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중점 17-2. 큰 비밀-그리스도와 교회(5:23-5:33) : 워치만니,위트니스리,한국복음서원
에베소서연구
2009-12-21 , 조회 (35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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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중점 17-2. 큰 비밀-그리스도와 교회(5:23-5:33) : 워치만니,위트니스리,한국복음서원 

 

 에베소서 중점 17-2.

큰 비밀-그리스도와 교회(5:23-5:33)

 

에베소서 5장 23. For a husband is head of the wife as also Christ is Head of the church, He Himself being the Savior of the Body. 24. But as the church is subject to Christ, so also let the wives be subject to their husbands in everything. 25. Husbands, love your wives even as Christ also loved the church and gave Himself up for her 26. That He might sanctify her,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of the water in the word, 27. That He might present the church to Himself glorious, not having spot or wrinkle or any such things, but that she would be holy and without blemish. 28. In the same way the husbands also ought to love their own wives as their own bodies; he who loves his own wife loves himself. 29. For no one ever hated his own flesh, but nourishes and cherishes it, even as Christ also the church, 30. Because we are members of His Body. 31  For this cause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be joined to his wife, and the two shall be one flesh. 32. This mystery is great, but I speak with regard to Christ and the church. 33. Nevertheless you also, each one of you, in the same way love your own wife as yourself; and the wife should fear her husband.



IV.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하심과 품으심

 

  신약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돌봄은 두 방면이 있다. 내적인 방면은 보양하심(nourishing)이고, 외적인 방면은 품으심(cherishing)이다. 보양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필요를 채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보양(nourish- ment)은 공급물에서 나온다 공급물이 없으면 보양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공급물은 아버지의 모든 풍성들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충만의 체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풍성들이 있고, 그분은 이 풍성들을 누리신다. 그리고 나서, 그분 자신이 누리신 신격의 모든 풍성을 가지고 교회를 보양하신다.

 

  이것은 요한복음 15장에 의해서 증명된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아버지는 경작가요, 심은 자요, 농부이시다. 우리들, 곧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가지들이다. 포도나무는 땅으로부터 그가 흡수한 것을 가지고 자기의 가지들을 보양한다. 아버지 하나님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흙이시고 물이시고 모든 것이시다. 포도나무는 흙으로부터 풍성들과 물을 빨아들여서, 그것들을 소화하여, 그런 후에 그것들을 가지들에게 전송한다. 이것이 보양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흡수하고 동화시킨 아버지의 풍성들을 가지고 교회를 보양한다. 교회를 보양함으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내적 필요를 채우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과 그분의 말씀으로 교회를 보양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원은 아버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어 있는 생명과 생명공급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 되고, 심지어 생명의 떡이 되고, 생명의 공급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보양을 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면서 그분의 내용물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생명과 생명공급으로 흡수해야 한다. 실행적인 방식으로 이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있는 말씀을 접촉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생명과 생명공급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가하면서 말씀을 더 많이 접촉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의 보양을 체험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품으심은 무엇인가? 품으심은 외적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품으심은 생태환경과 관련된다. 우리의 생태환경 안에서 주 예수는 우리 위로 불어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풍처럼 우리에게 실제가 되신다. 이 따뜻한 미풍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부드럽게 달램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비록 이것이 우리의 생태환경 안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은 생태환경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심지어 주님의 임재 그 자체 이상의 무엇이다. 주님의 임재가 부드러운 미풍이 될 때, 우리는 그분의 품으심을 체험한다. 이 체험은 달램과 위로와 안식을 포함한다.

 

  교회생활이라는 생태환경 안에서 우리는 종종,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품으심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라도 교회가 없는 환경 속에 있게 된다면, 기후가 바뀌고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우리는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즉 부드럽고 따뜻한 미풍이 더 이상 우리에게 불어오지 않음을 느낀다. 우리가 물질적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전에 누렸던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우리가 교회생활로 되돌아 올 때, 즉시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주님의 품으심의 생태환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따뜻해 지고 달래지고 위로를 얻게 된다. 이것이 품으심이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품음을 받듯이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품음을 받는다. 나의 어린 손녀는 종종 그녀의 어머니의 품안에서 친밀하게 있기를 갈망한다. 단지 그녀의 어머니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위로이다. 그녀의 어머니의 임재는 부드럽고 따스한 대기(분위기)를 제공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주님의 임재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의 대기(분위기)를 산출해서 우리 존재를 품는다.

 

  교회집회 안에서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체험한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집회를 관심하기보다 단지 그들의 가정에서의 교통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가정에서의 교통이 얼마나 누림이 있든지, 집회들에서의 분위기만큼 품음의 분위기가 없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모임에 있는 영적인 기후는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가 이 영적인 분위기에 들어가자마자 주님의 임재에 의해 품어진다. 주님이 교회를 품는 것은 바로 이 주님의 덮는 임재에 의해 산출되는 분위기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기후, 이러한 분위기, 이러한 환경에 있는 것은 우리로 안식과 위로와 치료와 정결케 함과 용기를 준다. 어떤 부위기도 교회 집회들의 분위기와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교회의 집회들 중 한 집회도 놓치길 원치 않는다.

 

  보양과 품음은 함께 온다. 보양을 통해 우리는 내적으로 생명공급을 누린다. 또한 품음을 통하여 우리는 외적으로 부드럽게 되고 위로하는 분위기를 체험한다. 우리가 품음의 분위기에 있을 때마다 우리는 사역의 모든 말씀을 흡수할 수 있다. 이것은 품음 아래에서 우리가 보양을 받음을 가리킨다. 그러한 방법으로 소중히 품어지고 보양된 교회는 강하고 건강하게 될 것이다. 보양과 품음은 교회의 분깃이고 그것들은 매 집회에서 발견된다. 만약 집회들에서 보양과 품음이 없다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마도 당신과 함께 한 것이지 교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합당하고,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면 당신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임재의 품음을 누릴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생명공급의 보양을 받을 것이다. 주님이 교회를 돌보는 길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교회 사람들은 그러한 섬세하고 부드럽고 친밀하고 실제적인 길 안에서 주님을 누리는 특권을 갖는다.



V.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화시키심

 

  교회 집회들 안에서 우리가 내적으로 보양함을 받고, 외적으로 품음을 받을 때, 또한 우리는 성화된다. 주님과 갖는 개인 시간들을 통해서만, 성화된 사람은 우리 중에 많지 않다. 반대로 우리 중 대부분은 교회 집회들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도움을 통해 하나님께 성화되어왔다. 우리가 보양을 얻고 품음을 입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분별된다. 우리가 분별될 때, 우리는 적셔진다. 적심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보양이다. 또한 우리가 집회들 안에 있는 분위기에 의해서 품어질 때, 우리는 더욱 많이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한다. 따라서 품음은 우리의 적셔짐을 돕는다. 이 적셔짐은 자연스럽게 변화를 가져온다. 자신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의식하지 못해도 다른 이들은 알 것이다. 당신의 생활과 생명에 있어서의 그 변화를 그들은 보게 된다.

 

  변화는 가르침이나 교정이나 징계를 통해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보양과 품음에 의해서 온다. 만약 당신이 신실하게 교회집회에 와서 보양을 얻고 품어진다면, 자연스럽게 당신은 세상에서 분별되어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적셔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에게 성장과 변화와 건축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예비된다. 결국 신부는 완전하고 온전하고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까지 자랄 것이다. 그때 주 예수께서 오셔서 이 예비된 신부를 자기 자신에게 드리실 것이다.


VI.성화의 방법-말씀 안에 있는 물로 씻으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화시키는 방법은 말씀 안에 있는 물의 씻음에 의해서이다. 신성한 관념에 따르면 여기서의 물은 흐르는 물에 의해 예표된 하나님의 흐르는 생명이다. 그러한 물의 씻음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의 씻음과 다르다. 구속하는 피는 우리의 죄들을 씻어내지만, 생명의 물은 티나 주름이나 어떤 그런 것들과 같은 우리의 옛 사람의 천연적인 생명의 흠(blemish, 결점, 오점)들을 씻어낸다. 교회를 거룩케 함에 있어서 주님은 먼저 그분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씻어내고, 다음으로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천연적인 흠들을 씻어낸다.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게 하려는 그런 씻음의 과정 안에 우리는 놓여있다.

 

  창세기 2장의 이브는 아직 그 장에서는 그녀가 타락하지 않았기에 씻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순수하고 섞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하고 오염되고 더럽혀졌기에, 오늘날에는 씻겨질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이 제련되어 내보내져야 한다. 육체, 자아, 옛 사람, 천연적인 생명, 나아가 우리는 티들, 주름들, 어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씻김이 없는 보양과 품음을 가진다면, 우리의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보양과 품음은 항상 그분의 씻음을 가져온다. 씻김에 의해 가져와지는 영적인 신진대사의 과정 안에서, 우리 존재 안의 세균들은 죽임당하고, 소극적인 것들은 배출된다. 씻김을 가진 보양과 품음을 통하여 우리는 건강하고 강할 수 있다. 집회들에 있을 때 무의식중에 우리 안에 씻김이 발생한다. 집회들 안에서 더 많이 우리가 보양을 얻고 소중히 품음을 받는다면, 더 많이 우리는 신진대사적으로 씻김을 받게 될 것이다.

  매우 실제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물두멍이다. 구약에서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제사장들은 제단 위의 피에 의해 그들의 죄들을 처리했고, 물두멍에서 씻음에 의해 그들의 더럽혀진 것들을 처리했다. 바울의 여기서의 관념은 교회가 말씀 안에 있는 물두멍에 의해 정결케 된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할렐루야! 우리는 참된 물두멍을 가지고 있다. 말씀의 물두멍 안에는 물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갈증을 해결하는 물이 아니라 우리를 씻는 물이다. 바울은 여기서 갈증을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을 관심한다. 이것들은 말씀 안에 있는 물의 씻음에 의해서 씻겨나간다.

 

  어느 날 니(Nee) 형제님이 성경 읽기에 관해서 말할 때, 어떤 자매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녀는 기억력이 나빠서 말씀 안에서 그녀가 읽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고 말했다. 그녀가 성경을 계속 읽어가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의 답변에서 니(Nee) 형제님은 중국의 여인들이 버드나무 채에 쌀을 씻는 방식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여러 번 물 속에 그 채를 담궜다가 꺼냈다가 한다. 그들이 그 채를 물에서 꺼낼 때마다 모든 물이 빠져나간다. 그 채에는 더 이상 물이 없을지라도, 그 채와 쌀은 씻겨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 예화를 성경읽기에 비유했다. 우리가 읽은 어떤 것을 담고 있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씻겨진 것이다. 우리는 정결케 된 것이다. 씻겨지기 위해 계속 말씀에 나아오도록 격려를 받자. 우리의 채를 말씀 안에 있는 물에 담그고 다시 빼고 하자. 물은 채를 통해 새어 나가겠지만, 우리는 정결케 될 것이다.


VII.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영광스러운 상태로 그분 자신에게 드림

 

  영광이란 하나님의 표현이다. 결국 그리스도께 드려진 교회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 드려진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나타남이다. 교회가 영광스러운 상태가 된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보양과 품음과 거룩케 함은 교회가 하나님의 본질로 적셔지게 할 것이고, 교회는 결국 신부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표현이 되는 유일한 길은 계속 신성한 본질로 적셔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될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평범한 것들에서 하나님께로 분별됨으로 신성한 본성과,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으로 적셔지고 침투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거룩케 되는 교회는 흠이 없을 것이다. 흠이란 보석 안에 있는 결점을 말한다. 이 결점은 보석 안에 있는 혼잡에서 나온다. 우리가 순수하고자 한다면 섞임이 없어야 한다. 즉 우리 존재 안에 하나님 외의 어떤 것도 가져서는 안된다.  어느 날 교회는 이같이 될 것이다. 교회는 단지 깨끗하고 순수할 뿐만 아니라 흠이 없고 섞임이 없어야 한다 . 교회는 하나님 자신이 부활되고 고양되고 변화된 인성과 연합된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교회,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이다. 미래에 그러한 영광스러운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 자신에게 드려질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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