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 조회수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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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김치볶음밥으로 규탁이 도시락을 싸주고 은영이는 너트럿 바른 빵을 점심으로 싸주었습니다. 아침도 두 아이가 각자 달리 먹습니다. 규탁이는 구운 토스트에 계란과 베이컨 우유를 먹고요 은영이는 아침에 밥을 먹고 싶어 하니 도시락 싸고 남은 김치볶음밥에 우유를 섞은 부드러운 계란 후라이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분산하게 등교 준비가 끝나고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오늘도 빠짐없이 포옹을 하니 목덜미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나서 “우리 아들 냄새가 좋다“고 하였더니 신발을 도로 벗고 목욕탕으로 쫒아가 지난번 사다 준 남성용 로숀을 잔뜩 바르고 나왔습니다. (못 말리는 십대 남학생의 멋내기 폼잡기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빠져나간 공간은 갑자기 텅 비고 갑자기 적막해지기도 합니다. 빨래를 널고 이불을 내다 말리고 화분에 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원에 나가 떨어진 단풍잎을 주웠습니다. 자갈 위에 나무 위에 데크 위에 떨어진 빨간 단풍잎들이 참 곱습니다. 콩가루를 섞은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먹고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고 따뜻한 햇살을 등지고 앉아 아침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the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ground and dies, it abides alone; but if it dies, it bears much fruit.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꽃씨를 뿌려 꽃을 보고 씨앗을 뿌려 텃밭을 일구면서 매번 보는 이 이치에 자주 감탄도 하고 신기해하지만, 이것이 자신에게 적용될 환경이 조금만 닥치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얼마나 죽지 않으려 용을 쓰는지.. 머릿속에 진리의 말씀은 있는데 어떤 일에도 죽기 싫어 늘 버둥거리며 아우성치는 자아에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어릴 적부터 깊게 자리 잡힌 강해야 이겨내고 강해야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인식은 저의 기질이 되었고 언행의 습관이 되어 버렸나 봅니다. 요즘 들어 이러한 저와 이십년을 함께 가정을 이룬 당신을 생각하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습니다. 십년 넘게 항상 바쁜 남편과 두 아이와의 맞벌이 생활은 하루하루가 치열한 분투의 나날이었고 힘든 그 숱한 날들을 이겨내는데 저의 강한 기질은 보탬이 되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의 영어공부라는 명목으로 오클랜드행 비행기를 탄 이후 우리 가족 모두에게 몰아닥친 변화의 힘겨움은 다시 한 번 저의 강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케 하였습니다. 남의 나라에서의 시작은 상상치도 못한 어려움의 뒤범벅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오는 밤에 혼자 울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씩씩하게 고개고개를 넘었습니다. 그래서 영주권도 받고 시민권도 받아 남들보다 적은 비용으로 선진 사회보장제도를 누리며 아이들 공부를 시킨다는 자긍심이 또다시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래저래 저는 드센 엄마 드센 아내에 자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렇게 나팔을 불며 오늘까지 온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과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의 공급이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굳세고 강했다고 믿었던 의지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도 별 기력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한 제 기질을 보는 것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온유’와 ‘순복’ 같은 단어가 나오면 제 자신과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아 좌절감이 생기고 ‘자랑’과 ‘교만’ 같은 단어가 나오면 온통 제 자신인 것 같아 양심이 찔리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도 헷갈리는 것은 온유하고 싶지만 굳셈을 잃어가는 자신이 못마땅하고 겸손하고 싶으면서도 자긍심을 잃는 것이 두렵습니다. 제 나이가 중년일 뿐 아니라 제 안의 많은 것들도 중간선에서 기우뚱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같이 이 좋은 햇살 아래서도 ‘아~ 좋다!’ 와 ‘마냥 이리 살아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함께 합니다.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가정주부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줄도 모릅니다. 이런 저를 늘 격려해주고 어려움이 없도록 이모저모를 공급해주는 당신에게 오늘따라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사실은 파란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간식으로 단감을 먹다가 갑자기 이런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가을이 되면 제가 좋아하는 홍시감을 봉지봉지 싸서 냉동실에 얼려 놓는 당신의 정성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 입니다. 그리고 이십년 동안 함께 잘 살아 줘서 고맙다며 당신이 사준 반짝이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감은 익을수록 맛있다’는 말처럼 당신과 제 사이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알콩달콩 맛있어지는 면이 많아지는 것 같아 행복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는 당신을 위해서라도 저 정말로 좀 더 부드럽고 좀 더 온유한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버님 어머님 등 모든 가족을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리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힘을 도움 받으며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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