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성장의길 -- 여김 -- (1)
정상적인그리스도인의생활
2009-02-18 , 조회 (294) , 추천 (0) , 스크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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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것을 안다음에는 여길줄 알게된다..

롬 6:6절과6:11절을 연결시켜서 읽어보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옛사람이 예수와함깨 십자가에 못박힌것은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나 이 일을 말할때 우리가 여기는것을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많은사람들은 아직 알기도 전에 여기려고 한다. 그들은 이사실에 대해 성령이 계시한 바를 얻기도

전에 여기려고 하기 때무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쉽게 당하게 된다.

내가 주님을 믿은 후 수년 동안 나는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나는 1920년 부터 1927년까

지 여겨왔다.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자로 여길수록 나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지 못했고 죽어지지도 않았다.이런문제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할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로마서 6장 11절을 읽으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서6장11절을 읽고서 여기면 여길수록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내게서 더욱 멀어 졌고  이런 여김은 나로 죽음을 얻게 하지못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번의 여김이 왜 아무런 결과를 낳지  않는지를 의아히게 생각했다.

 

 나는 이것 때문에  수개월 동안 번민했던 것을 시인 한다. 나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님 이일에 대해 철저한 인식을 갖게 하소서. 수개월동안 때로는 금식까지 해보았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나는 그아침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못한다.

  위층의 책상 앞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여 내눈을 열러주소서 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바로 그순간에 나는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된것을 보았고  내가 그의 안에 있으며 그분이 죽을 때 나도 죽었고 나의죽음이 장래일이 아닌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죽으실때  내가 그분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그분의 죽으심과 같이 참되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모든 문제가 내게 알려졌다. 이런 벌견으로 나는 자신을 억제할수가 없어서 의자 위에서 펄쩍 뛰면서  "주님을 찬미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라고 크게 외쳤다. 나는 아래층으로 달려가 주방에서 돕는 한 형제를 만나 그를 붙잡고서 "형제님 내가 이미 죽은것을 아십니까 라고 말했다"

  그형제는 내 말에 어리등절해져서 형제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어서 그에게,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신 것을 모르십니까.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나의 죽음이 그분의 죽음처럼 참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라고 말했다.

  오! 나에게 이 일은 이렇게 참되었다. 나는 정말 상해의 도로들을 한번 두루다니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을 외치고 싶었다.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는   말씀의 결정성을 의심해본 적이없다.

  내말은 그것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잠시후 우리는 함께 죽은 사실에 대해 볼것이다.

 

로마서 6장 6절이 함께 죽은 것을 체험하는 우선적인 조건이다. 그렇다.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여김의 비결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계시이다. 우리에게 는 하나님 자신으로 부터 온 계시가 필요하다. (막 16:17. 엡 1:17.18)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사실은 알뿐 아니라, 더욱 눈이 열려 이것을  볼수 있어야한다. 이런 계시는 결코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본 날이 언제인지 기억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보는 데 있어서도 확실한 날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전진하는 것의 기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모호해서는 안된다.

  내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는  내가 죽은 자라는 것 곧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끝내셨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계산 방법이다.

여기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죽음을 향해 나아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출발점으로 삼고  여겨야한다.

 

                     둘째단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 여길지어다.

여긴다는 말은 무슨뜻인가. 헬라어로 여긴다는 말은 장부에 기록한다는 뜻이다. 회계는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할수 있는 일이다.

화가가 풍경화를 그릴 때 완전히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가. 역사 학자가 모든  기록의  절대 정확성을 보증할수 있는가.혹은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모든 지도의 절대 정확성을 보장할수 있는가 그들은

대락적인 정도 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 우리의언행도 마음 속으로야 진실하게 말하고자 하지만 완전히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말은 왕왕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말하거나 너무적게 말한다, 오직 수학만이 절대 정확성과 진실성을 갖고 있다.

수학에는 과오가 용납되지 않는다. 의자하나에 한 의자를 더할때 두개가 되는 것이다.이것은 런던에서나 상해에서나 동일하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자로 여기라고 하시는가. 이는 우리가 죽은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죽은자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여김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도리어 우리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라고 하지 않으신다.

 "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롬 6장 11절)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계시는 자연히 우리를 계산하는 데로 이끈다.

우리는 결코 우리에게 "너희도 --- 여길지어다"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것을 소홀히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장부에다 기록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나는 이미 죽었다고 기록하고  그런 다음 그 사실을 붙잡기를 원하신다.

무엇 때문인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실 때 내가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나는 이 일을  사실로 간주하고 선포한다.

   

                   믿음의 계산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

롬 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

           가  인정 하노라.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으로 더블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두번째 부분에서는 믿음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얼핏볼 때에 강조점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번째 부분에서 비록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여김 이라는 단어가 믿음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여김과 믿음은 동일한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사실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로마서 3장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위하여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하여 죽으신것을 보여준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분의죽음 안에 포함되어 있고. 이로써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보여 준다.  성령이 첫번째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할때 우리는 믿고 의롭게 되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다시 우리게 두번때 사실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실행면에서 두번째 부분의 여김은 첫번때 부분의 믿음을 대치한 것이다. 서로의 강조 점이 다른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사실을 봄으로써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계속 진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거룩한 사실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분의 십자가이다.

 

                     믿음에 도전이 되는 유혹과 실패

역사상 두 가지의 가장 위대한 사실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로 처리된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로 처리된 것이다.시험에 관하여는 어떤가.우리가 이 두가지 사실을 보고 또 믿었는데 이제 옛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것보다 더 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전에 아는 죄에 빠질 때에는 어떻게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성질을 내거나 혹은 성질을 내는 것보다 더 나쁜  어떤 것이 일 어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들로 인해 앞에서 말한 모든 사실들이 다 거짓되다고 말할것인가.

  우리는 마귀의 주된 목적이 항상 우리로 하나님의 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창3:4)

성령의계시로 말미암아 실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보고. 또자신을 죽은자로 여긴 후에 사탄은 우리에게 와서. "속에 활동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 이것은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을 죽음아라고 말할수 있느냐." 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으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이것이 결정적인 시금석이다. 당신은 당신 앞에 놓여진 자연계 안의 만질 수 있는 사실을 믿는가 아니면 볼수 없고 과학으로도 증명될수 없는 영적 한계안의 접하기 어려운 사실을 믿는가.

  여기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붙잡으라는  것과 붙잡지 말라는 것들을 상기해 보는 것은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남은 어떻게 구원의 방밥을 말씀하셨는가. 먼저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뽑아버린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계산한 다면 우리는 완전히 잘못 계산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호주머니 속에 십이실링 밖에 없지만 장부에다는 십 오 실링으로 기록 하였다. 사실상 죄의 본성은 제해지지 않았다. 죄의 본성은 우리안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정복하여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범죄하게 한다. 이때문에 우리는 계속 보혈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범죄를 처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피로 인하여 그분은 다시 우리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본성과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간접적인 방법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분은 죄의 본성을 제하는것이 아니라 죄인을 제하신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전에 죄의도구였던 육신의 몸은 실직하게 되었다.(롬6;6.원문참조) 비록 옛주인인 죄의 성품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를 섬겼던 노예가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이상 우리 몸을 지배할수 없다.

  도박꾼의 손이  실직하고 맹세하는 자의 혀가 실직하였기 때문에 이제 이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롬6:13)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의해방" 아라고 말하는 것이 죄를 이김 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성경적이다. 로마서  6:7절과 11절이 말한 죄에서벗어남과 죄에대하여 죽고 라는 말씀은 우리가 더이상 존재하재 않는 권세가 아닌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실재하는 권세로 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죄의본성이 여전히 존재하지만.우리는 그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알고 또한 해방의 정도가 날로 증가한다.

 

  이구원이 이렇게 참되기 때문에 요한은 담대하게. "하나님게로서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저도범죄치 못하는 것은 (요일 3:9))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이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된다.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죄가 다시는 우리의 역사 중에 출현하지 않고 우리가 다시는 범죄치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뜻은 범죄가 하나님께로서 난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안에 심겨진 그리스도의 생녕의 성질은 범죄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어떤 존재의 성질은 그것의 역사와 큰차이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의 역사와 큰 차이가 있다. 

 

이일을 설명하기위하여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한가지 예를 들겠다. 우리는 나무가 성질상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말할수 있다.이것은 나무의성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나무를 손으로 누른다면 잠기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우리의 역사에서 하나의사실인 것같이 이 역사는 하나의사실이다.

  이뿐아니라 본질도 하나의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새 성품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는 죄를 범할수 없다.

  오직 아담안에 있는 자만이 능히 범죄하고 죄를 범할수밖에 없다.

이런사람에게 사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권세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실을 우리의 의지로 삼고 생활의 수단으로 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체험중에서 접촉한 사실을 택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강력한 사실을 택하는가. 그분의 부활 능력이 우리쪽에 있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한다.(롬1:16)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실을 우리 체험에서 실제화하는 데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질화요,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입니다. (히 11:1 ). 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 나는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11장이 신구약 성경전체의 믿음에 대한 유일한 정의임을 알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이 정의를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어떤 상태만을 뜻아지 않고 일종의 행동을 뜻한다. 수년 동안 나는 이단어에 합당한 용어를 생각했었다. 영어 성경 중 다비의번역판은 이 단어를  매우 훌륭하게 번역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실제화요.(substantiate). 이단어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휠씬 낫다. 이는 실제화는 바라는 것들을 체험으로 화하는 행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실제화 하는가 .사실상 우리는 매일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수 없게 된다. 당신은  실상과 실제화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줄 아는가. 실상은 내앞에 있는 어떤 물체의 현상을 말하고 실제화는  그물체를 우리에게 참이 되게하는 어떤 힘 혹은 기능을 가리킨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오관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계 안의 것들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감상할수 있다. 

예컨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세상에 있는 빛과 소리를 실제화 시키는 두 가지 기능이다.  또 세상에 있는 홍색.황색. 녹색. 자색 등 각종 색상들은 모두 참되다. 그러나 눈을 감아 버릴 때 그 색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색상의 실재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시력이 있을 때 나에게는 색상을 실제화할  능력이 있게 된다. 시력을 통하여 황색은 내게 황색이 된다. 그러므로 황색의 존재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황색을 실제화할 능력이 나에게있다. 나는 어떤 물 체를 내게 참된 것이되게하고 내 의식 속에 실제가 되게 할 능력을갖고 있다. 이것이 실제화의 의미이다.

  바라는 것들 과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들을 실제화 하는 능력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사실을 우리의 체험에서 진실한 것이 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실제화시킨다. 천천만만의 사람들이  로마서 6장 6절의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을 읽어보았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고.의심하거나 머리로만 동의하고 영적인 빛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믿든 믿지않든 여전히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여전히 참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사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사실 자체는 결코 믿음에 의해 그진실성이 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만이 그것들을  만질수 있고  그것들을 우리 체험에서 참된 것이 되게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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