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형제님이 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헐벗은 산과 같고 마른 땅 같은 (사41:18) 우리에게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았습니다.
지역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애찬을 누리고
나눈 교통에 함께 한 성도들이 잔잔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때맞추어 도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요6:57]
우리의 생활은 어쩌면 이 한 구절을 이루는 생활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을 생명의 방식으로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고 살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고 살려고 하니 많은 부작용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기를 교통했습니다.
우리의 부족은,
말씀을 읽지 않거나, 아니면 읽어도 기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아침 부흥시간에 말씀을 기도와 함께 읽을 때
우리는 주님을 접촉할 수 있고,
그분을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기도화 해서 읽을 때 실제적으로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 13~14절을 아침에 지체들과 함께 보았는데,
"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원천이 되어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
함께 이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특히 "이 물",
"내가 주는 물" , 그 물이 우리 안에서 "샘솟아 올라!" 가 두드러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을 사용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 시간에 없는 지체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어떤 자매님 형제님이 이시간 주님이 주는 물을 마시게 하소서!
그러므로 "이 물"을 마시는 데서 구원 받게 하소서!"
두 구절을 함께 기도를 읽는 우리들을 소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물"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각주를 찾아서 읽고,
그 중심 단어들,
"물질적인 것을 누리는 것" 과 "세상적인 오락을 통해 얻는 쾌락" 보다는
주님이 주는 물로 만족을 얻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20분동안의 아침부흥이었지만
우리는 뭔가 우리 안에 채워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기도로 읽는 실행은
주의 회복에서 일반화 된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아침부흥이나 말씀을 추구할 때 잘 적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님과 교통 중에 저의 교회 생활이
메마르고 궁핍한 이유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전에 B.F.K (Bibles For Korea) 자원봉사자로
회복역 보급판을 배포하러 함께 갔습니다.
어떤 감리교 교단에 있는 자매님에게 회복역을 소개하며
이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마침 아침 속회에 참석치 못하고 병원에 가는 데,
말씀을 함께 읽으니 뭔가 자신 안에 전달되는 것 같다고 하며
좋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안 것은 아침 부흥이 우리에 복음 전파에도 영향을 주며,
우리의 생활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님의 방문이 우리에게는 가뭄에 단비였습니다.
미국에 어떤 자매님은 이런 실행으로 생활이 전환되려하자
악한 자가 싫어하여 공격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관념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실행도 적용되지 않는 것은 우리와 무관합니다.
교회생활이 빈곤하고 달콤하지 못하고 변화가 더딘 원인이
어쩌면 우리가 먹는 것이 부족해서 인지도 모릅니다.
놀랍고 특별하고 새삼스런 방법은 아니었지만,
최근의 폴한 형제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를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아침에 함께 등산하며 나눈 교통들도 좋았습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맛보는 1박2일의 섞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