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여름훈련 개요(한-영) 메시지 25~30-isilo file입니다. (isilo file은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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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꿈은 하나님의 목표에 대한 꿈, 벧엘에 대한 꿈, 하나님의 집에 대한 꿈이었는데,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 교회이고,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신 선민의 영원한 거처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Jacob’s dream was a dream of God’s goal, the dream of Bethel, the dream of the house of God, which is the church today and which will consummate in the New Jerusalem as the eternal dwelling place of God and His redeemed elect.
우리는 타고난 생명의 파쇄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변화를 거친 후에,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데서 단체적으로 체험하는, 즉 하나님을 벧엘의 하나님으로 체험하는,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전환을 가질 것이다.
After we experience the breaking of our natural life and undergo transformation for God’s building, we will make a crucial and radical turn from the individual experience of God to the corporate experience of God-the experience of God as the God of Bethel.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에 관하여 축복하며 예언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사람, 곧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조성되고 침투된, 심지어 하나님으로 재구성된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생각이었고, 그가 표현한 의견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의견이었다.
When Jacob prophesied concerning his twelve sons with blessing, he was a God-man, a man filled, constituted, permeated, and even reorganized with God; whatever he thought was God’s thought, and whatever opinion he expressed was God’s opinion.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하나님의 재생산이 되고,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하여 원수를 처리하고 땅을 회복하며 왕국을 이끌어 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God’s intention in creating man in His image and in giving him dominion was that man would become a reproduction of God for His corporate expression and would exercise God’s authority to deal with the enemy, recover the earth, and bring in th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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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 / WEEK 25 - OUTLINE
벧엘의 꿈 / The Dream of Bethel
성경: 창 28:10-22, 요 1:51
Scripture Reading: Gen. 28:10-22; John 1:51
Ⅰ. 야곱의 꿈은 하나님의 목표에 대한 꿈, 벧엘에 대한 꿈, 하나님의 집에 대한 꿈이었는데(창 28:10-22),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 교회이고(딤전 3:15)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신 선민의 영원한 거처인 새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계 21:3, 22).
I. Jacob’s dream was a dream of God’s goal, the dream of Bethel, the dream of the house of God (Gen. 28:10-22), which is the church today (1 Tim. 3:15) and which will consummate in the New Jerusalem as the eternal dwelling place of God and His redeemed elect (Rev. 21:3, 22):
A. 하나님은 꿈을 갖고 계셨고, 그 꿈은 하나님의 경륜의 완결인 건축된 성, 새 예루살렘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건축물은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넣어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건축물은 한 하나님-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집(시 90:1, 91:1, 9)이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집(사 66:1-2, 57:15, 요 14:20, 23, 15:5, 계 21:3, 22)인 건축물이다.
A. God had a dream, and that dream was to have the New Jerusalem, a built-up city, as the consummation of His economy; this building is the building of God into man and of man into God-God’s building is a God-man, a building in which God is man’s home (Psa. 90:1; 91:1, 9) and man is God’s home (Isa. 66:1-2; 57:15; John 14:20, 23; 15:5; Rev. 21:3, 22).
B.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경륜의 완결인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다 ― 계 21:9-10.
B. Our dream is to become the New Jerusalem as the consummation of God’s economy (vv. 9-10).
C. 꿈의 원칙은 불가능한 어떤 일이 꿈속에서는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 비교 눅 1:37, 18:27, 욥 42:2-3, 시 126:1, 렘 32:27.
C. The principle of a dream is that in it something impossible happens to us (cf. Luke 1:37; 18:27; Job 42:2-3; Psa. 126:1; Jer. 32:27):
1. 모든 영적인 이상은 꿈이다. 즉 모든 영적인 체험은 꿈이다.
1. Every spiritual vision is a dream; every spiritual experience is a dream.
2. 대부분의 하늘에 속한 이상들은 고난의 시기에, 즉 우리가 사람에게 속한 것에서 끊어지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신뢰를 둘 때 우리에게 임한다 ― 비교 창 28:10-12.
2. Most heavenly visions come in times of suffering, when we are cut off from what is of man and put our trust in what is of God (cf. Gen. 28:10-12).
3.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첫 번째 꿈은 우리의 구원이다. 교회생활 안에 들어오는 것도 꿈이며, 교회의 실지적인 면을 아는 것도 역시 꿈이다.
3. The first dream of our spiritual life is our salvation; coming into the church life is a dream; knowing the practicality of the church is also a dream.
4. 모든 영적인 꿈의 중심은 사다리이신 그리스도, 곧 하늘을 땅으로 이끌어 오고 땅을 하늘에 연결하는 분이신 그리스도이다 ― 요 1:51.
4. The center of every spiritual dream is Christ as the ladder, as the One who brings heaven to earth and joins earth to heaven (John 1:51).
Ⅱ. 창세기 28장에 있는 야곱의 꿈은 창세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며, 하나님의 계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II. Jacob’s dream in Genesis 28 is the most crucial point in the whole book of Genesis and the most crucial word in the revelation of God:
A. 벧엘에 있는 하늘에 속한 사다리이신 면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구속받고 변화된 그분의 선민으로 구성된 한 집을 이 땅에서 갖기를 얼마나 갈망하시는지 에 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하늘(하나님)을 땅(사람)으로 이끌어 오시고 땅(사람)을 하늘(하나님)에 연결하시어 영원토록 이 둘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다 ― 요 1:51, 창 28:10-22.
A. Christ, in His being the heavenly ladder at Bethel, speaks to us concerning how God desires to have a house on the earth constituted with His redeemed and transformed elect so that He may bring heaven (God) to earth (man) and join earth (man) to heaven (God), to make the two as one for eternity (John 1:51; Gen. 28:10-22).
B. 야곱의 꿈의 기록에서, 돌(창 28:11, 18, 22)과 기둥(18절)과 하나님의 집(17, 19, 22절)과 기름(18절)은 두드러진 항목들이고 성경을 구성하는 기본 요인들이다.
B. In the account of Jacob’s dream, the stone (vv. 11, 18, 22), the pillar (v. 18), the house of God (vv. 17, 19, 22), and the oil (v. 18) are outstanding items and are the basic factors with which the Bible is composed:
1. 돌은 하나님의 영적인 집인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기초돌과 꼭대기 돌과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 사 28:16, 슥 4:7, 행 4:10-12.
1. The stone symbolizes Christ as the foundation stone, the topstone, and the cornerstone for God’s building, His spiritual house (Isa. 28:16; Zech. 4:7; Acts 4:10-12).
2. 돌은 또한 변화된 사람, 곧 변화시키는 요소이신 그리스도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위한 재료가 된 사람을 상징하며(창 2:12, 마 16:18, 요 1:42, 고전 3:12, 벧전 2:5, 계 21:11, 18-20), 이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 교회이고(딤전 3:15), 결국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어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신 선민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다(계 21:3, 22, 요 14:23).
2. It also symbolizes the transformed man, who has been constituted with Christ as the transforming element to be the material for the building of God’s house (Gen. 2:12; Matt. 16:18; John 1:42; 1 Cor. 3:12; 1 Pet. 2:5; Rev. 21:11, 18-20), which is the church today (1 Tim. 3:15) and which will consummate in the New Jerusalem as the eternal dwelling place of God and His redeemed elect (Rev. 21:3, 22; John 14:23).
3. 야곱은 돌을 베개로 사용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한 요소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조성되어 (만족을 포함하는) 우리의 안식을 위한 베개가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서 견고한 버팀대가 되는 것을 상징한다 ― 비교 마 11:28.
3. Jacob used a stone for a pillow, signifying that the divine element of Christ constituted into our being through our subjective experience of Him becomes a pillow for our rest (which includes satisfaction), the solid support within us (cf. Matt. 11:28).
4. 꿈에서 깬 후에 야곱은 베개로 사용했던 돌을 기둥으로 세웠는데, 이것은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그리스도, 우리가 기대어 안식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건축물인 하나님의 집을 위한 재료와 버팀대가 되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 비교 왕상 7:17,21, 갈 2:9, 계 3:12.
4. After awaking from his dream, Jacob set up the pillow-stone as a pillar, signifying that the Christ whom we have experienced, who has been wrought into us, and on whom we rest becomes the material and the support for God’s building, God’s house (cf. 1 Kings 7:17, 21; Gal. 2:9; Rev. 3:12).
5. 마지막으로 야곱은 기둥 위에 기름을 부었는데, 기름은 사람에게 도달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그 영을 상징하고(출 30:23-30, 눅 4:18), 기둥은 삼일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분을 표현하는 변화된 사람을 상징한다.
5. Eventually, Jacob poured oil, a symbol of the Spirit as the consummation of the Triune God reaching man (Exo. 30:23-30; Luke 4:18), on the pillar, symbolizing that the transformed man is one with the Triune God and expresses Him.
6. 이 돌이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창 28:17, 19, 22).
6. That stone became Bethel, the house of God (Gen. 28:17, 19, 22):
a.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상호 거처이다(요 14:2, 23). 즉 사람은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사 66:1-2, 고전 3:16, 엡 2:22, 히 3:6, 계21:3), 하나님은 사람의 거처가 되시는 것이다(시 90:1, 91:1, 요 15:5, 계 21:22).
a. God’s house is the mutual dwelling place of God and His redeemed (John 14:2, 23)-man as God’s dwelling place (Isa. 66:1-2; 1 Cor. 3:16; Eph. 2:22; Heb. 3:6; Rev. 21:3) and God as man’s dwelling place (Psa. 90:1; 91:1; John 15:5; Rev. 21:22).
b.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나로 연합되어 조성된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은 인성 안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모두는 상호적이며 영원한 만족과 안식을 갖게 된다 ― 시 132:13-14.
b. Hence, the house of God is constituted of God and man mingled together as one; in God’s house God expresses Himself in humanity, and both God and man find mutual and eternal satisfaction and rest (Psa. 132:13-14).
7. 오늘날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벧엘의 실재, 곧 하늘에 속한 사다리와 돌과 기둥과 하나님의 집과 기름이 나오는 야곱의 꿈의 성취 안에 있다. 이것은 영원한 벧엘, 곧 하나님의 영원한 집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딤전 3:15, 계 21:3, 22.
7. Today in the church life we are in the reality of Bethel, in the fulfillment of Jacob’s dream with the heavenly ladder, the stone, the pillar, God’s house, and the oil; this will consummate in the New Jerusalem as the eternal Bethel, the eternal house of God (1 Tim. 3:15; Rev. 21:3, 22)
8.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함께 연결되고 연합되고 합병됨으로 조성된다 ― 요 14:23, 요일 4:15-16, 비교 행 17:24.
8. The house of God is constituted of God and man united, mingled, and incorporated together as one (John 14:23; 1 John 4:15-16; cf. Acts 17:24).
Ⅲ. “야곱은 꿈을 꾸었다. 꿈에 보니 땅 위에 사다리가 세워져 있는데,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창 28:12) “예수님께서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요 1:51)
III. “And he dreamed that there was a ladder set up on the earth, and its top reached to heaven; and there the angels of God were ascending and descending on it” (Gen. 28:12); “and He said to him, Truly, truly, I say to you, You shall see heaven opened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 (John 1:51):
A. 사다리는 야곱의 꿈의 중심과 초점이다. 이 꿈은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야곱이 본 사다리의 실재이시기 때문이다.
A. The ladder is the center, the focus, of Jacob’s dream; this dream is a revelation of Christ, for Christ is the reality of the ladder that Jacob saw.
B.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인성 안에서 하늘(하나님)을 땅(사람)에 이끄시고 땅과 하늘을 하나로 연결하시는, 땅에 세워진 사다리이시다 ― 비교 요 14:6.
B. Christ as the Son of Man, in His humanity, is the ladder set up on earth that brings heaven (God) to earth (man) and joins earth and heaven as one (cf. 14:6):
1. 주 예수님은 육체 되심을 통해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다 ― 요 1:14.
1. By His coming through incarnation, the Lord Jesus brought God into man (1:14).
2. 주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가심으로써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다 ― 요 14:6, 20.
2. By His going through death and resurrection, the Lord Jesus brought man into God (14:6, 20).
C. 오늘날 하나님의 거처인 우리의 거듭난 영(엡 2:22)은 하늘에 속한 사다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서 계시는 기반이다(창 28:12, 딤후 4:22).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이끌어 오고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어 주는 사다리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된다.
C. Our regenerated spirit, which is God’s dwelling place today (Eph. 2:22), is the base on earth where Christ as the heavenly ladder has been set up (Gen. 28:12; 2 Tim. 4:22); hence, whenever we turn to our spirit, we experience Christ as the ladder bringing God to us and us to God:
1. “그러므로 형제님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히 10:19.
1. “Having therefore, brothers, boldness for entering the Holy of Holies in the blood of Jesus” (Heb. 10:19):
a. 오늘날 지성소는 하늘에 있으며, 그곳에 주 예수님께서 계신다(히 9:12, 24).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땅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가?
a. The Holy of Holies today is in heaven, where the Lord Jesus is (9:12, 24); how, then, can we enter the Holy of Holies while we are still on earth-
b. 그 비결은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말한 우리의 영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은 지금 우리 영 안에도 계신다 ― 딤후 4:22.
b. The secret is our spirit, referred to in Hebrews 4:12; the very Christ who is in heaven is now also in our spirit (2 Tim. 4:22).
c. 하늘에 속한 사다리(창 28:12, 요 1:51)이신 그분은 우리 영을 하늘과 연결하시고, 하늘을 우리 영 안으로 가져오신다. 따라서 우리가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c. As the heavenly ladder (Gen. 28:12; John 1:51), He joins our spirit to heaven and brings heaven into our spirit; hence, whenever we turn to our spirit, we enter into the Holy of Holies; there we meet with God, who is on the throne of grace.
2.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 히 4:16.
2. “Let us therefore come forward with boldness to the throne of grace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for timely help” (Heb. 4:16):
a. 의심할 것 없이 여기 언급된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다(계 4:2). 하나님의 보좌는 온 우주에 대한 권위의 보좌이다(단 7:9, 계 5:1).
a. Undoubtedly, the throne mentioned here is the throne of God, which is in heaven (Rev. 4:2); the throne of God is the throne of authority toward all the universe (Dan. 7:9; Rev. 5:1).
b. 그러나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되며,이것은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 덮개(시은좌, 출25:17, 21)로 상징되었다. 이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기도 하다(계 22:1).
b. But toward us, the believers, it becomes the throne of grace, signified by the expiation cover (the mercy seat) within the Holy of Holies (Exo. 25:17, 21); this throne is the throne of both God and the Lamb (Rev. 22:1).
c. 여전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좌로 갈 수 있는가? 그 비결은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언급된 우리의 영이다.
c. How can we come to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 Christ, in heaven while we still live on earth- The secret is our spirit, referred to in Hebrews 4:12.
d.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롬 8:34)바로 그분은 또한 지금 우리 안에(롬 8:10), 즉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엡 2:22)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딤후4:22).
d. The very Christ who is sitting on the throne in heaven (Rom. 8:34) is also now in us (v. 10), that is, in our spirit (2 Tim. 4:22), where the habitation of God is (Eph. 2:22).
e.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곧 하늘의 문인 벧엘에서 그리스도는 땅을 하늘과 연결하시고, 하늘을 땅으로 이끄시는 사다리이시다(창 28:12-17, 요 1:51). 오늘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처소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영이 하늘의 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사다리로서 땅에 있는 사람들인 우리를 하늘로 연결하시고, 하늘을 우리에게로 이끄신다.
e. At Bethel, the house of God, the habitation of God, which is the gate of heaven, Christ is the ladder that joins earth to heaven and brings heaven to earth (Gen. 28:12-17; John 1:51); since today our spirit is the place of God’s habitation, it is now the gate of heaven, where Christ is the ladder that joins us, the people on earth, to heaven and brings heaven to us.
f.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하늘에 속한 사다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문을 통해 들어가서, 하늘에 있는 은혜의 보좌를 만진다.
f. Hence, whenever we turn to our spirit, we enter through the gate of heaven and touch the throne of grace in heaven through Christ as the heavenly ladder.
D. 이 사다리가 있는 곳에는 열린 하늘이 있고, 변화된 사람이 있으며, 이 변화된 사람 위에 부어지는 기름이 있고, 또한 이변화된 사람으로 건축된 하나님의 집이 있다.
D. Where this ladder is, there are an open heaven, the transformed man, the anointing upon this man, and the building up of the house of God with this man.
E. 하늘에 속한 사다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산출하신 것은 벧엘,교회,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사다리의 최종 완결은 새 예루살렘이다.
E. The issue of Christ as the heavenly ladder is Bethel,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and the consummation of this ladder is the New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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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주 / WEEK 26 - OUTLINE
선택되고, 다루심 받고, 파쇄됨 / Chosen, Dealt With, and Broken
성경: 창 25:22-23, 31:38-41, 32:22-32, 34:30
Scripture Reading: Gen. 25:22-23; 31:38-41; 32:22-32; 34:30
Ⅰ. 야곱은 하나님께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본다―창 25:21-26, 롬 9:11.
I. Jacob was chosen by God; therefore, in Jacob we see God’s selection (Gen. 25:21-26; Rom. 9:11):
A.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야곱을 선택하셨다 ― 롬 9:13, 말 1:2, 엡 1:4, 2:4.
A. God loved Jacob and selected him (v. 13; Mal. 1:2; Eph. 1:4; 2:4).
B.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심지어 창세전에 선택되었다 ― 창 25:22-23, 엡 1:4.
B. Jacob was chosen before his birth, eve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Gen. 25:22-23; Eph. 1:4):
1. 야곱은 하나님께 선택되었다. 이것은 그 자신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었으며, 그 자신이 분투하고 싸워서 얻은 결과도 아니었다 ― 창 25:22-23, 26.
1. Jacob was chosen by God; it was not of his own works, nor was it the issue of his own struggle and strife (Gen. 25:22-23, 26).
2. 야곱이 선택된 것은 부르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 롬 9:11.
2. Jacob’s being chosen was of God who calls, of God’s mercy, and of God’s grace (Rom. 9:11).
C. 야곱처럼 우리도 창세전에 선택되고 선정되었다 ― 엡 1:4, 살후 2:13, 요 15:16상.
C. Like Jacob, we were chosen, selected,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Eph. 1:4; 2 Thes. 2:13; John 15:16a):
1.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영역이시다 ― 엡 1:4.
1. Christ is the sphere in which we were chosen by God (Eph. 1:4).
2. 하나님은 그분의 미리 아심에 따라 우리를 선택하셨다 ― 벧전 1:2, 롬 8:29.
2. God chose us according to His foreknowledge (1 Pet. 1:2; Rom. 8:29).
3. 하나님의 선택은 그분의 주권적인 긍휼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 선택 받은 이들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단계에까지 우리를 이끄실 것임을 신뢰해야 한다 ― 롬 9:11-13, 16.
3. God’s selection depends on His sovereign mercy; as those who have been chosen by God, we should cast ourselves upon Him and trust that He will bring us to the point where we are pleasing to Him (9:11-13, 16).
4. 하나님께서 영원 과거에 우리를 선택하신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정하셨고 시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 롬 8:28-29, 엡 1:5.
4. God’s selection of us in eternity past was followed by His predestination and by His calling of us in time (8:28-29; Eph. 1:5).
5.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선택 받았고 부름 받았다 ― 롬 9:11, 딤후 1:9.
5. We have been selected and called for God’s purpose (Rom. 9:11; 2 Tim. 1:9):
a.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갖고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려는 것임을 계시한다.
a. Genesis 1:26 reveals that God’s purpose in His creation of man was that man would express Him in His image and represent Him with His dominion.
b.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녀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여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될 때까지 야곱을 다루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 창 47:7, 10.
b. God’s purpose for Jacob was to deal with him until he was transformed into a prince of God, bearing His image to express Him and exercising His dominion to represent Him; this is God’s goal (47:7, 10).
Ⅱ. 야곱의 생활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대표하는 생활이었으며, 야곱의 하나님은 다루시는 하나님이시다 ― 창 31:38-41.
II. Jacob’s life is a life that represents God’s dealings, and the God of Jacob is the God of dealings (31:38-41):
A. 하나님은 야곱이 일생 동안 분투하는 삶을 살 것을 정하셨다.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인생의 마지막까지 야곱은 계속해서 분투하였다 ― 창 25:22-26, 27:1-29, 41-46, 28:1-5, 29:1-36:43.
A. God destined Jacob to live a struggling life all his days; from his mother’s womb to the end of his life, he was struggling (25:22-26; 27:1-29, 41-46; 28:1-5; 29:1-36:43).
B. 야곱의 삶과 체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본다 ― 창 25:19-32:21.
B. In the life and experience of Jacob we see God’s dealings (25:19-32:21):
1.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야곱의 삶의 여러 환경들을 안배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은 야곱 위에 있으면서 야곱을 다루었다.
1. God sovereignly arranged the circumstances of Jacob’s life; God’s sovereign hand was upon Jacob to deal with him.
2.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창 32:28.
2. God’s dealing with Jacob was not God’s punishment; rather, it was for the purpose of Jacob’s transformation into Israel (v. 28).
3.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야곱은 여러 환경 가운데서 많은 고난을 받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루심을 받음으로써, 변화되고 성숙하게 되어 이스라엘이 되었다 ― 창 35:10.
3. Under God’s sovereignty, through the sufferings in his circumstances and through God’s direct dealing, Jacob was transformed and matured so that he became Israel (35:10).
C. 야곱의 역사는 성령의 징계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 창 47:9, 48:15-16상, 히 12:9-11.
C. Jacob’s history is a picture of the discipline of the Holy Spirit (47:9; 48:15-16a; Heb. 12:9-11):
1. 성령의 징계는 성령께서 우리의 바깥 환경에서 행하고 계시는 것,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모든 사람과 일들과 사건들을 안배하시어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고 계시는 것을 가리킨다 ― 롬 8:28.
1. The discipline of the Holy Spirit refers to what the Holy Spirit is doing in our outward environment, to His arranging of all people, things, and happenings, through which we are being disciplined (Rom. 8:28).
2. 성령의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옛 창조물을 완전히 허무심으로 새 창조물의 요소를 우리 안에 건축하신다.
2. Through the discipline of the Holy Spirit, God completely tears down our old creation so that the element of the new creation may be built up in us.
3.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성령의 징계를 통하여 다루심을 받는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조성되신다 ― 갈 4:19, 엡 3:17상.
3. As our natural life is dealt with through the discipline of the Holy Spirit, Christ is constituted into us (Gal. 4:19; Eph. 3:17a).
4. 우리의 환경 가운데 있는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 롬 8:28.
4. Everything and everyone in our environment are instruments of sovereignty used by God for our transformation (Rom. 8:28).
Ⅲ.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2절까지는 야곱의 인생에서 긴요하고 중대한 체험, 곧 야곱의 파쇄됨을 말해준다.
III. Genesis 32:22-32 relates a vital and crucial experience in the life of Jacob-his being broken:
A. 주님은 야곱에게 그가 얼마나 천연적이고 그의 타고난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내시기 위해 그와 씨름하셨다 ― 창 32:24.
A. The Lord wrestled with Jacob in order to expose to him how natural he was and how great his natural strength was (v. 24):
1. 주님은 ‘넓적다리 근육이 붙어 있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셨다’(창 32:32). 주님께서 신체 중 가장 강한 근육인 넓적다리 근육이 붙어 있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신 것은 야곱의 타고난 생명, 곧 그의 타고난 힘을 다루신 것을 상징한다 ― 창 32:25.
1. The Lord “touched the socket of Jacob’s hip at the thigh muscle” (v. 32); the touching of the socket of Jacob’s hip at the thigh muscle, the strongest muscle in the body, signifies the touching of Jacob’s natural life, his natural strength (v. 25).
2. 하나님에 의해 파쇄된 후에 야곱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똑같았지만, 내적으로는 그의 타고난 생명이 다루심을 받았다. 주님께서 만지신 것은 그의 외적인 생활이 아니었다. 주님은 바로 내적인 타고난 힘을 파쇄하셨다 ―창 33:1-4, 32:25, 32.
2. After Jacob was broken by God, outwardly he was the same as before, but inwardly his natural life had been dealt with; it was not the outward living that was touched by the Lord but the inward, natural strength that was broken by Him (33:1-4; 32:25, 32).
B. 야곱의 체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파쇄하셔야만 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강렬하게 치셔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 창 32:22-32.
B. Jacob’s experience shows us that God has to break our natural life, that He has to touch our natural life in a drastic way (vv. 22-32):
1. 종교의 방식은 사람의 외적인 행위를 바꾸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분의 방식은 사람의 내적 존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내적 생명을 다루는 것이다 ― 고후 4:16.
1. The way of religion is to change man’s outward behavior; the way of God in His economy is to touch man’s inward life in order to change his inward being (2 Cor. 4:16).
2.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치실 때, 우리는 절뚝거리게 되고 우리의 내적 존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된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절뚝거리며 더 이상 온전하지 않게 된다 ― 창 32:25, 31.
2. When the Lord touches us at a certain crucial spot, we are lame and can no longer be the same in our inward being; from then on, we limp and are no longer whole (Gen. 32:25, 31).
C. 모든 믿는 이는 겉사람의 파쇄를 체험해야 한다 ― 히 4:12.
C. Every believer needs to experience the breaking of the outer man (Heb. 4:12):
1. 그리스도께서 혼의 감금에서부터 해방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겉사람이 반드시 파쇄되어야 한다 ― 엡 3:16-17.
1. In order for Christ to be released from the imprisonment of the soul, our outer man must be broken (Eph. 3:16-17).
2. 영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 ― 히 4:12.
2. Our outer man needs to be broken for the release of the spirit (Heb. 4:12).
3. 우리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순수하게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파쇄되어야 한다 ― 요 12:24-26, 19:34, 7:37-39, 출 17:6-7.
3. In order for there to be a pure flow of the life of God from within us, we must be broken (John 12:24-26; 19:34; 7:37-39; Exo. 17:6-7):
a.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곧 우리가 파쇄되는 것이다.
a. The operation of death within us, spoken of in 2 Corinthians 4:12, is our being broken.
b. 주님은 생수의 통로가 될 파쇄된 그릇들이 필요하시다. 우리가 더 많이 파쇄될수록,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더 많이 흘러나올 것이다 ― 요 12:24-26.
b. The Lord needs broken vessels to be channels of living water; the more we are broken, the more the life of God will flow out of us (John 12:24-26).
4. 우리 혼의 각 부분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파쇄되어야 한다 ― 마 16:24-25.
4. Every part of our soul needs to be broken by God (Matt. 16:24-25):
a. 혼이 파쇄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지 않거나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거나 우리의 의지를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 살전 5:23.
a. For the soul to be broken does not mean that we no longer use our mind, express our emotions, or exercise our will (1 Thes. 5:23).
b.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여전히 기능을 발휘하지만 파쇄되었다. 다시 말하면 다루심 받고 굴복되고 우리의 영에 복종하게 되었다 ― 고후 4:16, 엡 4:23, 딤후 1:7.
b. Our mind, emotions, and will still function, but they have been broken, that is, dealt with, subdued, and made submissive to our spirit (2 Cor. 4:16; Eph. 4:23; 2 Tim. 1:7).
5.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가 든 옥합’ 즉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이 깨어질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순수한 나드 향유가 흘러나와 그 집이 ‘향유의 향기로 가득 찰 수 있다’― 막 14:3, 마 26:7, 요 12:3.
5. There is the need for the breaking of the “alabaster flask of ointment, of very costly pure nard,” containing “ointment of great value,” so that the ointment of pure nard may be released and that the house may be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ointment” (Mark 14:3; Matt. 26:7; John 12:3):
a. 옥합(겉사람)이 깨지지 않는다면 순수한 나드 향유는 흘러나올 수 없다 ― 막 14:3.
a. Unless the flask (the outer man) is broken, the ointment of pure nard cannot be released (Mark 14:3).
b. 우리는 옥합을 향유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면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겉사람을 우리의 속사람 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 마 26:7, 고후 4:16.
b. We should not be protective of ourselves, regarding the flask as more precious than the ointment; we should not consider our outer man more precious than our inner man (Matt. 26:7; 2 Cor. 4:16).
c. 겉 부분이 파쇄되지 않는다면 속 부분은 흘러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이라면, 우리는 전진할 길이 없을 것이고 교회 또한 전진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요 12:3.
c. If the outer part is not broken, the inner part will not be released; if this is our situation, we will have no way to go on, and the church also will have no way to go on (John 12:3).
6.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속으로 건축해 넣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겉사람의 파쇄가 요구된다 ― 엡 3:16-17상.
6. God’s work of building Himself in Christ into us requires the breaking of the outer man (Eph. 3:16-17a).
7. 파쇄는 건축을 위한 선결 조건이다 ― 마 16:18, 엡 4:16.
7. Breaking is a prerequisite for building (Matt. 16:18; Eph. 4:16):
a. 교회가 건축되기 위해서 우리는 겉사람의 파쇄를 체험해야 한다 ― 엡 2:21-22.
a. In order for the church to be built up, we need to experience the breaking of the outer man (2:21-22).
b. 우리가 봉사에서 다른 이들과 동역 하고자 한다면 기꺼이 파쇄되고자 해야 한다. 파쇄되지 않고는 동역이 불가능하다.
b. If we would be coordinated with others in service, we need to be willing to be broken; without brokenness coordination is impossible.
8. 바울과 같이, 우리는 몸의 이상 아래서 파쇄되어야 하고,몸 안에서 우리가 건축되는 유일한 길이 파쇄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 행 9:1-31, 엡 4:16.
8. Like Paul, we need to be broken under the vision of the Body and realize that the only way for us to be built up in the Body is to be broken (Acts 9:1-31; Eph.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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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주 / WEEK 27 - OUTLINE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변화됨 / Transformation for God’s Building
성경: 창 28:10-22, 32:28, 35:10, 15, 롬 12:2, 고후 3:18, 계 4:3,21:11
Scripture Reading: Gen. 28:10-22; 32:28; 35:10, 15; Rom. 12:2; 2 Cor. 3:18; Rev. 4:3; 21:11
Ⅰ. 우리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께서 오직 한가지 일만을 하고 계신다는 것, 곧 그분의 영원한 처소인 벧엘을 건축하고 계신다는 사상으로 빛 비춤 받고, 이 사상으로 완전히 적셔져야 한다 ― 창 28:10-22, 마 16:18, 엡 2:21-22, 계 21:2-3.
I. We need to be enlightened by and fully saturated with the thought that in the universe God is doing only one thing-building His eternal habitation-Bethel (Gen. 28:10-22; Matt. 16:18; Eph. 2:21-22; Rev. 21:2-3):
A. 성경 전체는 건축에 관한 책이다. 성경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의 건축이다 ― 창 28:10-22, 마 16:18, 엡 2:21-22, 4:16,계 21:2-3.
A. The entire Bible is a book of building; the main subject of the Bible is the building of God (Gen. 28:10-22; Matt. 16:18; Eph. 2:21-22; 4:16; Rev. 21:2-3).
B. 성경의 중심적이고 신성한 사상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과 인성의 연합인 신성한 건축물, 곧 하나님 자신이 구속하시고 하나님 자신과 연합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구성체를 얻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 마 16:18.
B. The central and divine thought of the Scriptures is that God is seeking a divine building as the mingling of Himself with humanity-a living composition of persons redeemed by and mingled with Himself (Matt. 16:18).
C. 하나님의 건축물은 하나님의 마음이 갈망하는 것이자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 출 1:11, 25:8, 40:2-3, 엡 1:5, 9,2:21-22, 4:16.
C. God’s building is the desire of His heart and the goal of His salvation (Exo. 1:11; 25:8; 40:2-3; Eph. 1:5, 9; 2:21-22; 4:16).
D.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에 대한 신성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 ― 마 16:18, 엡 4:16.
D. We need to have a divine understanding of God’s building (Matt. 16:18; Eph. 4:16):
1. 하나님의 건축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 요 14:20, 15:4상, 요일 4:15.
1. God’s building is the mingling of God with man (John 14:20; 15:4a; 1 John 4:15):
a. 하나님의 건축의 원칙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건축하시고 우리를 그분 자신 안으로 건축하시는 것이다 ― 엡 3:17상.
a. The principle of God’s building is that God builds Himself into us and builds us into Himself (Eph. 3:17a).
b. 교회는 신성한 재료이신 하나님 자신과 인간적인 재료인 사람이 연합되어 구성된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고전 3:9, 11.
b. The church is God’s building composed of Himself as the divine material mingled with man as the human material (1 Cor. 3:9, 11).
2. 하나님의 건축물은 삼일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이다 ―딤전 3:15-16, 요 17:22, 엡 3:19하, 21.
2. God’s building is the corporate expression of the Triune God (1 Tim. 3:15-16; John 17:22; Eph. 3:19b, 21):
a. 하나님의 의도는 영적인 건축물로 건축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어 그들로 하나님을 표현하게 하고, 그분의 원수를 처리하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는 것이다 ― 창 1:26, 벧전 2:5, 9.
a. God’s intention is to have a group of people built up as a spiritual building to express Him and to represent Him by dealing with His enemy and recovering the lost earth (Gen. 1:26; 1 Pet. 2:5, 9).
b. 이 땅에서 사람에 의해 표현되고 대표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함께 건축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 ― 창 1:26, 엡 2:21-22.
b. God’s desire to be expressed and represented by man on earth can be fulfilled only when we are built up together (Gen. 1:26; Eph. 2:21-22).
3. 하나님의 건축물은 단체적인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확대와 확장이다 ― 요 3:29상, 30상, 골 2:19.
3. God’s building is the enlargement, the expansion, of God to express Himself in a corporate way (John 3:29a, 30a; Col. 2:19):
a. 진정한 건축물은 삼일 하나님의 확대와 확장으로서,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단체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실 수 있다 ― 엡 3:21.
a. The genuine building is the enlargement, the expansion, of the Triune God, enabling God to express Himself in a corporate way (Eph. 3:21).
b. 신성한 건축물은 생명이신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 표현이 된 것인데, 이 표현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확대되시고 확장되신 것이다 ― 엡 3:9, 17상, 19하,21, 1:10.
b. The divine building is the Triune God as life being wrought into us so that we may become His one expression, the enlargement and expansion of God in His economy (vv. 9, 17a, 19b, 21; 1:10).
E. 하나님의 집인 벧엘은 오늘날 교회이며, 영원한 벧엘, 곧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된 선민의 영원한 거처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 창 28:19, 35:15, 딤전 3:15, 계 21:3, 22.
E. Bethel, the house of God, is the church today and will consummate in the New Jerusalem as the eternal Bethel, the eternal dwelling place of God and His redeemed elect (Gen. 28:19; 35:15; 1 Tim. 3:15; Rev. 21:3, 22).
Ⅱ.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손길 아래 있는 사람인 야곱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변화된 생명을 대표한다 ― 창 32:28, 35:10, 15.
II. Jacob, a man under God’s transforming hand, represents a life of transformation for God’s building (Gen. 32:28; 35:10, 15):
A. 야곱의 역사는 반드시 우리의 전기(傳記)가 되어야 한다.
A. Jacob’s history must become our biography:
1. 야곱의 삶에는 세 개의 구분되는 시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루심의 시기(창 25-32장)와 변화의 시기(32-36장)와 성숙의 시기(37-50장)이다.
1. There are three distinct periods in Jacob’s life: the period of dealings (chs. 25-32), the period of transformation (chs. 32-36), and the period of maturity (chs. 37-50).
2. 야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 Everything that happened to Jacob was for his transformation:
a. 변화되기 위해,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야 했다 ― 창 31:36-42, 32:28.
a. In order to be transformed, Jacob had to be pressed into situations that gave him no choice except to undergo a change (31:36-42; 32:28).
b. 야곱의 체험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게 된다 ― 롬 8:28-29, 12:2.
b. From Jacob’s experience we see that everything that happens to us is under God’s sovereignty for our transformation (Rom. 8:28-29; 12:2).
c. 야곱이 변화되는 것은, 창세기 32장에서 주님께서 오셔서 야곱의 가장 강한 부분인 그의 넓적다리를 치신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이후로 변화의 과정이 시작되어 37장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c. Jacob’s transformation began from the time the Lord came and touched Jacob’s strongest part, his thigh, in Genesis 32; from that time onward,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continued until chapter 37.
d. 시므온과 레위가 야곱에게 일으킨 문제는 야곱의 존재의 깊은 부분을 만졌고, 야곱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 창 34:30, 49:5-7.
d. The trouble that Simeon and Levi caused Jacob touched him in the depths of his being, and he began to be transformed (34:30; 49:5-7).
3. 야곱은 하나님의 표현과 하나님의 왕자가 되기 위해 선택되었고, 오직 변화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표현과 하나님의 왕자가 될 수 있었다 ― 창 1:26, 32:28, 고후 3:18.
3. Jacob had been chosen to be the expression of God and a prince of God, and he could become God’s expression and a prince of God only through transformation (1:26; 32:28; 2 Cor. 3:18):
a.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룬 사람’(창 32:28)과 ‘하나님의 왕자’를 의미한다.
a. Israel means “one who struggles with God” (Gen. 32:28) and “the prince of God.”
b. 하나님께서 빼앗는 사람인 야곱을 다루신 목적은, 그를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시켜, 하나님의형상을 지니고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여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는 것이었다 ― 창 1:26.
b. God’s purpose in dealing with Jacob, a supplanter, was to transform him into Israel, a prince of God, bearing His image to express Him and exercising His dominion to represent Him (1:26).
c.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빼앗는 사람(야곱)이 하나님의 왕자로 바뀐 것이다 ― 창 32:27-28, 35:10.
c. Jacob’s name was changed to Israel; a supplanter (Jacob) was changed into a prince of God (32:27-28; 35:10).
d.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과 다툼으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되는 생활이다 ― 롬 12:2, 5:17.
d. The Christian life is a life of struggling with God to be transformed by God into a prince of God (Rom. 12:2; 5:17).
e.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목적은, 가련한 죄인들을 왕가의 아들들로 변화시켜,변화의 과정이 다 완성된 후에, 우리가 왕으로서 다스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 계 22:5.
e. God’s purpose in selecting, predestinating, and calling us is to transform pitiful sinners into royal sons so that, after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has been completed, we may reign as kings (Rev. 22:5).
B.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는 비틀어진 진흙이 되었다. 하나님의 길은 비틀어진 사람들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건축하기 위해 그들을 돌들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창 2:7, 요 1:42, 벧전 2:4-5.
B. Because of the fall, we became distorted clay; God’s way is not to reform distorted ones but to transform them into stones for the building up of God’s house, Bethel (Gen. 2:7; John 1:42; 1 Pet. 2:4-5).
C. 변화되는 것은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 곧 생명 주시는 영으로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혼 안으로 분배되시고 일해 넣어지심으로, 타고난 생명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대치하시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증가하시고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감소하는 것이다 ― 고전 15:45하, 고후 3:17-18, 엡 3:17상.
C. To be transformed is to have the pneumatic Christ, Christ in resurrection as the life-giving Spirit, dispensed and wrought into our soul to replace what we are in the natural life so that Christ may increase and our natural life may decrease (1 Cor. 15:45b; 2 Cor. 3:17-18; Eph. 3:17a).
D. 변화는 외적으로 교정하거나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진대사적인 기능이며,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의 요소가 우리의 존재 안에 더해짐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우리는 밖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게 된다 ― 고후 3:18.
D. Transformation is not outward correction or adjustment but the metabolic function of the life of God in us, by the addition of the element of the divine life of Christ into our being, so that we may express the image of Christ outwardly (2 Cor. 3:18):
1. 변화의 과정은 유기적인 동시에 신진대사적이다. 변화는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에 유기적이며, 옛 요소들이 배출되고 새 요소들이 더해지는 과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신진대사적이다 ― 롬 5:10.
1.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is both organic and metabolic; it is organic because it is related to life, and it is metabolic because it is related to a process in which old elements are discharged and new elements are added (Rom. 5:10).
2. 변화되는 동안 일어나는 신진대사적인 바뀜은 내적인 조성과 외적인 형태 모두가 바뀌는 것이다 ― 롬 12:2, 8:29.
2. The metabolic change that takes place during transformation is a change both in inward constitution and outward form (12:2; 8:29).
3. 변화는 하나님-사람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대량재생산을 위한 것으로,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형태 지어져 하나님의 맏아들과 완전히 똑같아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 롬 8:29.
3. Transformation is for the mass reproduction of the firstborn Son of God as the prototype of a God-man so that we may be shaped into His image to be exactly the same as the firstborn Son of God (v. 29).
E. 우리가 이기는 이들인지 아니면 패배한 이들인지의 여부는,우리 혼의 변화와 주님의 변화시키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 롬 12:2.
E. Whether we are overcomers or defeated ones depends upon the transformation of our soul and upon our attitude toward the Lord’s transforming work (12:2):
1.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일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변화시키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다 ― 고후 3:18, 10:5-6.
1. God’s transforming work is actually His exercising of His kingdom; to obey God is to cooperate with His transforming work (2 Cor. 3:18; 10:5-6).
2. 우리가 생명 주시는 영이신 삼일 하나님께 매일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허락해 드린다면, 우리는 이기는 이들이 될 것이다 ― 롬 12:2, 8:28-29, 37.
2. If we let the Triune God as the life-giving Spirit transform us day by day, we will be overcomers (Rom. 12:2; 8:28-29, 37).
F. 변화는 건축을 산출한다. 새 예루살렘의 벽옥 성벽의 건축은 변화와 함께 진행된다 ― 롬 12:2, 계 21:18상.
F. Transformation issues in building up; the building up of the jasper wall of the New Jerusalem goes along with transformation (12:2; Rev. 21:18a):
1. 그 영의 변화시키는 일에는 하나님의 거처인 벧엘의 건축을 위해 그 영의 신성한 요소의 넘치는 공급이 함께한다 ― 빌 1:19.
1. The Spirit’s transforming work is with His bountiful supply of the divine element for the building up of Bethel, God’s dwelling place (Phil. 1:19).
2. 최종적으로, 그 영의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새 예루살렘을 산출한다.
2. Consummately, the transforming work of the Spirit issues in the New Jerusalem, which bears the image of God for His expression:
a. 하나님은 벽옥처럼 보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새 예루살렘은 벽옥처럼 빛난다 ― 계 4:3, 21:11.
a. God appears like a jasper stone, and the New Jerusalem, having the glory of God, shines like a jasper stone (Rev. 4:3; 21:11).
b. 새 예루살렘의 성벽 전체뿐 아니라 성벽 기초석의 첫번째 층도 벽옥으로 건축되었다. 이것은 성을 건축하기 위한 주된 재료가 벽옥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 계 21:18-19.
b. The first layer of the wall’s foundation, as well as the entire wall of the New Jerusalem, is built with jasper, indicating that the main material in the building of the city is jasper (vv. 18-19).
c. 벽옥은 하나님께서 쉽게 전달될 수 있는 그분의 영광가운데 표현되시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의 주된 기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 계 4:3, 21:11.
c. Since jasper signifies God expressed in His communicable glory, the main function of the New Jerusalem is to express God in bearing His glory (4:3; 21:11).
G.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완전한 계시의 축소판이다.
G. The book of Genesis is a miniature of the complete revelation of the entire Bible:
1. 창세기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 곧 맑고 투명하며 생명으로 충만한, 변화된 한 사람을 본다. 변화된 이 사람은 새 예루살렘의 씨, 곧 축소판이다― 창 35:10.
1. At the end of Genesis we see a man called Israel, a transformed person who is clear, transparent, and full of life; this transformed person is a seed, a miniature, of the New Jerusalem (35:10).
2. 요한계시록 마지막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본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진 투명한 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그 빛은 ‘가장 귀한 보석과 같고 벽옥과 같고 수정처럼 맑다’ ― 계 21:11, 3, 22:1-2.
2. At the end of Revelation we see the New Jerusalem, a transparent city filled with the life of God, having the glory of God, and whose light is like “a most precious stone, like a jasper stone, as clear as crystal” (21:11, 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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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주 / WEEK 28 - OUTLINE
벧엘의 실재와 고통의 아들이자 오른손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산출함 / The Reality of Bethel and the Bringing Forth of Christ as the Son of Affliction and the Son of the Right Hand
성경: 창 35:1-20, 27
Scripture Reading: Gen. 35:1-20, 27
Ⅰ. 창세기 35장에서 벧엘의 이상이 다시 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이 꿈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실재로서 임했다 ― 창 35:1-15.
I. In Genesis 35 the vision of Bethel came again; however, this time it did not come as a dream-it came as a reality (vv. 1-15):
A. 우리는 모두 두 번 교회생활 안에 온다 ― 창 28:12, 16-17, 35:15.
A. We all come into the church life twice (28:12, 16-17; 35:15):
1. 첫 번째로 우리는 꿈에서 교회생활 안에 오고, 두 번째로는 실재로 교회생활 안에 온다. 우리에게는 꿈과 실재 모두가 필요하다.
1. The first time we come in a dream, and the second time we come in reality; we need both the dream and the reality.
2. 처음에 있는 꿈은 참된 그림이었고, 실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꿈에 있는 것과 똑같다.
2. The dream in the beginning was a true picture, and everything in the reality is the same as that in the dream.
B. 벧엘에서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의 존재가 바뀌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제 벧엘에서 그는 이스라엘이었다 ― 창 32:28, 35:10.
B. At Bethel Jacob’s name was changed to Israel, indicating that his being had been changed; now he was Israel at Bethel (32:28; 35:10).
C. 창세기 35장에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데서 단체적으로 체험하는, 즉 하나님을 벧엘의 하나님으로 체험하는,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전환이 있다 ― 엡 3:17-21, 4:4-6.
C. In Genesis 35 there is a crucial and radical turn from the individual experience of God to the corporate experience of God-the experience of God as the God of Bethel (Eph. 3:17-21; 4:4-6):
1. 창세기 35장 7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신성한 칭호인 ‘엘벧엘’, 곧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을 본다.
1. In Genesis 35:7 we have a new divine title-El-bethel, “God of the house of God.”
2. 창세기 35장 이전에 하나님은 개개인들의 하나님이셨다. 여기서 그분은 더 이상 개개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엘벧엘 곧 단체적인 몸의 하나님,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시다.
2. Before this chapter God was the God of individuals; here He is no longer just the God of individuals but is El-bethel, the God of a corporate body, the God of the house of God.
3. 벧엘은 단체적인 생활, 곧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 때, 야곱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단체적인 체험으로 전진하였다 ― 고전 12:12.
3. Bethel signifies the corporate life, which is the Body of Christ; thus, in calling God the God of Bethel, Jacob advanced from the individual experience to the corporate experience (1 Cor. 12:12):
a. 야곱이 세겜에서 세운 제단은 ‘엘 엘로헤 이스라엘’ 곧 한 개인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 창 33:17-20.
a. The altar that Jacob built at Shechem was called El-Elohe-Israel, the name of God as related to an individual (Gen. 33:17-20).
b. 야곱이 벧엘에서 세운 제단은‘엘벧엘’곧 단체적인 한 몸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 창 35:6-7.
b. The altar that Jacob built at Bethel was called El-bethel, the name of God as related to a corporate body (35:6-7).
c. 세겜에 있는 제단은 개인적인 제단이고, 벧엘에 있는 제단은 단체적인 제단, 곧 하나님의 집을 위한 제단이다.
c. The altar at Shechem is an individual altar, but the altar at Bethel is a corporate altar-the altar for the house of God.
D.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은 벧엘의 건축을 위해 계시되신다. 오직 벧엘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다 ― 창 35:11상.
D. The All-sufficient God is revealed for the building of Bethel; only at Bethel is it possible for us to realize the all-sufficiency of our God (v. 11a):
1.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분으로 계시하신 목적은 그분의 건축물을 위한 것이다.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건축물을 위하신다.
1. The purpose of God’s revealing Himself as the All-sufficient One is for His building; the All-sufficient God is for God’s building.
2. 우리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을 단독적인 방식으로 체험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벧엘 안에, 곧 교회생활 안에 있어야 한다.
2. We cannot experience the All-sufficient God in an individualistic way; in order to experience the All-sufficient God, we must be in Bethel, in the church life.
3.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시는 것은 몸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 방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집 곧 건축물이 필요하다 ― 빌 1:19.
3. God’s all-sufficiency requires the Body; we need the house, the building, in order to experience this aspect of Him (Phil. 1:19).
4. 아버지와 아들과 영과 교회는 하나 안의 넷이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삼일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고 합병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 엡 4:4-6, 3:16-21.
4. The Father, the Son, the Spirit, and the church are four-in-one; ultimately, the church is a group of people who are in union with, mingled with, and incorporated with the Triune God (Eph. 4:4-6; 3:16-21).
E. 벧엘에서 야곱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부었다. 이것은 전제물이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 창 35:14상.
E. At Bethel Jacob set up a pillar and poured out a drink offering on it; this indicates that the drink offering is for God’s building (Gen. 35:14a):
1. 전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참된 포도주로 쏟아 부어진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출29:40-41, 민 15:1-10, 28:7-10.
1. The drink offering typifies Christ as the One poured out as the real wine before God for His satisfaction (Exo. 29:40-41; Num. 15:1-10; 28:7-10).
2. 전제물은 또한 하늘에 속한 포도주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적시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 그리스도는, 그분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쏟아 부어질 때까지,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적시신다―마 9:17, 빌 2:17, 딤후 4:6.
2. The drink offering also typifies the Christ who saturates us with Himself as the heavenly wine until He and we become one to be poured out for God’s enjoyment and satisfaction and for God’s building (Matt. 9:17; Phil. 2:17; 2 Tim. 4:6).
3. 우리가 전제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쏟아 붓는 것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그 영을 쏟아 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 창 35:14하.
3. Our pouring ourselves out as a drink offering to God brings in the outpouring of the Spirit for God’s building (Gen. 35:14b).
F. 하나님의 집인 벧엘의 기능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 엡 1:22-23.
F. The function of Bethel, the house of God, is to express Christ (Eph. 1:22-23):
1.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 안에서의 단체적인 문제이다 ― 요 17:22, 엡3:21, 롬 9:23.
1. God’s ultimate goal is the expression of Christ, and the expression of Christ is not an individual matter but a corporate matter in the house of God (John 17:22; Eph. 3:21; Rom. 9:23).
2.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를 낳으려면,우리의 타고난 선택과 타고난 갈망과 타고난 생명이 대가로 지불되어야 할 것이다.
2. The bringing forth of Christ for the corporate expression of Christ will cost us our natural choice, our natural desire, and our natural life.
G. 벧엘의 실재를 체험한 후에 야곱은 헤브론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 안으로 들어갔다. 헤브론에서의 교통은 친밀함과 평안과 만족과 기쁨을 의미한다 ― 창 35:27, 고전 1:9.
G. After experiencing the reality of Bethel, Jacob entered into full fellowship with God at Hebron; the fellowship at Hebron means intimacy, peace, satisfaction, and joy (Gen. 35:27; 1 Cor. 1:9):
1. 비록 우리가 교회생활 안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헤브론에 와서 주님과의 완전한 교통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여행해야 한다 ― 요일 1:3.
1. Although we are in the church life, we still need to journey on until we come to Hebron and enter into full fellowship with the Lord (1 John 1:3).
2. 헤브론에서의 교통은 하나님과의 교통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의 교통이다 ― 빌 2:1, 요일 1:7.
2. The fellowship at Hebron is not only fellowship with God but also with other members of the Body of Christ (Phil. 2:1; 1 John 1:7).
3.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안다면 교통의 중요성을 볼 것이며, 몸의 교통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고전 12:14-27.
3. If we know the life of the Body of Christ, we will see the importance of fellowship, and we will realize that apart from the fellowship of the Body, we cannot live (1 Cor. 12:14-27).
H. 야곱은 그의 삶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일생 동안 자신을 목양해 주셨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주님의 목양은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위한 것이다 ― 창 48:15-16, 28:10-22, 35:1, 3, 7-11.
H. Toward the end of his life, Jacob declared that the Lord had shepherded him all the days of his life; the Lord’s shepherding is for Bethel, the house of God (Gen. 48:15-16; 28:10-22; 35:1, 3, 7-11).
Ⅱ. 베냐민의 출생은 고통의 아들이자 오른손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산출을 예표한다 ― 창 35:16-18.
II. The birth of Benjamin typifies the bringing forth of Christ as the Son of affliction and the Son of the right hand (vv. 16-18):
A. 베냐민의 출생과 라헬의 죽음은 동시에 일어났다. 이것은 야곱이 라헬을 잃음으로써 아들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 창 35:16-20.
A. The birth of Benjamin and the death of Rachel occurred simultaneously; this means that Jacob gained a son by losing Rachel (vv. 16-20):
1. 라헬은 야곱이 자신의 마음의 원함에 따라 천연적으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 창 29:18-20.
1. Rachel was Jacob’s natural choice according to his heart’s desire (29:18-20).
2. 라헬의 죽음, 곧 야곱이 자신의 천연적인 선택을 잃어버린 것은 야곱을 깊고도 개인적으로 다루는 것이었다 ―창 35:16-20.
2. The death of Rachel, the loss of Jacob’s natural choice, was a deep and personal dealing for Jacob (35:16-20).
3. 야곱은 라헬을 잃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인 베냐민을 얻었다 ― 창 35:18-19.
3. Jacob lost Rachel, but in the process he gained Benjamin, who is a type of Christ (vv. 18-19):
a.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천연적으로 선택한 것을 가져가실 것이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낳고 그분을 표현하게 하실 것이다.
a. In the same manner, God will eventually take away our natural choice so that we may bring forth Christ for His expression.
b. 하나님의 목표는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낳는 것이다 ― 빌 3:7-8.
b. God’s goal is not to make His chosen ones suffer loss; it is to bring forth Christ through them (Phil. 3:7-8).
B. 라헬은 죽어가는 동안에 아이를 ‘내 고통의 아들’을 의미하는 베노니라고 불렀지만, 야곱은 즉시 그 아이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을 의미하는 베냐민으로 바꾸었다 ― 창 35:18.
B. As Rachel was dying, she called the child Ben-oni, meaning “son of my affliction,” but Jacob immediately changed the child’s name to Benjamin, meaning “son of the right hand” (Gen. 35:18):
1. 고통의 아들로서 베냐민은, 육체가 되시고 이 땅에서 인간 생활을 하신 슬픔의 사람으로서 그분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사 53:3, 히 9:12.
1. As the son of affliction, Benjamin typifies Christ, who, as the man of sorrows in His incarnation and human life on earth, accomplished God’s eternal redemption for His full salvation (Isa. 53:3; Heb. 9:12).
2. 오른손의 아들로서 베냐민은, 부활하시고 승리하시고 승천하신 오른손의 아들로서 하늘들에서 사역하시면서 그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구속을 적용하는 일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히 8:1-2, 7:25.
2. As the son of the right hand, Benjamin typifies Christ, who, as the Son of the right hand in His resurrection, victory, and ascension, ministers in the heavens to carry out the application of God’s redemption for His salvation (8:1-2; 7:25).
3.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으로 베노니, 곧 슬픔의 사람이 되셨으나, 부활 안에서 베냐민, 곧 영광과 존귀 가운데 계신 오른손의 아들이 되셨다 ― 시 68:27, 80:17, 막 16:19, 행 2:33, 5:31.
3. Christ was incarnated to be Ben-oni, the man of sorrows, but in His resurrection He became Benjamin, the Son of the right hand in glory and honor (Psa. 68:27; 80:17; Mark 16:19; Acts 2:33;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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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주 / WEEK 29 - OUTLINE
장자권 / The Birthright
성경: 창 25:29-34, 눅 4:16-19, 히 12:16, 23
Scripture Reading: Gen. 25:29-34; Luke 4:16-19; Heb. 12:16, 23
Ⅰ.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분의 형상을 갖고 그분을 표현하며, 그분의 통치권을 만물에게 행사함으로 그분을 대표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장자권을 갖고 있다. 장자권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출생에 의해 얻는 권리이다. 그러나 타락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함으로써 이 장자권을 팔았다 ― 창 1:26, 4:16-17, 10:8-11.
I. Since God created man to express Him with His image and to represent Him by exercising His dominion over all things, by birth every human being has a birthright-the right by birth to express God and represent Him; however, every fallen person has sold this birthright by being independent of God (Gen. 1:26; 4:16-17; 10:8-11).
Ⅱ. 성경에서 장자권은 맏아들의 특별한 몫이다. 성경 전체에 따르면, 장자권은 정해진 몫의 두 배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포함한다 ― 대상 5:1-2, 신 33:8-10, 창 49:10.
II. In the Bible the birthright is the special portion of the firstborn; according to the Bible as a whole, the birthright includes a double portion of the land, the priesthood, and the kingship (1 Chron. 5:1-2; Deut. 33:8-10; Gen. 49:10).
Ⅲ. 창세전에 하나님은 야곱이 장자권을 얻도록 야곱을 선택하시고 미리 정하셨다 ― 엡 1:4-5, 롬 9:10-13.
III.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God chose and predestinated Jacob to have the birthright (Eph. 1:4-5; Rom. 9:10-13):
A.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에게 주시려고 의도하신 이 장자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과 하나님의 왕국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 창 1:26, 계 20:4, 6.
A. This birthright, which God intends to give to His chosen people, includes expressing God, representing God, and participating in the kingdom of God (Gen. 1:26; Rev. 20:4, 6).
B. 에서가 장자권을 경시하고 야곱이 장자권을 산 일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선택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의 주권을 행사하셨다 ― 창 25:22-26, 29-34.
B. In Esau’s despising the birthright and in Jacob’s buying it, God exercised His sovereignty to fulfill the purpose of His selection (Gen. 25:22-26, 29-34).
C.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장자권이 옮겨진 것은, 장자권을 받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출생이나 노력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과 주권에 속한 문제라는 것을 계시해준다 ― 롬 9:10-13.
C. The shifting of the birthright from Esau to Jacob reveals that receiving the birthright is a matter of God’s predestination and sovereignty, not of our natural birth or endeavoring (Rom. 9:10-13).
D. 비록 야곱이 장자권을 얻었을지라도, 빼앗는 사람에서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되고 성숙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누리지 못했다. 이처럼 야곱은 성숙함으로 장자권을 누리는 것에 대한 본이다 ― 창 32:28, 35:10.
D. Although Jacob had gained the birthright, he did not enjoy it until he was transformed from a supplanter into a prince of God and became mature; thus, Jacob is an example of enjoying the birthright in his maturity (Gen. 32:28; 35:10).
Ⅳ. 하나님은 맏아들인 르우벤에게 장자권을 주려고 의도하셨지만,르우벤은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 장자권을 잃어버렸다. 장자권은 르우벤에게서 요셉에게로 옮겨졌는데, 요셉은 그러한 더럽힘으로부터 도망쳤고 정해진 몫의 두 배의 땅을 받았다 ― 창 39:7-12, 49:3-4, 대상5:1.
IV. God had intended to give the birthright to Reuben, the firstborn, but Reuben lost it because of his defilement; the birthright was shifted from Reuben to Joseph, who fled from that kind of defilement and received a double portion of the land (39:7-12; 49:3-4; 1 Chron. 5:1).
Ⅴ. 신명기 20장 1절부터 20절까지와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에따르면, 영적으로 말해서 싸움과 장자권은 서로 연관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싸움으로써 우리의 장자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V. According to Deuteronomy 20:1-20 and 21:15-17, spiritually speaking, fighting and the birthright are related, for only by fighting can we preserve our birthright:
A. 우리는 싸움으로써 우리의 장자권을 지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에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장자권을 잃어버릴 것이다 ― 히 12:16-17.
A. Since we preserve our birthright by fighting, if we do not fight, we will lose our birthright, even as Esau lost his birthright (Heb. 12:16-17).
B. 우리는 우리의 장자권을 위해 싸우는 동안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 수 1:2-9.
B. As we are fighting for our birthright, we must learn to trust in the Lord, not in ourselves, and realize that we are fighting for what He has given us (Josh. 1:2-9).
C. 싸우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지만, 우리는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써,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싸울 것을 정하셨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을 믿음으로써 이 의무를 완수할 수 있다― 수 23:3, 10, 엡 6:10-11.
C. It is our duty to fight, but we can fulfill this duty only by faith in the Lord, believing that He has ordained us to fight and that He will fight for us (23:3, 10; Eph. 6:10-11).
Ⅵ. 룻기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예표인) 보아스가 (구속된 교회의 예표인) 룻과 그녀의 장자권을 모두 구속하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 룻 1:16-18, 2:1, 3:2, 9-11, 4:1-17.
VI. The book of Ruth shows us how Boaz (a type of Christ) redeemed both Ruth (a type of the church in redemption) and her birthright (1:16-18; 2:1; 3:2, 9-11; 4:1-17):
A. 장자권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권리와 위치와 함께,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는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어 오는 왕이 되는 특권을 포함한다 ― 엡 3:8, 벧전 2:5,9, 계 5:10.
A. The birthright includes the right and position to enjoy Christ with the privileges to be a priest to bring man to God and to be a king to bring God to man (Eph. 3:8; 1 Pet. 2:5, 9; Rev. 5:10).
B.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권을 귀하게 여겼고, 자신의 장자권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장자권도 관심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척의 유업을 구속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했고 그의 친척의 과부와 결혼했다 ― 룻 4:1-17.
B. Boaz treasured the God-given birthright and was concerned not only for his own birthright but also for that of others; he paid the price to redeem his kinsman’s inheritance and married his kinsman’s widow (Ruth 4:1-17).
C. 보아스가 가난하고 연약한 룻을 동정하고 그녀의 장자권을 구속해 주었기 때문에, 왕국을 세운 왕인 다윗이 태어나게 되었다 ― 룻 4:17.
C. It was due to Boaz’s compassion on the poor and weak Ruth and his redemption of her birthright that David, the king who established the kingdom, was brought in (v. 17).
Ⅶ. 마태복음 21장 28절부터 31절까지에서 우리는 장자권이 이스라엘에게서 교회에게로 옮겨진 것을 본다.
VII. In Matthew 21:28-31 we see the shifting of the birthright from Israel to the church:
A. 누가복음 15장 1절과 2절, 11절부터 32절까지에서 주님은 유대교의 인도자들을 맏아들에 비유하셨고 세리들과 죄인들을 작은아들에 비유하셨지만, 마태복음 21장 28절부터 31절까지에서 주님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반대 순서로 비유하셨다.
A. In Luke 15:1-2 and 11-32 the Lord likened the leaders of Judaism to the firstborn son and likened the tax collectors and sinners to the second son, but in Matthew 21:28-31 the Lord likened them in the opposite order.
B.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맏아들이고(출 4:22) 장자권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장자권이 교회에게 옮겨졌고, 이 교회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는 것(히 12:23)을 가리킨다.
B. This indicates that the Jews were the firstborn of God (Exo. 4:22) and had the birthright; however, because of their unbelief the birthright was shifted to the church, which has become God’s firstborn (Heb. 12:23).
Ⅷ.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위해, 잃어버린 장자권이 신약의 희년 안에서 회복되었다 ― 눅 4:16-19.
VIII. For the believers in Christ, the lost birthright has been recovered in the New Testament jubilee (Luke 4:16-19):
A. 희년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해’, 곧 레위기 25장에 있는 희년의 성취이다.
A. The jubilee is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the fulfillment of the jubilee in Leviticus 25.
B.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생명 안에서 우리의 장자권과 신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포로 상태의 노예가 되었다.우리는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몫으로 누릴 권리를 잃어버렸다 ― 신 8:7-9, 골 1:12.
B. In our fallen life we lost everything, including our birthright and status, and we became slaves in captivity; we lost the right to enjoy our portion of Christ as the good land (Deut. 8:7-9; Col. 1:12).
C. 참되고 완전한 복음인 희년의 선포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고 우리의 영적인 장자권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장자권은 구속되고 회복되고 복원되었다 ― 눅 4:16-19.
C. The proclamation of the jubilee, the real and whole gospel, is a proclamation of release from slavery and of the recovery of our spiritual birthright; our lost birthright has been redeemed, recovered, and restored (Luke 4:16-19).
D. 우리는 희년을 확산할 필요가 있다. 희년은 신약의 복음, 곧 포로들의 해방과 잃어버린 장자권의 회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 눅 9:1-6, 24:47, 행 26:18.
D. We need to spread the jubilee-the gospel of the New Testament, the proclamation of the release of the captives and of the recovery of the lost birthright (9:1-6; 24:47; Acts 26:18):
1. 누가복음에 계시된 대로, 신성한 본성과 그 속성들 그리고 인간 본성과 그 미덕들이 연합되어 가장 높은 수준의도덕성을 산출한 것은 신약의 희년을 위한 것이다 ― 눅1:35.
1. As revealed in the Gospel of Luke, the mingling of the divine nature with its attributes and the human nature with its virtues to produce the highest standard of morality is for the New Testament jubilee (1:35).
2. 이 희년에서 우리는 모든 속박, 곧 죄와 사탄과 세상과 자아의 속박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잃어버린 장자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삼일 하나님을 누리는 권리의 누림 안으로 해방되어 들어간다 ― 고후 13:14, 엡 3:16-17.
2. In this jubilee we are freed from all bondage-the bondage of sin, Satan, the world, and the self-and we are freed into the full enjoyment of our lost birthright, the right to enjoy the Triune God in Christ (2 Cor. 13:14; Eph. 3:16-17).
Ⅸ. 히브리서 12장 16절은 믿는 이들에게 ‘한 그릇의 음식을 위하여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IX. Hebrews 12:16 warns the believers not to be like “Esau, who for one meal gave up his own birthright”:
A. 이삭의 맏아들인 에서의 장자권은 정해진 몫의 두 배의 땅과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이었다.
A. Esau’s birthright as the firstborn son of Isaac was the double portion of the land, the priesthood, and the kingship.
B. 에서는 세상의 속된 것을 욕심 내어 자기의 장자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정해진 몫의 두 배의 땅은 요셉에게 주어졌고(대상 5:1-2),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 넘어갔으며(신 33:8-11), 왕의 직분은 유다에게 돌아갔다(창 49:10, 대상 5:2).
B. Because of Esau’s profaneness in giving up his birthright, the double portion of the land was given to Joseph (1 Chron. 5:1-2), the priesthood was passed to Levi (Deut. 33:8-11), and the kingship was assigned to Judah (Gen. 49:10; 1 Chron. 5:2).
C. 히브리서 12장 23절은 ‘장자들의 교회’를 언급한다.
C. Hebrews 12:23 speaks of “the church of the firstborn”:
1.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를 통해 거두신 피조물들 중 첫 열매이다 ― 약 1:18.
1. We Christians, born of God, are the firstfruits of His creatures that He has reaped in His creation (James 1:18).
2.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장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로 구성된 교회는 장자들의 교회라 불린다 ― 히 12:23.
2. In this sense, we are the firstborn sons of God; hence, the church, composed of us, is called the church of the firstborn (Heb. 12:23).
3. 하나님의 장자들인 우리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다. 이 장자권은 땅(히 2:5-6)을 상속받는 것과 제사장 직분(계 20:6)과 왕의 직분(계 20:4)을 포함하며, 이것들은 오는 왕국에서 주된 축복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 곧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이러한 축복들을 잃게 될 것이다.
3. As the firstborn sons of God, we have the birthright; this includes the inheritance of the earth (2:5-6), the priesthood (Rev. 20:6), and the kingship (v. 4), which will be the main blessings in the coming kingdom and which the profane, world-loving-and-seeking Christians will lose at the Lord’s coming back.
4. 결국 이 장자권은 천년왕국에서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받게 되는 보상이 될 것이다 ― 계 22:12, 11:18.
4. Eventually, this birthright will be a reward given to the overcoming Christians in the millennial kingdom (22:12; 11:18).
D.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특권을 받아 누리는 것은 오는 왕국 안에 있는 축복들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 엡 3:8,롬 5:17, 벧전 2:5, 9.
D. Today what we are privileged to enjoy in Christ is the foretaste of the blessings in the coming kingdom (Eph. 3:8; Rom. 5:17; 1 Pet. 2:5, 9):
1. 만일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를 좋은 땅으로 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왕국 안에서 그분의 안식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분과 함께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 히 4:9.
1. If we do not enjoy Christ today as our good land, we cannot enter into His rest in the kingdom and inherit the earth with Him (Heb. 4:9).
2. 만일 우리가 오늘 우리의 제사장 직분을 훈련하여, 주님을 접촉하고 많은 기도로 그분을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왕국에서 우리의 제사장 직무를 이룰 수 없다 ― 벧전2:5, 9.
2. If we do not exercise our priesthood today to contact the Lord and prayerfully minister to Him, we cannot fulfill our priestly duty in the kingdom (1 Pet. 2:5, 9).
3. 만일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자아와 육체와 우리의 온 존재와 원수와 그의 모든 어둠의 세력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동 왕들이 될 수 없고 그분과 함께 민족들을 다스릴 수 없다 ― 롬 5:17, 21, 계 2:26-27.
3. If we do not exercise our spirit with the God-given authority to rule our self, our flesh, our entire being, and the enemy with all his power of darkness today, we cannot be Christ’s co-kings and rule the nations with Him in His kingdom (Rom. 5:17, 21; Rev. 2:26-27).
4.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고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실행하는 것은 장차 올 시대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국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예비하며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 벧전 2:5, 9, 계 5:10, 20:4, 6.
4. Our enjoyment of Christ and the practice of the priesthood and kingship today are the preparation and qualification for our participating in Christ’s kingdom in the coming age (1 Pet. 2:5, 9; Rev. 5:10; 2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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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 / WEEK 30 - OUTLINE
성숙의 과정 / The Process of Maturity
성경: 창 47:7, 10, 히 6:1, 골 1:28-29, 엡 4:14
Scripture Reading: Gen. 47:7, 10; Heb. 6:1; Col. 1:28-29; Eph. 4:14
Ⅰ. 창세기 37장부터 45장까지는 야곱이 성숙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I. Genesis 37-45 is a record of the process of Jacob’s maturity:
A. 창세기 27장에서 우리는 빼앗는 사람을 보고, 37장에서 변화된 사람을 보며, 45장 마지막에서는 성숙한 사람을 본다.
A. In Genesis 27 we see a supplanter; in chapter 37, a transformed man; and at the end of chapter 45, a mature person.
B. 변화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신진대사적으로 바뀌는 것인 반면에, 성숙되는 것은 우리를 바꾼 신성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 히 6:1.
B. To be transformed is to be metabolically changed in our natural life, whereas to be matured is to be filled with the divine life that changes us (Heb. 6:1):
1. 변화의 마지막 단계는 성숙, 곧 생명의 충만이다.
1. The last stage of transformation is maturity, the fullness of life:
a.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오직 우리가 변화되고 성숙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 창 1:26, 골 1:28, 2:19.
a. God’s eternal purpose can only be accomplished through our transformation and maturity (Gen. 1:26; Col. 1:28; 2:19).
b. 성숙은 거듭해서 신성한 생명을 우리 안으로 분배 받아 결국 우리가 생명의 충만을 갖는 문제이다 ― 요 10:10.
b. Maturity is a matter of having the divine life imparted into us again and again until we have the fullness of life (John 10:10).
2. 성숙은 용량이 확장되는 문제이다 ― 시 4:1.
2. Maturity is a matter of the enlargement of capacity (Psa. 4:1):
a. 생명의 성숙은 성령의 징계를 받은 것의 총체이다 ― 히 12:5-11.
a. Maturity in life is the sum total of receiving the discipline of the Holy Spirit (Heb. 12:5-11).
b. 다른 사람들은 생명이 성숙한 한 사람을 보겠지만, 그 사람이 수년에 걸쳐 남이 모르게 매일 받아 온, 축적된 성령의 징계는 볼 수 없다 ― 고후 1:8-10, 창 47:7, 10.
b. Others may see a person who has matured in life, but they cannot see the accumulated discipline of the Holy Spirit which that person has received secretly day by day throughout the years (2 Cor. 1:8-10; Gen. 47:7, 10).
3. 하나님은 우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비워 내시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여러 사람과 일과 사건을 사용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도록 우리의 용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 눅 1:53, 마 5:6.
3. God will sovereignly use persons, things, and events to empty us of everything that has filled us and to take away every preoccupation so that we may have an increased capacity to be filled with God (Luke 1:53; Matt. 5:6).
C. 야곱의 생활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계시해 준다.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C. The life of Jacob reveals that everything that happens to us is under God’s sovereignty for our transformation and maturity; nothing is accidental:
1. 성숙되기 위해, 야곱은 먼저 그의 마음의 보물인 요셉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 창 37:31-35.
1. In order to become mature, Jacob first had to suffer the loss of Joseph, the treasure of his heart (Gen. 37:31-35).
2. 성숙한 믿는 이는 하나님께서 긍휼이 많으시고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분으로서 온갖 종류의 상황에서 자신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을 배웠다 ― 창 43:11, 13-14, 17:1, 빌 1:19-21상, 4:11-12, 비교 딤전 6:6-8.
2. A mature believer has learned that God is merciful and all-sufficient to meet his needs in every kind of situation (43:11, 13-14; 17:1; Phil. 1:19-21a; 4:11-12; cf. 1 Tim. 6:6-8).
3. 성숙한 믿는 이의 신뢰와 안식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능력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그의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 롬 9:16.
3. His trust and rest are altogether in the mercy of his all-sufficient God, no longer in himself or in his ability (Rom. 9:16).
Ⅱ. 아가 6장 13절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변화의 여러 단계를 거친 후에,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성숙하여 그리스도의 재생산과 복사판인 술람미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결혼을 위해 그분께 어울리게 되었다.
II. In Song of Songs 6:13 the lover of Christ, having passed through the various stages of transformation, has become, in the maturity of Christ’s life, the Shulammite, the reproduction and duplication of Christ to match Him for their marriage:
A.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이다. 이것은 그녀가 생명이 성숙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 아 6:13.
A. Shulammite is the feminine form of Solomon, indicating that, in the maturity of life, she has become the same as Christ in life, in nature, in expression, and in function for the accomplishment of God’s eternal economy (v. 13).
B. 아가 3장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성숙의 단계에 도달하여 가마가 되고, 결국 주님께서 그녀를 예루살렘으로 여기신다 ― 아 3:9-10, 6:4.
B. In Song of Songs 3 the lover of Christ reaches a mature stage, becoming a palanquin, and eventually is reckoned by the Lord as Jerusalem (vv. 9-10; 6:4):
1. 그리스도의 연인은 자신의 타고난 사람이 파쇄되고 자신의 의지가 복종됨으로써 이 단계에 도달한다 ― 아 3:6,4:1, 4.
1. She reaches this stage by the breaking of her natural man and by the subduing of her will (3:6; 4:1, 4).
2.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으로 성숙하게 되어 하나님의 건축물, 곧 하나님의 성소가 된다 ― 아 6:4.
2. Through her living in Christ’s ascension as the new creation in resurrection, the lover of Christ becomes mature in the riches of the life of Christ so that she becomes the building of God, the sanctuary of God (6:4).
Ⅲ. 우리는 우리 안에 심어진 신성한 씨 안에 담긴,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의 발전을 체험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영원한 왕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 ― 벧후 1:1, 4-11.
III. We need to experience the development of the divine life and the divine nature contained in the divine seed that has been sown into us so that we may have a rich entrance into the eternal kingdom (2 Pet. 1:1, 4-11):
A. 우리는 놀라운‘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할당 받았고, 이 믿음은 모든 것을 포함한 씨이다 ― 벧후 1:1, 벧전 1:23.
A. We have been allotted the wonderful, equally precious faith, and this faith is an all-inclusive seed (v. 1; 1 Pet. 1:23):
1. 모든 신성한 풍성은 이 씨 안에 있지만, 우리는 부지런히 이 풍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 벧후 1:1-8, 3:18.
1. All the divine riches are in this seed, but we must be diligent to develop them; to grow to maturity is to develop what we already have (2 Pet. 1:1-8; 3:18).
2. 이러한 미덕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는 생명이 자라며, 결국에는 성숙에 도달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며,장차 올 왕국에서 왕들이 될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 엡 4:13-15, 벧후 1:11.
2. By developing these virtues, we grow in life, and eventually, we will reach maturity, be full of Christ, and be qualified and equipped to be kings in the coming kingdom (Eph. 4:13-15; 2 Pet. 1:11).
3. 우리는 믿음이라는 씨로부터, 미덕과 지식이라는 뿌리와 자제라는 줄기와 인내와 경건이라는 가지를 거쳐서, 형제 사랑과 신성한 사랑이라는 꽃과 열매에 이르도록 완전히 발전하고 성숙해야 한다 ― 벧후 1:5-7.
3. We need to have the full development and maturity from the seed of faith, through the roots of virtue and knowledge, the trunk of self-control, and the branches of endurance and godliness, to the blossom and fruit of brotherly love and love (vv. 5-7).
4.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본성의 궁극적인 발전은 신성한 사랑, 곧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하나님 자신의 본성인 신성한 사랑을 가리키기 위해 신약에서 사용된 헬라어단어이다 ― 벧후 1:7, 요일 4:8, 16.
4. The ultimate development of the divine nature within us is love-agape, the Greek word used in the New Testament for the divine love, which God is in His nature (v. 7; 1 John 4:8, 16):
a. 우리는 할당된 믿음이라는 신성한 씨가 발전하여, 신성하고도 더 고귀한 사랑으로 완결되도록 해야 한다 ― 벧후 1:5-7.
a. We need to let the divine seed of the allotted faith develop to its consummation in the divine and nobler love (2 Pet. 1:5-7).
b.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고 생명이 자라 성숙에 이를 때,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고 사랑의 사람들, 심지어 사랑 자체가 된다 ― 엡 3:19.
b. When we partake of the divine nature and grow in life unto maturity, we are filled with God as love, and we become persons of love, even love itself (Eph. 3:19).
B. 우리는 영원한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가기 위해,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자라고 발전하고 성숙되기를 부지런히 추구해야 한다 ― 벧후 1:10-11.
B. We should be diligent to pursue the growth, development, and maturity of the divine life and nature for a rich entrance into the eternal kingdom (2 Pet. 1:10-11).
Ⅳ. 히브리서에서 바울의 부담은 믿는 이들을 성숙에 이르도록 구원의 초기 단계에서 계속해서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 히 5:11-6:5.
IV. Paul’s burden in the book of Hebrews was to bring the believers out of the initial stage of salvation on to maturity (5:11-6:5):
A. 성숙에 이르도록 전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의 길에 관한 의의 말씀, 곧 단단한 음식인 말씀 안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 히 5:12-14, 6:1.
A. To be brought on to maturity is to be brought into the word of righteousness concerning Christ’s heavenly ministry and the way of God’s economy, the word that is solid food (5:12-14; 6:1):
1. 히브리서가 쓰인 목적은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땅에서의 사역에 관한 선한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에 관한 의의 말씀으로 계속 이끎으로써, 믿는 이들을 성숙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 히 1:3, 4:14-16, 6:20, 7:25, 8:1-2.
1. The book of Hebrews was written to bring the believers on from the good word concerning Christ’s earthly ministry to the word of righteousness concerning Christ’s heavenly ministry and thereby bring the believers on to maturity (1:3; 4:14-16; 6:20; 7:25; 8:1-2).
2. 의의 말씀은 하나님의 정의와 의,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적인 다루심에 관한 사상을 구체화한다 ― 히 5:13.
2. The word of righteousness embodies the thought of God’s justice and righteousness and governmental dealings with His people (5:13).
3. 의는 하나님의 왕국의 문제이다. 의는 하나님의 행정의 면에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과 관계 있다 ― 마 6:33, 시 89:14, 97:2, 사 32:1.
3. Righteousness is a matter of God’s kingdom; righteousness issues from God in His administration and is related to His government and rule (Matt. 6:33; Psa. 89:14; 97:2; Isa. 32:1).
B.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성숙에 이르도록 이끌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은혜로운 일과 협력해야 한다 ― 히 6:1.
B. The Lord wants to bring us on to maturity, but we must cooperate with His gracious work (Heb. 6:1):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께서 성취하신 것에 참여해야 한다 ― 히 1:9, 3:14.
1. We need to share with Christ in His attainments (1:9; 3:14).
2. 우리는 남은 안식일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 히 4:9, 11.
2. We need to be diligent to enter into the remaining Sabbath rest (4:9, 11).
3. 우리는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한다 ― 히 4:16.
3. We need to come forward to the throne of grace to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v. 16).
4. 우리는 단단한 음식을 먹고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 히 5:9-10, 14.
4. We need to feed on the solid food to enjoy Christ as the High Priest according to the order of Melchizedek (5:9-10, 14).
Ⅴ. 바울의 사역의 목표는 한 새사람을 위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 곧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 골 1:28-29, 3:10-11.
V. The goal of Paul’s ministry was to present every man mature, full-grown, in Christ for the one new man (Col. 1:28-29; 3:10-11):
A.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충분히 성장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온전한’, ‘완전한’, 혹은 ‘성숙한’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A. The Greek word rendered “full-grown” in Colossians 1:28 may also be translated “perfect,” “complete,” or “mature.”
B.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함으로,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됨으로써, 온전하고 완전하게 되어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B. Paul’s ministry was to dispense Christ into others so that they would be perfect and complete by maturing in Christ unto full growth.
C. 한 새사람을 위해, 우리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함으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리기 위해 수고하고 분투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그분에 의해 살고 그분으로 인해 자라 성숙에 이를 수 있다― 골 3:4, 2:19.
C. For the one new man we need to labor and struggle to present all the believers full-grown in Christ, ministering Christ as life to them so that they can live by Him and grow with Him unto maturity (3:4; 2:19).
D.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과 교통하는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공급하여 그들이 생명에서 성숙하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새사람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 골 3:10-11, 엡 4:13-14.
D. Our goal in preaching the gospel to sinners and in fellowshipping with the saints is to minister Christ into them so that they may mature in life and be presented full-grown in Him; this is for the growth of the new man (3:10-11; Eph. 4:13-14).
E. 실재와 실행적인 방면에서 한 새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 ― 엡 4:15-16, 24.
E. In order to become the one new man in reality and practicality, we need to grow up into Christ in all things (vv. 15-16, 24):
1.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랄 때,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것이다 ― 골 3:4, 10-11, 엡 3:17.
1. When we grow up into Christ in all things, we will no longer be different kinds of persons; rather, we will spontaneously take Christ as our person and our life (Col. 3:4, 10-11; Eph. 3:17).
2.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될 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우주적인 한 새사람이다 ― 엡 3:11, 4:13-14, 24, 창 1:26.
2. When we grow up into Christ in all things to be a full-grown man, we all will be one in Christ; this is the universal one new man for the fulfillment of God’s eternal purpose (v. 11; 4:13-14, 24; Gen.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