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징계


은혜로은글 2014-03-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1482.html
어떤 형제 자매들은 특별히 남보다 총명하고 사려깊고 상황판단과 계산이 빠르고 지략이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에 속한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고후1:12)
야곱은 항상 성령의 징계를 체험했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자신의 총명함을 원하는 대로 발휘할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성령의 내적인 징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셩령께서 우리의 외적인 환경에서 행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의 징계는 성령께서 모든 사람과 일과 사건을
안배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징계를 받고 있다.

우리가 성령의 징계을 받을 수록 우리는 더 끝나게 된다.
성령의 징계의 마지막 결과는 항상 우리를 허물고 파쇄하고 감소시켜 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성령의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 창조물의 요소가 우리안에 건축 될수 있도록
우리의 옛창조물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신다.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나누어 주는 것은(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첫단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깊은 일을 하기 원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안에 이루어 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처리하시는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는 것. 곧 그리스도가 우리안으로 일해 넣어 지고 조성되게 하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되는 길


은혜로은글 2014-02-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1438.html
주님은 일곱서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기는 자가 될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
요한 계시록의 일곱서신의 모든 항목이 다 주님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이다. 

주님을 알지 못하면 교회도 알수없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상태에 만족하고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우리는 사람의 죄와 교회의 죄를 발견할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많지 않기 때문에 주제넘는 일들도 잘 용납한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우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임의 대로 하는 것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임의대로 하는 것을 용납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앞에 충성되다면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교회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찻아야 한다.
많은 때 어떤 사람이 임의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용납하고 있는것은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 충성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정죄하시는  주님을 아는 계시가 없기 때문이다.
아. 때때로 우리는 주님과 그 백성 가운데서 우리가 누구를 섬겨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삭을 받침과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체험함


은혜로은글 2014-02-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1369.html
창 22:1-18절
"이런일이 있은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여러산중의 하나를 일 러줄터이니 거기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게 하셨는가.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할수있었는가".

1.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심으로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브엘세바에서의 생활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물을 산출한다.
번제물은 사람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라기 보다는 주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께드려지는 그리스도의 예표 이다.
우리가 교회생활 안에 더 머물수록 교회생활은 우리를 브엘세바에서 모리아로 더 많이 이끌것이다.

저는 브엘세바에서 살고있읍니다.이삭을위한 우물과 에셀나무가 있는 브엘세바에 머므십시요.
어느날 우리는 모리아로 인도 될것입니다.

2.창세기 22장1절부터 18절까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인해 순종한 것을 본다.
모리아산으로가는 여정을 급하게 시행하지 마십시요.브엘세바에서 모리아로가는 노정의 믿음이 있을때
가십시요.그럴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수가 있다.

모리아는 여호와의 이상이란 뜻이다.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것을 체험하고
분명한 이상을 보았다.

3.오늘날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것은 교회생활 안에 있으며. 교회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것을 얻는다.

주님의 회복안에서 우리는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
모리아 산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삭을 바칠것이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것을 누릴 것이다.


두우물 두종류의 생활을위한 두 근원


은혜로은글 2014-02-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1367.html
1. 창세기 21장 15-34절 까지에 나오는 두 우물은 두 종류의 생활을 위한 두 근원을 상징한다.

한우물은 혼이라는 광야에 있는 타고난 근원이다. 이근원은 광야에 살면서 이집트에 연결되어 있던
이스마엘로 상징된다.
다른우물은 우리의 영이라는 동산에 있는 구속된근원이다. 이근원은 브엘세바에 살면서 모리아산으로
이끌렸던 이삭으로 상징된다.

2.오늘날 두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한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마엘과 같이 그들의 혼이라는 광야에서 자신을 위해 살면서 세상과
연결되어있다.
또 다른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삭과 같이 그들의 영안에서와 교회생활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서
시온으로 이끌리고 있다.

심지어 참된 그리스도인 인 우리들도 이삭이 보여주는 예표대로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기위해
우리의 영안에서와 교회생활안에 살지 않는다면  이스마엘처럼 자신안에서 자신을 위해 살면서
세상과 연결되어 있을수 있다.

3.이스마엘의 생활의 근원이었던 그의 우물은 그를 활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활쏘는 사람은 창세기 10장 8절부터 12절까지 에 나오는 니므롯처럼 거친 사냥꾼 곧 광야에서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다.
우리가 혼이라는 광야에 머물며 이스마엘을 위한 우물. 곧 이스마엘의 생활의 근원에서 물을 마신다면,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활로 생명을 죽이는 활쏘는 사람이 될것이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자신의 근원이었던 이집트 에서 아내를 얻어주어 이집트의 것들로
이스마엘을 묶어버렸다.

4.이삭의 우물 곧 이삭의 생활의 근원은 브엘세바에 있었다.

출애굽기15장 27절에서 엘림에는 열두곳의 샘과 일흔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

브엘세바에서의 우물은 우리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넌동산의 샘 생수의 우물이라 레바논서 흐른는 시내로구나.(아 4:15)

아브라함은 어린 암양 일곱마리를 값으로 지불하고 그 우물을 되찾았다.
이삭을 위한 우물은 구속된 우물이었다. 이삭은 구속된 물 곧 언약의 물을 마셨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고 있는 생수는 천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큰 값이 지불되어 구속된 우물이다.

5.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가는줄기와 매우 가느다란 잎을 가지고 있는  에셀나무는 풍성한 생명의 흐름 을 상징한다.
오늘날 교회생활은 브엘세바에 있는 우물곁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합당한 교회생활은
모두 에셀나무로서 우리가 의지해 사는 생명나무로 표현한다.

6.아버지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아들하나님은 생명의 체현이시며 영하나님은 생명의 흐름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생명의 빛이시고 아들하나님은 생명나무이시며 영 하나님은 생명의 강이시다.  


이기는자


진리의말씀 2014-02-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505/51363.html
육십육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전체는 두가지 항목 곧 이기는 이들과 새 예루살렘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기는 이들과 새 예루살렘이 성경의 마지막책인 요한 계시록에 계시된 두가지 주요항목이다.
요한 계시록 1장부터 20장까지 이기는 자들에 대한 완전한 기록을 보여주며 요한 계시록21장부터 22장 까지는
이기는 자들에 대한 결과와 나타남의 완결인 새 예루살렘을 계시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기는 이들의 총체이다. 이기는 자들은 다가올시대 곧 천년왕국시대에 있을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 믿는 이들중 비교적 적은부분만이 이기는 자들이 될것이다.
대다수의 믿는이들은 피로씻어지고 거듭났지만  패배당할 것이다.

주님은 다시 오실때 이기는 이들만을 데려가시고 다른 범주에 속한 나머지 믿는 이들은 남겨 두실것인데
그들은 신성한 생명안에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년왕국에서 이기는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가운데 있을 것이지만 패배한 믿는 이들은 바깥어두운데서
징계를 받을것이다.

어떤 농작물이든 성숙하게 되려면 과정을 통과해야한다.
성숙하지 못한 이들은 천년동안 징계와 징벌이 있을 것이다.

요한 계시록 1장 16절은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별이 있고 라고 말한다. 또한 12절은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일곱 금등잔대를 보았다고 말하고   20절은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과 일곱금등잔대의 
비밀은 다음과 같다.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전달자(사자)이고. 일곱금등잔대는 일곱교회이다.라고 말한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전달자(사자)이다". 이런 전달자들은 교회들안에 있는 영적인 이들로서 마치
별들처럼 그들은하늘에 속한 본성을 지니고있다.
등잔대들과 별들은 모두 어둠속에서 빛을 내기 위한 것이다. 각 지방에 있는교회를 대표하는 등잔대는 단체적인 방면을 말하고  교회의 (사자)전달자를  대표하는 별은 개인적인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들 가운데 거니실때 주님의 오른손에 인도하는이(사자)들을 붙들고 계신다.
이들은 주님의 오른손에 있기 때문에 위축되거나 약해지거나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다.
요한 계시록 에는 교회들안에 장로들이 없고 그보다 전달자들이 있다.
에베소에 잇는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편지하여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계 1:1)

사도요한의 계시록은 일곱교회의 사자에게 쓴 것이므로 바울의 첫일곱서신과 는다르다.
바울의 서신서중 빌립보서만 성도와 감독과 집사들에게 썼으나 빌립보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는
다 교회에썼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회에게 직접 쓰지 않고 성령은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나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쓴것이다.

일곱 별은 일곱교회의 사자이다. 사자라는 이 두글자는 영어로는 messenger(전달자) 이다 .
많은 사람들은 계시록 2.3장을 읽을때 여러가지 잘못된 해석을 사자에게 붙이고 있다.
그러면 이 사자는 과연 누구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자는 다 단수이므로 이 서신은 단수의 사자에게
쓴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단수는 단체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이것이 각 편지의 마지막에 복수의 이기는 자들을
부르시는 이유이다.  이사자는 단체적인 사자로서 능히 교회의 소수 이기는자를 대표할수있다.
이전에는 교회가 주님앞에섰으나 지금은 사자가 주님앞에 서있다.
주님은 꺼지지 않는별. 빛나는 별을 택하시고 이는 내사자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주님의 눈에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사자이며. 교회의 성질이 그들에게 맡겨졌다.
종전에 교회의 대표는 지위와 직분을 가진 장로들이었지만 이제 교회를 대표하는 책임은
영적 사자에게 주어졌다. 이사자는 어떤 장로나 집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교회를 대표할수있는 사자에게 교회의 책임을 지게 하신다.
오늘날 이것은 지위나 직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참된 영적인 권위를 갖느냐의 문제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책임을 위임하시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쓴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종이 아니라면 이해할수 없다.(계 1:1)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는 장로들이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의 움직임을 인도하는 이들이었다.
장로가 되는것은 다소 법적이며 형식적이다. 장로가 되기를 열망하지 말고.빛나는 별이 되기를 갈망하라.
단지 지위만을 가진사람이 되지말고 빛나는 별이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