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어떤 진리를 결정할 때 성경의 한 구절만 의존할 수 없고 그 대신 말씀에 의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한 구절에 대한 주해는 그 자체의 내용에만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되고 대신 성경 전체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베드로 후서 1장 20절에서 성경 예언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했다. 이 구절의 원래 의미는 성경예언은 그 자체의 내용에 의해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예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을 연구해야 하고 성경의 모든 예언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만 비로소 그 예언이 완전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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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결정할 때 가끔 연관된 많은 구절들이 어떤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지만 그들 중 두세 가지는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절이 한두 구절밖에 안 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시하고 다른 많은 구절들을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의 몇몇 구절들이 희생당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한두 구절 때문에 어떤 한 가지 해석을 할 수 없다면, 그 해석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중시해야 한다. 하나의 해석이 성경 전체와 조화될 때만 이 해석을 믿을 만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떤 진리의 해석과 반대되는 구절은 어떤 것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해석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계시를 주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연구한다면 쉽사리 잘못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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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행된 표현이 똑같음 성경에는 서로 병행된 표현들이 많이 있다. 이 모든 병행 구절들은 서로 똑같고 다르지 않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아홉 가지 축복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것은 첫째 표현이 둘째 것과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 경우 각각의 축복에 먼저는 축복의 조건이 있고 그 다음 축복 그 자체가 있다. 모든 구절들이 똑같다. 만약 한 구절의 첫째 부분이 어떤 조건을 말하면 모든 병행 구절의 첫째 부분도 또한 조건을 말한다. 한 구절의 둘째 부분이 축복을 말하면 모든 표현의 둘째 부분도 또한 축복을 말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원칙 또는 법칙이다. |
성경을 해석할 때 배경에 제한받아도 안 되며 무시해도 안 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산상수훈에는 많은 말들이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 5:23)과 같은 말씀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이것은 전적으로 유대교의 배경에 근거하고 있다. 만약 이 구절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배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그와 교제하기 위해 제단에 예물을 드렸다. 만약 당신이 이 원칙을 붙든다면 주님의 말씀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을 언급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경을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또 한 면으로 배경에 제한되어도 안 된다. 단지 주님이 말했기 때문에 제단에 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이런 배경에 제한된다면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배경에 제한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