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 (2)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2012-07-25 , 조회 (1701)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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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우리는 집회에 올 때 제일 좋은 자리를 골라 앉을 정도로 이기적이다. 이곳 미국에서는 집회에서 개인용 의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리를 이용하지 못하지만, 대만에서는 집회에서 긴 의자를 사용한다. 긴 의자는 평상시의 집회 때에 네 사람이 앉기에 충분한 길이이다. 그러나 특별 집회 때는 형제자매들에게 의자마다 다섯 명이 앉을 수 있도록 가능한 밀착하여 앉기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자리를 넓게 잡아 사분의 일을 차지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밀착하여 앉으라고 강요한다. 이것이 성막과 주님의 증거를 접촉하는 방법이란 말인가? 우리는 얼마나 사악한지! 우리는 주님을 속건제로 적용할 필요가 얼마나 많은지!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우리가 주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하다면 우리가 이 성막을, 이 증거를 접촉하러 올 때 성령은 우리의 모든 사악함과 범죄를 느끼도록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였는지 깨닫고는, “오, 주님,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를 씻어 주소서. 주님은 나의 구속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다시 한번 나의 속건제로 적용합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오,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적용할 때마다 즉시 용서받고 정결하게 됨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양심은 편안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과 좋은 교통을 나누고 몸과 좋은 교통을 나누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할 때마다 늘 항상, 주님께 나를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양심의 정죄 때문에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없고 생생하게 말씀을 전하지 못할 것이다. 내 양심이 순수하게 되어 평강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그리스도를 나의 속건제로 적용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 나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요구할 만큼 담대해진다. 피가 정결하게 한 곳에는 기름 부음이 따라온다. 관유를 바르는 것은 언제나 피로써 정결케 한 다음에 온다. 우리는 기름 부음, 즉 성령의 운행을 요구할 수 있는 피의 근거가 있기 때문에 생생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속건제로 적용할 때, 내가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든지 그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주님을 찬양하자! 나는 용서받고 정결하게 되었다. 나는 말씀을 전하려 할 때마다, 

봉사를 하려 할 때마다, 어떤 형제를 만날 때조차도,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한 번 더 정결하게 하옵소서. 당신을 나의 속건제로 적용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때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주님의 보호로 어떤 죄도 범하지 않고 온종일 주님 안에서 보존되었다. 그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보다 깊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온종일 저를 지켜 주셨습니다. 당신의 보호로 저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 안에 어떤 악한 것이 있다고 더 깊이 느끼게 된다. 깊은 속에서 범죄 그 이상의 사악한 어떤 것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로 단수의 ‘죄’이다. 그것은 죄의 본성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평화롭게 지낸다 하더라도, 그러나 우리 속에는 죄의 본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5, 6, 7, 8장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죄이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한다. 나는 여러 ‘죄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수의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이다. 죄라고 불리는 악하고, 강력하고, 살아 있는 무언가가 내 속에 있다. 그것은 나를 정복할 수 있고 나를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몹시 싫어하는 일들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본성, 즉 악한 자의 본성이다. 이것 때문에 한 제물, 곧 속죄제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은행 강도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나는“주님,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 제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내 깊은 속에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있었다. 왜냐하면 강도짓을 하는 본성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실제로 강도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나도 강도의 본성은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주님, 당신의 보호로 다른 사람을 강탈하는 일에 연루되지 않은 것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주님, 저는 죄의 본성, 즉 강탈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속죄제이십니다. 비록 겉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속에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나의 속건제로 적용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저는 여전히 나의 속죄제이신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 제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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