밖에 없게 되었다.이것는 참으로 가슴 아픈일이 아닐 수 가 없다.

로마에는 수천개의 성당이 있다. 그중 마리아를 숭배하는 성당이 가장많다.예수님을 기념하는 성당보다 많다.

로마에는 세계에서 가장큰 네개의 성당이 있는데 성 베드로(바티칸)성당. 성 요한성당(라테란). 성 바울성당. 성 마리아성당인데 성마리아 성당은 마리아을 숭배하기 위한 성당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성모 숭배가 없다. 주님은 마리아의 육체를 빌려 이땅에 오셨지만 천주교는 마리아를 하늘의 황후로 숭배한다..

마리아를 숭배 하는것은 381년부터 시작되었고 4세기 부터는 마리아 숭배 사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성 마리아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때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이단은 대항하기 위해 천주교는 예수님은 과거부터 존재하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431년 에베소 대공회부터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공식화 했다.

432년부터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개축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때 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 되고 심각해졌다. 먼저는 성모에게는 원죄가 없다 라는 말이 떠돌고. 나중에는 성모가 죽지 않았다는 말이 나돌았다.1950년경에는 성모가 하나님에 의해 직접 하늘오 이끌려졌다는 말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천주교의 정통신앙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리아를 하늘로 데려갔기 때문에 성모의 무덤이 없다고 말한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를 가장 숭배했고 마리아를 대대적으로 높였다.

이때 수 많은 이방의 신전들이 대대적으로 복원 되었고 보수 되었다.로마에는 판테온신전이 있는데 천주교는 신전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만들었다.판테온의 뜻은 모든신을 위하여드리는 신전이란 뜻이다.이 신전을 천주교는 성모와 모든 성자를 위하여 라고 바꾸었다.진리에 이단이 추가된것. 생명에 사악함이 섞여진것. 고운가루에 누룩이 더해진것. 이것이 바로 타락한 천주교이다.

천주교는 마태13장의 사악한 여인의 본 모습이며. 계17장은 이 사악한 여인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피에 취한지라" 라고 말한다.

천주교는 성경의 교훈으로 부터 떠났을 뿐아니라 역대로 주님을 믿는이를 핍박하고 살해 했다. 종교 재판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콘스탄티누스 이후 천주교가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이 된 뒤 종신토록 교황직을 수행하였으며.종신교황제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중세 교황제도의 시작이었다.

중세의 천주교는 교황이 영원히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즉 교황 무오설을 주장한 것이다.이것은 교황의 말은 성경과 동등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역대 교황의 사적을 종합해 볼때 그들 중 에는 탐욕.살인. 강탈.음행. 하나님을 모독 하는 자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못할일이 거의 없었다.

중세기의 로마 교황청의 허례 허식과 음란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 였으며. 교황청은 거의 매춘부들의 거처와 같았다. 심지어 어떤 교황은 간음현장에서 정부의 남편에게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중세의 천주교는 암흑시대 였다.이러한 흑암시대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빛 줄기의 노선이 있었다.



간략한 로마 제국사 4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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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는(284-305) 로마제국에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악하게 핍박한 황제이다. 그가 퇴위한 뒤 로마는 내전의 혼란 가운데로 빠져들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306-337) 는  312년에 숫적으로 우세한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티베르강의 밀비안다리에서 승리하였다.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306년에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대는 콘스탄틴을 황제로 옹립 하였고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와 북 아프리카를다스리고 있었다. 막센티우스는 공개적으로 적대하였고 콘스탄틴은 막센티우스를 마귀라고 하였다.콘스탄틴은 312년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전 정오에 하늘에서 기호를 보았는데 이기호를 의지하면 반드시 승리 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군사의 군복과 방패에 십자가를 새겨넣고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로마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다. 그 중에서 콘스탄틴의 개선문이 가장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가 혼란속에서 로마제국을  통일시켰기 때문에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위하여 개선문을 만들어 주었는데 개선문 상부에 그 장군의 업적을 새겨 넣을때 콘스탄틴은 신성한 지각.신성한 감각을 의지하여 승리 하였다고 썼다. 이것은 이 때만해도 많은 원로원의 의원들이 그들의 신.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후313년에 콘스탄틴 황제는 밀라노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신앙의 자유를 주고 또한 박해 받던 시기에 강제로 빼앗겼던 재산을 돌려 주었으며 그가 통치하던 영토내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제재와 박해를 금지하였다.

밀라노칙령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제국을 이긴 이정표를 세웠다. 교회는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백성으로 부터 시작하여 300백년간의 피 비린내 나는 박해와 사악한 공격을 거친뒤 이교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것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 직전에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가 된다고 말하였다.

밀라노 칙령은 비록 교회사의 전환점이 되었지만 부패한 세상의 조류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과거에는 교회가 묵묵히 고난을 받으며 승리하였으나 이 때 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삼아 목적을 이루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전같은 건물을 집회장소로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누스는 평상시 장사를 하거나 기타 집회를 하던 장소나 정부의 건축물(Basilica)을 그리스도인들이 집회하는 장소로 개축하였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306-337) 지지로 기독교는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고. 데오도시우스 황제(379-395)때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기독교가 국교화 됨으로 말미암아 이교의 신앙과 풍속이 점진적으로 교회 생활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이교의 절기와 사악한 교훈은  마태복음에 언급된 누룩처럼 교회를 부패하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래 태양신을 섬겼으나 주님을 믿은 후에 매주의 첫째날을 태양일로 정했으며. 원래 태양신의 탄일인 12월25일을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고 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떡 떼는 실행은 번거로운 의식이 되었고 경배의 실재가 없는" 미사와 성찬 의식"이 되었다.

게다가 성인에 대한 숭배와 성인의 유물에 대한 미신적 신앙 그리고 외적인 종교의식은 점차 믿는이들로 하여금 기존의 순수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더구나 로마의 지리적 정치적 우월로 인해 로마교회는 초기 교회들 가운데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로마 주교는 스스로 기타 주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주후 451년에는 칼케돈에서  네번째 공의회가 열렸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신성과 인성이 있음을 인정했고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은 서로 혼합되지 않고 서로 교환되지 않으며 나누어질 수 도 없음을 확증하였다. 그회의는 로마주교의 우월한 권위를 더 견고하게 하였다.  

사도시대가 끝나고 사도시대 후반기의 교부들의 저서로부터 교회가 부패하게 되었다. 그 후 사백년 동안 상황은 갈수록 심해졌다.  5세기 말에 이르러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많은 교의와 활동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 연옥, 순교자 및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성직계급 등이 이미 교회에 뿌리를 내렸다.

숭배 의식은 갈수록 복잡해졌고 말씀은 갈수록 감소되었다. 그 원인은 그리스도 및 사도에 대한 무지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이교의 사상과 실행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각 방면에 침투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의 조류가 생명을 삼켜 버리게 되었다.

한편 콘스탄틴누스는 330년에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겨 콘스탄틴노플이라고 하였다. 395년에 콘스탄틴의 뒤를 이은 데오도시우스는  황제가 죽으면서 로마제국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동서로 양분되었다. 서 로마제국은  잦은 이민족들의 침공으로  빠른 속도로 쇠락해 갔으며  476년 동고트족 오도아케르가 왕위를 찬탈함으로 멸망하였다. 동 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되어 천년이나 더 존속하다가 1453년 오스만 투루크에게 멸망당하였다.

서 로마제국의 몰락은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이름은 중세 봉건사회로 그 주인공은 게르만인이었다.




간략한 로마 제국사 3.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0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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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대부분 암살 당하거나 자살하였다.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 당한 후 원로원은 원로원의원 출신인 네르바를 황제로 즉위시켰다.이 때 부터 유능한 인물이 제위를 계승하는 관례가 이루어졌다.주후 180년까지 로마는 안정된 시기였다.

180년이후 로마는 안으로부터 혼란이 시작되었고 황제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그치지 않았다.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황제가 되었고. 이때를 군인황제 시대라고 부른다.

1.아우구스투스(BC 27-AD.14) . 2.티베리우스(14-37).3.칼리굴라(37-41암살).4.클라우디우스(41-54암살).5.네로(54-68자살).6.베스파시아누스(69-79).7.티투스(79-81)(예루살렘을함락시킴).8.도미티아누스(81-96암살).9.네르바(96-98원로원의원출신).10트라얀(98-117). 11.하드리아누스 (117-138)유대인 반란 진압. 마사다공격12.피우스(138-161).13.마르코스아우렐리우스.(161-180).14.세베루스(225-235 ).15.막시무스( 235-238 ).16.데키우스( 249-251 )17.발레리아누스( 235-260 )18.아우렐리아누스( 270-275 ).19.디오클레티아누스.( 284-305)

5세기 역사학자 오로시우스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 네로.도미티아누스. 트라얀.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막시무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아우렐리아누스.디오클레티아누스의 열 시기로 나누었다.   250년에 데키우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고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을 내렸을때 많은이들이 느슨하고 안일하게 되어 참된 믿음을 버렸다. 그러나 260년 부터 303년까지 교회는 다시 급속히 발전하였고  인수도 크게 증가 하였다.


기독교가 300년 만에 로마제국을 정복하였다. 그 당시 로마제국을 이길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에는 분명한 인생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다신교는 사람이 어디서 와서 장래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귀족들은  음란과 살인  동성연애 근친상관으로 가득했다.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주 예수님을 복음으로 전했다.당신이 믿는 신이 이런 신이라면 당신의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겠읍니까.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이생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였으며 이것은 기독교에 큰 힘이 되었다.

히13:13-15. 우리도 그분께서 받으신 능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으로 나아갑시다. 이곳에는 우리에게 영원한 성이 없으니 우리는 장차 올 성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제물을 곧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에서 볼 수 있는 신성한 계시는 후반기 교부들의 저서에서 진리들에 대한 언급이 점차적으로 적어졌으며. 심지어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있었다.

초기교회의 내부적인 어려움

외부의 압력 이외에도 초기 교회는 이단의 해를 입고 있었고 논쟁으로 인한 분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1.교회가 초기에 직면한 이단은 에비오니즘이다. 이뜻은 빈궁이라는 의미이다.교부 터투리안의 해석에 따르면에비오니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너무나 빈궁 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에비오니파는 기독교를 유태화 하려고 하였다.모세의 율법을 중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였으나 그분이 육체되신 하나님 이심을 믿지 않았다.

2.도세티즘은 물질세계가 악하다고 믿었기에 성결한 본체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물질에 속한 육체를 취할 수 없다고 여겼다. 성육신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육신은 단지 하나의 환 영으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고통받은 이는 실제로 주예수가 아니라 단지 환 영일 뿐이라고 여겼다. 사도요한은 서신서에서 이들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3.위의 두 이단보다 깊은 영향을 미친것은 그노니스주의(영지주의)이다.그노시스주의는 신비 신앙과 헬라철학의 혼합체이며.후에 다시 기독교의 외투를 걸친것이다. 바울시대에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는 이미그노시스 파가 출현하였다.그노시스파는 80-150년사이에 형성되었으며 교회와의 관계를 벗어나 스스로 한 계파가 되었다.

4.140년경에 몬타누스 주의가 일어났는데 예수님 이 후에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자자를 통해 계시한다고 여겼다. 성결한 생활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 하였는데 그것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다.그들은 술을 입에대지않고 금식하며 그들이 살아 있을때 주님께서 반드시 오실것 이라고 믿었다.

5.아리우스주의 아리우스는 (256-336) 알레산드리아의 장로였는데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으며 성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시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러므로 성자와 성부의 본질은 차이가 있기에 신성한 삼일성의 진리는 이로 인해 동요되었다.

주후 325년에 콘스탄틴 황제는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당시 적지 않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하였는데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을 통하여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 하였고  결과는 정통 신앙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그 본질이 같고 동등하며 동일한 영광을 갖고 있다는 진리도 확립되었다.

이러한 풍파가 가라앉자 또 다른 풍파가 일어났는데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네스토리우스 파였다.

6.네스토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둘은 서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누었다. 교회는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나누어질수 없으며 또한 둘이 연합한 것임을 믿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자 동시에 참된 사람이시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불러일으킨 논쟁 이 후에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대한 각종 논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가 육체가 되신 후에는 한 분이신가 두 분이신가. 단지 하나님 이신가 아니면 하나님 이시면서 사람 이신가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존재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므로 451년 칼케돈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논쟁을 철저하게 해결하였다. 회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절대적으로 진실 된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는 오직 한 인격이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서로 함께 연합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칼케돈 공의회 후에 정통신앙은 더욱 분명한  표현을 얻게 되었고  또한  광볌위하게 받아들여져 논쟁이 비로서 끝나게 되었다.






간략한 로마 제국사 2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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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는 고대 로마 도시 였다.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은 이 도시를  화산재로 덮어버렸다. 그동안의 발굴로 도시의 5분4가 발굴 되었다고 한다.   

2000년전 사람들이 살던 도시를 본다는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도시는 화산재로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원형 경기장.포럼(광장).신전.상가. 빵집. 대중 목욕탕등이 있고.상가 앞에는 돌로 만든 도로가 있었는데 마차들이 얼마나 많이 다녔던지 마차 바퀴 모양을 따라 돌이 움푹 파여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간 모습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거의 똑같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대중목욕탕은 바닥과 벽이 모자이크 식으로 타일이 깔려 있었고 사물함을 두는 곳도 있고 남탕에는 냉탕도 있었다.빵굽는 화덕도 오늘날의 모양과 거의 같았다. 폼페이는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도시였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항구 도시였다. 그곳을 보면서 2000년전 사도바울도 이곳을 지나 갔을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행28장13절 거기서 우회 하여 레기온에 도착 하였다. 하루가 지난 후 남풍이 불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간청으로 그들과 함께 칠일 동안 머물다가 로마로 갔다.)


행18장2절: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를 만났다. 아굴라는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왔는데 이것은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순절이후 복음은 안디옥. 마케도니아. 아가야 등으로 확산되고 결국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로 아굴라는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서 바울를 만났다.바울은 유대인의 고소로 64년경 로마 감옥에 갇혔었다.그 기간에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를 썼다.그리고 자신을 위한 변호에서 승리를 거두고 석방된 뒤 에베소와 마케도니아를 방문 하였고 (딤전1:3절)그곳에서 디모데 전서를 썼다.

67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 두번째로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순교하기전 감옥에서 디모데 후서를 썼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도 바울과 거의 같은 시기인 네로의 재위기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네로는 천성적으로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65년에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였다. 자신의 아내 옥타비아도 누명을 씌워 죽였다.자신의스승 세네카도 죽였는데 세네카는 네로에게 충고로  황제는 모든것을 할수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도 괜찮으나 황제가 노래하거나 연극을 해서는 안됀다고 말하였다고 죽였다고 한다 .네로는 31세 나이로 자살하여 죽었는데 죽을때 마지막으로 남긴말이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딤전1:9절 율법이 제정된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사람들과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경건하지 않는 사람들과 죄인들과 거룩하지 않는사람들과 세속적인 사람들과 자기 아버지를 치는 사람들과 자기 어머니를 치는사람들과 살인하는 사람들과")

클레멘트. 오리겐. 이그나티우스등과 같은 초기 교부들은 그들의 서신 가운데서 이 일을 언급 하고 있다. 네로가 죽은 뒤 도미티아누스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와 신으로 존칭할것을 요구하였다.사도요한은 도미티아누스 재위시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계시록을 썼다고 한다.그 후에 트랴얀황제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통치기에 예루살렘 감독인 시메온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안디옥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사자에게 물려죽었다. 서머나 감독인 폴리갑도 피우스 재위기에 화영 당하여 순교하였다.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와 잔혹함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주후 67년 부터 222년 까지 교회는 매우 큰 박해를 받았다.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핍박을 받을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 해졌고 인수도 크게 증가 하여 귀족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성경을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거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을 것을 강요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살아남은 교회 역사학자인 에우세비우스는 친필로 기록하였다.

히 11:35 .어떤 사람들은 고문을 받아 죽게 되어도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풀려 나기를 원하지 않았읍니다.또 어떤 사람들은 조롱받고 채찍질 당하는 시련을 겪었고. 심지어 결박되어 감옥에 갇히는 시련까지도 겪었습니다.그들은 돌에 맞아 죽었고 톱으로 잘라졌으며.

1.초기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안에 견고히 머물며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며 주님의 구원을 온땅에 전파하였다.

2.박해로 인해 믿는이들은 대부분 소규모로 집에서 집회를 하였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바랬으며.생명의 위협에도 두려움없이 가정집회를 하였고 지하동굴무덤에서도 집회를 가지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3.초기 교회 교부들은 신앙을 위한 변증과 진리에 대한 변호를 힘쓰므로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간략한 로마 제국사 1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34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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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설령 인류의 역사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세계정세는 바로 하나님의 안배하에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으며 주전 753년에 티베르강에 인접한 일곱개의 언덕위에 세워졌다.로마 황제들이 살던 왕궁이 위치한 팔라티노 언덕과 유티테르 신전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 로마광장을 중심으로 첼리오 언덕 에스퀼리노언덕 비미나레언덕 퀴리날레 언덕이다.

오늘날의 팰리스는 로마 황제들이 살던 언덕 팔라티노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팔라티노언덕아래에는 영화 벤허에서 볼수있는 전차 경기장이 있다.

교회사에서 로마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믿는이들 수 많은 순교자들이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위해 흘린 피와 땀으로 얼룩진 도시이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인의 시조는 늑대젖을 먹고 자란 두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한다. 로마도 로물루스라는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고한다.

(행28:11절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 배에는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의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주전 509년부터 60년 삼두정치(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마는 공화정을 시행하였다.주전 54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평정하고 전제정치의 기초를 닦았다.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 당하고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일어나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와의 2차 삼두정치를 마감하였다.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기 27년전에 원로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아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로마 대 제국을 건설할수있었던 원동력을 보자. 영토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해 점령한 땅을 식민지화 하지않고 속국화 하여 지배하였다. 수탈하거나 착취하거나 학대 하지않고 집정관을 두어 로마의 문화와 정치 경제를 받아 들이도록하고 지배한 지역에는 도로와 상수도를 설치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하여 로마시민과 똑같은 지위와 특권을 가지도록 하였고 세금을 걷어 들이도록했다.

그리고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유피테르 신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피아 가도를 통하여 지중해 연안과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 까지와 북 동쪽으로 에스파냐(스페인) 갈리아 (프랑스)와 브리타니아(영국) 메소포타미아 까지 영토를 넓혔다.

(행28:15절 그곳 형제들이 우리에 관한 소식을 듣고 아피온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라는 곳까지 우리를 맞으로러 나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기를 얻었다.)

고대 로마는 시멘트를  발견하여 석회암 대리석을 사용하여 웅장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로마시대의 수로 건설은 놀랍다. 높은산에서부터 수로를 통하여 시민들이 물을 사용 할수있도록하고. 수천명이 동시에 목욕할수있는 목욕탕도 건설하였다.

도시의중앙에는 급수탱크시설이 되어있고. 그곳에서부터 물은세갈래로 나뉘어 귀족들과 공중목욕탕과 일반시민들의 가정으로 물을 공급하였는데 가뭄이들어 식수가 부족해지면 가장먼저 귀족집으로 가는물을 끊고.다음으로 공중목욕탕. 마지막으로 시민들의 물을 끊었다고한다. 

주 예수님은 아우쿠스투스황제 통치기에 태어나셨다. 아우쿠스투스 왕정이후 로마는 안정된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때를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부른다. 시대에는 언어가 통일되고 정치가 통일되었으며.상업이 발달하고 통상범위도 확대되었으며 치안도 안정되었다.

이렇게 세상이 통일된상황은 복음이 확산되는 편리성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경륜과 깊은관련이 있음을 보아야한다.만약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알렉산더가 남긴 지중해 연안의 수많은 나라들이 분열되어 요동과 불안으로 통일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성경의 예언대로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호적신고를 명한것이나.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리라는 예언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언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로마제국은 주님께서 오시기 72년전에 스파르타쿠스난을 통해 붙잡힌 포로들을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참하게 죽였고 그 십자가의 행렬은 수십리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로마제국으로 인해 통일된 언어와 온땅으로 통하는 도로와 안정된 치안을 가졌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것이 성의 경계를 넘으면 되는 것처럼 쉽게되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볼때 로마제국의 패권을 위한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복음의 개척을 위해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볼때 일반인들처럼 수 많은 자료를 갖고 결과을 알수없는 원칙과 노선으로 임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의 노선에 따라 역사를 연구해야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것은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완성된사역을 확산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것임을 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