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성장하는 길 (영을 좇아 행함)


정상적인그리스도인의생활 2010-04-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k505/13904.html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에 왔다. 먼저 두번째 단락의 중심인 5장 12절부터 8장 39 절까지의 중심을 두 마디로 간략히 설명하겠다. 이 두마디는 한 가지 대조를 포함하고 있고, 각각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한 방면을 지적해 준다.

       이 두 마디는 다음과 같다.

       아담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 5:12-6:23 --

       육안에서와 영 안에서                    -- 8:1-8:39   --

 

우리는 이 네가지 일의 관계들을 깨달아야 한다. 앞의 두 가지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말한다. 그중 첫번째 것은 원래 천연적인 것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이고, 두번째 것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위치이다. 뒤에 나오는 두 가지는 주관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행함과 관계된다.    이것들은 실제적인 체험에 속한 것들이다. 성경은 앞의 두 가지는 전체의 일부만을 언급한 것이고 나중 두 가지가 있어야 온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기만 하면 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영 안에서 행해야 함을 알았다.(롬 8:9)

로마서 8장 앞 부분에서는 거듭 영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이공과를 얼마나 중요시 하는가를 보여 준다.

 

                                 육체와 영

 

육체는 아담과 연관되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관된다. 이제 우리가 아담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치고, 잠시  이문제를  한 쪽에 제쳐놓고 우리가 육체 안에 사는가를 물어보자.  우리안에 산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행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힘은 아담에게서 이어 받은 옛창조의 천연적인 생명에서 나왔기 때문에 체험에서 우리는 아담의 죄의 모든 자본을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매우 효과적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이러하다.

 

만일 우리가 체험에 있어서 그분이 체험한 것을 누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못박혔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주심은 현재의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과 완전히 상반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이 사실이 우리 몸에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낡은 성질이 여전히 나타나는 사실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우라가 객관적으로 그 진리을 붙잡고 객관적인 진리을 주관적이 진리로 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안에 살 때에만 객관적인 진리가 주관적인 체험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내 안에 계신다. 사람의 몸이 물 속에서는 생활 하거나 일할 수 없고. 공기 중에서만 살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거하지 않으시고 영 안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육신을 좇아 생활한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본래 내게 속했던 모든 것이 내 안에서  허공에 뜬 것 같이. 죄가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비록 사실에 따르자 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겠지만  만일 내가육체 안에 산다면, 곧 내 힘으로  내 주장대로 행한다면  체험에 있어서  나는 놀랍게도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이 내 몸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체험으로 알려 한다면 나는 반드시 영안에 살기를 배워야 한다.

 

   영안에 산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활은 내 자신을 의지하여 살아내는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에 당면할 때 마다. 나는  그분께서 내게 요구하신 것을 내 안에서 친히 이루시도록 그분을 앙망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도해 보라고 하시지 않고 다만 믿고 의지하라고 하신다. 또 그분은 우리에게 분투하라고 하시지 않고 그분 안에 안식하라고 하신다.  만일 내 안에 난폭한 성품이나. 부정한 생각. 예리한 혀와 비평하는 영을 가졌다면. 자신을 고치려고 결심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할 일은 다만 이 모든 일을 향하여 이미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내게 필요한 순결함과 겸손과 온유를 산출해 내시도록 앙망하는것이다.

 

이것이 모세가 말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의 뜻이다.


의심할바 없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리라고 믿는다.  즉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한 친구를 심방하러 가자고 할때 당신은 그 친구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를 돌보러 갈 것이다. 츨발하기 전 당신은 주님께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실패뿐이고 아무 것도 할수 없으므로 주님이 당신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달라고 구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은 비록 그 친구가 조심성 없고 남과 융화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당신이 그에 대해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것에 놀랄 것이다.집에 돌아올 때 당신은 이 체험을 회상해 보면서 당신이 그렇게 잠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인해 놀란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었는지를 이상히 여기며 어떠한 해설을 찻으려고 한다.     이 해설은 바로 성령이 당신으로 통과하게 한것임을 기억하라.

 

불행히도 당신은 어쩌다 한 번 이런 체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이어야한다. 성령이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은 긴장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를 악물고 자기를 잘 통제하면 영광스런 승리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참된 승리는 육체의 힘을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어떤 것을 넘어가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목적은 항상 우리로 어떤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우리를 범죄케 하지 않고 우리가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도록 격동시킨다. 일단 우리가 숨어 있는 곳에서 나와 나와 버릴 때 사탄은 이미 우리를 이긴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숨어 있고  육체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탄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승리의 방법은 바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밖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활동할때 위험에  떨어지게 되고. 우리의 천연적인 경향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읽어보자. "육체는욕망을 일으켜 그영을 거스르고. 그 영은 육체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이둘은 서로 대적하여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육체는 우리를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거스린다. 이는  이둘이 서로 대적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짓밟고 처리하는 것은 그분이지 우리가 아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니니라." 우리는 자주 이구절 하반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보기로 하자.

 

천연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기을 원하는가. 우리는 우리 천성의 지시를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행동을 취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일하기를 거절한다면. 성령은 자연히 우리 안의 육체를 처리하실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천연적인 경향에 따라 일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때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너희는 성령을 쫒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는 원칙이 있다. (갈 5:16)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살며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행한다면. 우리는 한편에 서서 능히 성령으로 매일 우리의 육체를 이기시게 할수 있다. 성령은 이 일을 책임지도록 이미 우리에게  보내지셨다.

우리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고 오로지 성령만을 의지하여 그분의 새 갈망을 따라 우리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데 달려 있다.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이루었고. 우리 안에서 성령은 구원을 나타내도록 주어지셨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또한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의 부르짖음은 참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가 말한것과 똑같다.  거기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연구한  문제의 해답이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나" 라는 단어가 매우 현저히 나타났고. 또 이" 나"는 결국 "답답한 부르짖음" 곧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로 끝맺는다는 것을 안다.

그 뒤에 우리는 그의 해방받은 환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주예수께 감사라하리로다.  매우 분명한 것은. 바울이 우리가 사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개선된 생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치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치하는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다른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대치하신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다시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이점에 있어서 재생이(새생명으로삶), 중생 이상이라는 것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중생은 우리가 회개할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은 것이다. 재생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재생(새생명)되기 시작할 때까지 이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서 점점 자라고 그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인들에게 바울이 말한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 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또 한가지 예화로 이점을 설명해 보겠다. 한번은 미국에서 주님을 믿는 부부의 가정에 갔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내게 청해 왔다. 내가 그들에게 무슨 어려움이라도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니 형제님 최근 저희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저희는 너무 쉽게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납니다. 과거 몇주 동안 저희두사람은 거의 매일 수차례 화를 내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저희에게 인내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라고 답했다. 그들은 십분 놀란 표정으로 당신의 뜻은 저희가 너무 형편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내를 구하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꺼려하신다는 말입니까 . 라고 말했다 . 아닙니다. 내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렇게 기도해본적이 있습니까. 나는 당신들이 자주 이렇게 간구했으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까. 아닙니까. 당신들은 왜 응답이 없는지 아십니까.  이는 당신들에게 인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 없다구요. 저희는 매일 화를 냅니다. 당신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 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답했다.

 

하나님은 결코 겸손.인내.성결. 사랑의 은혜를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신다. 즉 인내가 없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인내를.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사랑을. 혹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겸손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느소량을 우리에게 자본으로 주지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족히 채울수있는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는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그분의 생명을  내안에서 살아 나타내시도록 그분을 앙망할 때 그분은  나의 겸손과 인내와 사랑이 되신다. 또한 내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이 되신다. 요한일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증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 5:11-12)    하나님의 생명은 여러가지 항목으로 우리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말한다.(롬 6;23)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는 바로 우리와 생명의 관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와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 즉 온유와 그리스도. 인내와 그리스도. 사랑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일 인지 . 고린도 전서 1장 30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너희는 하나님께로 부터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나니". 통상적으로 거룩함에 대한 사람의 관점은 생할의 모든 방면이 거룩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거룩함자체가 아닌 거룩함의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거룩함은 그리스도 자신임을 기억하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

 

 주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거룩함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기타 사랑. 겸손.능력. 절제 등도 이와 같다. 오늘날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면 그분이 바로 우리의 인내이시다. 내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거룩함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의 해답이시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말할때 그 열매가 단수요. 하나의 열매요 별개의 여러 열매가 아닌 이유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에게 사랑이 결여 되었을 때 성령의 열매는 바로 사랑이고. 우리에게 희락이 필요할때 성령의  열매는 바로 희락이다. 이것은 정확하다. 당신 개인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백 한 가지가 결여 되어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는 충족한 답변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시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의 해답이시다.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필요를 더욱 많이 느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들 안에서 부족한 것을 발견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혀 자라지를 못한다.오직 은혜안에서 자랄 때 비로소 성장할수있다. 우리는 은혜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시는 것임을 말한 바 있다. 비록 우리 안에 동일하게 거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지만. 오직 새로운 필요에 대한 계시가 있어야만이 우리를 이끌어 그분을 믿고 의지하게 하며 이 점(필요) 에서 우리 안으로부터 살아 나타나시게 할수 있다. 분량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누릴 수 있다. 우리가 계속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

 

성장의 비결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시도함과 믿고 의지함에 대해 말한 바 있고 또한 이들의 차이점을 본 바 있다. 이것들의 차이는 마치 천당과 지옥 같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말뿐인 좋은 사상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주님께. 주여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도하지도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라. 많은 사람은 이 점에서 실패하였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주여. 나는 할 수 없으므로 손을 떼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당신을 믿고 의지 합니다. 라고 말한다. 내가 스스로 하지 낳고 그분이 하시도록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나는 그분이 시작하신 역사 안으로 충만하고도 줄겁게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피동적인 생활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생활이다. 나는 이렇게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님으로 부터 생명을 흡수 하고 그분을 생명 삼으며 내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 낼수 있다.   

 

생명의 성령의 법


  그러므로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8:1-2)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적극적인 면을 상세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는 8장 시작에서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없나니" 라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 이 말씀의 위치가 적합하지 않은 것같다.  왜냐하면 정죄함은 확실히 피에 의해 해결되었고. 주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정죄와 내 자신 안에서의 정죄이다.  이것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말한 두종류의 평안과 같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 있어서. 두번째 종류의 정죄가 첫번때 종류의 정죄보다 훨씬 무섭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만족케 했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의 죄가 이미 사하여졌고 하나님 앞에서 더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는 여전히 실패를 체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내 속의 정죄의 느낌이 아주 참된 것일 가능성도 큰 것이다. 그럴지라도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내 생명으로 취하여 산다면. 나는 승리의 비결을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영의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를 체험하게 된다.(롬8:6) 이는 내가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평안이 있기에 더 이상 정죄받은 느낌이 없고. 도리어 그분이 나를 한 번씩 승리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찬미하게 된다. 무엇이 나에게 정죄의 느낌을 주는가.  실패한 체험과 무능한 느낌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보기 전에 나는 항상 불리한 위치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정말 나로 하여금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범사에 무능함을 느끼게 한다. 자주 나는 큰 소리로. 나는 이 일을 할수 없다.고 부르짖는다. 나도 노력해 보지만.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없다.

이제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빌 3:13.)

 

바울은 어떻게 이같이 담대할수 있는가. 그는 무엇에 근거하여 이제 더이상 제한을 받지 않고 도리어 "모든 것을 할수 있다"고 선포할수 있는가. 다음 말씀이 그의 답변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왜 결코 정죄함이 없는가. ( 이는---)은 결코 정죄 받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고 확실한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의 법에 있다. 바울이 이것을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 법이 다른 법인 죄와 사망의 법 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법들은 무엇인가. 어떻게 운행하는가. 죄와 죄의 법 사이에는 어떤차이가 있는가. 사망의 법과 죄의 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지금 나는 런던에 있다. 여기서 내손수건을 던질때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만유 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뉴욕이나  홀콩에서 내손수건을 던진다 해도 결과는 똑같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손수건을 던질때 마다 만유인력은 역사 한다. 따라서 동일한 결과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동일한 원칙에 있기만 하면 동일한 결과를 낳는것이 바로 법이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인가. 가령 누가 내게 대하여 좋지 않은 비평을 할때 내속에서는 즉시 뭔가 불쾌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법이 아닌 죄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만일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좋지 않은 비평을 할 때 여전히 내 안에서 동일 하게 불쾌한 생각이 일어난다면 나는 항상 변함없는 만유인력과 같은 한법 -죄의 법- 이 내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죄의 법도 이와 같다. 우리는 사망이란 극점에 이른 약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의 약함은 나의 할수 없음이다. 내가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 보니 또 나의 할수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한   법이 내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본다. 내 속에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죄의 법이 있다. 내 속에 사망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사망의 법이 있다.

 

이 법은 만유인력과 같이 불변하고 어떤 예외도 없다. 이것은 토론을 거쳐 제정한 법칙인 교통 규칙과 달리 사람은 제정할 수 없는 자연의 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손수건은 내 도움 없이도 자연히 땅에 떨어질수 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울이 발견한 법도 이와 같다. 죄의법과 사망의 법은 선함에 반대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를 좌절시킨다.  사람은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따라 자연히 죄를 범한다. 그가 다른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안에 있는 법은 잔인하며. 사람의 의지는 결코 이법에 대항 할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가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죄뿐 아니라 더욱 사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끊임없는 약함과 실패에서 해방받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만유인력의 법을 무효화 시킬수 있는가. 또다시 내 손수건을 예로 든다면.

만유인력의 법은 손수건에 역사하여 그것을 아래로  끌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을 손수건 밑에 둔다면

손수건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게 된다. 왜 그런가. 법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나는 만유인력의 법을 제거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 법을 제거 할수 없다. 그러면 왜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가. 이는 손수건이 땅에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다른 힘이 있기 때문이다. 법이 여전히 거기 있지만 그 법을 능가하는 생명의 법이라고 하는 다른 법이 운행하여 그 법을 정복한다. 만유인력이 할수 있는 대로 힘껏 역사할 수 있지만 손수건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다른법이 운행하여 만유인력을 대항하여 손수건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로 포장 석판 사이에 떨러진 씨가 나무로 자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씨가 점점 자랄 때 그 생명 안에 있는 능력이 아주 무거운  석판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한 바 법이 법을 이기는 그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다른 법을 이끌어 옴으로써 원래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죄와 사망의 법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른 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으로 역사하게 하신다. 이 법의 강도는 족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인것을 기억하라. 이 법은 부활한 생명으로서 이미 그분 안에서 각종 사망을 처리하였고 이미 사망을 이기었다. (엡 1:1.9.20.)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려서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임의로 행하시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옛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이때 우리는 보호하심이 우리 힘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벧전 1:5)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있습니다."

 

생명의 법의표현
 

  이 점을 더 실제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 바 있다.    심지어 오래된 그리스도인도 의지가 그들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아직 모른다.

이것 또한 로마서 7장의 어려움 중 일부이다.   그의 원함은 선한 것이나 그의 모든 행함은 그의 원함과 상반된다.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얼마나 큰 결심을 하든  그의 원함은 그로 더 큰 어두움을 거치게 할 뿐이다. 그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기름이 없는 자가용같이 누가 밀어 주어야 간다. 언제든지 누가 밀지 않을 때에는. 즉시 멈추고 만다. 그들은 의지로 자신을 밀어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아주 고생스럽다고 생각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고 힘이 빠지게 한다. 어떤 사람들이 할렐루야를 외치기 때문에 자기도 억지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들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들은 자기 답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강요한다.  이것은 물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다. 이는 의지가 이를 수있는 최고점이 원함까지 이기 때문이다.(마 26:41. 참조)

만일 우리가 많은 힘을 들여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야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생활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님을 말해줄 뿐이다. 우리는 자기의 고향 이야기는 억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 천성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의지력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뜻을 세울 수 있으나, 결국은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 패배당할 것이다. 아마 우리는 "원함이 내게 있어서 내가 이 주 동안 선을 행했다". 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뜻을 세우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행하려고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당신은 왜 사람이 의지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거듭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취할 새 생명이 없거나 이미 거듭나서 생명을 소유하였으나 그 생명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점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재삼재사  실패하고 범죄하며 자신들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돤다.

 

  우리가 이렇게 끊임없이 연약한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생활이 아니요.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과 의지함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23절은 하나님의 은사는 "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절은 새로운 은사를 말하지 않고 로마서 6장 23절에 언급된  생명을 말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새로운 계시라는 뜻이다.  나는 이점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손에서 얻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새롭게 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역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이는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는 말에 사용된 시제가 과거시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이점을 보고 그분을 믿고 의지 한다면 로마서 7장은 우리 몸에서 절대로 재현 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체험들이나 행위들은 참으로 중복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렇게 의지의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고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땅에 떨어져 깨지지 않고 도리어 다른 법인 생명의 영의 법  아래 떨어지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우리에게 생명만 주지 않으시고 또한 생명의 법도 주셨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이 사람이 입법한 결과가 아닌 자연계의 법칙이듯이 생명의 법도 자연의 법칙으로서 원칙상 우리 심장이 뛰는 것이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꺼플이 깜박이는 법과 동일하다. 우리가 우리 눈의 청결함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눈에 대해 항상 생각하거나 의지로 결심하지 않아도 눈 거플은 자동적으로 감겼다가 열려 진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겠다고 마음 속으로 항상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도움이 되기는 커녕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기만 하면 눈꺼플은 자연히 움직인다. 우리의 의지는 생명의 법을 저지할 뿐이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나는 이사실을 발견하였다.

전에 나는 불면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며칠 밤 온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는여러모로 기도 하였다.

나는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내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분의 답변은 자연 법칙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수면은 굶주림과 같이 다 하나의 법이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비록 내가 굶주리지는 않을까를 염려하지 않았으나 항상 수면에 대해 염려하였었다. 나는 자연 법칙을 도우려고 하였다.  이것이 많은 불면증환자의 주된문제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자연 법칙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잠을 잘 잘수있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하는가. 당연히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손실을 입게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억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안에 성경을 사모하는 새로운 법이 있다. 우리가 이법을 따라 삼십 분간 읽는 것이 억지로 다섯 시간 동안 성경을  읽는 것보다 더욱 유익하다. 이와 같이 구제하고 전도하며 간증하는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냉정하게 자선사업을 하는것과 같이 억지로 전도할때 결국 찬 심장으로 뜨거운 복음을 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가 새 법 안에 산다면 우리는 옛 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간추린말씀 조회 4 댓글 0 스크랩 0 2010-03-27 20: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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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새 법 안에 산다면 우리는 옛 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옛 법이 여전히 존재 할지라도 그것이 더이상 우리를 다스릴 수 없고 우리도 더이상 그 통제하에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마태 복음 6장에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홥화를...생각하라" 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날으는 새들에게 만유인력을 무서워하느냐고 물어볼수 있다면, 그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는 뉴톤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 법칙을 조금도 모른다. 우리가 날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우리로 날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 나는 생명이 있을뿐 아니라, 또한 그 생명 안에는 항상 그들로 자연 스럽게 만유인력을 이기게 하는 하나의 법이 있다. 그러나 만유인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날씨가 몹시 춥고 땅에 눈이 쌓인 어느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났을 때 한 마리 참새가 정원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즉시 그 법의 항구성과 불변함을 상기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날고 있을 때에는 그들이 만유인력을 정복하고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분은 이미 이 영의 새법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나는 것은 더이상우리의지의 문제가 아닌 그분의 생명의 문제이다. 당신은 인내할수 없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하라는 것이 그에게 하나의 시험이라는 것을 주의한 적이 있는가. 그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족히 그를 억압하여 병들게 한다. 하나님은 염려로 우리 영적 신장을 더하게 하려는 노력과 같은 자연 스럽지 않은 일들을 결코 억지로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염려는 사람의영적 키를 줄어들 게 만들 뿐 절대로 조금도 크게 하지 못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안에 있는 생명의 새법을 주의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오 .우리안에 있는생명의 새 법을 주의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오. 우리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이 있기를 !

 

이것은 얼마나 귀한 발견인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 이는 이 법이 작은 일에서도 큰 일에서 처럼 운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방에서 주인의 허락 없이 임의로 책을 꺼내 본다면 이법은 허락을 얻기 전에는 꺼내볼 권리가 없다고 우리를 일깨우고 저지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번은 어느 그리스도인 친구와 대화를 가졌는데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아십니까. 만일 사람이 생명의 영의 법을 의지해산다면 참으로 고상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이러 했다. "이는 그법이 사람을 완전한 신사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시골 사람 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참된 문제는 그들에게 주님의생명이 있는가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내가 말하지만 그 생명은 그들에게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그렇게 웃는 것은 틀렸습니다. 혹은 당신이 이렇게 비평하는 그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말해줄 것입니다. 성령은 범사에 그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상세히 알려 줄 것입니다. 이로써 진실된 고상함이 나오게 됩니다. 교육에는 이러 본질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내게 이런 말을 한 친구 자신이 교육자였다.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생활
간추린말씀 조회 8 댓글 1 스크랩 1 2010-03-27 21: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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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된 것이다. 말이 많은 것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은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닌가.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때 당신은 스스로 나는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면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특별히 조금만 말하여 내 자신을 통제해야 겠다.  라고 말한 적이 없는가.  당신이 한 두 시간은 자신을 잘 제어한다. 그러나 당신는 어떤 이유로 자제력을 잃고 얼마 못가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수다스럽게 말하고 잇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 의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자. 만일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일에서 의지를 사용하라고 권한 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 세상의 허무한 종교를 제공한 것일 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제공한 것이아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수다쟁이가 온종일 말하지 않아도 그는 여전히 그런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이는 수다스러움의 자연율이 그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그루의 복숭아 나무가 복숭아를 맺든 안 맺든 여전히 한 그루의 복숭아나무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 새법 곧 생명의 법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 법은 다른 모든 법보다 승하고 이미 우리를 수다스런 법에서 해방하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새 법에 자신을 맡긴다면 그법은 어는때에 말을 멈추어야하고. 어느 때 말하기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우리에 게 알려준다.

 

또한  이법은 우리가 그렇게 할수 있도록 힘을 더해준다. 만일 이 기초 위에서 생활한다면 당신은 친구 집에 가서 두 세 시간 동안 앉아있어도 심지어 이 삼 일 동안 거하여도 말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하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 당신은 말많이 한 것을 괴로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생명의 새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 자발적인 생활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할인 것이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천연적으로 그들을사랑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할 수 없음] 이 법은 사랑을 나타낸다. 이법은 주님이 그 형제 안에서 보시는 가능성을 기초로 하여 역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그를사랑스럽게 보고 그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또한 나를 통하여 그를 사랑하소서'  라고 말한다. 이러므로 실제적인 생활에서 이 법은 그 자체를 표현하게 된다.

 

즉, 참된 도덕적행위에서 그 자체를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 갑게도 그리스도인 생활 중에 위선이 너무 많고. 가식도 너무 많다. 가식보다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은 없다. 이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의 가식을 꿰뚫고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생명의 법을 믿고 의지 한다면 가식은 실제에게 굴복할 것이다.


 영을 좇아행함
간추린말씀 조회 8 댓글 0 스크랩 0 2010-03-31 22: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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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이 욱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이 두구절을 자세히 읽은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서 두가지 일을 발견할 것이다. 첫째는 주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이루신 일이고. 두번째는 성령이 장차 내 안에서 행하실 일들이다. 육신이 약한 고로 결국 율법의 의는 육신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도 구원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문제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할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 가지 절차를 취하셨다. 첫째로 우리 문제의 핵심을 다루기 위해 그분이 개입하신 것이다. 그분은 죄를 위하여 죽고. 육체에 죄를 정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속에 있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사지로 이끄신 것을 말한다.  이옛창조를 "우리 옛사람" 혹은 "육체" 육신에 속한나" 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의 약함의 기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고. 우리의 여려움을 근절시키는 데 있다. 

이것이 첫째 단계이다. 그러나 율법의 의는 여전히 우리 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필요가 있다.

 

성령은 우리 속의 사정을 돌보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 만 하면" 그는 능히 이렇게 돌보실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한다는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두 방면으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이것은 일이 아니라 좇는 문제이다. 우리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때 나는 헛된 노력 아래 묶이게 된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골 1:29)

평안히 자신을 의탁할 수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일을 대비 시켰다.(갈 5:19.22)

 

둘째로. 좇는 것 안에는 순복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육신을 좇는것은 육신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로마서 8장5절부터 8절까지는 육신을 좇은 결과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영을 좇는다는 것은 바로 영을 순종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영을 좇아 행할때 그는 결코 그분을 향하여 독립할수 없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반드시 성령께 순복해야한다.

 

나의 행동은 반드시 그분에게서 시작되어아 한다. 내가 그분께순복할때 나는 비로소 생명의 영의 법의 충분한 운행하심과 율법의 의(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일들) 가 만족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는 고린도 후서 13장13절의 축복의 말씀에 매우 익숙해 있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신령한 복의 근원이시고. 주 예수의 은혜는 신령한 부요함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며. 성령의 교통하심은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사랑은 하나님 마음 속에 감취어진 것이고 . 은혜는 이 사랑이 아들 안에서 표현되고. 취할수있게 된것이며. 교통은 성령을 거쳐서 은혜가 사람에게 나누어지는 것임을 안다. 무릇 우리를 위해 아바지 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은 아들이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루셨고. 이제 성령은 그것을 우리에게 교통해 주신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확보해 놓으신 것들을 새로이 발견할때. 그것이 성사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을 바라보고. 절대적으로 성령님께 순복하여 발견한 그것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수 있도록 셩령님께 충분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분은  이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안에서 실현시키신다.

 

나는 어느 늦여름에 장기 휴양을 위해 어느 고원에 간적이 있었다. 거기서는 침식을 겸하여 제공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게 잠과 식사를 각각 다른 집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식사를 하던 곳은 어느 직공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거했었다. 내가 그곳에 간 후 이 주 동안 식사하기 전에 축도하는 것. 외에는 집 주인에게 복음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다. 어는 날 나는 그들에게 주 예수님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듣기를 좋아했고  또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을 가까이하였으며. 주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 하였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들은 거듭났고 그들의 생명안에 새로운 빛과 기쁨이 있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확실히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발생한 일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얼마후 기후가 차가워졌기 때문에. 나는 거기를 떠나 상해로 돌아오게 되었다.

 

추운 겨울 동안 그 직공은 식사 때마다 술을 약간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마실 때마다 과음하기가 매우 쉬웠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날씨가 추워지니까. 식탁에 또 술을 올려 놓았다. 그날 그는 전과 같이 식사 전에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하려고 했으난 말이 나오자 않았다. 한 두번 시도를 해보아도 말이 나오지 않자 그는 아내에게 "뭐가 잘못되었지. 왜 오늘 기도를 할 수 없을까. 빨리 성경을 가져와 보오. 그 안에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봅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성경 한 권을 남겨 두었었다. 그의 아내는 글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어두워서 술을 마시는 것에 관한 성경의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성경을 상고해야 할줄 몰랐고. 또 하나님의 종에게 문의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그들에게서 아주 먼곳에 있었고. 그들은 몇 개월 후에라야 나를 볼 수 있었다. 이때 그의 아내는 먼저 마시고 보지요. 다음에 니 형제님을 만나거든 그때 물어보도록 합시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술을 이하여 주님께 감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술을 치우시오" 라고 말했다. 그녀가 술을 치운 후에 그들은 감사하고 음식을 먹었다.

 

나중에 그 사람은 상해로 와서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었다. 그는 아주 적절한 말로 나에게 말하기를."니형제님. 내 속의 주인 어른이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아주 좋습니다. 형제님. 당신 속에 계신 주인 어른의 말씀을 계속 들으셔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임을 알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것을믿는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의 행위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아는데 있다. 우리는 그분이 주인어른이신 줄 아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