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와의 관계 1.
워치만니
2010-06-02 , 조회 (257) , 추천 (0) , 스크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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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는 위트니스 리였습니다.

남침례교인으로 자라왔던 위트니스 리는 19세였던 1925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해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철저히 알기 위해 추구하고 있었고 워치만 니의 글과 출판물이 성경 진리에 관하여 가장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워치만 니와 서신으로 교제하기 시작하였고 그보다 두 살 밖에 많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데 놀랐습니다.

그들은 1932년 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를 치푸로 초대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 워치만 니는 지식보다는 신성한 생명을 더 강조했는데 그로 인해 위트니스 리는 주님과 더 깊은 교통을 가지고 더 친밀해졌습니다.

그 같은 해에 믿는 이들이 위트니스 리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 해까지 이 집회는 번성했습니다.

교회의 필요로 인해 두 사람 다 주님께서 위트니스 리가 전 시간으로 봉사하기를 갈망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 시간 동안 워치만 니는 계속해서 위트니스 리를 온전케 하고 시험하여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중국에서의 주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여야 하고 주님은 워치만 니를 통하여 상하이에서 그 일을 시작하셨음을 깨닫고, 1934년 상하이로 이주하여 워치만 니와 더욱 가깝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수고하고 고난 받고 사역을 확장시키고 계시를 받고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이 형제는 워치만 니의 출판물인 《기독도보(基督徒報)》를 1934년부터 1940년까지 편집했고 워치만 니의 결혼식 때 신랑 들러리를 섰습니다.

 

공산주의의 침범으로 전멸될 위험이 있자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와 다른 몇몇을 1949년 대만으로 보내어 그 곳에서 사역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1950년 3월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이는 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를 처음 알게 된지 이십오 년 후였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워치만 니가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긴 교통을 가졌습니다.

그가 위트니스 리에게 “대륙에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 하고 주님의 간증을 위해 그들과 함께 서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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