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22편과 마가복음 15장을 통해
주님이 6시간 동안 겪으신 죽음의 고통(suffering of death)의
의미 안으로 새롭게 들어가 봅니다.
주님은 이 시간 동안 3중고통을 겪으셨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쩌면 삼일하나님께서 거치신 과정 중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한 항목 안에 다 포함시켰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격으신 죽음의 고통을
간과하고 경시하고 무시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을 전한 미노르 형제님은 이 부분에서
주의 회복의 젊은 세대들에게
죽음에 이르실 때까지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용어들을
깊이 생각해보고 연구해 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3중의 고통은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입니다.
신체적인 고통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실제로 이런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두 손과 두 발, 옆구리에서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몸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모든 뼈는 어그려지셨습니다.
혼 적인 고통은 더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모욕과 멸시, 조롱과 조소,
침 뱉음, 갈대로 머리를 치는 것을 당하시고,
"어허!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건축하겠다던 자야,
너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등 [막15;29~30]
많은 조롱과 비아냥 거림을 견디셨습니다.
그런데 더 견디기가 힘드셨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심판 받고 죄로 여겨 버림 받으신 것입니다.
이를 견디기가 힘드셔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울부짖으신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27:46] 은,
다윗이 고통 받는 중에 말한 것으로 예언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22:1]
말씀으로 잘 표현되었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 저는 이런 구속을 위한 고난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은 물론,
어떤 조그만 비난과 조롱과 조소도 견디기가 힘듭니다.
주님 같지는 않지만 주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도 두려울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주님이 통과하신 이 죽음의 고통의 각각의 의미가 우리 자신을 더 만진다면
구속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당연하게 그냥 지나치고 있는 십자가 위에서의 일어난 일들이
우리 구주에 대한 헌신을 더 깊고 강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이 미지근하고 절대적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우리를 위해 통과하신 고통에 대한 감사가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진젤도르프는 "너를 위해 죽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라는 성화 밑에 있는 글을 일고 온 일생 헌신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요구하시지 않으시겠지만,
우리를 대속하신,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특히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 안으로들어가 산출된
교회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부활 안에서 산출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구성체임을 봅니다.
이 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회중 (교회) 가운데서 주를 찬송하는[시22:22]"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구속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구속입니다.
특히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너무나도 큽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어떠한지요?
또한 부활 안에서 산출된 교회에 대해 우리의 태도와 인식은 어떠한지요?
다시 한번 주님께 헌신합니다.
온 일생 이런 주님께 사로잡혀서 그분의 인격과 역사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