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교회 – 하나님의 왕국 : 교회- 교회의 신분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교회
2010-02-03 , 조회 (269) , 추천 (0) , 스크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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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교회 하나님의 왕국 : 교회- 교회의 신분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제목 : 신약의 결론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성령

4. 믿는이들

5. 교회

5.1 교회의 신분

5.1.1 교회 에클레시아

5.1.2 교회 하나님의

5.1.3 교회 하나님의 왕국

 

에베소서 2장 19절은, “너희가 이제부터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한다. ‘동일한 시민’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왕국을 가리킨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모든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권위를 행사하시는 영역이다. 믿는 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다. 이러한 시민권에는 항상 병행하는 두 가지 것들, 즉 권리와 책임이 있다. 우리는 왕국의 권리를 누리며 왕국의 책임을 짊어진다.
 
2장 19절에서 바울은 교회의 두 방면, 즉-‘동일한 시민’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왕국과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가족을 다룬다. 하나님의 집은 생명과 누림의 문제이다. 모든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께로서 그분의 권속 안으로 태어났다. 하나님의 왕국은 권리와 책임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집 안으로 태어난 모든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시민권과 그들의 책임을 갖는다. 그러므로 2장 19절에는 두 가지 심오한 것들이 다루어진다. 그것들은 권리와 책임들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왕국과 아버지의 생명과 풍성의 누림이 있는 하나님의 집이다.
 
에베소서 2장 19절은 성도들과 하나님의 권속과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 말한다. 성도들은 개인적이지만 하나님의 권속은 단체적이며 하나님의 왕국을 가져온다. 권속이 없다면 하나님의 왕국은 있을 수 없다. 먼저 우리는 개별적인 성도들이다. 그 다음 단체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집이다.
 
19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권속 앞에 하나님의 왕국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서 바울의 사상은 이방인들이요, 손들이었을 때의 우리의 이전 신분을 관심한다. 이방인과 손들은 권속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왕국과 관련된다. 이 나라에서 이방인들은 가족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관련하여 이방인들이다. 이방인들과 손들은 가족에 대해서가 아니라 왕국에 대해서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바울은 먼저 왕국을 언급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시민권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국은 가족들로 구성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족을 말한다.
 
에베소서 2장 19절은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말할 근거를 준다. 여기에서 언급된 시민들은 가족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왕국, 나라에 관련된다. 하나의 가족은 시민들이 아닌 가족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의 구성원들이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들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일지라도 우리가 영 안에서 살고 행할 때라야만 비로소 실지로 왕국 안에 있게 된다. 우리가 옛사람에 따라서 행동하거나 육신 안에서나 자아 안에서 살 때마다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의 왕국 밖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왕국을 형성하고자 하는 사탄에 의해 완전히 침해당한 타락한 사람의 본성의 옛 영역 안에 있게 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영 안에 있는 대신 육신 안에서 산다면, 실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왕국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아닌 우리 영 안에서 살고 행하며 행동하고 전적으로 우리 존재를 그 안에 둘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으며 실지로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집과 같이 하나님의 왕국은 단체적인 사람이다.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는 단체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집은 하나님의 가정이요,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이다. 왕국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단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단체적인 인격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집으로서 생활하는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생활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지체들로 생활하느냐 혹은 시민들로서 생활하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집의 구성원들로서 사는 것은 누림의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산다는 것은 책임 지고 통제 받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권속의 구성원들이며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교회의 실재이다. 신약에 따르면 교회는 왕국과 밀접히 관련된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선포하셨고, 19절에서는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19절에 있는 ‘천국(the kingdom of the heavens)’이라는 단어는 18절에 있는 ‘교회’라는 단어와 교체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이 시대에 천국이라는 강한 증거이다.
 
교회의 실재인 왕국이 없다면 교회는 건축될 수 없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의 실재인 왕국을 필요로 한다. 비록 왕국이 교회의 실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교회가 왕국의 실재라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왕국이 교회의 실재라고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교회 생활이다. 이것을 강하게 증명해 주는 구절은 로마서 14장 17절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어떤 성경 교사들에 따르면 왕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은 교회 시대이며 다음 시대가 왕국 시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14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왕국이 있게 될 것이라(shall be)고 말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존재한다(is)고 말한다. 믿는 이들을 받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로마서 14장의 문맥에 따르면 왕국은 오늘날의 교회 생활이다. 교회 생활의 실재는 왕국이다. 로마서 12장은 몸의 생활에 대하여 말하며 14장은 왕국 생활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왕국 생활이 몸의 생활의 실재임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는 교회 시대요, 다음 시대는 왕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오늘날 이곳에 있다. 왜냐하면 왕국은 교회의 실재이며 교회 생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곧 왕국이다. 교회는 오늘날 왕국이므로 왕국이 다음 시대까지 완전히 연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로마서 14장 17절은 왕국이 오늘날 교회의 생활임을 분명히 증명해 준다.
 
더 나아가 교회와 관련된 사도행전에서는 왕국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8:12, 14:22, 19:8, 20:25, 28:23, 31). 사도행전에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복음으로 전파했다(8:12). 복음은 왕국 복음으로도 불린다. 그러므로 왕국이 오늘날의 교회 생활과 전적으로 분리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약의 계시에 따르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은 왕국 생활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규율, 즉 천국의 율 아래 생활한다면 우리는 마태복음 5, 6, 7장에 기록된 그런 유형의 생활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교회 생활 안에서 왕국 생활이 실행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교회와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우리는 교회의 생활인 하나님의 왕국이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왕국의 권위가 우리 안에서 운행할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의 특징이 될 것이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 표현될 때 그분은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는 우리의 의요, 타인들에 대하여는 우리의 평강이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우리의 희락이라.
 
믿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왕국 생활을 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 대하여 의롭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엄격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서 왕국 생활을 한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타인들에 대하여 평강 가운데 산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평강에 의하여 특징지어져야 한다. 타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평강을 추구하기를 노력해야 하며 계속적으로 그들과 평강 가운데 있기를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평강은 우리의 존재로부터 살아내어진 그리스도 자신이다.
 
교회 안에서 왕국 생활을 산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기쁨으로 생활할 것을 요구한다. 성령은 기쁨의 영이다. 우리가 즐겁지 않다면 이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참으로 왕국 생활을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기뻐할 것이며 그분을 찬양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들에 대하여 의롭게 되며 타인들에 대하여 평강 가운데 살 때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으로 생활할 것이다. 그러한 삶은 교회 생활로서의 하나님의 왕국이다.
 
 
 
 
교회 생활 안에 남아 있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은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다르다(요 3:3, 5).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갔으므로 우리는 이제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며 발전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이러한 성장과 발전의 결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고린도 전서 6장, 갈라디아서 5장 및 에베소서 5장은 모두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고린도 전서 6장 9절 상반절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다가오는 시대에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의를 추구하는 성도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마 5:10, 20, 6:33). 의롭지 못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의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로워야 한다.
 
고린도 전서 6장 9절 하반절과 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지 새로운 출생을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오늘날 천국의 실재 안에 생활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죄인이나 불의한 사람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왕국에 결코 참여할 수 없다.
 
고린도 전서 6장 9절과 10절에서의 ‘유업을 받다’라는 말은 누림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것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누린다는 것이다. 오늘날 왕국은 누림이 아닌 훈련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왕국은 우리의 누림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왕국을 누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예수와 함께 다스리는 왕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 바울은 육신의 일을 언급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기는 믿는 이들에게 일종의 보상인 다가오는 왕국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부터 21절까지에 나열된 육신의 일들을 행하는 그런 믿는 이들은 보상으로서의 다가오는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장 5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천년 왕국이며(계 20:4, 6, 마 16:28) 또한 하나님의 왕국이다(마 13:41, 43).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거듭났으며 교회 생활 안에서 그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왕국 안에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믿는 이들이 다 천년 왕국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정한, 패배한 자들은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 후서 1장 3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발전하고 자란 그런 믿는 이들은 넉넉히 하나님의 왕국 안에 들어갈 것임을 본다.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한편 우리는 왕국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한편 우리는 여전히 넉넉히 들어갈 필요가 있다.
 
왕국 안으로 처음 들어간 것은 거듭남이지만 넉넉히 들어간 것은 베드로 후서 1장 5절부터 11절까지에 계시된 신성한 생명의 완전한 성장과 발전을 통해서이다.
 
11절은,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말한다. 신성한 생명과 본성의 발전 안에서의 넘치는 공급은(3-7절) 그분의 신실한 믿는 이들, 곧 그분의 본성의 미덕의 성숙과 발전에 이르도록 생명 안에서의 성장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일종의 보상이 될, 우리 주의 영원한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감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공급하실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천년 왕국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딤후 2:12, 계 20:4, 6).
 
베드로 후서 1장 5절부터 7절까지에서 우리는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신성한 본성을 가진 신성한 생명의 발전을 갖는다. 5절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이라고 말한다. 5절에서 ‘공급하다’라는 단어는 사실상 발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음 안에서 덕을 공급한다는 것은 믿음의 훈련, 즉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을 위하여 신약의 축복의 공동 분깃으로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배로운 믿음의 훈련 안에서 덕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1절).
 
5절에 있는 덕(미덕)은 3절에 언급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거기에서 바울은 ‘그분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말한다. 더 나아가 이 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풍성을 가리키는 신성한 본성에 관련된다(4절). 그러므로 3절과 5절에 있는 덕은 4절에 있는 신성한 본성의 체험의 결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다양한 방면들의 풍성인 신성한 본성에 참여할 때 이러한 풍성들은 우리의 미덕이 된다.
 
5절에서 베드로는 또한 ‘덕에 지식을’ 공급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활력 있는 행동인 덕이란 신성한 생명과 경건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의 지식의 넘치는 공급과(2, 3, 8절) 5절부터 7절까지에 묘사된 발전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을 필요로 한다. 이 지식은 사실상 생명과 경건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는 이 지식을 우리의 미덕 안에서 발전시켜야 한다.
 
6절에서 베드로는,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이라고 계속한다. 절제는 통제의 훈련이며 자아의 욕구와 갈망과 습관에 있어서 자아에 대한 제한이다. 절제(self-control)가 자아에 관련된 반면, 인내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환경에 관련된다. 자신들에 대하여 우리는 절제를 가져야 하며, 환경에 대하여는 그것들이 어떻다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럴 때 우리 인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같으며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인 경건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아에 대한 통제를 훈련하며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대하여 인내하기를 훈련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 같으며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하여 경건은 영적인 생명 안에서 발전될 필요가 있다.
 
7절에서 베드로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결론짓는다. ‘형제 우애’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대한 사랑을 갖다’라는 필레오(phileo)와 ‘형제’라는 델포스(delpos)로 구성된다. 따라서 형제지간의 애정, 기쁨과 즐거움의 사랑이다. 7절의 사랑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아가페(agape)로 신약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 안에 계시는 신성한 사랑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이다(요일 4:8, 16). 그것은 필레오보다 더 높으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질(質)을 빛나게 해준다(고전 13, 롬 13:8-10, 갈 5:13-14). 그것은 사람의 사랑보다 능력에 있어서 보다 강한 것이며 용량에 있어서 더 큰 것이다(마 5:44, 46). 그러나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며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 믿는 이는 그것으로 적셔질 수 있으며 그것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랑은 형제지간의 사랑에서 발전될 필요가 있으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을 지배하고 그 안에서 흐를 필요가 있다.
 
믿음은 생명의 씨로 여겨질 수 있으며, 사랑은 그 완전한 발전 안에 있는 열매이다. 이 발전은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을 포함한다. 결국 우리는 믿음의 씨로부터 출발해서 덕과 지식의 뿌리와 절제의 줄기, 인내와 경건의 가지를 통해 형제지간의 사랑으로 꽃피며 사랑(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매 맺는 완전한 발전과 성숙을 갖는다. 11절은 신성한 생명이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고 발전한 결과로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들어감이 부요하고 넘치도록 우리에게 공급될 것임을 가리킨다.
 
1장 5절부터 11절까지에 있는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성숙 안으로 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만유를 포함한 씨인 보배로운 믿음을 동일하게 할당받았다. 모든 신성한 풍성들이 이 씨 안에 있지만 우리는 부지런히 그것들을 덕 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 다음 우리는 우리의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한 성장과 발전을 통해 우리는 결국 성숙에 도달할 것이고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감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발전하고 자란 사람들이 다가오는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어떤 믿는 이들은 다가오는 왕국 안에서 분깃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합당한 교회 생활 안에서 생활해 오지 않았으며 신성한 생명 안에서 충분한 성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국이 나타날 때 그들은 왕국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생명 안에서 충만한 정도로 자라고 발전한 사람들은 다가오는 왕국 안으로 넉넉히 들어감을 얻게 될 것이다.
 

 

/출처 : 한국복음서원 진리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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