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 주님을 섬김 : 믿는이들- 구원과 섬김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믿는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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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 주님을 섬김 : 믿는이들- 구원과 섬김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제목 : 신약의 결론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성령

4. 믿는이들

4.1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체험함

4.2 믿는이들의 생명과 생활

4.3 기도와 성경 읽기

4.4 구원과 섬김

4.4.1 구약의 제물

4.4.2 언약

4.4.3 침례

4.4.4 집이 구원을 받음

4.4.5 생활을 청산함

4.4.6 복음 전파

4.4.7 주님을 섬김

 

 

먼저, 주의 집인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할례 받아야 한다(겔 44:9).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 섬길 자격이 없다. 할례는 십자가에 의해 육과 천연적인 사람과 옛사람이 처리받음을 예표한다. 우리의 할례는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행했던 외적인 할례가 아니고 십자가에 의해 우리의 육과 천연적인 사람과 옛사람이 처리받음이다. 만일 당신의 육과 천연적인 사람과 옛사람이 십자가에 의해 처리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교회 생활 안에서 섬길 자격이 없다. 오히려 당신은 주님에 의해 외인으로 취급받는다. 당신은 참된 형제일지 모르나 십자가에 의해 당신의 육과 옛사람과 천연적인 사람이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을 외인으로 간주하신다. 당신은 교회 생활 안에서 섬길 자격이 없다. 당신은 이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서 당신의 육과 천연적인 사람과 옛사람에 관해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십자가의 역사로 말미암아 처리되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이 당신은 할례를 받을 것이며 교회 생활 안에서 주님을 섬길 자격이 있게 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릇될 때 할례를 받은 사람 중의 일부도 그릇되었다(44:10). 그들은 할례를 받았으나 그릇된 사람들을 좇아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우상을 좇았다. 그들은 그릇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섬길 자격이 절반밖에 없다. 한 면에서 그들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격이 있었다. 다른 면에서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우상을 좇았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다. 할례는 그들을 자격 있게 했지만 그릇됨은 그들을 자격 없게 했다. 이 절반밖에 자격이 없는 사람에 대해 주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셨는가?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전(殿)에서 섬길 수 있으나 주님 혹은 거룩한 것에 가까이 나아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44:11-14). 그들은 사람들을 도와서 제물을 드림으로써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었으나 주님께 가까이 나아와서 직접 그분을 섬길 수는 없었다. 이것은 의미심장하며 매우 심각한 것이다. 오늘날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어떤 사랑스런 사람들 또한 절반밖에 자격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할례를 받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들은 대다수의 사람과 함께 그릇되었다. 오늘날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릇되어 주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갔다. 그들은 주님을 떠났기 때문에 직접 주님을 섬길 자격과 위치를 상실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 봉사의 일부를 맡고 있겠지만 그것은 주님에 대한 간접적인 봉사이다.
 
우리 모두는, 할례를 받고 주님께 절대적으로 신실했던 사독 자손과 같아야 한다. 그들은 결코 대다수의 사람을 따라 그릇되지 않았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고 항상 주님께 정직했고 신실했다(44:15-16). 그러므로 그들은 직접 섬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님의 백성을 섬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을 섬길 수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우리 중에 절반만 자격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기 바란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할례를 받고 정직하고 그릇되지 않고 다수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자격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다수를 따르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그릇되었다.
 


할례 받고 신실하고 자격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가? 먼저, 그들은 제물의 기름과 피를 드려야 했다(44:15). 제물의 가장 귀한 부분은 주 예수의 귀한 인격을 예표하는 기름이다. 피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상징하지만 기름은 그분의 인격을 상징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름은 그리스도의 귀한 인격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피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이다. 예표론에서 모든 제물의 기름은 주 예수님의 귀한 인격을 예표하고 피는 주님의 만유를 포함한 구속 역사를 예표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섬김에 있어서 주 예수님의 귀한 인격과 그분의 구속 역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제사장들은 주님께 와서 수종들 때 양털 옷을 입을 수 없었다(44:17).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을 섬길 때에 그들은 베옷을 입었다. 성경에 의하면 베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고운 생활과 행동을 상징한다. 베옷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한, 생명 주는 영 안에서의 우리의 일상적인 행함과 일상생활을 상징한다. 제사장들은 양털 옷을 입으면 안 되는데 이는 너무 더워서 땀을 흘리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19절에 의하면 땀은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이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땀을 흘려야 한다. 저주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서 땀을 흘려야 한다. 그는 땀을 흘리게 하는 자신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봉사에서 우리는 자신의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노력하고 분투할 때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축복 아래 있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증명한다.
 
주의 회복 안에서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자신의 모든 힘과 자신의 분투와 자신의 노력을 피해야 하며 심지어 그것들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어떤 것을 강요하지 말라. 만일 어떤 일이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주님은 그 일에 넘치는 축복을 하실 것이며 또한 그것을 성취하실 것이다. 주님 자신이 성취하실 것이다. 우리는 결국 싸움을 할 정도로 그 일을 강요하고 노력하고 분투하고 힘을 낼 필요가 없다. 교회 봉사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삶으로써 생명 주는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천연적인 힘을 사용하여 어떤 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잠깐 뒤로 물러나서 항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항복하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여, 이 부담이 당신께 속한 것이라면 나는 물러나겠습니다. 당신이 개입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앞장서셔야 합니다. 나는 포기하겠으니 당신이 이 부담을 짊어지셔야 합니다. 이것은 내 부담이 참으로 당신께 속한 것인지를 확증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때 결코 애쓰며 싸울 필요가 없다.
 


이에 더하여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을 직접 섬기는 제사장들은 죽은 사람에 의해 더럽혀지면 안 된다(44:25). 죽은 사람에게 가지 말라.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라.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사람임을 당신은 아는가? 그들은 죽어서 악취가 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서 그들의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절반쯤 죽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지독한 악취와 사망이 당신 자신의 입에서 나올 것이다. 당신은 말할 만한 적극적인 것은 없고 오직 소극적인 말만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장로들이 틀렸고 동역자도 틀렸고 청년도 틀렸고 노인도 틀렸으며 다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죽은 사람을 접촉할 때 당신 또한 죽고 소극적이 된다. 당신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느낄 때마다 당신은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들의 사망에 의해 더렵혀질 것이다. 사망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은 죄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죄 있는 어떤 것을 만졌다면 자백하고 피를 적용함으로 즉시 씻음 받는다. 그러나 당신이 죽은 사람을 만짐으로써 더럽혀지면 정결케 되기 위해 최소한 칠 일이 필요하다(민 19:11). 당신이 사망의 악취로부터 정결케 되고 정화되는 데에는 일정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과거에 이런 체험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사람과 잠시 동안 이야기한 후에 당신은 일주일 동안 집회에서 기도할 수 없었고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절반쯤 죽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조심하라. 그들에게서 떠나라! 당신이 죽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망이 당신에게 확산될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몇 명의 성도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화나 범죄나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활발하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어 있다. 교회 생활에 관한 한 그들은 참으로 죽은 사람들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아직 매장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잠시 후에 매장되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더럽혀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한다. 항상 죽은 사람에게서 떠나 있으라.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제사장에 관한 또 하나의 요점은 그들의 머리털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짧게 깎기만 할 것이며”(겔 44:20). 이 구절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밀어서는 안 되고 모든 머리털을 잘라서도 안 되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해도 안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머리털을 짧게 깎아야 했다(원문 참조). 고린도 전서 11장 5절에 의하면 모든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미는 것은 주님의 머리되심에 대항하는 반역을 상징한다.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그분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머리되심에 복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에는 일정량의 머리털이 필요하며, 이것은 주님의 머리되심에 대한 우리의 복종을 상징한다. 다른 면에서, 긴 머리는 자기 영광과 자기 권위를 의미한다(고전 11:15). 심지어 우리는 ‘자기 쾌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오늘날의 장발 모양에는 대적의 간교함이 들어 있다. 이것이 다만 히피족의 머리 모양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간교한 사탄이 이 모든 것들 뒤에 있다. 성경에 의하면 긴 머리는 아름다움과 영광을 상징한다. 만일 어떤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이것은 그가 자기 영광과 자기 권위를 지키고 있음을 뜻한다. 그는 자기 기쁨과 자기 쾌락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긴 머리를 즐기는 것이다.
 
이 두 요점을 적용해 보자. 가령 어떤 형제가 자신은 어느 누구의 밑에도 있지 않고 독립이며 몸 안의 다른 모든 지체와 평등하다고 말한다 하자. 심지어 그는 우리 모두가 형제라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23장 8절을 인용할 것이다.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영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모든 머리털을 밀어버린 것이며 자신이 주님의 머리되심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마태복음은 우리 모두가 형제라고 말하지만 베드로 전서 5장 5절은, 젊은 자들은 장로에게 복종해야 하며 우리 모두는 서로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머리털을 밀거나 자르는 것은 지방 교회 안에 복종이 없음을 상징한다. 우리에게는 합당한 복종이 필요하다.
 
다른 면에서, 자기 영광을 상징하는 긴 머리를 갖는 것은 교회 생활 안에서 인도자가 되려고 갈망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교회 생활 안에서 두 종류의 문제이다. 하나는 복종이 부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위와 인도 직분에 대한 굶주림과 추구함이다. 이것이 자기 권위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로나 인도자가 되기를 추구하고 있다. 당신은 그런 추구가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도 직분을 추구하고 자기 영광을 좇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를 죽일 것이며 합당하게 주님을 섬기는 자격을 박탈할 것이다. 만일 주님을 섬길 자격이 있기 원한다면 우리는 머리를 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합당한 복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머리털을 길게 자라도록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영광, 자기 권위, 지위, 인도 직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은 지위를 추구하고 좇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복종이 부족하고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교회 생활을 손상시킨다. 교회 생활 안에서 인도 직분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전혀 자격이 없으며 교회 생활은 끝난다. 사탄은 극히 간교하다!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머리털을 알맞게 유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한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스스로 복종함으로써 합당한 권위 아래 있으며, 다른 면에서 우리는 인도자가 되려고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분배하며 그분의 은혜로 교회 생활을 부축한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만 인도 직분의 지위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참으로 놀랍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장로나 인도자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추구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는 자격을 잃게 할 것이다. 우리는 머리털을 짧게, 곧 알맞게 유지해야 한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께 직접 수종들 자격이 있는 제사장들은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된다(44:21). 포도주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징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쾌락과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자격을 잃을 것이다.
 


더욱이 이 제사장들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그들의 유업, 곧 기업으로 소유한다(44:28). 우리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소유를 가짐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관념과 마음과 생각과 깨달음과 심지어 우리의 실질적인 생활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업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기업이시며 우리의 참된 유업이시다.
 

 

/출처 : 한국복음서원 진리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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