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측 신화진리-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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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7 , 조회 (487) , 추천 (0) , 스크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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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자신에 대한 전통적인 오해

 

초기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적인 신화 교리는 거부했지만 신화의 합당한 이해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초기 교회는 어떻게 존재와 본질에 있어 사람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을 최종적으로 신화하는 구원을 희망할 수 있었는가? 바꾸어 말하면 초기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간격이 우리의 구원으로 좁아질 수 있다고 믿었는가? 그러나 이 딜레마는 사실상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그릇된 것이다. 사람의 신화를 하나의 결정적인 가정(假定),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이 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접근하기 때문에 이러한 딜레마를 갖게 된다. 유대인과 현대 기독교인 가운데 압도적인 개념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하시고 그분의 초월성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공유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신학 용어로는 이것을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incommunicable) 이라고 한다. ,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을 자신 외의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바울이 디모데 전서 6 16절에서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에 공유할 수 있는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그분의 육체되심이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는 두 방면이 있으시다. 한 방면은 그분의 만유 위의 초월성과 접근 불가성과 비공유성이고, 다른 방면은 사람에게 오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 인류와 연결하심으로 그분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신 것이다. 초기 교회 교부들의 이해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의 미덕에 의한 것이다.

 

많은 근대 기독교 교사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구별을 부정하는 반면 초기 교회는 이것을 인정하고 가르쳤다. 블라디미르 로스키(Vladimir Lossky)는 이러한 구별이 심지어 초대 교회의 교부들을 포함한 그들의 글 대부분에 나타난다고 했다(71). 로스키가 자신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초대 교부들로는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바질(Basil), 그레고리 나지안젠(Gregory Nazianzen),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디오니시우스(Pseudo-Dyonisius) 등이 있다(71-72). 초기 교회는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만 있으시다는 전제아래서 우리의 구원을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그나티우스 (Ignatius)(주후 107년 사망)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하고 하나님께 참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의 구원의 목표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자주 사용되었다. 초기 교회에게는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물과 떨어져 있는 동시에 연결될 수 있었다. 그분의 비공유적 속성을 통해 유일하고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의 구분을 유지하시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통해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결하고 사람을 그분 자신과 연결하고자 하는 그분의 경륜을 표명하신다. 육체되심은 이 경륜의 첫번째 단계였고, 사람의 신화는 최종 완성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그 이상을 의도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에 관한 그러한 구분은 필수적이다. 구원이 단지 이신득의 (以信得義) 이라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공유되실 수 없고 가까이할 수 없어도 괜찮다.(최종 분석에서는 그러한 제한된 구원의 관점조차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시고 사람과 연결되시는 그분의 공유적 속성의 어떤 것이 요구되지만). 초기 교회의 구원에 관한 평가는 이신득의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연합 안으로 이끌고 우리를 그분과 함께하는 영원한 차원으로 높이는 구원이었다. 구원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고대 교회에 반향하는 우리가 하나님은 그분의 신격에 있어서 유일하시며 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시며,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와 실존에 의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이 홀로 하나님이신 그분과 연합하고 참여함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한 전적으로 합당하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관해 초기 교회가 가르쳤던 것보다 한참 뒤떨어진 것으로 만족한다. 안타깝게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신화를 포함하는 구원에 관한 보다 깊은 관점을 조롱하고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의 근거를 요구하면 그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오직 비공유적 속성을 가지시며 인간의 신화에 의해 성역이 침범되지 않으신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방향에서의 위대한 첫 걸음이신 육체되심, 즉 그분이 자신의 광대한 공유적 속성을 전람하시고 사람과 멀리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가 아니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무시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호해 드리길 소원하는 것같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그분의 사람이 되심 안에서 더 큰 위험에 처해졌다. 신약은 육체되심을 비우심(2:7)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죽으심을 그분의 굴욕( 8:33)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단지 사람이 영원한 수준으로 올려지는 것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영화롭게 되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유적인 방면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그분의 신격의 유일함에 대한 합당한 존중이 더해졌을 때 사람의 신화는 덜 심각한모독”이다. 우리가 그분의 신격의 비공유성을 존중하고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경배를 돌린다면, 그분을 불쾌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반면에 우리가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공급을 무시하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충만히 누리는 데 실패한다면 그분의 은혜와 경륜 안에서 그분을 모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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