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복음대행진 (2007년 8월 26일경)을 돌이켜보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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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 조회 (80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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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대행진의 날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라고 썼었던 네이버 블러그의 포스트를
이제는 돌이켜보며라고 써야할 거 같습니다.
(아래 글은 그 당시에 쓴 글이므로 미래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쯤이면 적어도 그 행진에 참여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그 당위성과 그 의미에 대해 정립이 되어야할 시기임을 느낍니다.
아니 최소한 그것이 한국사회와 한국의 기독교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며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합당한 선견을 가져야 함을 봅니다.
,,,,,,,,,,,
몇번의 한국교회에서의 큰 움직임이 있었던 기억입니다.
아주 예전에 세계 섞임집회가 있었다고 들었고(70년대)
문두드리기 실행이 있었고(80년대 말)
윗트니스 리 형제님이 몇번 한국에 오실 때 큰 모임이 몇번 있었고(80년대와 90년대 초)
러시아의 볶음팀이 함께한 대전에서 전국 연합집회가 있었습니다.(90년대 말)
그리고
회복안에서 오랜 교회생활을 하신 분들은 일년에 두차례씩
한국교회들의 유스호스텔에서의 모임(80년대 말까지)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온 한국의 성도들이 한군데서 이박삼일씩 먹고자고 모이고 교통하고 하면서
마치 먼데 떨어져 있던 친인척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기에
축제같았고 잔치같았던 그 날들을 은근히 그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당시는 그렇게 경제적인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일년에 두번정도 있는 어쨌든 그당시로서는 시설이 좋은 편인 
서울의 호스텔에서의 숙박비와 식비까지 포함된 체류비를 충당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을 해서 상경을 하는 분들도 많았기에
그만큼 사모되었고 그만큼 본전을 빼야겠다는 각오?도 있었고
그래서 그만큼 누림이 많은 집회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그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까르르~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잔치마당!!
문득 돌이켜 보면....그래서
크고 작은 모든 모임들의 성겪은 대부분 집안잔치와 같은 것이었고
하나의 이런 저런 실험과 같은 성겪들이었던 기억입니다.
 
이번 볶음 대행진은 그러나 집안잔치이기 보다는 대외적인 선전포고와 같은 성겪임을 느낍니다.
그것은 회복역 출판과 함께 앞으로 불어닥칠 폭풍을 미리 예측하고
미리 포석을 놓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회복역은 윗트니스 리 형제님의 사역의 총집산이라고 할 수 있는 수확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의 지방의 터위의 교회들의 성도수의 양적인
그리고 질적인 부흥을 위한 휘저음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선포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회복역 성경을 소개하는 표어이기도 하고
회복안의 성도들인 우리의 내적인 부흥을 위한 새출발의 다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 나라엔 기독교와 관련된 사고가 참 많았습니다.
하다못해 하필 예배당의 철탑이 떨어져 트럭을 덮치는 일까지도.... 
그러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선포는 이런 저런 의미에서 주목을 받을만한 여건이 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이 이야긴 아직 끝맺을 단계가 아닌 것을 봅니다.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성경으로 돌아가자느 포스터를 미리 어디선가 보았는지
교파의 목사라는 분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블러그를 만들었더군요...어이구 참......)
 
 
 
 
 
 

<아래 글은 원문 http://blog.naver.com/r_wj?Redirect=Log&logNo=60040270653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07년에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역사인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도 로버트 하디 선교사가 중심이 된
1903년 원산의 참회기도회가 출발점이었다.

평양장대현 교회예배당 모습: 어떤 느낌이 드나요? 좀 넓은 가정집이라는 생각이 안듭니까?
 
 
1903년 부흥의 불씨는 하디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부흥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07년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설날이 되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10일 동안 성경 공부를 위해 모이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지정된 장소에 모였는데
그곳이 평양의 장대현 교회였습니다.
 
약 1500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고
이미 선교사들은 6개월 동안 한국교회에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대 여섯 명의 선교사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해 주시기를 탄원하였습니다.
그중의 한 선교사는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실 때까지 그 분을 놓지 않으려 했다"
 
드디어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간단한 설교가 끝이 난후에 기도를 시키려고 했지만
지원자가 너무 많아 누구를 지명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회자는
 "여러분이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면 다 함께 기도 합시다"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식 통성기도의 원조입니다.
 
이것을 후일에 한 목격자는
"기도의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기도소리와
 성령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화요일 집회에서는 놀라운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한국인 목사 중에 김모 목사와
강모 목사님이 서로를 적대시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이 강대상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김목사가 강목사를 미워한 것을 회개하겠거늘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대상을 붙잡고
"나는 하나님께 대항해 싸운 죄가 있습니다.
나는 강목사뿐만 아니라 방목사도 미워했습니다.
방목사님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 목사는 선교사였는데 한국식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김 목사가 선교사 방 목사를 미워한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사소한 요구를 거절했던 방 목사를 미워했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방목사가 기도를 했습니다.

<아바지여 아바지여...>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기도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마치 건물의 지붕이 걷히고
하나님의 성령이 하늘로부터 태산의 눈사태처럼 우리들 가운데 내려와 덮치는 것 같았다.
나는 김 목사 곁에 쓰러져 흐느끼며 전에는 드려 본적이 없는 그런 기도를 드렸다"

방목사의 회고입니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길선주 장로가 일어서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사람이 임종 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미화 100불상당의 금액을 사취(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길 장로는 보기에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구르며 회개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형제들을 질시한 것과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는 것도 고백하며 자복했습니다.

다른 한 교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죄를 통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음란과 증오를 고백하면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까지 회개했습니다.
그 교인 역시 회개하며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이어서 온 교인들이 따라 울면서 자신의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새벽 2시가 지나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평양장대현교회의 부흥은 먼저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집회는 성경을 가르침으로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사경회 형태로 진행되었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한 성도들의 죄를 회개하는 통회자복의 역사를 통해서
죄 사함의 기쁨과 실제로 삶속에 들어가서도 삶이 변화되고 있는 증거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폭력을 쓰던 사람은
자신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일일이 용서를 구했고
장사로 부당한 이득을 취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대자보에 회개하는 글을 붙이고 실제로 배상해주고 용서를 구했고
뭔가 사회에 해악이 되는 업종의 직업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런 대부흥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심히 돌이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무엇이 참된 열매를 맺는가에 대한 단상의 글이 있군요)
아래 주소에서 가져왔습니다.

소위 “평양대부흥”에 관한 김교신 형제님의 단상

Trackback URL: http://qlibrary.net/blog/archives/92/trackback/
June 7th, 2005 at 10:34 am (
Radical Christianity)

 

부흥전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각처 교회에 영화(靈火)가 붙었다는 일이

반드시 조선에 희망을 초래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도 과거에 경험한 바이요,

사회 전반이 기독교적으로 변하여 상고(商賈)*까지도

예수쟁이 행세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이 되는 일도

조선에 희망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은

서북지방에서 벌써 시험제(試驗濟)*가 된 일이었다.

 

그 밖에 신학을 지원하는 청년이 많음이라든지

독립 전도의 비장한 결심으로써 구령(求靈) 사업에 진출하는 이를 보았으니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일로써 희망이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학이나 전도에만 거룩함이 있고 갱생의 희망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다.

 

양돈과 양계에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산란의 일자와 계보의 정부(正否)를 속이지 말면서

성전(聖前)에서 행하는 일이면 다 거룩한 일이요,

희망이 전족(全族)에게 임하는 대사업이다.

 

우리의 희망은

그대한 사업 성취나 혹은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은 참패(慘敗)로써 세상을 마친다 할지라도

참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노역하는 자면

우리의 희망은 전혀 그에게 달렸다.

 

 -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년 3월)

 * 상고商賈 : 장사치
 * 시험제試驗濟 : 이미 경험하여 결론이 난 일

 

나는 무교회(무예배당)주의자였던 김교신 형제님이 말한 '진실한 인물'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하나님사람(God-man)-곧 '이기는 자'라고 생각한다.

 

위의 글은 “김교신전집1- 인생론”을 읽다가 동감하여 옮겨 적는 김교신 형제님의 글이다.

이 글은 참으로 예수를 제대로 믿어, 조선에 기여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한 형제님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감격이 있다.

 

제대로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이

오히려 대부흥의 역사보다 더욱 값진 일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제대로 밝히고 있다.

 

이 글의 첫 문단은, 선교와 전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인용하는 ‘평양대부흥’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어떠했을까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평가가 담겨져 있다. 이 글이 1937년에 쓰여졌으니,

소위 평양대부흥이 있은지 대략 30년이 지난 후인데

그 30년 동안 그런 영성운동이 조선에 무슨 기여를 했던 것인가에 대한

선생의 비판적 어조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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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가 중보기도 하여야 할 7가지가 있는데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의 동반자들을 위하여, 여러분의 교회를 위하여,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새 신자들을 위하여, 주 예수님의 회복을 위하여, 사역의 말씀을 위하여 아멘 하늘의 사역 안에서 중보기도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영 안으로 건축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나다나엘
성경으로 돌아가자 언제 시작한지 모르는 일입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RSG와함께 하며 지체들과 새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건축하고 누립니다 아멘 온 땅에 하나님의 기쁜소식이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코너스톤
아멘!! 온 땅에 하나님의 기쁜소식이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