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을 건넘


교회의 의의 2015-02-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kheeha/54042.html

그래서 그들은 모두 구름 속에서, 또 바다 속에서 침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으며, (고전 10:2)

And all were baptized unto Moses in the cloud and in the sea; (1 Cor.10:2)

침례 받을 때 우리의 주된 일은 세상을 매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체험 가운데, 두 번째의 매장이 있는데, 이것은 요단 강을 건너 옛사람을 묻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떠났다. 그들의 광야에서의 실패는 이집트의 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옛사람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옛 창조에 속한 본성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침례를 통해 세상을 장사지내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에 이어 우리는 광야를 지나 요단 강에서 옛사람을 장사지내야만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다. 요단 강을 건너는 것의 중점은 낡은 것과 옛 것이 죽고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다. 홍해에 묻힌 것은 이집트의 군병이었고, 요단 강의 물에 매장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들은 열두 개의 돌을 요단 강의 물속에 남겼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옛사람이 물에 매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들은 다른 열두 개의 돌을 요단 강에서 취하여 가나안 땅에 두었다(수 4장).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세대가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한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매장되어야 하고, 새사람만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 예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 면에서 교회가 어느 날 참되게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모든 옛 창조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창조 안에 있게 될 때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된다. 다른 면에서는 영적인 노정에서 교회와 개인의 생명은 계속 전진하지만 요단 강을 건널 때에 비로소 광야의 표류하는 생활이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영에 속한 실제적인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옛 창조를 끝낼 때, 비로소 새 창조 안에 살게 된다.

이 끝냄은 바로 요단 강의 물이다. 요단 강을 건넌 후에는 영적인 전쟁이 있다. 홍해에서 매장된 것과 요단 강에서 매장된 것은 다르다. 홍해의 물에 매장된 것은 이집트의 군병이고, 요단 강에서 매장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우리가 침례 받을 때, 비록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매장되었으나, 매장된 것은 세상뿐이다. 우리는 또 다른 매장을 체험하는데, 바로 요단 강이다. 요단 강을 건넌다는 것은 표류하는 생활을 끝내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물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다.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을 처리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자아를 끝낸다. 체험 안에서 우리가 세상을 처리하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옛 창조, 즉 육체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실패는 이집트에 속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육체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와 자아와 옛 창조가 끝나고, 요단 강에 매장되며, 다시 새롭게 시작할 때만이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교회의 의의, 제 10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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