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교회 – 새사람 : 교회- 교회의 신분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교회
2010-02-03 , 조회 (27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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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교회 새사람 : 교회- 교회의 신분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제목 : 신약의 결론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성령

4. 믿는이들

5. 교회

5.1 교회의 신분

5.1.1 교회 에클레시아

5.1.2 교회 - 하나님의

5.1.3 교회 - 하나님의 왕국

5.1.4 교회 - 그리스도의

5.1.5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

5.1.6 교회 새사람

 

 

에베소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1:22-23), 하나님의 왕국이요, 하나님의 가정이며(2:19),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의 거처(2:21-22)임을 계시한다. 2장 15절과 4장 24절에서 우리는 교회가 새 사람임을 본다. 에베소서 2장 15절은,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4장 24절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골로새서 3장 10절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말한다. 교회란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로서 부르심을 받아 나온 무리, 즉 회중을 의미하는데, 이는 교회의 첫째 측면이다. 이 방면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왕국의 방면으로 계속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첫째 측면보다는 높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방면만큼은 높지 않다. 그러나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보다 한층 더 높다. 이와 같이 교회는 단지 믿는 이들의 모임, 하늘에 속한 시민들의 왕국,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정만이 아닐 뿐더러 그리스도를 위한 몸만도 아니다. 교회는 그 최고의 측면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생명에 있는 반면, 새 사람인 교회에 대한 그 강조점은 인격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그 생명으로 필요로 하며 새 사람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그 인격으로 필요로 한다. 생명이 없는 몸은 몸이 아닌 시체이다. 그러나 몸이 움직일 때는 생명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새 사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인격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단체적인 인격인 새 사람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생활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이 사람에 의해 실제로 깨달아지게 하는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 안에 있는 새 사람에 대한 그림이다. 이것은 옛 창조가 새 창조의 표상이요, 예표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옛 창조에 있어서 그 중심 인물은 사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옛 창조와 새 창조 모두에서 그 중심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창 1:26) 그 후 사람에게 그분의 통치권을 주셨다. 형상은 표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표현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통치권은 표현의 문제가 아닌 대표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통치를 위한 그분의 권위 안에서 그분을 대표하기를 원하신다. 옛 창조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갖도록 창조되었으며 또한 그분을 대표하기 위한 그분의 통치권을 갖도록 창조되었다.
 
형상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를 말하며, 통치권은 하나님의 소극적인 의도를 말한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그분을 표현하는 것인 반면, 하나님의 소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대적, 사탄, 마귀를 처리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 하나님은 하나의 문제, 즉 그분의 대적을 처리하는 문제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대적 마귀는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직접 그를 처리하지 않고 그 대신 그분의 창조 가운데 한 피조물인 사람에 의해 그를 처리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그분의 대적을 처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으셨다. 적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분의 형상을 갖는 것이고, 소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하기 위하여 그분을 대표하기 위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갖는 것이다.
 
옛 창조 안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통치권은 땅에만 국한되었다. 이것은 옛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하는 것이 땅에 제한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 창조 안에서 통치권은 온 우주로 확대되었다.
 
결국, 새 사람인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셨으며 옛 창조 안에서 그분은 실제의 인물이 아닌 하나의 표상, 예표를 창조하셨다. 실제의 인물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통해서 창조하신 사람이다. 이 사람은 새 사람이라 불린다.
 
‘새 사람’이란 용어는 우리에게 옛사람을 상기시켜 준다. 옛사람은 하나님의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 창조 안에 있는 새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하는 두 방면의 목적을 완성한다.
 


에베소서 2장 15절은 새 사람인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계시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성이 인성 안으로 역사된 한 새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행동은 새로운 어떤 것이었다. 옛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을 어떤 피조물 안으로도 역사하시지 않으셨으며 사람 안으로도 역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한 새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본성은 사람 안으로 역사하셔서 그분의 본성을 인성과 한 실체가 되게 하셨다.
 
새 창조는 옛 창조처럼 개별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어떤 것이다. 옛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수백만의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고 그 반대로 모든 사람을 포함한 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있어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새 창조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로 구성된 새 사람인 교회의 부분들이다.
 
새 창조와 옛 창조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이 옛 창조 안으로는 역사되지 않았으나 새 창조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소유한다. 비록 옛 창조가 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존재했다고는 할지라도 그분 자신이 그 안에 거하시지는 않았다. 따라서 첫째 창조는 신성한 내용이 없다. 신성한 본성은 옛 창조 안에는 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옛 창조가 낡아졌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이나 하나님의 본성을 갖지 않았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영으로 거듭남으로써만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어 우리로 새 창조가 되게 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 육신에 속한 옛 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나갔으며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생명과 본성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전 1:30, 갈 3:26-28).
 
“보라 (그것들이)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은 새 창조의 기이한 바뀜을 지켜보라는 하나의 부르심이다. ‘그것들이’라는 단어는 옛 것들을 말한다. 옛 창조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난 믿는 이들로 구성된 새 창조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요 1:13, 3:15, 벧후 1:4). 따라서 믿는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육신에 속한 옛 창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에 속한 새로운 본성에 따른 것이다.
 
새 창조는 사실상 신성한 생명에 의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옛 창조이다. 옛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 부분으로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낡았으나 새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새롭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우리는 이제 그분의 새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 영으로 살고 행할 때에만 실제이다. 우리가 육체로 살고 행할 때마다, 우리는 새 창조 안에 있지 않고 옛 창조 안에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 안에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은 어떤 것이든 옛 창조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새 창조의 부분이다.
우리가 새 창조 안에 있으려면,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한 연합이 없다면 우리는 옛 창조 안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에 의해 우리는 새 창조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으로 말미암은 새 창조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옛 창조 안으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창조 안으로 거듭났다. 여기 새 창조 안에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회중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왕국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배필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새 사람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단체적이고 우주적인 사람을 얻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완성할 그러한 사람을 원하신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옛 창조 안에서 창조되어 옛사람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로 재창조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

 
 
그분 자신 안에서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우리는 새 사람이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 자신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본다. 여기에서 ‘자신 안에서’란 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한 새 사람인 교회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한 새 사람이 창조된 영역이요, 그로써 한 새 사람이 창조된 본질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새 사람의 요소이시다. 우리 옛사람의 어떤 것도 새 사람을 창조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전의 본질은 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놀라운 본질이 있는데, 그 안에서 한 새 사람은 창조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이 새 사람은 단체적이며 우주적이다. 우주 안에는 많은 믿는 이들이 있지만 단 하나의 새 사람만 있다. 모든 믿는 이들은 이 하나의 단체적이고 우주적인 새 사람의 구성 요소이다.
 
십자가에서
 
새 사람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 자신 안에서 창조되었다. 이 특별한 방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계셨을 때 새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은 한 새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일하시고 계셨다. 죽음 안에서 그분은 다양한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창조하셨다.
 
옛사람과는 달리, 새 사람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새 사람은 옛사람으로부터 창조되었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1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십자가로 데려가 그곳에서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들을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가리키고 있다.


 
그분의 육신 안에서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을 폐하심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육신 안에서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을 폐하심으로 자신 안에서 새 사람을 창조하셨다(엡 2:14-15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분은 죄들, 옛사람, 사탄, 및 세상을 처리하셨을 뿐만 아니라 규례들도 처리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육신 안에서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 중간에 막힌 담
에베소서 2장 14절은 ‘중간에 막힌 담’에 대하여 말한다. 이러한 중간에 막힌 담은 15절에 있는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인데, 그것은 사람의 육신 때문에 주어졌다. 이러한 규례들 중 첫째가 사람의 육신을 베어내는 할례이다. 이것은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이 되었다.
 
- 원수 된 것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바울은 또한 ‘원수된 것’에 대해서 말한다. 할례당과 무할례당 사이의 구별이 되는(주로 할례당에 의해서 됨) 중간에 막힌 담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적대감이 되었다.
 
한 새 사람의 창조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육신 안에서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을 폐하심,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깨뜨리셨음을 보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4절과 15절 상반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으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류 가운데 모든 규례를 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본다.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 가운데는 많은 규례, 많은 관습, 습관, 생활방식 및 경배를 위한 방식들이 있다.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이 모든 차이점들은 인류를 나누어지게 하고 흩어지게 하고 혼돈시켜 왔다. 그러므로 인류 가운데에는 평화가 없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규례들을 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특별히 그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벽을 제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벽이 있을 뿐 아니라 국가마다 종족마다 벽들이 있다. 이러한 벽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길이 없을 것이다.

모든 규례들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폐하여졌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의 죽음은 인류와 종교의 다양한 규례를 폐하고 없이 하셨다. 더 나아가 종족간의 차별이나 사회적 계층간의 차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폐하여졌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말한다. ‘우리의’라는 단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모두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두 가까워졌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위한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화평, 우리의 조화이시다. 인류의 타락과 택함 받은 인류의 부르심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하나의 분리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이러한 분리는 제거되었다. 이제 그 둘은 하나로 묶는 끈이신 구속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두 가지의 계명이 있다. 즉 도적질과 부모를 공경함에 관한 계명들과 같은 도덕적 계명과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과 같은 규례적인 계명이 그것이다. 할례와 먹는 규례에 관한 계명은 도덕적인 계명이 아니라 규례적인 계명이었다. 도덕적인 계명은 이 세대뿐만 아니라 천년 왕국에서나 영원 세계에서도 폐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로 규례적인 계명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중간에 막힌 담을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 즉 할례나 안식일이나 먹는 것에 관련된 의식적인 계명들의 율법을 뜻했다. 의식적인 계명들의 율법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이었다. 사실상 어떤 규례나 의식도 중간에 막힌 담이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육체로’ 규례들 가운데 있는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인류가 육신이 되어(창 6:3)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택하신 백성이 육신으로부터 할례 받도록 정하셨다. 이러한 규례는 사람의 육신 때문에 주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육신 안에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성전 안의 분별하는 휘장으로 예표되는 그분의 육신이 갈라졌다(히 10:20). 십자가에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으로써 그리스도는 평강을 이루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종과 나라들에 있는 그들의 다양한 규례들, 습관들, 및 규칙들을 십자가로 가져 가셨다. 그다음 십자가에서 그분은 옛 창조를 죽음에 넣으시고 옛 창조 가운데 있는 모든 규례들을 폐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하신 것이다.

 

/출처 : 한국복음서원 진리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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