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생명의 영, 생명 주는 영 : 신약의 결론- 성령 -성령을 인식함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성령
2010-01-21 , 조회 (192) , 추천 (0) , 스크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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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생명의 영, 생명 주는 영 : 신약의 결론- 성령 -성령을 인식함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제목 : 신약의 결론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성령

3.1 성령을 인식함

3.1.1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

3.1.2 성령

3.1.3 그 영

3.1.4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3.1.5 생명의 영, 생명 주는 영

 

 

 
생명의 실제임
 
‘생명의 영’이라는 용어는 신약 로마서 8장 2절에서 꼭 한번 사용된 말이다. 성령은 예수의 영일 뿐 아니라 또한 생명의 영이다. 생명의 영은 생명의 실제이다. 이는 이 영이 신성한 생명의 실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그 영 자신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영과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갖는다.
 
생명을 얻는 길은 그 영이다. 생명은 그 영에 속하며, 그 영은 생명에 속한다. 이 두 가지는 실제적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생명을 그 영에서 분리시킬 수 없으며, 그 영을 생명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주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여기에서 주님은 영과 생명을 연결짓는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하고, 영원하며, 변치 않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은 생명의 영이다.
 
신약은 그리스도가 생명, 심지어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계시한다(요 11:25, 골 3:4).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영의 실제 안에서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생명이 되시는 분은 실제적으로 생명의 영이시다. 생명의 영이신 삼일 하나님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산 지체들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든다.
 
 


우리는 생명의 영이 유일함을 보았다. 이 칭호는 신약에서 오직 한 번 로마서 8장 2절에서 사용된다. 생명 주는 영 또한 유일하다. 물론 이와 같은 유형의 표현이 신약에서 몇 번 사용된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생명을 주는 것은 그 영이니”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은, “그 영은 생명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신약에서 특별히 “생명 주는 영”이라고 말한 유일한 곳이다. 로마서에서 생명의 영이신 그분은 고린도전서에서 생명 주는 영이시다. 생명의 영이라는 칭호는 그분이 움직이며 역사하신다는 사상을 전혀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생명 주는 영이라는 칭호는 생명의 영이 움직이고 역사하며 생명을 분배함을 가리킨다.


분배를 강조함
 
요한복음 6장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두 가지 표현-그분은 생명의 떡이며(35절) 산 떡(51절)이시다-이 있다. 젊었을 때 이 두 가지 표현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자문했었다. 생명의 떡은 떡의 본성, 즉 생명을 가리키며, 산 떡은 떡의 상태, 즉 살아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떡 그릇에 있는 물질적인 떡은 살아 있는 떡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떡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떡을 얼마큼 먹어 우리의 배 속으로 들어올 때 즉시로 그 떡은 우리의 배 속에서 살아 우리에게 영양을 주고, 우리 안으로 생명의 요소를 분배하고, 우리의 혈관을 통해 우리 존재 안으로 각종 영양소를 배분하기 시작한다. 먹은 후에 생명의 떡은 우리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역사하는 산 떡이 된다.
 
생명의 영은 그 영의 요소가 생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생명 주는 영은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역사하고 사는 동일한 영이다. 이것은 로마서에 있는 생명의 영이 역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에서는 그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에 있는 강조점은 생명의 영이 지금 그리스도의 각 지체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영이 믿는 이들의 존재 안에서 역사하고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생명 분배의 영이요, 그 역사는 당신의 존재 안으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파헤침
 
생명 주는 영은 하나님의 깊이들(depths)이신 그리스도를 파헤친다(고전 2:10, 12, 14). 어떤 것이 파헤쳐질 때 그것은 뒤엎어져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된다. 생명 주는 영이 없어도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모든 것이 되시지만 당신은 조용한 상황 안에 있게 된다. 당신에게 모든 것이 되시지만 당신은 조용한 상황 안에 있게 된다. 당신에게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가 있지만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이 너무도 ‘조용하기’ 때문에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거의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파헤치고 분발케 하기 위해 오시는 아주 활동적이고 생생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 누군가가 바로 생명 주는 영이시다.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모든 믿는 이들의 몫이신 그리스도는 만유를 포함하시며, 우리 모두는 그러한 분의 교통 안으로 부르심 받았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분은 첫째로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교통이다(고전 1:2, 9).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우리에게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고전 1:24, 30). 그분은 우리의 영화롭게 하심을 위한 우리의 영광이시므로(고전 2:7, 롬 8:30) 영광의 주(主)이시다(고전 2:8). 그분은 하나님의 깊이들(깊은 것들)이시다(고전 2:10). 하나님은 퍽이나 비밀한 분이시지만 이 하나님에게 깊이들이 있다. 그리스도는 가장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깊이들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건축의 유일한 기초이시다(고전 3:11). 그분은 우리의 유월절이며(고전 5:7), 누룩 없는 떡이며(고전 5:8), 영적인 음식이며, 영적인 음료이시며, 영적인 반석이시다(고전 10:3-4). 그리스도는 움직이는 반석, 즉 이스라엘 백성을 따랐던 따르는 반석이시다. 그분은 머리이시며(고전 11:3), 몸이시다(고전 12:12).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첫 열매이며(20-30절), 둘째 사람이며(47절), 마지막 아담(45절)이심을 본다. 그리스도가 첫째요 둘째요 마지막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시다. 이와 같은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앞의 모든 항목들의 집합이신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 최소한 열 아홉 가지 항목을 갖고 있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으로 집계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분을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몫으로 주셨다.
 
생명 주는 영의 주된 역사는 우리 안에 계신 이 열아홉 가지 항목에 관해 그리스도를 파헤치고 분발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우리의 놀라운 몫이다. 생명을 주는 그 영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추구와 체험에서 이 그리스도를 분발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파헤침은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지혜이며, 우리의 능력이며, 우리의 의이며, 우리의 거룩함이며, 우리의 구속함이신 그리스도를 깨닫도록 우리에게 보여 주고 우리를 이끌기 위해 여전히 계속된다. 그 영은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이시며, 누룩 없는 떡이며, 영적인 음식이며, 쪼개어진 반석에서 흘러나는 생수이신 영적인 음료이며, 우리를 항상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 무언가 더 파헤치실지도 모른다. 이러한 파헤침은 그리스도가 머리이며, 몸이시며, 첫 열매이시며, 둘째 사람이시며,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더 보여 주기 위해 여전히 계속된다. 그리스도가 첫째와 둘째와 마지막임은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임을 가리킨다. 이것이 그분의 어떠하심에 대한 매 항목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분발시키기 위한 생명 주는 영에 의한 파헤침이다.
 
말씀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게 파헤치고 탐색하는 것이다. 성경을 다만 읽고 연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깊이들인 그리스도를 파헤치라. 오늘날 이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에 달려 있다. 생명 주는 영은 돌쩌귀이며 그리스도는 완전히 이 영으로 싸여져 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며 파헤치는 생명 주는 영이시다. 이 파헤침에 의해 그분은 그리스도의 풍성들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인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심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17). 이것은 완전히 하늘에 속한 언어이다. 이 땅에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종교가 없다. 심지어 구약에 따라 기초가 놓여진 유대 종교조차도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 안에 거한다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신약, 하나님의 신약 경륜만이 우리에게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인,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이신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전 우주에 오직 한 분만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으며 생명 주는 영, 삼일 하나님의 완성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비할 것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부요한 자라는 것을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이 온 우주 안에 그분처럼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삼일 하나님의 완성인 생명 주는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성전으로 삼으신다.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내주하는 보배이시다(고후 4:7).

 

믿는 이들을 씻어 거룩케 하심
 
생명 주는 영은 또한 믿는 이들을 씻어 거룩케 하신다(고전 6:11). 모든 집과 건물에는 어느 정도 닦고 깨끗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들의 집을 깨끗케 한다. 심지어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도 씻음이 필요하며, 생명 주는 영은 이렇게 씻으신다.
 
우리의 교회 생활의 체험의 시작은 신혼의 밀월(蜜月)이다. 신혼 여행 후에 점차로 얼만큼씩 ‘먼지’가 쌓이기 시작하여 약간 청소를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우리가 처음 교회 생활에 들어왔을 때에는 밀월 기간으로서 모든 것이 너무도 달콤했었다. 교회 생활은 우리에게 놀라웠다. 그러나 얼마 후에 밀월의 교회 생활이 지나갔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교회 생활이 지나갔을 때 나는 장로들을 최고의 천사들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아하!” 이와 같은 생각은 이제 당신에게 깨끗케 함이 필요하고 씻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 영으로 돌이킬 때 그 영은 우리의 ‘아하’를 깨끗케 하고 씻어 준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으로 일 주일 동안 돌이키지 않는다면 많은 ‘아하’가 당신 안에 쌓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집회에 가지 않으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집회에서 당신이 언짢게 여기는 어떤 형제를 만날 것이기 때문에 집회에 가기를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은 먼지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씻을 필요가 있고 청소할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으로 돌이켜 삼십 분간 기도한다면 당신은 교회 집회로 달려갈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을 씻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생명 주는 영은 이렇게 씻으신다.


믿는 이들을 한 영으로 주님께 연결시킴
 
또한 생명 주는 영은 믿는 이들을 한 영으로 주님께 연결시킨다(고전 6:17). 이 연결하는 문제에 있어서 생명 주는 영은 우리 개개인을 한 영으로 주님께 연결한다. 이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씻음 뒤에는 연결이 온다. 그 영에 의해 씻겨질 때마다 우리는 즉시로 우리가 주님과 하나라는 느낌을 갖는다. 만일 내가 어떤 지방에 단 이주(二週) 동안만 머문다면 그 교회에 있는 인도자들이 매우 좋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곳에서 반 년을 머문다면 아마 ‘아하’가 시작될 것이다. 이 ‘아하’는 나를 주님과 분리시킨다. 내가 그 영으로 돌이키고 그 영 안에 머물 때 생명 주는 영은 나를 씻는다. 그 씻김 후에 나는 즉시로 내가 주님과 하나라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연결됨은 씻음에 뒤따른다. 우리에게 항상 씻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도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관찰을 감당할 만큼 완벽한 장로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 생활 안에서 인도하는 자들은 엄격하고도 철저하며 날카로운 눈초리와 관찰 아래 있다. 사람들은 인도하는 자들이 어떤 종류의 타이와 옷과 구두를 착용하는지를 보려고 살필지도 모른다. 모든 성도들은 장로들을 샅샅이 살핀다. 누가 이러한 눈초리와 관찰을 피할 수 있겠는가? 오직 인류 가운데 한 사람만이 사람들의 눈초리와 관찰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 중에는 이렇게 완벽하고 엄격한 검사를 통과할 자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눈초리를 감당할 수 없어도 씻음을 누릴 수는 있다. 그 씻음은 우리를 깨끗케 한다. 생명 주는 영에 의한 그 씻음은 항상 우리를 다시 이끌어 주님과 한 영으로 연결되게 한다.


믿는 이들의 몸을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심을 위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점유함
 
생명 주는 영은 믿는 이들의 몸을 점유하신다. 이 몸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심을 위한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6:19-20). 이것은 생명 주는 영이 비단 우리의 영 안에 머무를 뿐 아니라 우리의 몸까지도 점유하고 우리의 몸에 거주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그들의 몸으로 주님께 부끄러운 일들을 행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도박을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몸을 도박에 쓰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도박장에 간다면 당신은 그곳에 가는 데 당신의 두 다리를 쓴다. 주님께 부끄럽게 되어진 대부분의 일들은 몸을 통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몸은 내주하는 생명 주는 영에 의해 점유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발과 다리가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우리를 끌고가지 못하게 해야 하며 항상 우리를 이끌어 교회 집회에 오게 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발은 항상 생명 주는 영에 의해 점유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심지어 우리가 농담을 할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몸의 일부인 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영이 우리의 입을 점유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이것이 생명 주는 영의 역사이다.

 

믿는 이들의 의견을 적심
 
또한 생명 주는 영은 믿는 이들의 의견을 적실 수 있다(고전 7:40). 내가 믿는 바로는, 주님을 추구하는 형제자매들로서 우리 모두는 의견을 미워한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당신은 의견이 충만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마음이 상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에게 의견이 있다고 말했다. 7장 25절에서 바울은 그에게 주님의 계명이 없지만 그의 의견을 고한다고 말했다. 7장 40절에서 그는 우리에게 의견을 말한 뒤에,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바울의 의견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기도와 찬송과 하나님을 위해 하는 말에만 하나님의 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우리의 의견에도 생명 주는 영의 적셔짐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너무도 생명 주는 영에 의해 적셔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 안에까지도 하나님의 영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의견에 침투하고 스며들었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될 수 있다.


믿는 이들은 이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음
 
믿는 이들은 이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고전 12:13). 그 영이 우리의 영적 침례의 영역과 요소이다. 이와 같은 영 안에서 우리 모두는 유기적인 한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종족과 국적과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몸의 생명과 구성 성분이며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제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살아 있는 이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은 것은 이 한 영 안에서이다.


믿는 이들이 이 한 영을 받아 마심
 
믿는 이들은 또한 이 한 영을 받아 마신다(12:13下). 침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한 영을 마실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이 영 안에 잠겨지자. 우리는 이 영 안에 적셔지고 스며지고 배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항상 이 실제-우리의 밖에 있는 것도 다 그 영이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다 그 영이다―안에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 영으로 싸여져야 한다. 이것이 생명 주는 영의 역사이다.


이 영의 나타남인 은사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은사들, 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이 영의 나타남을 본다(4, 7-11절).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 합당한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성장의 충만한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이르기 전에는 은사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생명의 이 충만한 발전 안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은사들, 즉 생명의 나타남을 가질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그 영의 나타남으로 아홉 가지 은사들을 열거한다.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들, 능력의 역사,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이 그것이다. 그 영의 나타남의 마지막이 방언과 방언 통역이다. 그 영의 나타남의 최우선 순위에 있는 것은 지혜의 말씀이며, 그 다음이 지식의 말씀이다. 그 영의 나타남의 아홉 가지 은사 가운데 다섯 가지가 말하는 것과 관계된다.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방언, 방언 통역이다. 다른 네 가지 항목들은 기적적인 항목들로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 병 고치는 은사들, 능력의 역사(기적들), 영들 분별함이다(고린도전서 회복역 12장 4절부터 11절까지의 각주를 보라).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은사들 중 방언과 방언 통역은 마지막 두 가지로 열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른 항목들만큼 교회의 건축에 유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4:2-6, 18, 19). 우리를 몸 안에서 합당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로 만들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생명 주는 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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