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삶만을 볼 뿐,
영원한 삶과 「다시 삶」을 보지 못함은
얼마나 큰 문제인가?
오순절 때에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고 했다.
사망이 매어 놓을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으나
주 예수님은 사망이 묶어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망이 그를 묶을 힘이 없음은
그가 곧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명은 죽음을 견뎌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부활의 원칙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보배로운 「변화」인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그 생명이 죽음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음부의 문이 교회를 향해 열려 있지만
그 음부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고
교회를 그 안에 가두어 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질은 부활이다.
어느 때든지 교회가 고난을 이기는 힘을 잃을 때
교회는 아무 쓸모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오면
죽음을 만난 듯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난을 받을 때 그가 죽음을 견딜 수 있음이 증명된다.
당신의 생각으로는
OO형제가 그러한 일을 당하면 넘어지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그 일을 거쳐 다시 나온다.
죽음을 거쳐 능히 존재하는 이것이 곧 부활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도 이와 같다.
때로 시련이 오고 시험이 올 때,
기도도 할 수 없고 성경도 볼 수 없고
형제들도 다 말하기를 거의 넘어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가서 다시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 속에 있다면
얼마 안가서 다시 그 환경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거치고 끝나버리는 것은 부활이 아니다.
교회의 한 가지 기본 원칙은
죽음을 거쳐도 죽음에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에는 특별히 이 진리가 나타나 있다.
당신이 만일 폭스(Fox)가 쓴 순교사를 보았다면
교회가 어떠한 환난과 고난을 받았는가를 알 것이다.
당시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은 대적자들에게 붙잡혀갔다.
그는 이미 팔십육 세였으므로 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한 마디-『나는 나사렛 예수를 모른다』-만 하면 놓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했다.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이 86년 동안 그는 한 번도 나를 외면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내 몸을 위해 그를 부인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그를 타오르는 불 속에 던졌다.
그의 하반신이 이미 다 타들어갈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 당신을 간증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또 한 자매는 그들이 그 자매에게
다이아나[Diana: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성(城)의 우상 아데미의 또 하나의 이름]를 향해
한 번만 절하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 자매는 어떻게 말했던가? 그녀는 말했다.
『너희들이 내게 그리스도를 택하든지, 다이아나를 택하든지 하라는 것이냐?
처음에 나는 그리스도를 택했다.
지금 너희들이 다시 택하라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택한다.』
결국 그 자매도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