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기초 : 새 예루살렘에 나타난 교회 생활의 방면들 (43방면)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새 예루살렘
2010-02-15 , 조회 (20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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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기초 : 새 예루살렘에 나타난 교회 생활의 방면들 (43방면)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제목 : 신약의 결론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성령

4. 믿는이들

5. 교회

6. 왕국

7. 예루살렘

7.1 최종완성

7.2 예루살렘에 나타난 교회 생활의 방면들 (43방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왕국을 나타내는

        질서 있게 건축된

        성막

        신부

        하나님의 권위의 중심

       

        등잔대 (촛대)

        생명의 흐름

        생명나무

       

        흐름, 나무,

        정금

        성의 문들

        거듭남의 진주

16       신성한 본성의 체험

17       생명의 내적 흐름

18       생명의 교통

19       왕권과 제사장 직분

20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성벽

21    성벽의 분별과 보호

22    벽의 건축

23    벽의 척량

24    성의 치수

25     예루살렘

26    빛이신 하나님

27    밤이 없음

28       흐름과

29    정사각형의

30    투명한

31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32    숫자 12

33 기초

기초

 
다음으로 우리는 그 성의 기초에 이르는데 여기서 여섯 방면을 다룰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건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선지자가 없다. 우리는 에베소서가 쓰일 때 어떤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선지자가 필요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선지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도들은 영원히 거한다. 왜냐하면 그 성의 열두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계 21:14). 사도들은 여섯 가지를 대표하기 때문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간증
첫째 사도들은 하나님의 건축이요, 예수의 간증인 이 성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갈 1:10-12) 의미한다. 사도들 중 누구도 사람으로부터 인한 자가 없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인한 자들이다. 이것이 참 간증이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교회 생활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어떤 것도 사람으로 인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면 조만간에 그것은 약점이 될 것이고 대적에 의해 크게 공격받을 것이다. 그러한 요소는 대적의 공격을 대항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난 어떤 것으로 시작한다면 그 기초가 강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도시에서 우리는 교회 생활이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게 해야만 한다.
 
- 하나님의 긍휼
 
사도들은 또한 하나님의 긍휼의 참된 증인들이다. 열두 기초석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인정해야만 한다. 긍휼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두 형제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 날 첫째 형제가 좋은 성경책을 사서 둘째 형제에게 그것을 선물한다고 하자. 이것은 은혜의 행위이다. 이제 둘째 예를 생각해 보자. 그 둘째 형제가 그리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해 보자. 즉 그가 가난하고 더러운 거지라고 가정하자. 그러한 사람은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나 첫째 형제가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선물을 준다면 이것은 긍휼의 행위이다. 긍휼은 은혜보다 훨씬 더 멀리 미친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만약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하고 더러운 거지보다 더 가련한 상태에 있다. 그분의 긍휼이 그처럼 멀리 미쳐 우리 같은 가련한 죄인에게도 이르렀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제 열두 기초석을 자세히 보라. 사복음서를 연구했을 때마다, 나는 항상 ‘가난하고 가련한 베드로’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에 의해 택함 받고 쓰임 받았다. 그는 긍휼로 말미암아 장식되고 장비되어 그의 이름이 그 성의 한 기초석 위에 있다. 하나님의 긍휼로 장식된 후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진실로 얼마나 가련한지, 그분의 눈에 얼마나 가치 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긍휼을 받은 후에 그분을 찬양할 수 있고, 그분께 이제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의 자격과 아무 관계가 없고 모든 것이 다만 주님의 긍휼이기 때문이다.
 
열두 사도를 생각해 보라. 베드로는 가난한 어부였고(마 4:1819), 마태는 세리였다(마 9:9, 눅 5:27). 그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를 언급할 때마다 침을 내뱉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이사와 로마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었다. 그들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미움 받았다. 그들은 가련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하나가 사도가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의 한 기초석이 되었다. 이 어떤 긍휼인가! 이 열두 기초석은 영원히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할 것이다. 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아야만 한다.
 
- 하나님의 은혜
 
열두 기초석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의 누림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자기 안에 사는 것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그는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선포한다(고전 15:10). 이 두 구절을 함께 놓고 볼 때, 우리는 은혜가 참으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본다. 은혜는 나의 강함, 나의 능력, 나의 누림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이 가난한 어부와 세리가 거룩한 성의 그러한 중요한 기초의 일부분이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 하나님의 신실하심
 
사도들이 그 성의 기초석이 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경에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분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다. 거룩한 성에서 기초는 옆으로 나란히 놓인 것이 아니고 층층이 쌓여 있으며, 열두 층의 각각은 각각 다른 종류의 보석들이다. 각 층은 독특한 색을 나타낸다. 이 문제를 철저히 연구한 어느 전문가에 따르면 그 성의 기초를 이루는 보석들의 층은 무지개 색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로 그 성의 기초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는 ‘기초석들을 가진 성’을 갈망했다(히 11:10). 그들은 그 성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성을 갈망했다. 시편 89편 2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로 하늘에서 견고케 된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열두 돌만으로는 홀로 거룩한 성의 기초를 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열두 돌에 부여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기초를 이룬다. 사도들 자신은 기초를 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나는 베드로나 마태 자신들에 대해서는 어떤 신뢰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알므로, 그들 위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한다. 보석으로 된 열두 층의 기초석은 무지개로 나타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영원히 선포한다.

- 보석들
 
이 모든 보석들은 원래 단지 진흙덩이들에 불과했었다. 의학적인 연구는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흙의 구성체임을 보여 주었다. 우리 몸은 약간의 염분, 동, 철분, 유황과 이 땅의 다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열 사도들이 어떻게 그러한 보석들이 되었는가? 변화시키는 일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건축에 있어서 세 종류의 귀한 재료들이 있는데, 그것은 금과 진주와 보석들이다. 금은 변화가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원래 상태 그대로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석은 뜨거운 열 아래서 함께 눌린 몇 가지 요소들의 복합물이다. 보석은 원래 상태에 있는 물체가 아니며 완전히 변화시키는 일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건축에 있어서 또 다른 재료인 진주 또한 어떤 변화시키는 일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진주는 분명히 거듭남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 성의 입구, 문을 구성한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받았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밖으로 눌리고 불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우리는 모두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많은 압력을 체험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더 이상 진흙덩이들이 아니고 보석들이다. 그들은 뜨거운 열과 압력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그들이 통과했던 고통을 보라. 그들은 강하고 보배롭게 되기까지 눌리고 태워졌다. 오순절날 베드로와 요한을 생각해 보라. 그때 그들은 더 이상 진흙덩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강하고 보배로운 돌들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신성한 정금의 본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생명의 거듭남의 진주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그 영의 변화시키는 일로 말미암아 보석들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의 기초와 벽을 갖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 열두 가지의 다양성
 
그 성의 열두 기초석은 열두 종류의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다(계 21:19-20). 이것은 다양성 안에서의 하나를 상징한다. 한 돌도 같지 않다. 베드로는 한 색이고 요한은 또 다른 한 색이다. 사도들 가운데 나타난 열두 색이 있다. 이는 참된 다양성이다. 그러나 또한 이 다양성 가운데 하나가 있다. 오늘날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가 되지 않은 것같이 보인다. 이것이 참으로 문제이다. 요한은 그의 일을 하고, 베드로도 그의 일을 한다. 다양성은 있으나 하나는 없다. 오늘날 그렇게 많은 은사 있는 형제들이 하나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함께 일할 것으로 기대되는 형제들조차 하나가 아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게 되도록 혁신시키고자 노력한다. 나는 벽옥이고 당신은 홍보석이라고 가정하자. 문제는 나는 당신을 녹색으로 만들려고 하고 당신은 나를 적색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바꾸는 데 실패한다면 그 후에 나는 당신과 아무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가련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역을 가진 누군가를 존경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되게 하려고 설득시키고 바꾸려는 편협함과 강요를 미워해야 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요한은 요한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주 예수님은 아주 크고 놀라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 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으로는 충분치 않다. 돌들 중 하나이면서 다른 것들과 다르게 되는 것은 참으로 긍휼이다. 다른 사람을 우리와 같게 만들려고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

출처 : 한국복음서원, 진리100

 

 

출처 : 한국복음서원, 진리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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