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해우소
아름다운 글들
2012-01-19 , 조회 (1881)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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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해우소
조영호 판사(광주지법)


기억에 남는 법원장이 있다. 그 분은 시를 좋아했다. 회식 자리에서 한 번 쯤 노래를 부를 만도 하건만 그분은 시를 낭송했다. 긴 시를 수줍게 암송하는 것이 신선했다. 시 한 줄 읽지 않고 바쁘게 살았는데 고단한 일상의 틈 사이로 새롭게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그 후, 나도 시를 읽고 외워 보았다. 

그분은 가끔 이메일로 판사들에게 여러 시인들의 시를 보내주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게 된 시인이 정호승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 앞 /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어제는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가 보고 싶어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선암사 해우소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생긴 화장실 건물’로 평한 것도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해우소란 ‘근심을 푸는 곳’, 또는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란 뜻으로 절에 딸린 화장실을 말한다. 고졸하고 참 멋스러운 표현이다. 돌이 많은 진입로를 굽이돌아 당도한 선암사 해우소는 유홍준 교수가 묘사한 것처럼 정(丁)자 형 건물로 가운데 넓은 공간이 있어 마음 넉넉한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내부에는 밖을 볼 수 있는 창살이 있어 그 사이로 새들이 날아 올 수 있을 만했다. 

푸근한 느낌이었다. 배설물을 묵묵히 받아내는 넉넉함이 근심을 없애고 번뇌를 사라지게 하는 힘인 듯했다. 모든 사람을 향한 깊고 널찍한 공간이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통곡하는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깃들 수 있는 성글고 소박한 여유가 역겨운 냄새를 가슴 속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변하게 하는 것이리라. 남의 번뇌를 없애주기 위하여 더러운 배설물을 받아 내는 것이 운명이었다. 해우소는 오랜 기간 매화향기 내며 소리 없이 선암사에 그렇게 있었다. 

해질 무렵 돌길 밟아 돌아오면서 재판을 생각했다. 나의 법정은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었는가? 냄새 나는 역겨움을 헤집으면서 억울한 사정을 헤아리려고 끝까지 듣고 받아주는 넉넉함은 있었는가? 사람 냄새 풍기는 소박한 여유나 마음 편한 푸근함이 있었는가? 기대어 통곡할 만한 등 굽은 소나무는 아니더라도 눈물 자국 훔쳐내는 한조각 풀잎이라도 되고 싶다.


출처 : 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serial=61518&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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