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상과 차세대와의 연관성
♠누림과 교통♠
2013-06-13 , 조회 (166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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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각지방마다 대부분 주일날에 주의 상 집회와 신언 집회를 병행하게 되었는데
주의 상 집회가 신언 집회보다 많이 위축되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각지방을 방문해 보면 공통점은 한쪽에서는 중고등부학생들이 있고 젊은 층들이 있는데
찬양을 하거나 선포하는데 소극적이고 눈빛을 보면 젊은 이로서의
열정과 에너지가 50대 이상보다 별로 미치지 못하고 힘들고 괴로우니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눈치이고 신언집회때 신언을 빨리하거나 그주의 부담을 빨리
해방하거나 의무방어전에 모든 촛점을 맞추어 오랜동안 습관처럼 지내고 있는것 같습니다.
아니면 특별히 부담있는 형제들이 몇분 일어나서 이마져 가르치는 스타일로
전람하고는 떡떼고 찬양 몇곡하고는 마치고 후다닥 신언집회로 넘어갑니다.
우리가 차세대를 걱정한다면 주의 상에서 젊은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반응하고
주의 상앞에 오는지만 보면 압니다.찬송을 너무 길게 하는것에 부담스러워 하고
주님 앞에 자신을 열고 적극적으로 뛰어들려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나 힘든것은
각지방마다 공통된 고민입니다.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찬양안에서
느끼지 않다보니  주의 상집회가 너무나 공허하고 지루할 뿐입니다.
다소 천연적이고 부정적인 요소가 많더라도 중심이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뭔가가 있는가~~
이것에 대해 확신이 없는것 같습니다.어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차세대들은
말할것이 없겠지요~~

차세대들이 주의 상집회에서 어떤 실제를 만지고 주님의 이루신 업적에 감사하고
그시간에 행복을 느낀다면 교회생활 전체가 윤택해지고 달라질것이라고
믿습니다.교회생활의 모든 시작은 주의 상집회에서 부터이고 지방교회생활의 복지는
주의 상의 집회의 분위기가 좌우한다고 봅니다.그만큼 주의상 집회는 너무나 중요한데
너무나 그동안 소흘히 한면이 있지 않았냐~는 느낌이 있습니다.
최근에 여기는 주의상 집회 회복에 관하여 형제들끼리 많은 교통과 부담을 가지고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실행이나 가지고 있는 어떠함이 우리 자녀들이나 차세대들에게
그대로 전이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의 상에 관한 진리의 의미나 실행의 방법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사실은 외적인 실행과 더불어 내면의 어떠함에 도달에
보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는 차세대가 뭔가를 짊어지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주의 상 앞에서 아무런 느낌도 없고 감사도 감동도 열정도 없이 앉아서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가 사역을 열심히 쫒는다고 말하는 그것이 두려운 사실인것 같습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의 감동과 감사가 일회성으로 끝난다고 보고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면 된다고 보는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우리곁에 항상 실제가 되고
돌이킴의 재료가 되고 무한대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는것은 배은 망덕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올때까지 나를 잊지말고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속과 구원에 대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자꾸 새것~~새것 하는데
주님은 새것으로 마실날까지 이것을 잊지 말고 너희는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고
용서와 화해~~하나~~라는 주요항목을 주의 상에서 부터 견고히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주의 상을 매주 대할때마다 별반 새로운 공급과 영적 감흥이 없이 오랜세월
흐르다 보면 교회생활 전체가 어느순간에 메마르고 질병이 늘고 교회분위기가
메마르고 딱딱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여기지방에 각지방교회들이 교회방문을 자주 오면 
좋은 점은 비교적 섞임이나 주의 상 집회에서 분위기가 밝고 편안함을 느끼고 간다는것인데
한지방을 높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의 상앞에서는 모든 믿는이들이나 초신자들이 와서 냉랭함과 무거움만을 느끼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의 상 집회를 신언 집회와 따로 하든지 같이 하든지 방법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식과 태도의
문제라고 봅니다. 주의 상집회를 신언 집회보다 소흘히 여기는 태도를 많은이들이 느껴온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은혜가 있고 여기에 주님과 주님의 산역사를 내안에 새기고 계신다는것을
느낄수 있다는것을 안다면 굳이 여기로 가입하라고 사람들을 잡아 끌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얻는데는 그렇게 고봉의 메시지가 처음부터 필요한것은 아닙니다.

주의 상집회는 전심전력으로 쓰러질때까지 몰입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찬양도 냉랭하고
선포도 없고 그야말로 차가운 얼음장같은 떡상집회가 마치면 또 다시 어렵고 난해한 신언집회까지
오랜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데 교회생활 오래한 저도 힘든데 다른 지체들이나 차세대들이나
초신자들이나 손님들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과거의 오래된 지체들은 고봉의 메시지들을 전람하고 듣는것이 익숙하고 즐겁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측면도 있다는것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필요한것 같습니다.양육이 부족한 상황에서 모든것을 대집회에서 다 범벅을 해서 교회부담을 다 쏟아 내려니 무리한 모양새가 되는것 같습니다.양육을 할려면 누군가의  기도와 보이지 않는
헌신과 희생이 많아야 하는데 먹고 살기도 빠듯하고 교회 안에 각종 집회를 따라붙히기도 힘드니
누군가를 양육한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그래도 말없이 짐을 지고 가는 지체가 많겠지요~~

신언집회는 어느정도 양육을 거친 사람들이 앉아 있어도 힘든데 떡상 집회는 모든 믿는이들이
참여하는데 주의 상 집회가 마치자 마자 또 신언집회로 이어지니 초신자들이 교회생활의
첫단추부터가 너무 많은 짐을 지게하고 참여가 부족하고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5년 10년 흐르니
결국 맨날 하는 사람만 하게 되니 누가 와서 봐도 너무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왜 주의 회복이 인수와 부흥이 더딘지 저도 많은 고민과 기도중에 있습니다~~
떡상집회는 특정한 이가 누가 가르치는 집회가 아니고 모든 자녀들이 다 참여하는
것인데 각자 분량대로 주님께 자백하고 선포할것도 많을것이데 그것을 그냥
다 흘러 보내버리는 시간이 되어 버릴수가 많은것 같습니다.

아마도 먹고살기가 바쁘고 세상조류가 너무 바삐 돌아가니 힘들어서
주의 상집회를 주일 집회와 병행을 하고나서 신언집회와 주의 상집회 두항목을
똑같이 부담을 해소하려니 자연히 한쪽은 소흘히 될것입니다.과거에는 밤에는
주로 만찬이라고 하여 주의 상 집회를 따로 가진 지방도 많았습니다.
그뒤로 너무나 많은 회복의 메시지와 집회를 다 소화시키려니 따라 잡기가
힘들었을겁니다. 주의 상집회가 끝나면 잠깐 쉬었다 신언집회를 하는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각자의 가진 분량과 연륜에 따라서 주의 상에서 부터
진정한 회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주의 상을 자꾸 주목하다보니 우리가 지방에서 회복안에 있는자들만이 떡을
뗀다는 생각에서 좀더 나아가서 이 떡안에는 모든 자녀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됩니다.떡의 단위가 회복보다 크다는것을 보게 됩니다.우리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그러한 말씀의 영역을 실제로 살아내어서 또한 우리가 그만큼 부활생명을
살아서 다른이들을 얻고 품는 분량으로 참된 부흥과 증가를 가져오게 되길 기도합니다.


트랙백:  수신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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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
우리가 또는 차세대가 뭔가를 짊어지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떡상 앞에서 아무런 느낌도 없고 감사도 감동도 열정도 없이 앉아서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가 사역을 열심히 쫒는다고 말하는 그것이 두려운 사실인것 같습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의 감동과 감사가 일회성으로 끝난다고 보고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면 된다고 보는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우리곁에 항상 실제가 되고
돌이킴의 재료가 되고 무한대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는것은 배은 망덕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올때까지 나를 잊지말고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관제

떡상앞에서는 모든 믿는이들이나 초신자들이 와서 냉랭함과 무거움만을 느끼게 해서는 안됩니다.
떡상 집회를 신언 집회와 따로 하든지 같이 하든지 방법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식과 태도의 문제라고
봅니다. 주의 상집회를 신언 집회보다 소흘히 여기는 태도를 많은이들이 느껴온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은혜가 있고 여기에 주님과 주님의 산역사를 내안에 새기고 계신다는것을
느낄수 있다는것을 안다면 굳이 여기로 가입하라고 사람들을 잡아 끌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얻는데는 그렇게 고봉의 메시지가 처음부터 필요한것은 아닙니다.
주의 상집회는 전심전력으로 쓰러질때까지 몰입하는곳이어야 하는데 찬양도 냉랭하고
선포도 없고 그야말로 차가운 얼음장같은 떡상집회가 마치면 또 다시 어렵고 난해한 신언집회까지
오랜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데 교회생활 오래한 저도 힘든데 다른 지체들이나 차세대들이나
초신자들이나 손님들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과거의 오래된 지체들은 고봉의 메시지들을 전람하고 듣는것이 익숙하고 즐겁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측면도 있다는것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필요한것 같습니다.양육이 부족한 상황에서 모든것을 대집회에서 다 범벅을 해서 교회부담을
다 쏟아 내려니 무리한 모양새가 되는것 같습니다.양육을 할려면 누군가의 기도와 보이지 않는
헌신과 희생이 많아야 하는데 먹고 살기도 빠듯하고 교회 안에 각종 집회를 따라붙히기도 힘드니
누군가를 양육한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신언집회는 어느정도 양육을 거친 사람들이 앉아 있어도 힘든데 떡상 집회는 모든 믿는이들이
참여하는데 떡상 집회가 마치자 마자 또 신언집회로 이어지니 초신자들이 교회생활의 첫단추부터가
너무 많은 짐을 지게하고 참여가 부족하고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5년 10년 흐르니
결국 맨날 하는 사람만 하게 되니 누가 와서 봐도 너무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왜 주의 회복이 인수와 부흥이 더딘지 저도 많은 고민과 기도중에 있습니다~~



바울
요즘 <제사장 직분과 하나님의 건축>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위 형제님이 지적한 부분들을 포함하여
저의 교회생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지금 두번째 읽고 있는데, 형제님도 시간을 내어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960년 초반에 나온 메시지인데, 지금 읽어도 신선함이 있습니다.

결론은 영이 흘러나오는 제사장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제
형제님 오랜만입니다~~ㅎ
저가 요즘은 교회들사이트에서
제글만 올려놓고 과거처럼 다른 지체의 부담을 같이 하지 못하는것이
마음에 짐이 된지가 오래전입니다.
어느것이고 제대로 차분하게 해야하는데 무엇이 이리도 바쁘고 힘든지~~퇴직만 하면 좀 나아질려나~~하고 주님께 물어 봅니다.지금 뭔가 저도 요 몇년간 많은 변화가 있고 뭔가 과거와는 다라져 가는데 주님의 인도와 기도가 많이 필요한것 같습니다~~방문주셔서 감사합니다.

야이로
상당히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