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와 직분 어떻게 다른가?
그리스도인의교회생활
2010-07-15 , 조회 (23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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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광휘 형제: 은사를 추구함에 대하여 마땅히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1)직분은 예수의 죽음으로 구성된 것이고, 은사는 다만 성령이 밖에서 더한 것이다.

 

워치만 니 형제님: 고린도 전.후서는 은사와 직분이 다름을 말한다. 고린도전서는 은사를 말하고, 고린도후서는 직분을 말한다. 직분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이며, 은사는 다만 성령이 우리의 밖에서 더해진 능력일 따름이다. 고린도후서 4장의 ‘죽음’은 원문에서 하나의 특별한 죽음이다. 헬라어에서 ‘죽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생명과 반대되는 것,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죽었다고 말할 경우에 쓰이는 일반적인 용법이다. 다른 하나는 “죽이다”의 의미로서 사람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경우에 쓰이는 또 다른 용법이다. 고린도후서 4장에 있는 죽음은 헬라어에서 “죽이다”의 의미이므로 예수의 죽임(the killing or the slaying of Jesus)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나는 영국에 있을 때 서양의 형제자매들에게 고린도후서 4장의 죽음이란 단어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단어 곧 “죽게 하다”를 쓸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죽음은 곧 당신을 죽게 하는 죽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적극적으로 우리에게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죽게 하는 그 죽음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생명의 사역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요, 한 차례 한 차례의 처리함을 인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은사는 다만 교회의 초보적인 것이다. 오늘날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은, 우리가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지 은사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2)교회는 영적인 은사보다도 생명의 직분이 필요하다.

 

한 형제가 연단에 오르면 당신은 즉시 그가 은사 있는 형제인지, 아니면 직분이 있는 형제인지를 알 수 있다. 동남 아시아 사람들은 칼을 사용하여 고무나무를 벤다. 나무 안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은 칼이 낸 상처로 인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직분의 섬김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불 시험을 받을 때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다만 사람에게 은사를 주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가 강한 교회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은사가 아니라 생명의 직분이다. 어린 교회는 당신이 들어갈 때는 아주 뜨겁겠지만 안에 생명이 많지 않다. 다른 한 면으로 당신은 아마 언변이 없는 형제로 인해 조급해하며 그를 대신할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에게 직분이 있으며 그가 나타내는 것은 은사가 아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성장할 때 많은 직분들이 산출되며 결과적으로 많은 공급이 있게 된다. 모든 형제자매들은 직분과 은사가 다름을 만져야 한다. 교회는 더 많은 직분의 일어남이 있어야 한다. 어린 교회는 은사 있는 형제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 계속 나가게 할 수는 없다. 은사는 일시적인 것인 반면 직분은 영원한 것이다.

 

(3)은사는 당신이 사용하는 도구이고 직분은 당신이란 사람이다.

 

유성화형제교통: 그리스도의 생명은 믿는 이들 안에 있는 ‘예금’ 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로부터 온 실재적인 것이며 하늘로부터 온 실재이다. 은사는 단지 어떤 것에 불과하다. 빌려서 자신이 쓰지만 쓰는 사람 본인은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은 마치 발람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었지만(민 22:28), 이로 인하여 당신이 나귀를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은사는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무리의 직분 있는 사람을 일으킬 때 그들에게 물론 은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세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만 은사에 의하여 말하는 사람과 이십여 년을 과정 속에서 산출된 직분에 의하여 말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자신도 똑 같이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을 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가 한 말로 인해 그를 어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나귀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를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은사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직분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외면상으로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크게 다른 것이다.

 

교회가 강할 때 성도들의 영은 밝다. 비록 겉은 뜨겁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어린 교회 안에 은사가 있을 수 있지만 직분이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말할 때 그 말이 그가 한 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은사가 있는 어떤 사람들은 은사가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욱 빠르고 쉽게 타락한다.

 

워치만 니[3집 사역재개 메세지 기록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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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안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은 칼이 낸 상처로 인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직분의 섬김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불 시험을 받을 때 다른 사람에게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게 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