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3 , 조회수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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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나는 상해에서 왔습니다.

나는 전에 교사였습니다.

1960년에 나는 모택동의 어떤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7년 형을 받아 투옥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극동에서 가장 큰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1963년에 나는 니 아저씨라고 부르던 니 형제님과

같은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니 형제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감옥은 열 개의 건물로 되어있는 아주 큰 감옥이었습니다.

각 건물이 6층으로 되어 있었고 각 층에 90개의 감옥이 있었습니다.

한 방에 3명씩 들어간다면 1620명이 한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큰 감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 명 이상이 있는 그렇게 커다란 감옥에서 그렇게

긴 기간 어떤 사람과 함께 투옥되어 함께 있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 번째 건물에 감금되었을 때 니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분과 9년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9년 중에 2년 동안은 우리가 따로 있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이를 인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분이 주님께 가시기 이틀 전까지 나는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삼 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어느 형제님을 상해에서 만났을 때,

나는 그 형제님에게, 주님을 사랑한 니 아저씨가

왜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훈련 후에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역이라는 것을,

고난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고난을 받았지만

그분의 사역은 이제 온 땅에 퍼져 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지만 주님을 극도로 얻으셨습니다.

그분이 주님을 반사함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질그릇이었지만 그분 속에는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가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직접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정말 견딜 수 없는 모든 고난을 그분이 통과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몇 가지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번 째로 만난 것은 안휘성에 있는 한 도시였었는데,

그때 그분은 몸이 아주 약해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많이 드셨습니다.

우리가 기거한 곳은 감옥 식당에서 60미터 내지

70미터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니 아저씨는 걷지도 못할 만큼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걸어서 식당에 가서 식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음식을 타다 드렸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왜 워치만 니를 위해 음식을 갖다 주느냐?"

나는 “그분은 나이가 많고 약해서 그렇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2층에 가서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간수는 엄한 얼굴을 하고서“말도 안돼 그는 약한 척 하는 거야.

자기가 가서 먹으라 해.

너는 더 이상 음식을 갖다 주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받으러 갔을 때

부엌에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 간수들이

“아무도 워치만 니의 음식을 받아가게 하지 말라.

워치만 니가 직접 와서 먹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냥 돌아가서

니 아저씨에게 그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분은 아주 자비가 많은 분이셨습니다.

나는 그분이 어떤 묘책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좀 생각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분은 말했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나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그때 화가 났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실까? 식사를 안 하시겠다는 말인가?’

처음에 나는 그분께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합당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분과 따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음식을 조금 그분께 나누어 드렸습니다.

갑자기 나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내가 일을 더 많이 하면 식사를 조금 더 받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심으로 주는 다섯 개의 밥 덩어리 중에서

한 덩어리를 더 받아 여섯 덩어리 중에서 두 덩어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니 형제님은 두 덩어리만 드셔도 양이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 둘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71년 어느 날 간수가 나에게 가족들에게서 온 편지를

니 형제님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편지를 갖다드렸는데,

그 내용은 니 형제님의 부인이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니 형제님이 상해로 가서 부인을 방문하도록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자청해서 니 형제님과 함께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실상 우리 둘 다 형기를 마쳤기 때문에 더 이상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규정에 의하면 우리는 매년 2주 동안

가족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6년에 일어난 문화혁명 때문에

모든 범죄자들은 가족을 방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에게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보내 주어야 했습니다.

처음에 간수는 "생각 좀 해 보지.”라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당신은

심장병이 있는데 어떻게 상해에 갈 수 있겠어?”라고 물었습니다.

니 형제님은 나와 함께 가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반 달 동안 보류를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간수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간수는 “당신은 왜 집에 가려고 하지?

당신은 의사도 아닌데. 또 당신의 아내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경우를 조사해 봤는데 우리는 당신을 집에 보낼 수 없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럴 때 형제님은 한 마디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사실 따지도록 허용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감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니요, 저 분은 기도하는 게 아니라

입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간수가 니 형제님이 기도하는지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니 형제님은 기도하지 않고는 하루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니 형제님이 눈물을 흘리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부인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니 형제님은 아주 슬퍼하셨습니다.

나는 힘을 다해 위로하며 또다시 요청해 보자고 격려했습니다.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게 상해에 가 봅시다.”

이번에는 허가를 해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기다리게 하다가 여전히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허락해 줄 줄 알았지만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는데 가면 무엇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누가 니 형제님보다 고난을 더 당했겠습니까?

그분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약해 지셨고, 체중이 줄어들었고,

9개월 후에 그분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말했습니다.

“형제가 나가거든 꼭 이 사람을 찾아보시오.

이상수라는 사람을 찾아보시오.

이 형제를 만나거든 나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시오.

이상수 형제를 만나는 것이 나를 만나는 것이고,

그의 말이 곧 내 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니 형제님의 마음에서는 이 형제님이 가장 좋은 형제님이셨던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니 형제님은 신체적인 고난 말고도

정신적인 고통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견딜 수 없는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항상 말하지요.

중국에서도 요즘에는 자유가 있어서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니 형제님의 때에는

중국 정부의 규제가 아주 엄격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니 형제님은 20년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여 당신을 사랑합나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생각해 보십시오.

20년 동안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못했다면,

20년 동안 사랑하는 자녀에게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면,

20년 동안 자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니 형제님은 이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니 형제님을 생각해서라도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말합시다.

오, 주 예수여 ,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간증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안배하시는 장래에 또 더 많은 간증을 하기 원합니다.

 

2003, 고린도후서 여름 결정연구 메시지 7번 중에서,

오 형제님의 간증 발췌문


트랙백:  수신불가

관제
Date 2009-05-16 19:16:12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니 형제님을 생각해서라도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말합시다.

오, 주 예수여 , 당신을 사랑합니다.....이시간 주님을 불러 봅니다..오주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아멘
진주
Date 2009-05-13 23:53:39  
그때 이 집회를 참석해서 들었는데....새롭습니다. 아멘.
연합된영(金容權형제)
Date 2010-02-28 17:21:05  
퍼가요~♥
엘가나
Date 2010-04-30 09:55:30  
judo pugayo!! ~

 

순수한마음
Date 2010-05-26 17:18:12  
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