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영의 처리
빛비춤&누림
2013-06-07 , 조회 (904)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섹션 > 성경자료실
원문 http://chch.kr/kin/25754.html

우리는 마음과 영과 혼의 정의와 기능을 살펴 보았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언제나 마음에 의해서 시작되고 유지된다. 물론 주님을 접촉하는 것은 영의 문제이지만 이것은 마음에 의해서 발단되고 또 유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우리 전존재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방이 있는 건물에도 언제나 하나의 입구와 출구가 있는 법이어서 그 입구로 들어오고 그 출구로 나간다. 입구가 닫히면 모든 사람이 건물 안의 방들로부터 격리되지만, 일단 입구가 열려지면 모두 그 건물에 들어가 각 방을 사용하며 누릴 수 있다.


마음은 우리 존재에서 분리된 또 하나의 부분이 아니라 혼의 모든 부분과 영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전존재의 입구가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마음은 우리 존재의 입구도 되고 출구도 된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마음을 통해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나가는 것은 모두 마음을 통해 나간다.

 

예를 들면, 만일 우리 마음이 말씀을 들을 때 깨어 있지 않다면 그 말씀의 본질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그 내용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식사하는 동안에라도 우리에게 먹을 마음이 없다면 그 음식의 맛을 모를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조절 기관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건물 전체를 조절하기 위하여 문을 여닫는 것같이 우리 자신을 닫거나 여는 힘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복음 전파는 사람의 마음을 만질 수 있도록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복음 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것이다.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지 않는 이들이 마음을 강퍅하게 먹고 복음 전파에 마음을 닫는 이유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설교하더라도 그들이 마음을 닫으면 우리는 그들을 만질 수 없고, 아무 것도 그들 속에 공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구」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려면 입구를 헤치고 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가장 훌륭한 복음 전파자는 마음을 여는 열쇠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주님 자신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우리를 끄신다. 그분은 먼저 우리의 영을 격동시키지 않는다. 아가서에 첫 부분에 나오는 그 찾는 자는 그녀가 주님을 사랑하도록 주님의 사랑으로 그녀를 매혹시켜 달라고 주님께 간구한다. 주님은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지려고 오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부활 후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고 물으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마음의 문을 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마음이 열리면 성령은 쉽게 사람의 영과 각 부분을 만질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공급하는 일에서도 실제가 된다.


마음의 처리

 

이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다시 말하거니와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성경 말씀에서는 『마음이 순수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8, 회복역 참조)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번역자들은 「순수하다」는 말을 「깨끗하다(clean)」로, 즉 「마음이 청결한」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깨끗하다」는 말은 합당치 않다. 그것은 마음의 깨끗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함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깨끗할지는 몰라도 혼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순수하지가 않다. 혼합되어 있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이상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있는 문제이다. 그들은 그들이 깨끗하고 정죄함이 없으므로 그들의 마음에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 가지 이상의 목표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다른 것에도 마음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도 목적 삼고 박사 학위도 목적 삼을 수 있다. 그들이 그들의 목표로 두 가지를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은 혼합되어 복잡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동시에 두 가지를 볼 수 없다. 동시에 두 가지를 보려고 하면 두 가지가 다 희미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뜻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두 가지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은 일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주님을 찾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지위나 경력 같은 다른 것도 찾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갈피를 못 잡는 복잡한 일로부터 피할 수 있는가? 주님 자신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가 되도록 그들의 마음이 많은 야망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어떤 형제는 그의 교파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가가 되려는 큰 목표가 있었다고 간증했다. 그의 마음은 깨끗했지만 순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 목표, 즉 주님 자신만을 가질 때까지 계속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 어떤 사역자들은 주님 자신과 그의 사역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는 것이다. 주님 자신만이 그들의 목표가 될 때까지 그들의 마음은 순수해져야 한다.

 

그들의 목표, 그들의 표적, 그들의 취미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한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주님 외의 다른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들의 마음은 순수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에게 「하늘」이 열릴 뿐 아니라 아주 맑게 될 것이다. 때때로 하늘은 열려 있지만 구름이 끼어 있다. 영적 하늘에 왜 구름이 끼어 있는가? 마음이 혼합되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여러 가지 목표로부터 순수하게 될 때 하늘이 맑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마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단일성」, 즉 「마음의 단일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어떤 성경에서는 「단일성」을 「단순함」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마음의 단일성은 단순함을 의미한다. 단순함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보 같은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목적삼는 사람들은 일종의 바보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바보들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예수만 압니다. 내가 어디에 가든지 예수만 압니다.』 우리는 영리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길-예수의 좁은 길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당신은 바보같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바보스러워지고 싶어해야 한다. 이것이 단순함이다.

 

마음의 순수함을 언급하고 있는 세 군데의 성경 구절은 시편 73편 1절과, 마태복음 5장 8절과, 디모데 후서 2장 22절이다. 디모데 후서의 말씀은 교회들이 하락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구하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음의 단일성을 언급하는 구절도 적어도 세 군데 있다. 사도행전 2장 46절과, 에베소서 6장 5절과, 골로새서 3장 22절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구하고 붕사하려면 이 두 가지 문제, 즉 마음의 순수함과 단순함을 다루어야 한다. 깨끗하고 옳은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순수한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처리한다면 우리의 전체가 주님께 열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입구가 열려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전체를 소유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처리하는 법에 관한 가르침일 뿐이다.


양심의 처리

 

주님은 먼저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끄신다. 우리의 마음을 열기 위하여 그분은 그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신다. 마음을 처리하신 다음으로는 즉시 양심이 처리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처리는 먼저 마음을 처리하고 그 다음에 양심을 처리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단순하다면 우리 양심의 기능은 즉시 예민하고 깨어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틀렸다든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없을지 모르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처리하여 순수하고 단순하게 한다면 양심이 기능을 다할 것이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비난하며 우리로 고백하고 처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양심으로 거리낌 없게」 만들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 쓰노라고 말했다(행24:16). 거리낌 없는 양심이란 어떠한 거리낌이나 비난에 대하여 자유함을 의미한다.

 

영과 혼의 차이를 알려면 예민한 양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일은 정신적으로 논하자면 어려운 문제이다. 여러분은 『나는 10을 잘못했는데 저 형제는 100을 잘못했읍니다. 그러니까 저 형제는 나에게 90의 잘못을 더 했읍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것은 다만 혼에서의 정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조리있게 이유를 대지만 깊은 속에서는, 『그 형제가 네게 얼마나 잘못했던지간에 너는 10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돼.』라고 말씀하는 소리가 있을 것이다.

 

영적 계정은 은행 계정과 같지 않다. 은행에서의 계정은 차변과 대변이 있어 균형을 이루지만 영적 계정에는 다만 한 가지, 차변만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대변(貸邊)이 있든지 간에 우리에게 차변(借邊)이 있는 한 그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시계를 훔치고 당신은 나의 자동차를 훔쳤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서로에게 훔쳤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어느 날 양심이 움직여, 『너는 그 훔친 물건을 정리해야 해.』 라고 말한다. 물론 내가 은행 계정(計定)의 균형을 맞춘다면 나는 이렇게 이유를 댈 것이다. 『이 시계는 백 불이고 저 자동차는 이천 불이다. 그러니 이 사람은 나에게 천 구백 불을 빚진 거야. 나는 내 양심에서 정리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나는 균형을 맞추어야 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적 계정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적 계정은 다른 사람이 내게 얼마나 빛졌는가를 잊어버리고 백 불을 정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선생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가 훔친 것은 완전한 죄입니다. 여기 훔친 시계가 있읍니다. 그것을 돌려 드리겠읍니다.』라고 사과까지 해야 한다. 그 차(車)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말할 권리가 없다. 오직 성령만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늘 나라의 계정에는 한 항목밖에 없다.

 

당신은 내 말의 요지를 알겠는가? 당신이 다투고 이유를 댄다면 당신은 생각에 있는 것이지 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성령이 여러분에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면서 여러분의 영 안에서 역사하신다 하자. 수많은 이유들이 여러분의 생각에 홍수처럼 밀려온다. 『아내는 어떻게 하나?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그들의 교육 문제는? 아직도 80이 되신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데. 좀 더 기다리는 게 낫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가장 알맞은 시기일 것이다.』 이것은 혼에서의 싸움이요, 정신적인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옳지만 깊은 영 안에는 여전히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혼과 영의 차이를 이해하기는 쉽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전체가 여전히 닫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아직도 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처리하여 순수하고 단순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양심은 비난과 거리낌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양심은 자백함으로써, 주님의 피 뿌리심과 정결케 하심을 적용함으로써 정상적으로 될 것이다(히9:14).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될 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양심에 많은 거리낌이 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사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이름뿐인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될 때 하나님이 매우 생생하게 살아계심을 느낀다.

 

때때로 하나님은 마치 실제로 사시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다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때는 우리 양심이 무뎌지고 거리낌으로 가득하게 된 것이다. 양심은 고백과 정결케 함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순수한 양심을 갖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다. 이것은 씻음 받은 양심으로만 아니라 어떤 섞임이나 그림자 없는 양심으로 섬겼음을 말한다(딤후1:3). 우리 양심에서의 비난은 양심을 불순하고 불투명하게 만들어서 주님과의 교통을 방해한다.

 

순수한 양심은 선한 양심이기도 하다(딤전1:5, 19, 벧전3:16). 좋은 양심은 정결케 된, 순수하게 된 양심이다. 그것은 어떤 그림자도 없는 올바르고 투명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상태에 있는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 이르게 할 것이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는 아무 장벽이 없을 것이다.


교통의 처리

 

양심을 처리한 다음에는 요한 일서 1장 1절∼7절에서 보여 주는 대로 영 안에 있는 교통의 기능이 다루어져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은 선한 앙심에 의하여 유지된다. 양심이 거리낌을 받을 때 그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과 손상이 된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 1장 9절과같이 주님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시도록 우리의 허물과 실패와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우리의 양심에는 주님과의 교통을 방해하는 어떤 정죄도 없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교통은 양심을 처리하는 데 달려 있다. 주님과의 교통은 순수한 양심을 통하여 유지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처리는 실제적으로는 한 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곧 교통을 처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심에 잘못된 것이 없다면 교통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주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양심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양심이 순수하지 않고 투명하지 않을 때 교통은 사라지고, 우리의 양심이 회복될 때만 다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직감의 처리

 

이제 직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교통이 양심을 따라온 것과 같이 직감은 교통을 따라온다. 우리의 양심에 잘못된 것이 있을 때에는 교통이 깨지고, 교통이 깨질 때 직감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투명한 양심은 우리로 주님 앞에 이르게 하여 주님과 생생한 교통을 나누게 할 것이다. 이 생생한 교통을 통해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감지하기란 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직감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완전한 교통에 달려 있다. 우리의 교통이 완전할 때 직감은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와 주님과의 교통이 깨질 때에는 자동적으로 직감이 움직이지 않고, 회복된 교통을 통해서만 다시 직감이 회복된다.

 

요한 일서 2장 27절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인데 우리들의 대부분이 그 말씀을 소홀히한다. 그 성경 구절은 기름 부음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 기름 부음이란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느낌을 주는, 우리 영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 직접적인 느낌이 직감이다.

 

요한 일서 1장에서는 교통이 피에 의하여 보존되고 유지됨을 지적한다. 2장은 직감이 안에 있는 성령의 기름 부음에 의해 움직임을 말한다. 성령이 우리 영 안에 움직여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 우리는 직감의 직접적인 느낌을 받는다. 영 안에 있는 직감을 통하여 우리는 정신적인 이해가 아닌 안의 지식을 갖게 된다.

 

안의 지식은 영 안에 있는 반면, 이해는 생각에 있는 것이다. 또 우리 영 안의 내적 지식은 항상 생각의 이해를 앞선다. 바꿔 말하면 성령이 우리의 영 안에 기름을 부을 때 우리의 직감에 직접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영 안에서의 직감을 통해 하나님에 속한 것을 감지하는 내적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영 안에서 느끼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여전히 생각이 필요하다.

 

때때로 우리는 영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생각에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언어같이 들리며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를 알지 못한다. 생각에서의 이해는 다만 우리의 영이 안의 지식으로 느낀 것을 해석하는 데에 작용한다. 밝아지고 새로와진 우리의 생각은 영의 직감에서 느낀 것을 해석해 줄 것이다.

 

때때로 아침에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동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주 깊고 무거운 눌림이 우리 영 안에 깊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눌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리는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한다. 영 안에 있는 것을 낮에 점점 생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침에는 영 안에 직감으로 말미암아 눌림, 즉 내적 지식을 느끼지만 낮에는 점차 우리의 생각에서 그 해석을 받게 된다.

 

요약하면 요한 일서 1장에서는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되어야 함을 나타내며, 요한 일서 2장에서, 특별히 27절에서는 직감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야 하고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교통과 직감은 모두 양심을 처리하는 데 달려 있다. 양심의 처리에 의하여 투명하고 순수한 양심을 얻을 때, 그런 양심이야말로 우리에게 주님과의 완전한 교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직감의 기능을 다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움직여 기름 부을 근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모든 것은 매일매일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마음과, 양심과, 교통과, 직감이 날마다 처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마음과 영의 처리",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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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최근 마음을 처리하는 것에 대하여
고려하고 있었는데...
빛 비춤이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단일하고 순수하게 혼합되지 않고
주님 자신만을 목표로 취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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