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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달

 

                                                                                   유미애

 

 

그믐밤, 손톱을 깎는다

하모니카 불던 저녁엔 누군가 향낭을 빠져나가고

이른 아침 내 손가락은 붉게 피어있었다

쇄골이 드러난 달은

내가 한쪽 허리에 품고 살던 당신의 옛 이름

당신이 흘리고 간 머리칼이 친친, 국화 베개를 감았을 때

빛을 쓸어 담듯 자루 가득 손톱 조각을 모았다

꽃의 몸 어디엔가 조용조용, 무언가 자라고 있어

작약 뿌리를 먹고 눈 먼 뱀이 달을 향해 울고

새들은 또한 세상을 부수며 날아갔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도 물컹

꽃 냄새가 묻어나는, 새로 보름

푸른 뱀의 눈물자국이 사방으로 번져 갈 때

국화도 작약도 잠든 화단, 당신의 허물 위에 앉아

하모니카 분다

다시는 아프지 말자고, 톡톡

움푹 깎여나간

달을 본다

 

2010년 발간

유미애 시집 <손톱>중에서

 

 

 

 

유미애의 하늘은 땅과 교신한다.

그믐 지나 그녀의 하늘에 뜨는 초승달은 단단히 매듭 진 허리띠처럼 그녀를 지탱해주던 중심이기도 하고

착하고 순한 노예로서 항상 대기하게 하던 사모하는 주인의 이름이다. 그리운 주인의 음성을 듣기 위해

사랑에 매인 종은 문설주에 귀대고 엿들어야 한다. 허리띠가 느슨해서도 안 되고 졸아서도 안 된다.

그녀는 어느 시절, 그 소중한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열고 종일 문밖에 서 보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렇듯 전일하게 대상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때가 있기도 했다. 향낭에 모아 둔 향은 사랑하는 그이의

이름에서 풍기는 것이다. 향은 하모니카 곡조와 함께 그녀의 손가락에 붉게 표지된다. 그녀는 국화꽃잎을

모아 베갯속을 만들듯이 고이 모은 자신의 정념을 사랑하는 이에게 괴어주고 쉬게 했을 것이다. 이제 한때

붉었던 손톱조각 같은 추억의 편린만을 쓸어 담는 세월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인연에 대한 집착은 그녀에게

영묘한 작약뿌리로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이 그리 쉽게 치유되는 병인가? 애증의

독니를 버리지 못한 눈 먼 뱀은 그이의 발뒤꿈치를 아프도록 물고 싶지만, 그녀의 하늘에 떠 있는 이름을

향해 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길고 아픈 울음 끝에 그녀는 산해경의 뱀들처럼 날개를 얻는다. 옛사랑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상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이제야 *간신히 그대가 그립지 않다. 당신 없이도 물컹, 향기로울 수 있는 새로 보름이다.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뱀은 날로 어리고 푸르다. 상실감을 이겨내고자 흘린 눈물자국이

사방에 번지며 - 마치 선지자 에스겔이 본 이상 중에 문지방에서 스며 나와 사방을 적신 물처럼 - 망각과

소생을 위한 절실한 몸부림이 드디어 끝나 간다. 하모니카라는 악기는 애조 띈 음색을 내긴 하지만 절망을

노래하진 않는다. 오히려 어떤 무거운 그림자도 하모니카를 만나면 휘파람처럼 휙휙 가벼워진다. 시인은

지금 휘파람이나 하모니카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톡톡 손톱을 깎듯 미련과 애착을 움푹 깎아내고 만월을

기다리는 상현달로 뜨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하늘에 뜬 초승달은 이제 새 피를 수혈받는다. 그녀는 새롭고도

달콤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손톱달’에서 유미애와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 시에는 우리를 신선하게 하는 낭만의 요소가 충만하다.

사랑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낭만성은 일회적인 것, 요란하게 흘러가버리는 흐름이 아니라 영원한 요소, 영원

한 바다이다. 그 속에 인간의 정신은 되풀이하여 몸을 담가야 한다. 성스러운 회춘의 목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출생하고 모든 형상이 탄생하는 영원한 어머니의 품이다. 마치 즐겨 듣는 음악에서 새로운

조형미가 나오고, 그리스 신화에서 미의 여신이 항상 보던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화석화되어

사멸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미 있던 것은 재삼 파괴, 해체되어야 한다. 변화와 변형이 사랑과 생을 수

호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만월이라고 여기는 달은 자꾸만 손톱달로 깎여져 나가야한다.

모든 화석화된 사랑은 깎여져 나가야한다. 새로 자라나는 분홍 손톱을 위해서.

*장석남 시인의 시에서 인용함

 

 

 계간지  < 시산맥>  2011년 여름호  게재

 

단평 나금숙

2000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 <그 나무 아래로>

       <레일라 바래다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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