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처음과 마지막
성도들의 삶과 누림
2010-04-15 , 조회 (43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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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givenzone/80023468965

 

성경의 처음 창세기 1, 2장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의 건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계시록 21, 22장의 새 예루살렘입니다.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은 의외로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도 또한 많습니다.

‘하나님의 건축의 일’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묵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모두

1) 생명나무가 있고, 2) 강이 있으며 3) 또한 보석들이 있고, 4) 배필이 있고, 5) 사람이 있습니다.

(그 외 또 무엇이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동일하면서도 다른 것이 많습니다.


1) 생명나무

 

처음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새 예루살렘에도 생명나무는 있습니다.

그러나 동산에서는 사람 밖에 있던 생명나무가

새 예루살렘에서는 단체적인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있습니다.

동일하게 생명나무가 존재하였지만,

사람 밖에 있는 것과 사람 안에 있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객관적인 생명나무가 주관적인 누림이 되었고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2) 뱀


처음에는 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새 예루살렘에는 뱀이 없어졌습니다.

이 부분을 비교할 때 얼마나 큰 누림이 되는지 모릅니다.

뱀은 생명나무 옆에 자신의 체현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갖다두고 여자를 유혹했습니다.

그 이후로 성경의 전 과정을 통해서 뱀은 계속 존재합니다.

존재는커녕 자꾸만 자라서 큰 용이 됩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이 뱀이 없어졌습니다.


3) 성벽


처음에는 동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새 예루살렘은 성벽이 있는 성입니다.

높이가 무려 64미터 정도 되는 큰 성벽을 가졌습니다.

동산은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뱀도 또한 왔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견고한 새 예루살렘에서는

진주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4) 보석들


처음에는 흩어진 보석들이었습니다.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있었지만 흩어져 있었습니다.

마지막 새 예루살렘은 금과 진주와 보석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된 것이 없습니다.

흩어져 굴러다니는 돌도 없습니다.

층층이 쌓여진 기초 위에 아름답게 건축되었습니다.

 

5) 사람


처음에도 사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아담이 지어졌고 그 갈비뼈로 하와가 지어졌습니다.

성경의 마지막에도 사람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때의 사람은 이기는 자입니다.

할렐루야! 새 예루살렘에서는 모두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가 아니라면 새 예루살렘이 될 수 없습니다.

은혜 시대에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면

천년의 나머지 공부를 해서라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6) 아내


처음에는 아담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와는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마지막에도 아내가 있는데, 신랑은 어린양입니다. 

처음에는 개인이었지만, 마지막은 단체적입니다.

처음의 아내는 실패했지만,

마지막의 아내는 영원히 실패가 없습니다.


7) 처소


처음에는 하나님이 발을 두실 땅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딘가에서 말씀을 하셨지만,

그분이 어디에 계신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인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수의 강이 있습니다.

그 처소에서부터 발원하는 강이 온 땅을 적십니다.


8) 그 이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이루어진 성경의 처음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 2장 또는 3장 정도로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건축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나머지 성경 전체를 포함하는 매우 긴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온통 건축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단체적인 건축인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의도는 이 한 가지에 맞춰있습니다.


오, 새 예루살렘!


이 새 예루살렘은 먼 장래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실제가 있다면,

계시록 마지막에서야 보여지는 그림들이 매일 우리에게 체험될 것입니다.


저는 한 가지 매우 기쁜 사실이 있는데요...

새 예루살렘의 실재가 있을 때마다 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도 얼마나 많이 미혹하는지, 그 피해정도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가 없어졌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실재가 있는 곳에서요.. 너무 기쁘지 않아요?

그리고 생명나무가 우리 안에 있고, 건축된 보석들,

이기는 자들, 그분의 영원한 처소... 아, 새 예루살렘!  “지금”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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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감자
아멘!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이 참 비슷하네요   ...아멘!

비슷하다기 보다는 발전이라고 해야 더 맞겠지요...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찬양합니다 아멘!

머슴

요한 복음 1장 17절에 ..은혜와 진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하신다.


 


은혜와 진리가 성질상 같은 것 임을 암시한다.


은혜도 내가 받은 실제요 진리도 내가 받은 실제이다.


실제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은혜와 진리도 사실에 근거함을 말한다.


 


사람들은 처음에 구원받고 기뻐하다가 환경이 오면 느낌이 사라지고


구원받은 것 같지 않다고 한다. 내편에서 느낌으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편에서 보면 당신은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이다. 주님이 죽으실때 이미


당신도 함께 죽었기에 죽은 것이 사실이므로 사실에 근거한 구원을 말한다.


사람들은 사탄과 싸우고 맞서다가 힘이 빠지면 더 이상 사탄을 이길수 없다고 한다.


내편에서 사탄을 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사탄은 십자가에서 끝났다고 말씀하신다. 끝난 사실을 말한다.


사실이 실제요 실제가 진리이다.


사탄을 이기려는 나를 보는가?  이미 끝났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보는가?


 


주님을 믿은 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고 선포했다.


생활하면서 자꾸만 살아나는 자아를 보고 내가 죽지않은 것을 보고 늘


실망하다. 내편에서 보니 난 아직도 살아 있다.


 


그러나


 


주님편에서 보면 넌 이미 죽었다는 것이며 함께 죽은 것이 사실이다는 것이다.


내편에서 보면 살았고 주님편에서 보면 죽었다.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주님편에서 본 것을 받아야 한다.


 


진리가 주님으로 부터 왔다는 뜻은 주님이 실제이고 사실이라는 뜻이다.


나의 느낌,자아, 환경 등은 주님으로 부터 온것이 아니므로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실제이고 실제가 진리이며 그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왔고 주님이 바로 진리이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하신 말씀의 뜻은 주님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뜻이다.,


 


느낌과 자아와 환경에서 자유함을 얻고 평강을 얻은 것이 은혜이다. 은혜와 진리가 같다.


내편에서 보지 말고 늘 주님편에서 보는 것이 진리편에서 보는 것이다. 아멘!!


 



[원본출처] 내편에서 보는 것과 주님편에서 보는 것의 차이 - 신앙과 경영 :: 교회들(http://blog.chch.kr/accinfo/18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