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켕거스 특강-형제 온훈 2011년 6월 12일 저녁(2)
사역말씀들
2011-07-01 , 조회 (445)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카페 > 부산교회
원문 http://cafe.chch.kr/busanch/46914.html

란 켕거스 형제님 특별 교통-B

몸을 위해 자아와 기질을 처리함
   위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기질이 있다. 그의 기질이 교회 안의 모든 봉사를 망칠 위험이 있다. 40대나 젊은 형제들은 기질을 심각하게 처리하는 시점이 아닐 것이다. 기질은 우리의 존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기질 때문에 모든 것이 슬프고, 어떤 사람은 기질 때문에 사역의 심각한 것만을 관심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난폭한 기질을 갖고 있다.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과 같다. 그의 누이가 더럽힘을 당했을 때, 더럽힌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들은 난폭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불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고, 불같은 성질이 언제든지 나온다. 기질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존재이다. 주님께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마치 천둥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사마리아인들이 주 예수님을 거절했을 때, 그들이 주님께 말하길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리길 원하십니까?”라고 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다 불 못에 가라. 주님께서 너희를 불 못에 태우실 것이다.”라고 하는 성향이 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이다. 우리 모두에게 기질이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기질이 점점 발전한다.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큰 소리로 말하고, 기질적으로 대담하고, 기질적으로 급하고, 기질적으로 내성적이다. 내성적인 사람은 항상 고려하고, 사적이다. 위트리스 리 형제님은‘기질은 자아의 깊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기질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지 못하고, 어떤 것을 할 때 뒤틀리게 한다. 어떤 형제는 밤낮 진리를 추구하려는 기질이 있고, 어떤 형제는 실행적인 것에 집착하는 기질이 있다. 집회소나 실지적인 사무에 속한 것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내성적이어서 인터넷을 하든, 책을 읽든, 혼자 있길 원한다.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외향적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하고, 복음을 전하길 원한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을 모두 함께 모으면 어떻게 교회를 건축할 수 있겠는가?
   자아는 하나님께 독립을 선포한 혼이다. 이것은 또한 몸과 독립적인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면 교회가 필요하고, 다른 형제들이 필요하고, 교통이 필요함을 느낀다. 자아는 어떤 사람도 필요 없고, 어떤 교통도 필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만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교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어떤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의 느낌을 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원수이다. 이런 자아를 가진 사람이 지방 교회에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젊은 청년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질 않는다. 연장한 자들이 문제가 된다. 자아는 몸의 원수이다. 예를 들어 아홉 명의 형제들이 동역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교회의 일부로서 교회 안에 있고, 교회의 사무에 대해 교통한다. 그런데 자아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몸은 없게 된다. 실제에 있어서 몸은 없다. 왜냐하면 자아 때문이다.
   이 땅에 그런 곳이 있다. 이 형제님께서 그곳에 강한 부담으로 회복을 가지고 가셨다. 형제님은 특별한 부담으로 6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런데 35년 동안 한 사람의 자아 때문에 주의 회복이 그 지역에서 전진할 수 없었다. 그는 그 교회의 장로였다. 그는 자신을 동역자라고 생각하고, 이 형제님과 가깝다고 생각했고,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런데 그는 35년 동안 주님이 그 지역에서 움직이지 못하시도록 좌절시키고 있었다. 많은 성도들이 그에 의해 손상 받았고, 많은 사람이 회복을 떠났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받아드릴 수가 없어서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다. 이런 것이 일어났고, 한국에서나 다른 모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원수이다. 교회가 있고, 집회도 있고, 활동도 있었지만, 그곳엔 그리스도의 몸이 없었다. 이것은 진단을 하는데 충분한 것 같다. 이러한 진단이 없으면 주님의 치료를 받아드릴 수가 없다.


자아의 치료책-십자가와 그 영


  그러면 치료책을 보자. 하나님께서 모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들을 십자가로 해결하신다. 십자가는 다만 고통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임으로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종결하신다. 우리에게 죄나 옛사람이 문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마귀도 문제였다. 주님은 마귀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세상도 문제였는데, 주님은 이 세상을 십자가에서 종결하셨다.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은 문제를 대화나 타협함으로 해결하지 않으시고, 한 길 십자가로 해결하신다. 
 자아는 문제일 뿐  아니라 몸의 원수이다. 이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나의 아내의 자아를 대신 부인해 줄 수 없다. “당신은 자아 안에 있으니 내가 대신 거절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다. “내가 당신의 자아에 십자가를 적용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다. “당신의 자아에 십자가를 적용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오직 자신이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주님을 먹을 수 있고, 그 영을 마실 수 있고, 숨을 쉴 수가 있고, 호흡할 수가 있다. 저녁에 삼계탕을 먹었는데, 각 사람이 자신의 삼계탕을 먹었다. 오직 여러분 자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자기를 부인하고’는 또한 우리의 자아가 폭로되어야 함을 말한다. 어떤 것을 행하려할 때 “이것이 자아다. 이것이 나이다.”라고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생각, 나의 혼 생명, 자아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아를 분간하지 못하면 부인할 수 없다. 원수는 모든 것을 어둠 안에 두려고 한다. 그는 숨기를 원하고 폭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폭로하셨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장래에 우리가 베드로를 만나게 되면, 베드로에게 “우리가 들은 바가 있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와 동일하다.‘하늘에 속한 이상’이라는 책 중에‘자아에 대한 이상’이라는 장이 있다.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 이 빛이 우리 존재를 관통해야 한다.   
   계속해서 자아의 본성을 보자. 그것은 우리 안에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교통하려고 모여서, 형제님들이 이것저것 고려를 하고 있을 때, 우리 안에 반응이 있고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려 한다. 이것이 자아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억누르지 않고 거절할 수 있다. 거절하는 것은‘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자아에 의해 이 교통을 망치고 싶지 않다”라고 해야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자아를 보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십자가가 우리가 고통의 상황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자아로부터 나온 의견이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신 죽음을 죽으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옛사람이 거기에서 종결되었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음을 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의 옛사람의 이름은‘옛 나’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알아야 한다. 여기 모든 형제님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분 안에 있었다. 그분이 못 박히실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육신을 갖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사실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 주님은 하나님께 영원하신 영을 통해 자신을 드리셨다고 말한다. 그분의 부활 안에서 그 영은 복합적인 영이 되셨다. 복합적인 영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포함한다. 이 영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우리에게 가져오신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이 복합되신 영 안에 계신다. 간단히 말하면 십자가는 영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자아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것은 폭로되어야 하고, 거절되어야 한다. 내가 자아에 대하여‘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가? 우리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길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이 그 영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아에 대해‘아니다’라고 말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죽으셨고 부활하신 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영께서 우리 안에 흘러들어 오신다. 그 영이 흐를 때 ,신성한 약이 흐르는 것이다. 그 영은 우리에게 십자가와 십자가의 죽음의 효능을 적용시킨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아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 형제가 나를 어렵게 했지만 나는 신사처럼 행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연장하기 때문에 나는 겸손하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집회 후에 다른 형제들과 비빔밥을 먹으러 가서 집회 때 가졌던 자신의 느낌을 쏟는 것이다. 이것은 내 자아를 쏟는 것이다. 나는 형제님들이 나를 좋은 형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감추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것도 부인되지 않았고, 십자가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앞에서 설명한대로 여러분이 십자가를 진다면 삼계탕을 먹으러 갔지만, 어떤 부정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죽임 당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폭로되어야 하고, 자아 안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완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한 형제가 자아 안에서 강력하고 왕이라면, 그 형제는 폭로되어야 한다. 그가 그런 폭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온 일생 동안 속임 당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자라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살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거나 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건축되지 못할 것이고 몸을 좌절시킬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만날 때 “너는 40년 동안 교회 건축을 허물면서 지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어 우리의 자아가 자신에게 폭로되길 원한다. 이것에 대해 형제님들의 아내는 큰 도움을 준다. 어떤 아내는 형제를 자아 안에 있게 도와준다. 나의 아내 수잔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나의 자아를 보게 하고, 자아를 죽이도록 돕는다. 이것이 참된 배필이다. 우리의 배우자는 자아를 폭로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실 그런 도움이 없으면 내가 어디서 폭로받을 수 있는가? 결혼 생활은 완전히 열려있는 상태에서 관계를 맺기 때문에 가능하다.
   형제님들은 어떤 형제가 자아를 볼 수 있도록 도우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어떤 형제가 형제님의 자아나 기질을 보고 “형제님, 주님께 돌이킵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접촉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가 없다. 35년 동안 주님의 움직임을 좌절했던 형제는 주님께서 오셔서 그를 상황에서 나오게 하셨다. 그런데 그가 깨달았다는 표시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80세가 되어 가고 있다. 그의 나이에 깊은 도움을 받아 구원받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의 나이는 성숙에 도달해야하는 나이이다. 주님께 가장 유용한 시기이다. 마치 성숙한 야곱과 같아야 한다. 그런데 그 형제는 50대부터 자아 안에 갇혀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길 원하다. “주님, 나로 자아를 보게 하소서. 기꺼이 자아를 부인하게 하소서. 주여, 저에게 십자가를 보여 주소서. 저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죽음의 효능이 영 안에 있는 것을 알게 하소서.” 우리가 이것을 볼 때 적용은 매우 간단하다. 이것은 마치 눈에 안약을 넣는 것과 같다. 눈에 안약을 떨어뜨릴 때, 안경을 벗고, 안약 뚜껑을 열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다 잊어버린다. 그 약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 약은 영과 비슷하다.


치료의 결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그 영 안에 있다. 오직 자신만이 자아를 부인할 수 있다. 마음을 주님께 돌이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영이 흘러들어온다. 그 영은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그 느낌을 죽이고, 그 생각을 죽이고, 그 의도를 죽인다. 즉시 영은 해방되고 주님을 누리고 희년이 펼쳐진다. 이것이 첫 번째 결과이다. 이런 치료를 받은 후 우리는 주님을 누리게 된다. 내가 언급했듯이 누림은 주로 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혼이 자아에 의해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자아가 죽임 당하면 우리의 영과 혼은 해방된다. 그래서 기도할 때 주님을 누리고 내적으로 자유롭게 된다. 이제 생명 안에서 성장한다. 원수를 패배시키고, 묶고 풀 수 있다. 생명 안에서 자라며 그리스도를 살 수 있다.
   이 결과를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의 의견이 자아의 표현이고, 자아는 사탄의 생각의 체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 7장에서는 가장 높은 영성을 말한다. 바울은 참된 하나님-사람으로 자아를 부인했고, 십자가를 졌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 대답할 때 어떤 것은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어떤 것은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계시를 받는 척하지 않았다. 그는 의견을 말했다. 그런데 이 의견을 말할 때 바울이 사탄에게 사용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하였는데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의견을 다 말한 후에 나에게도 하나님이 영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가 이것을 읽을 때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의 의견은 하나님의 의견을 표현 한 것이다. 우리는 교통 가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교통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교통이 없이 결정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자아를 처리한 아름다운 결과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토론을 할 때, 처음에는 각자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한 형제는 이렇게 제안하고, 또 다른 형제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1999년 말에 2000년을 맞이하는 집회에 관한 교통이 있었다. 어떻게 이 집회를 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 교통이 있었다. 한 형제가 영적인 면에서 어떤 제안했다. 다른 형제는 하룻밤이 지나면 하루치의 버스비를 더 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라고 제안했다. 어떤 형제는 함께 모이자고 했다. 다른 형제는 여러 집회소에 모이자고 했다. 결국 우리는 어떤 결정을 했다. 누구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어떤 형제도 낙심하지 않았다. 논쟁도 없었고, 분당도 없었고 평강의 교통이 있었다.
   형제님들 이렇게 하길 원하는가? 부산에서도 이렇게 하길 원하는가? 어느 누구도 주장하지 않고, 요구하지도 않고, 모두 교통의 영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에드 막 형제님과 사역을 수행해 나갈 때 우리는 항상 교통의 영 가운데 제안한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할 때 교통의 영 가운데서 하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주된 것을 해야 한다. 첫째로 여러분은 신실하게 여러분의 생각을 가져 와야 한다. 둘째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내 생각은 조절 될 수 있다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교통을 하려면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교통 안에서 너무 강하다면 교통의 분위기를 죽이고, 사탄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다 부수고, 파내어 버린다.
   우리가 함께 봉사할 때 자아를 부인한 아름다운 결과는 한  마음 한 뜻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그 영 안에서 하나 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영의 하나 됨을 우리 온 존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에 도달되면 사도행전의 15장 25절의 실제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성령과 우리가 함께 좋게 느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통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몸 안에 건축과 조화와 사랑과 순종과 복종이 있다. 이것이 자아가 없는 몸이다. 우리는 이것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이것을 싫어한다. 이 몸은 새 사람이다. 새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고, 전사로서 사탄을 멸망시킨다. 또한 새 사람이 신부로 건축되면 왕국이 이 땅에 올 것이다. 그때 우리도 변형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육체가 있고, 자아라는 위험성 있다. 우리는 “자아인가 몸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인가? 자아인가? 자아를 사랑하겠는가? 타락한 사람은 자신의 혼 생명을 사랑하고, 혼 생명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존재하고 혼 생명이 고난 받는 것을 거절하고 미워한다. 자아를 거절하고 혼 생명을 미워함으로 주님과 교회와 몸과 형제들을 사랑하겠는가? 주님이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로 방문하셔서 빛 비춤을 받길 원한다. 한 사람 한 사람 결정을 내리시도록 도와주시길 원한다. “주님, 나는 몸을 선택하겠습니다. 자아에 대해‘아니다’라고 하겠습니다. 몸에게‘예’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하고 전에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교회 안에 축복이 넘칠 것이다. 여러분은 한 마음 한 뜻이 있고, 교통 안에 있고, 보스가 없고, 독재자가 없고, 독립적인 혼도 없고, 사탄의 여지도 없고, 사탄이 들어올 길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벽이 되어 사탄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문이 되어 수많은 새 신자들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님들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아인가? 몸인가? 선택은 몸이어야 하고 자아를 선택하지 말고‘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몸에는‘예’라고 말해야 한다.(형제 온전케하는 훈련 특강, 6월 12일 저녁 7시 남구 학생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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