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역사와 함께 했던 로마의 콜로세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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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 조회 (39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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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은 '영원한도시'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콜로세움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이 세계 7대 불가사의중  두번쩨로 들어 갑니다.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라고 합니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입니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합니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때 완공하였습니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합니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 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습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내부는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습니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계7대불가사이 중의 하나로

로마의 상징이 되어 버린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하며,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로마의 콜로세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네로의 거대한 동상(colossus)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지만, 정식 명칭은 ‘폴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폴라비우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중세에는 ‘거대한 건축물’의 상징이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콜로세움은 한쪽 외벽이 크게 무너져내린데다 곳곳이 상처투성이라서

그걸 메꾸고 보수하는 작업을 하고있는데,

뒤에 보이는 모습이 바로 그 현장.


 



 



 

 



 

 

 

콜로세움은 지진에 의해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고 중세에는 교회를 짓기위해

외벽의 절반을 가져가는 등의 수난을 겪었고.

18세기 무렵 교황은 기독교의 박해를 기억하는 의미로 콜로세움을

재건축없이 보존하라 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습니다.


 

 

 

콜로세움은 로마가 4세기경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사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지진과 무관심 속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 중세에는 큰 건물과 교회를 짓기 위한 채석장이 되면서 외벽이 많이 훼손되었다.



 

 



 

 

콜로세움의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치형 구조로 되어있다.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콜로세움의 내부. 타원형 투기장 내부는 관람석과 아레나로 구성된다.

아레나의 마룻바닥은 없어지고 맹수들을 가둬두었던 우리만이 앙상한 몰골을 드러낸다.


 

 

 

콜로세움은 지하 2층까지 있어서 검투사 등의 대기장소로 쓰였는데,

마루가 붕괴되는 바람에 지하 구조가 앙상하게 드러나보이는 것이다.
 

 

 

 

콜로세움 내부의 관중석과 격투장.



 

 



 



 

 

 

원형투기장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느 문처럼 아치형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육중한 벽 사이를 뚫고 좌우 양쪽으로 통로가 나타난다.

통로 역시 아치형 구조다. 옛날에는 이 통로를 따라 입장객이 자기 좌석을 찾아갔다.



 

 

 

지금 타원형의 아레나(라틴어로 ‘모래’란 뜻이나 여기선 ‘무대’)는

앙상한 몰골만 드러내놓고 있다.
원래 마루였던 바닥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지고

그 아래 맹수들을 가두었던 우리만이 그대로다.
관람석 또한 허물어진 채 붉은 벽면을 노출하고 있어 거칠고 투박하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2000년의 세월을 이기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콘크리트 구조물이란다.



 

 



 

 

 

글래디에이터 같은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검투영화를 보면

지하에서 선수가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저 아랫공간이 바로 그 장소



 

 



 



 

 

 

아래로 벽 같은 것이 길게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저것이 콜로세움의 지하구조.



 

 

더위에 지쳐 그늘을 촬영과 명상에 젖어 있는 관광객



 

넓은 공간 아래로 벽 같은 것이 길게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저것이 콜로세움의 지하구조.

콜로세움은 지하 2층까지 있어서 검투사 등의 대기장소로 쓰였는데,

마루가 붕괴되는 바람에 지하 구조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인다.
 

 

 

가운데 사진 중간에 넓게 펼쳐진 공간이 보이고


저 멀리 있는 문으로부터 저 공간까지 오는 길이 나있는 것이 보인다.


넓은 구간은 바닥면의 3분의 1 정도를 덮고있는데,콜로세움에서 공연장



 

 

 

아취 사이로 포로 로마가



 

 



 

 



 

 

 

콜로세움 자체 박물관



 

 



 



 



 

 



 



 

 

 

- 에스퀼리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 사이 사이에서

그 거대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는 콜로세움을 야간에 ? 을것을 기약하며

 



                         파이디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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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한샘

덕분에 정말 좋은 구경하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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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