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굴욕과교황제도의 몰락.단테
간추린2000년교회사
2014-11-19 , 조회 (78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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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굴욕

11세기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정욕을 방종한 상황들이 곳 곳에서 볼 수 있었다. 1073년 그레고리7세가 교황자리에 오르자 전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성직 매매를 엄격하게 금지하였고 성직자 독신제도와 그때 까지 국왕이 갖고있던 성직 임명권을 교황이 갖는것 등의 교황의 권리를 확고하게 확립 하므로서 교황과 황제들 사이에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언급할 만한 일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노사의 사건이었다. 1075년 정치와 종교간의 희극적인 투쟁이 있었다. 두 주인공은 그 당시 강자 들로서 정치에서는 하인리히 4세이고 종교에서는 그레고리 7세였다.하인리히는 그레고리가 교황으로 선출되는것을 반대하였다. 그레고리가 교황이 된후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독일국경 내에 있는 각 교회의 주교 임명권을 포기 하라고 명령함으로 성직자 서임권 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교황은 하늘로부터 성직자 서임권을 받았다는 말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하인리히 4세를 파면하고 왕위를 폐위 시켰다. 파면후 하인리히 4세에 동조하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1077년에 하인리히4세는 걸인의 모습을 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추운 겨울에 험준한 알프스산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에있는 카노사 성으로 찾아가 눈 덮인 성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베옷을 입고 죄인의 모습을 연출하며. 맨발로 3일동안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황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그레고리는 하인리히가 자신을  폐위 시켰다는 이유때문에 그를 만나지 않았지만.그레고리교황 자신은 평범한 목수 출신이었고 .귀족인 독일의 왕이 3일동안 꿇어 앉아있는데 사면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레고리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3일이지난뒤 성문을 열고 사면을 해주었다.

그당시 교황의 파면은 황제나 귀족이 죄를 짖고도 순종하지 않을때 교황은 성례 금지령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성례가 금지되면 그나라에 장례를 제외한 성찬,침례,혼례등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반항하게 된다는것을 하인리히4세는 두려워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압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수모를 당한 하인리히 4세는 세력을 키워 그를 반대했던 귀족들을 정복하고 3년뒤 군사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하여 1084년 점령하고 클레멘스 3세을 새 교황으로 취임하게 하고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7세는 3년뒤 정의 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배 신세가 되어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레고리7세가 새로운 통치 방법을 강구하고 권위를 새로 회복하기 위하여 시도 하였으나 종교와 정치의 추악한 투쟁만 있을뿐이었다.

중세 교황과 정권의 관계는 복잡하여 때로는 결탁하고 때로는 충돌 하였다. 정치와 종교사이의 야합과 대립.신권과 왕권의 권력 투쟁을 볼수있다. 중세 시대는 부패하고 변절되고 정권야욕이 가득한 암흑 시대였음을 볼 수있다.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마져 죽고 난 다음 성직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고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 아래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협약에서 통과 되었다.

교황제도의 몰락

1305년에 교황이된 클레멘트 5세는 프랑스의 영향아래 있었고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1309년에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겼다. 아비뇽 교황청은 70년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역사는 이기간을 "교회의 바빌론 유수시기"라고 말한다.

당시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 주된 원인은 교회의 부패함과 십자군 원정을 위하여 교회는 책임질 수 없는 영적인 구호로 사람들의 참가를 격려하였고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죄를 사하여 줄 뿐아니라 사후에 천당에 갈 수 있고 하늘의 보상이 있다고 약속을 하였다.

교회는 영적인 약속을 남용하여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게다가 원정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 재원을 충당 해야만 했다. 1300년 보니페이스 8세는 로마로 성지 순례를 와서 침례를 받으면 죄가 청산된다고 하였다. 또한 무릇 로마로 오지 못하는 이들은 금전으로 대체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황청은 재화가 쌓이게 되었다.

이후로 성당를 보수하려 하거나 재정이 궁색해 지면 속죄 증명서를 대량으로 찍어 판매하는 면죄부 제도를 세웠다. 또한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재물을 거두어 들이는 일들이 수 없이 발생했다. 성인의 유물.뼈.아론의 지팡이.예수님이 심판 받을때 걸었다는 계단 등이 모두 사람들이 자신이나 연옥에 있는 가족의 속죄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 "금화와 은화가 헌금통에 떨어지며 딸랑 소리를 낼때 영혼이 즉시 연옥 가운데서 나온다."

14세기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교황청과 국왕 사이에 충돌이 갈수록 빈번하게 되었는데 교황 보니페이스 8세와 프랑스왕 필립4세 사이에 세금과 권력의 문제로 인해 일련의 투쟁이 발생하였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프랑스 국왕은 교회에 세금을 징수했다.

교황은 어떠한 정부도 교회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금지하며 그렇치 않다면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라고 명령하였고 더나아가 교황은 자신이 영적인 일을 주관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동시에 땅에 속한일을 주관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모든사람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공고를 반포했다.1303년 필립4세는 교황을포로로 잡아 감금하였고. 얼마안가 보니페이스8세(1294-1303)는 감옥에서 죽었다.

단테

이탈리아 문학에서 신곡을 쓴 단테라는 문학가 가있다. 단테는 당시의 교황이었던 보니페이스  8세를 매우 미워했다고 한다. 단테는 플로랑스 사람이었는데 플로랑스에서 민주운동이 일어났을때 보니페이스 8세는 플로랑스의 귀족들을 도와 단테를 포함한 민주 운동가들을 진압하였다.

결국 탄테는 감옥에 가게되었는데 신곡에서 단테는 보니페이스 8세를 지옥의 가장 낮은곳으로 보냈다. 1300년에 보니페이스 8세는 로마로 성지 순례를 와서 침례를 받으면 죄가 청산된다고 하였다. 단테는 1300년 희년 성지순례에 참석 하였는다.로마에는 성 천사의 성이 있는데 그 앞에 다리가 있다.

그당시 그다리에는 희년 성지순례하는 사람들로 메워져 있었는데. 그때 단테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밟히며 심지어 다리에서 떨어질 정도로 많은사람들을 보고. 신곡에서 사망의 지옥으로 향하는 다리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걸어갔다고 썼다. 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인지 이다리가 사망으로 가는 것과 같다는 느낌은 성지 순례때 얻은 영감일 것이다.

단테가 감옥에 같히게 된것은 보니페이스 8세  때문이었으므로 그는 보니페이스 8세를 죽도록 미워했고.그 아픔과 증오를 신곡에 썼던 것이다.

성 천사의 성은 티베르강가에 있고 베드로 성당에 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원래 이곳은 하드리아누스황제의 묘가있는 곳이었다. 천주교는 후에 그곳을 도피성으로 만들었다. 외적이 로마성을 공격한다거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교황은 이곳으로 피신 했었다.

또한 죄수들을 감금하거나 교황이 다른교황을 타도한 후에 감금하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중세의 천주교는 성례를 주관하고 심지어 황제의 대관식도 주도하였다. 종교의 권위로 왕권에 대항하며 국가의 대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성 천사성은 중세에 왕권과 신권이 투쟁한 또 하나의 전쟁터라고 말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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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 롬
정치인들의 도피성으로 천주교의 유래를 볼수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