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성령의 상징 (비둘기,호흡,바람,옷,생수) : 신약의 결론- 성령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성령
2010-01-21 , 조회 (45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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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령의 상징 (비둘기,호흡,바람,,생수) : 신약의 결론- 성령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제목 : 신약의 결론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성령

3.1 성령을 인식함

3.2 성령의 상징 (비둘기,호흡,바람,,생수)

 

 



온순함과 단순함을 상징함
 
마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내려 임하심을 보시더니”. 여기의 비둘기는 그분의 사역을 위해 주 예수 위에 임하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비둘기는 온순하며, 눈으로 한 번에 한 가지밖에는 못 본다. 그러므로 비둘기는 시각과 목적에 있어서 온순하고 단순함을 상징한다.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임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초점을 맞추고 온순하고 단순하게 사역을 하셨다.


생명을 상징함
 
요한복음 1장 32절 역시 영에 대한 상징으로서 비둘기를 말한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천거했을 뿐 아니라 또한 비둘기와 함께하는 어린양으로 천거했다. 어린양은 사람에게서 죄를 지고 가며, 비둘기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어온다. 어린양은 타락한 사람을 하나님께 구속하기 위한 구속을 위하며, 비둘기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며, 하나님을 사람에게, 사람을 하나님께 이끌기 위해 생명을 주며, 기름 붓는 것을 위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참여하려면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다. 비둘기의 일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사람을 하나님께 이끌어 연합시키는 것이다. 소극적인 면에서 어린양은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적극적인 면에서 비둘기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어 온다. 어린양은 사람을 죄로부터 분리시키며, 비둘기는 하나님을 사람에게로 이끌어온다.
 
요한복음 1장 32절에 있는 비둘기는 생명을 주고, 거듭나게 하고, 기름을 붓고, 변화시키고, 연결시키고, 건축하기 위한 성령을 상징한다. 비둘기는 능력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다. 비둘기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그 눈이 가리키듯이 생명과 내적인 통찰력이 충만하다. 아가서에서 주님은 그분의 추구하는 자들의 눈이 비둘기 눈과 같음을 칭찬하셨다(1:15). 그러므로 비둘기는 능력이 아닌 조그맣고, 사랑스럽고, 생명으로 충만한 생명의 상징이다.
 

 
제자들의 속 생명을 위한 성령을 상징함
 
요한복음 20장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여기의 생명의 영은 호흡에 비유되었는데 이는 생명을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있는 호흡인 성령은 제자들의 생명을 위해 그들 속으로 생명으로 호흡되었다. 제자들 안으로 호흡을 내쉼으로 주 예수님은 자신을 그들 안에 생명과 모든 것으로 분배했다.
 
성령은 사실 다름 아닌 부활하신 주 예수님 자신이다. 이는 이 영이 그분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있는 영이라는 헬라어는 뉴마(pnuma)이다. 이 말은 호흡, 영, 바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정확히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거룩한 호흡을 받으라”. 그분이 부활하신 날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자들 속으로 거룩한 호흡으로 내쉬셨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생명과 그 영을 본다. 1장부터 17장에서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하나님을 본다. 18장과 19장에서는 죽음을 통과하는 생명을 보며, 20장, 21장에서는 부활 안에서 움직이는 그 영, 즉 뉴마를 본다. 부활 안에 있는 이 영의 움직임은 이제까지 끊임이 없다. 이에 관하여 요한복음에는 끝이 없다. 요한복음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공개적인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기록이 없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한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거룩한 호흡, 즉 성령으로 제자들 안으로 내쉬어 지금은 그들 안에 거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호흡, 이 뉴마는 부활 안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계신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있는 신성한 호흡은 성령이며, 성령은 그분의 구속된 백성들에게 도달한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완성이다. 신약은 삼일 하나님이 성육신되어 사람으로 땅에서 사시고, 사역하시고, 죽음 안으로 들어가시고, 죽음을 정복하고 굴복시켰으며, 부활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계시한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 성육신된 분은 마지막 아담인 사람이시며, 부활 안에 있는 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날 그분은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 우리 모두는 삼일 하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셨으며, 마지막 아담이 우리에게 도달하신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완성인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에 관한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호흡으로 제자들 안으로 내쉰 성령의 방면에 대한 상징이다.



사역과 움직임을 위한 성령을 상징함
 
사도행전 2장 2절에서 우리는 급하고 강한 바람의 상징을 본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은 본질적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존재와 삶을 위해 그들 안으로 호흡된 호흡으로 비유되었다. 주님의 승천 안에서 승천 능력의 영은 제자들 위에 부어졌으며, 경륜적으로 제자들의 사역과 움직임을 위한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상징되었다. 부활 생명의 본질적인 영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살기 위한 것이다. 승천 능력의 경륜적인 영은 믿는 이들이 그분의 위임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20장과 사도행전 2장에 있는 호흡과 바람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 20장에 있는 호흡은 본질적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존재와 삶을 위해 제자들 안으로 생명 주는 영을 분배하기 위한 것이며, 사도행전 2장에 있는 바람은 믿는 이들 위에 부어진 경륜적인 능력의 영의 부어짐을 위한 것이다. 이 능력의 영이 임하기 전에 제자들은 이미 본질적인 영을 받았다. 능력의 영의 부어짐은 믿는 이들의 영적인 존재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는 이들의 사역과 움직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호흡으로 상징된 그 영의 본질적인 방면은 생활을 위한 것이며,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상징된 그 영의 경륜적인 방면은 사역을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 20장에 있는 그 영의 호흡과 사도행전 2장에 있는 그 영의 바람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호흡은 생명을 위한 것이며, 바람은 움직임을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호흡은 우리에게 내적인 힘을 주며, 바람은 우리에게 외적인 권위를 준다. 호흡과 바람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장비된다.
 
 

 
권위를 주는 제복인 성령을 상징함
 
그 영에 대한 다른 상징은 옷이다. 우리의 옷이 되는 그 영은 우리를 덮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권위를 주는 ‘제복’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24장 49절은 이렇게 말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본질적인 생명의 영을 받는 것 외에 제자들은 여전히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입혀질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 영에 의해 경륜적으로 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요한복음 10장 22절에서 발생한 일은 본질적인 생명의 문제이며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발생한 일은 경륜적인 사역을 위한 능력의 문제이다.
 
능력으로 입히려면 우리는 제복인 영을 입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엘리야의 겉옷으로 상징되었다(왕하 2:9, 13-15). 이러한 이유로 어떤 성경 교사들은 옷으로 상징된 능력의 영을 ‘외투의 영’이라고 부른다. 열왕기 하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외투를 받기 원했다. 엘리사가 이 외투를 받았을 때 그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을 영접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주 예수님은 외투의 영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입힐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실 수 있는 성령을 상징함
 
요한복음 4장 7장에서 그 영은 생수로 상징되어 있다. 요한복음 4장 10절과 14절은 생수를 말한다. 14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또한 요한복음 7장 37절과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39절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4장 14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그 안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을 갖게 되리라고 말씀했다. 7장에서 주님은 더 전진하여 누구든지 그분을 마시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 주님은 단지 한 흐름이 아닌 강들을 말씀했다. 생수의 유일한 강은 성령이다. 이 유일한 강으로부터 많은 강들이 흘러날 것이다.
 
이러한 생수의 강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인(롬 8:2) 유일한 생수의 강(계 22:1)의 생명의 다른 방면들의 여러 흐름이다(롬 14:30, 살전 1:6, 살후 2:13, 갈 5:22-23). 한 강은 평강의 강이며, 다른 강들은 기쁨과 위로와 의와 생명과 거룩함과 사랑과 인내와 겸손의 강들이다. 이러한 생수의 강들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이것이 생수이신 성령이다.
 
호흡과 바람과 급하고 강한 바람과 옷과 생수의 상징들은 우리에게 많은 방면에서 그 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생활을 위한 호흡으로서의 영이 필요하며, 우리 위에 불어오는 급하고 강한 바람인 영이 필요하며, 우리에게 권위를 주는 옷인 그 영이 필요하며, 마시기 위한 생수인 영이 필요하다. 특별히 우리가 메마르고 죽어 있을 때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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