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성령의 내주하심 – 내적 충만 : 신약의 결론- 성령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성령
2010-01-21 , 조회 (28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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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성령의 내주하심 내적 충만 : 신약의 결론- 성령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제목 : 신약의 결론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성령

3.1 성령을 인식함

3.2 성령의 상징 (비둘기,호흡,바람,,생수)

3.3 성령의 침례

3.4 성령의 내주하심 내적 충만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은 생명을 위한 것이고, 사람 밖에 있는 성령은 능력을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 역사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면 구약과 신약에 있는 성령의 역사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 안에 내주하리라는 약속은 신약에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기 전에 하신 약속이다. 성령의 이 방면의 역사는 주님의 죽으심과 관계가 있으며 이 약속은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이루어졌다.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며 역사한 결과는 믿는이의 생명을 위한 것이며, 또한 믿는이의 생활을 위한 것으로 성령의 열매인 성결, 공의, 인내, 희락 등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리라는 약속은 아버지가 구약에서 한 약속으로 주님이 승천하기 전에 재삼 이 약속을 견고히 하셨다. 성령의 이 방면의 역사는 주님의 승천과 관계가 있으며 이 약속은 주님이 승천하여 높이 들리워졌을 때 이루어졌다.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여 역사한 결과는 믿는이의 능력을 위한 것이며 또한 믿는이의 간증을 위한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능력 삼아 성령의 은사를 산출하고 힘있게 주님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생명과 생활을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사람 밖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간증과 일을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은사를 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안에 성령이 충만하고 밖에도 성령의 임하심이 있다면 그는 큰 능력으로 주님을 위해 일할 것이다. 만일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단지 밖에 성령의 부어짐만을 얻었다면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는데 이는 교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이김의 관문을 통과한 적이 없다면 비록 외적인 성령의 부어짐을 얻었다 할지라도 몇 개월이나 몇 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이 우리 몸에서 행하시는 이 두 가지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
 

 
성령은 자신을 위해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 것이다(요 15:26). 어떤 사람은 당신이 십자가의 구속을 볼 때 성령이 당신을 도와 믿게 해달라고 구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당신을 이끌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말할 때 결코 성령 자신을 말하지 않고 성령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가를 말한다. 요 며칠 동안 우리는 이기는 생명을 말하고 성령을 말하지 않았으며 주님이 이미 부활하여 우리의 생명이 되셨음을 말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합되게 하는 것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보면 성령의 역사를 얻고, 주님의 죽음을 보면 성령의 거듭남을 얻으며, 사람이 주님의 부활을 보면 성령이 생명 된 것을 얻는다. 오늘 승천한 그리스도 곧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사람은 성령의 부어짐을 얻는다.
 
성령의 부어짐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한면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로 이기게 하시며, 또 한면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임을 증거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갈 5:22-23), 이 열매는 다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것은 조그마한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예를 들면 조금의 사랑, 조금의 희락, 조금의 인내 등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전체를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열매는 오직 하나로 원문에서 ‘열매’는 단수이다. 이는 마치 감자 아홉알이 한 열매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만일 성령의 열매가 있다면 이 모두가 다 있는 것이다. 결코 사랑은 있는데 희락이 없고, 희락은 있는데 인내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매를 하시며 소매를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당신께 주신다. 만일 당신에게 사랑이 있는데 희락이 없다면, 그것이 당신 자신의 열매이며 성령의 열매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밖의 성령과 안의 성령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성령의 부어짐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이기는 생명 만큼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성령의 부어짐은 성령의 내주하심이나 이기는 생명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은혜로 대하셔서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기는 생명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성령의 부어짐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도 성령의 부어짐에 관한 일을 말하였다. 안의 성령에 외적인 성령의 부어짐이 더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밖의 성령의 부어짐이 있으나 안의 성령이 줄어드는 것도 놀라운 일로서 양 극단의 놀라운 일이다. 안팎에 성령이 다 있는 것이 최상이다. 안에 성령이 있으면 밖의 성령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안에 성령이 없다면 잠시 밖의 성령의 일을 한쪽에 제쳐두는 것도 무방하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나서 이어서 기름으로 그러한 것들에 발랐다(레 14:14-17). 반드시 먼저 피를 바르고 나중에 기름을 발랐다. 이 뜻은 반드시 먼저 십자가의 역사가 당신의 귀와 손과 발에 행하여 진 후에야 당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길을 가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당신의 자아를 제하는 것이며 성령은 당신을 대신해서 사는 것이다. 피를 귀와 손과 발에 바른다는 것은, 피는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제한다는 뜻이며, 성령은 당신을 대신해 당신의 귀와 손과 발이 된다는 뜻이다. 먼저 승리의 생활이 있은 후에 성령의 부어지는 일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피의 바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표시하며, 다른 면에서 주님의 생명은 곧 기름의 역사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름이 머리에 부어지기를 바라지만 만일 피의 역사가 없이 기름이 당신 머리에 부어진다면 당신을 교만하게 할 것이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밖에 성령이 있었으나 안에 성령의 충만이 없는 육체에 속한 믿는이들이었다. 밖의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많은 사람이 안에 충만한 생명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사람은 생명의 변화가 없으며 생활이 모호하여 세상 사람과 분별이 없다. 밖의 성령의 부어짐과 내적인 생명이 서로 관계가 발생하지 않는 한 매우 은사 있는 사람도 안에 승리의 이기는 생명이 없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깨끗하지 못하며 밖의 성령의 부어짐으로는 결코 당신 안을 정결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안에 생명이 있고 밖에 성령의 부어짐이 더해진다면 당신은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령의 옮겨 부음과 같이 만일 우리가 체험 가운데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되심―곧 그분이 하늘 보좌로 높이 올리우심―을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 몸에 능력으로 임한 것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주되심―곧 우리의 생명 안에서 그분이 능력 있는 통치자가 되심―을 볼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능력이 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 영향력―의심할 바 없이 사람으로 선을 향하게 하는 영향력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양심이 성령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악을 행할 때 설령도 그들을 질책하고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그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의 임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로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영적이지 못함에 대한 치료책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누가 그들 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한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가?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볼 수 있기를! 내 안에 거하시는 분은 다만 어떤 영향력이 아니라 위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다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뻐서 큰 소리로 외칠 것만 같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인격적인 성령임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 오, 친구여.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인격이 있는 분임을 백 번이라도 반복하여 말하겠다. 나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이 질그릇 안에 비할 데 없는 보배인 영광의 하나님을 담았다.
 

 
당신은 주님을 믿을 때 당신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곳을 그분의 성전 삼으셨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돌로 만든 성전 안에 거하졌다 오늘 그분은 살아 있는 믿는이들로 건축된 성전 안에 거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참으로 보았다면, 우리의 일생은 얼마나 경건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 때, 모든 경솔함과 얕음과 자만은 다 종식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성령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가? 당신은 성경이나 하나님께 속한 많은 선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하나님 자신을 모시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참으로 알아도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경건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건함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이 인격을 가진 성령이 임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령은 그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는 생활을 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실패의 생활을 하는가? 그들의 차이점은 성령의 임재 여부에 있지 않고(이는 성령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데 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이 사실에 대해 참된 계시를 얻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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